108화 머슴이 잘나가니 아랫배가 찢어진다(2)
유상주는 이제 들어올 때 가지고 왔던 스트레스가 완전히 풀린 것 같았다.
그때, 세 명의 손님들이 카운터로 걸어가 술값을 계산하더니 바깥으로 나갔다.
파팟!
그들을 보던 유상주의 눈이 빛났다.
갑자기 한 가지 생각이 떠오른 것이다.
유상주는 핸드폰을 들더니 곧장 어디론가 전화를 했다.
유태수는 송만술과 고주식을 택시에 태워 보냈다.
그리고 대리기사가 오는 동안 사하라 주차장 한쪽에 있는 벤치에 앉아 담배를 피워물었다.
태천카드 작업하는 데 두 사람 모두 고생이 많았다.
그래서 오늘 마음먹고 한 잔 마시는 것이었다.
딸칵!
말보로 레드의 연기가 어둠으로 뻗어나간다.
누나다.
유상주를 만났다.
남편 전극준을 원 없이 씹고 있었다.
이미 전극준으로부터 아내 유상주가 찾아와 좋지 않은 모습을 보였다면서 죄송하다는 전화가 왔었다.
- 그게 죄송할 일입니까? 부부는 대그빡 터져라 싸우고도 다음 날 웃는다던데 사장님은 그런 재주 없으십니까?
- 네에?
전극준이 놀란 건 유태수의 말 때문이었다.
부부는 대그빡 터져라 싸우고도 다음 날 웃는다고.
언젠가 아버지 생신에 왔다가 유상주와 전극준은 회사 문제로 악을 쓰며 싸웠다.
워낙 살벌하자 아버지도 어머니도 지켜보기만 했다.
그런데 다음 날 집에 볼일이 있다면서 왔는데 나란히 손을 잡고 들어섰다.
그래서 자형, 어쩌면 이렇게 달라질 수가 있냐고 묻자 전극준은 야릇한 표정을 지으며 그렇게 말했다.
- 어떻게 하면 다음 날 웃습니까?
- 밤에 죽여 버리면 돼.
전극준은 자신이 했던 말을 그대로 돌려 들었기 때문에 놀란 것이다.
어쨌든 묘한 장소에서 묘한 만남이 이뤄진 것이다.
하나도 안 변했다.
‘하긴 사람이 갑자기 변하면 죽는다고 했지.’
물론 유상주의 말이다.
죽기 싫어 안 변한 것인가 하며 빙긋 웃고 있을 때 발소리가 들렸다.
유태수는 담배를 물고 고개를 돌렸다.
대리기사가 오는 줄 안 것이다.
그런데 아니다.
파팟!
유태수의 눈이 빛났다. 놀랍게도 유상주의 운전사이자 비서이기도 한 고칠장 과장이 다가오고 있었다.
저벅저벅!
유태수는 다가오는 고칠장 과장을 보며 어렵지 않게 한 가지 상황을 떠올렸다.
‘기분 나빴다는 건가.’
사하라에서의 일로 고칠장을 보낸 것이다.
‘유상주답군.’
손톱만 한 것도 자기 기분에 거슬리면 그냥 넘어가지 않는다.
“형씨, 나 좀 봅시다!”
고칠장은 벤치에 앉아 있는 유태수에게 다가와 대뜸 눈을 내리깔았다.
유태수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무슨 일로 그러십니까?”
화아악!
대뜸 주먹이 날아온다.
고칠장은 평사원으로 들어온 것으로 알려졌다.
그러다 유상주의 눈에 띄어 핸들을 잡았는데 주먹질깨나 한 인물이라고 들었다.
운전을 하면서 경호원 노릇까지 할 정도면 만만찮은 실력자인 것이다.
하지만 상대는 유태수였다.
더욱이 그는 모르겠지만 오래전 지금 호텔 이사로 있는 양성국이 유태수에게 두들겨 맞아 손가락뼈가 여러 개 부러졌었다.
스윽!
고칠장의 주먹이 다가오기도 전에 유태수는 뒤로 한 걸음 물러나 피해 버렸다.
움찔!
고칠장이 놀란다.
이른바 선빵이다. 선빵은 기선을 제압하기 위한 것인데 알고 보면 비겁한 짓거리다.
상대가 전혀 준비를 갖추지 않은 상태에서 공격하는 것이므로 엄밀하게 말하면 암습이다.
보통 사람은 선빵이 아니어도 자신의 주먹을 피하지 못하는데 상대는 너무 간단히 움직여 공격권을 벗어났다.
고칠장은 움찔했다.
보통 선빵이 먹히지 않으면 연이어 밀어붙여야 한다.
그런데 고칠장은 멈춰 서버렸는데 단 한 번의 주먹질 실패로 자신은 상대가 아니라는 것을 깨달은 것이다.
불현듯 양성국 이사가 했던 말이 떠올랐다.
그때는 양성국이 아직 수행비서일 때였다.
사하라 바깥에서 기다리던 중에 엄청 얻어터졌다는 것이다.
양성국의 말을 빌리면 유상주에게 돌아갈 화(禍)가 자신에게 왔다고 했다.
낯선 사내에게 얼마나 인정사정없이 맞았는지 손가락뼈가 절단되는 중상을 입었다고 했다.
그런데 오늘 또 사하라 주차장이다.
여러 생각이 동시에 겹치면서 주먹을 멈춘 것이다.
어쩌면 주먹이 스스로 나갈 생각을 하지 않았다는 표현이 더 옳을지 모른다.
“대리 부르신 분!”
그때 대리기사가 찾아왔다.
유태수가 가볍게 오른손을 들면서 키를 던져 주었다.
휘익!
대리기사가 키를 받아 차로 걸어갔고 유태수는 고칠장을 향해 말했다.
“손가락뼈 부러지기 싫으시면 조심해요.”
고칠장은 눈썹을 모았다.
“당신 주인 편들다 손가락 나간 사람 여럿일 텐데.”
화악!
양성국이 해줬던 말이다.
어떻게 알고 있을까.
“그만큼 인생 사셨으면 주먹보다는 머리로 해결할 생각을 하셔야지.”
그러면서 유태수는 차로 걸어갔다.
유태수가 뒷자리에 타고 차가 출발했다.
“잠깐!”
고칠장이 소리를 지르며 달려왔다.
대리기사가 차를 멈췄고 유태수는 유리를 내렸다.
헐떡거리며 뛰어온 고칠장이 다그치듯 물었다.
“손가락 부러진 사람 있다는 걸 어떻게 아는 거요?”
“손오공을 아십니까?”
“손오공?”
부우웅!
유리가 올라가고 차는 주차장을 나가 어둠 속으로 사라진다.
한동안 사라지는 차를 보고 있던 고칠장이 꿈틀 이마를 찌푸렸다.
‘부처님 손바닥을 벗어나지 못하는 손오공.’
무거운 신음을 흘린다.
가슴이 서늘하고 갑자기 목이 탄다.
자신의 과거를 대략 아는 눈치다.
뿐인가 양성국의 그 날 사건도 알고 있는 듯 보인다.
더욱 놀라운 건 자신의 주먹질에도 전혀 화를 내지는 않았다.
화를 내지 않았다고 무섭지 않은 건 아니다.
뜨거운 기름일수록 수증기가 없다.
수증기가 피어나지 않는다고 그 기름에 손을 넣었다가는 바로 화상을 입는다.
그때 전화가 걸려 왔다.
“예, 사장님!”
[뭐해, 차 안 가져오고!]
재빨리 전화를 받자 유상주가 버럭 소릴 질렀다.
고칠장은 재빨리 차가 있는 곳을 향해 뛰어갔다.
***
눈을 떴다.
어제 술을 마셨지만 몸 상태는 나쁘지 않았다.
전화 진동음에 눈을 떴는데 액정을 보자 「고무룡」이라고 떠 있다.
유태수는 자리에서 일어나 담배를 물고 라이터를 켰다.
길게 담배를 빨아들이며 통화버튼을 눌렀다.
“원장님!”
태천의료원장이다.
[너무 일찍 전화한 것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괜찮습니다. 무슨 일입니까?”
[수술은 성공적으로 잘 끝났습니다. 단지 노령이어서 여러 가지 위험이 여전히 상존해 있는 상태죠.]
“의식은 차렸습니까?”
[호흡, 맥박 모든 건 정상인데 아직 눈을 뜨지는 못했습니다. 오늘내일 사이면 의식을 차릴 듯한데.]
주로 유태수는 듣는 입장이었다.
간혹 그래요, 그렇게 되는 것이군요 하거나 고개를 끄덕였다.
“아, 한 가지 물어보고 싶은 것이 있는데 병원에 오만철 법무팀장 오십니까?”
[아직 한 번도 보지 못했습니다.]
“감사합니다.”
[그런데 저기…….]
“다음에 또 통화하죠.”
고무룡이 뭔가 말을 하려 하자 유태수는 전화를 끊어 버렸다.
탁!
담뱃불을 검지로 퉁겨 꺼버리고 마당 한쪽에 있는 벤치에 앉았다.
궁금할 것이다.
유장풍 회장과 태천그룹에 대한 정보. 경영진이나 가족이 아니면 알 수 없는 깊은 내용까지 자신이 알고 있는 것에 당황스러울 것이다.
고무룡을 분석해 보면 의학적 실력은 자타가 인정하는 사람이지만 그릇은 그다지 크지 않다.
대한민국 넘버 원급 병원장이 여자 하나 잘못 건드려 질질 끌려다닌다.
아버지가 고무룡의 그릇을 몰라 그 자리에 앉힌 것이 아니다.
실력도 좋지만 고무룡 같은 다소 내성적인 사람들은 웬만해서는 병원 내부 일을 바깥에 퍼뜨리지 않는다는 걸 알고서 앉힌 것이다.
자신의 건강이 곧 회사 가치와 직결되기 때문에 나름 영리하게 선택한 아버지의 인사였다.
아버지는 죽지 않는다.
워낙 강골이기도 했지만 아직 죽을 때가 아니다.
문제는 유언장과 현실과의 괴리다.
아버지가 급작스럽게 돌아가신다면 유언장이 강력한 힘을 보여주겠지만 지금처럼 수술을 받고 입원 중인 형국이 오래 간다면 법무팀장 오만철의 신변이 위험해질 수도 있다.
누구라도 유언장 내용을 알고 싶어 할 것이고 오만철은 거절할 것이다.
그렇다면 충돌은 불가피하다.
***
결국 일은 터졌다.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단신으로 올라왔다.
십여 번의 죽을 위기를 넘겼다.
업소가 있는 일대를 이른바 나와바리로 잡고 있는 조폭들이 수시로 찾아와 칼을 들이대고 위협했지만 결코 물러나지 않았다.
성공의 뒤안길은 피로 범벅이 되었지만 끝내 살아 오늘날 기업형 거대 술집을 두 곳이나 운영하게 되었다.
하지만 덫은 너무 치밀했다.
도박(賭博).
그것도 불법 도박장을 출입하며 완전하게 털린 것이다.
이판사판.
사업체를 날린다는 건 정영길에게는 죽음이나 다름없다.
이왕 죽을 바에는 혼자 죽을 수는 없다.
동귀어진(同歸於盡).
같이 죽는 것이다.
경찰과 검찰에 기천수가 운영하는 불법 도박시설을 고발했지만 조용하기만 할 뿐이었다.
언론에 찔렀고 눈이 시뻘게지도록 기사를 찾았으나 단 한 줄도 보도되지 않았다.
오히려 느닷없는 세무조사가 나왔고 성매매 알선과 행위에 관한 처벌법 운운하며 오히려 자신을 연행해 갔다.
룸살롱과 나이트클럽에서 조직적인 성매매가 이뤄졌다는 것이다.
그리고 증거와 증인들이 등장하면서 정영길은 자신이 빠진 이 덫에서 절대 헤어 나올 수 없다는 걸 절감했다.
세무조사 또한 엄격하게 진행되었고 지난 7년간 약 200억 원의 세금을 탈루했다는 발표가 이어지면서 깊은 수렁으로 빠져들었다.
“기천수 이 개애새끼이이이!!!!”
수갑이 채워진 채 언론 앞에 모습을 드러낸 정영길은 거품을 물고 욕설을 퍼붓고 증오를 드러냈다.
콰앙!
기자들과 일체 말을 섞지 못하게 하려는 듯 경찰은 봉고차에 구기듯 정영길을 밀어 넣어 버렸다.
부우웅!
정영길은 차창을 통해 소릴 질렀으나 바깥에서는 무슨 말인지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경찰서 맞은편 길가에 벤츠 차량 한 대가 서 있었다.
뒷문 유리가 내려가 있었으며 담배 연기가 스멀스멀 밖으로 흘러나왔다.
기천수가 담배를 피우며 경찰서를 빠져나오는 경찰 승합차를 바라보고 있었다.
기천수가 핸드폰을 들어 번호 하나를 눌렀다.
“나다. 내일부터 영업 시작해.”
“내일부터 말입니까? 인테리어도 바꾸고.”
“넌 사업의 연속성이라는 것도 모르냐? 주인만 바꿨지, 손님 직원 여자 모두 그대로야. 내 말 알겠어?”
“예, 사장님!”
전화를 끊은 기천수의 얼굴에 미소가 번진다.
“한 놈은 정리됐고, 이제 남은 한 놈인데.”
틱!
담배꽁초를 차창 밖으로 던지고 유리를 올린다.
부우우웅!
벤츠는 도로를 달려 사라졌다.
***
유태수는 송만술의 발표를 듣고 있었다.
직사각형의 커다란 탁자를 놓고 한참 회의가 열리고 있었다.
태천건설 주식 매수에 관한 중간 보고 형태의 회의였는데 송만술의 보고가 끝나자 무어가 입을 열었다.
“취득 공시는 언제쯤으로 계획하십니까?”
현재 취득한 지분은 4.99%다.
공격 목표 회사의 지분을 5% 취득하면 금융위원회에 신고를 하게 되어 있다.
또한 우리가 특정 회사를 인수하려고 한다는 걸 시장에 드러내는 것이다.
“지금이 가장 좋을 때라는 말이 있습니다.”
“지금?”
모두가 눈을 빛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