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9화 누가 죽을까(1)
유태수는 말을 이었다.
“송 과장!”
“예, 이사님!”
“오늘 3시 어떻습니까?”
“알겠습니다.”
“회의 마칩시다!”
유태수는 더 이상 어떤 얘기도 듣지 않겠다는 듯 서둘러 회의를 끝내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걸 바라보는 설태왕이 빙긋 웃는다.
“저럴 때 보면 꼭 야수 같단 말이야.”
무어도 따라 웃었다.
“야수 같은 것이 아니라 야수지. 어쨌든 대단해. 조금은 답답하리만치 꼼꼼하고 느리게 사냥 준비를 하지만 일단 모든 것이 갖춰지면 뒤로 돌아보지 않고 전진 앞으로.”
그러면서 오른 손가락을 앞으로 쭈욱 뻗는다.
모두가 웃으면서 회의실을 나간다.
***
금융위원회 과장 최호민은 컴퓨터를 바라보고 앉아 있었다.
미국계 투자회사 데브그루의 태천건설 주식 5퍼센트 취득 신고가 들어와 있다.
한참을 바라보고 있던 최호민은 살짝 미소를 지었다.
“뭘 보고 그렇게 웃으십니까? 야릇하게.”
후배 직원 남창우였다.
대학 후배이기까지 하여 자신을 무척 믿고 잘 따른다.
“식사하셔야죠!”
“오, 시간 많이 지났잖아. 가자고. 오늘은 내가 사지.”
“그래서 온 것입니다.”
두 사람은 미소를 지으며 사무실을 걸어 나갔다.
두 사람 모두 회덮밥을 주문했는데 남창우가 놀란 얼굴로 바라보았다.
최호민이 미지근하게 웃으며 말했다.
“재밌지?”
“진짭니까, 아니면 소설입니까?”
지금 싸움이 붙었다.
이 싸움은 평범하지 않다.
우리 역사에서 6.25를 제외하면 가장 처절하고 무자비한 싸움이 될 것이다.
6.25의 가장 큰 비극이 무엇이냐.
바로 동족 간에 총부리를 겨눴다는 것 아니냐.
“태천그룹을 상대로 싸우는 사람이 누군데요? 과장님 말씀은 지금 식구 중 누군가가 시비를 걸고 있다는 것 아닙니까?”
남창우가 아는 태천그룹은 대한민국 재계 1위 기업이다.
5년짜리 청와대 권력 정도는 비교가 안 되는 황금의 권부이고 무자비한 지배자들이다.
외국의 거대 글로벌 기업이 아니라면 태천그룹과 맞짱을 뜰 사람은 없다.
“이런 싸움은 주인공들을 알아버리면 재미가 덜하지. 어차피 언론을 통해 수시로 중계될 것이므로 드라마 보듯 그때그때 보면 된다고.”
남창우는 굉장히 흥미로운 모양이었다.
조금이라도 시나리오의 줄거리를 알고 싶었는지 계속 질문을 했지만 최호민은 적당히 얼버무렸다.
***
태천건설 사장 정철산은 태천예술원 이사장 채무령의 조카였다.
그가 시장의 분위기가 이상하다는 보고를 받은 건 그날 저녁 퇴근 무렵이었다.
“오늘 금융위원회에 정식으로 신고 되었습니다.”
“무슨 뜻이야?”
상무이사 지현중이 말했다.
“데브그루에서 우리 주식을 매수하고 있다는군요.”
단순 투자일 수도 있다.
하지만 상대가 데브그루라는 게 마음에 걸린다.
데브그루는 이미 태천그룹을 상대로 막대한 영업이익을 올린 투기자본이다.
태천자연발전소는 매매가 되었지만 영국 BPC와 미국 시장의 공동투자를 발표하면서 폭등한 주가로 순식간에 거대기업으로 탈바꿈하고 만다.
그리고 태천카드를 인수합병하면서 또 한 번 그랜드슬램을 날렸는데 이번에는 태천건설이다.
앞서 넘어간 두 회사들과 태천건설은 차원이 다르다.
비록 전기자동차가 대세를 이루고 AI가 사람을 대신하는 첨단 시대이지만 건설은 그 기업의 주춧돌이자 마지막 고지이다.
바다 위를 가로지르는 다리와 터널 공사는 결코 사람의 손과 기계가 동원되지 않으면 창조될 수 없는 산업이기에 외면당하는 듯하면서도 진중하게 대접을 받는 분야가 건설업이다.
재벌들이 건설을 포기하지 않는 이유가 바로 그것 때문이다.
“이모님!”
정철산이 전화를 걸었는데 상대는 채무령이었다.
“바쁘십니까? 예, 드릴 얘기도 있고, 알겠습니다. 시간 맞춰 나가겠습니다.”
정철산은 전화를 끊었다.
다행히 한 번에 만남을 허락해줬다.
가깝게는 이모지만 차가울 땐 얼음이 따로 없다.
핏줄이고 뭐고 용서하고 봐주는 것이 없다.
“자넨 계속 시장을 지켜보라고, 아차 싶으면 우리도 준비해야 할 것 아냐?”
“알겠습니다.”
지현중이 방을 나갔다.
혼자 남은 정철산은 며칠 전 전화 한 통을 받았다.
그건 이라크에서 현재 고속도로 공사 중인 현장감독 전통수였다.
그 앞의 감독이었던 박진태는 자살했다.
어쨌든 전통수는 회사에서 원하는 대로 공사를 속도 있게 밀어붙이면서 곧 완공을 눈앞에 두고 있었다.
- 사장님!
- 전 소장.
- 아, 돌아버리겠네. 이걸 말해야 하나.
- 뭔데 그래. 말해봐, 사고야?
- 사고는 아니구요.
사고는 아니라는 말에 정철산은 잠시 한숨을 돌렸다.
- 박진태 씨가 나타났습니다.
- 누구?
- 박진태 전 소장요.
- 무슨 소릴 하는 거야. 그 사람은 죽었잖아. 자네 지금?
- 나만 본 것이 아닙니다. 우리 근로자들은 물론 이라크 쪽 노동자들도 한두 명이 본 것이 아닙니다.
아주 가끔 귀신을 본 사람 얘기를 듣는다.
무당이나 주술이 뛰어난 사람들은 정말로 귀신을 불러내기도 한다.
중요한 건 박진태가 공사 현장에 나타났다는 것이었다.
사업하는 사람들에게는 한 가지 불문율이 있다.
첫째, 공사 현장에서 인명피해가 생기지 않아야 하고 만에 하나 사망사고가 발생하면 어쩔 수 없는 것이다.
그러나 사망자의 영(靈)이 그 장소에 나타나면 엄청난 액운이 몰려온다는 말이 내려온다.
일본에서 실제로 참치잡이 나갔던 1,500톤급 아오마스호가 조업 중에 선원 한 명이 그물에 휩쓸려 바다에 빠져 죽은 사건이 일어났다.
그런데 밤만 되면 죽은 선원이 바다 위에서 살려달라고 외친다는 것이다.
그러다 열흘 만에 천오백 톤급 아오마스호는 감쪽같이 사라지고 말았고 아직까지도 행방을 모른다.
죽은 자의 한이 너무 깊으면 그 현장에 나타난다는 퇴마사들의 얘기도 있다.
그래서 갑자기 불안해하고 있는데 갑자기 데브그루의 태천건설 주식 매수가 폭풍의 핵으로 나타난 것이다.
탁!
약속 시간을 맞추기 위해 사무실을 나섰다.
프랑스 요릿집이다.
요즘은 서울에서도 프랑스 현지보다 더 맛 깊은 요리를 맛볼 수 있을 만큼 식당들이 많이 생겼다.
채무령은 프랑니수아즈라는 것을 주문하여 먹고 있었다.
여러 가지 채소에 참치와 연어를 썰어 넣은 것인데 꼿꼿하게 앉아 조용히 식사를 하는 그녀와 달리 정철산은 팔레미뇽이라는 스테이크를 주문하여 먹고 있다.
“언제봐도 이 집 요리는 놀랍습니다.”
“어머니 제사는 어찌할 생각이냐?”
음식이 맛있다는 말에 채무령은 어머니 제사를 물어봤다.
돌아가신 어머니 채무순은 채무령보다 무려 여덟 살 위였다.
“어떻게 하다뇨? 금둔사에서 항상 지내왔잖습니까?”
어머니 제사는 절에 일임했다.
물론 그에 대한 대가로 시주의 형식을 빌려 일 년에 삼천만 원씩 절에 보내지고 있었다.
“내 말은 올해는 참석할 것인지 묻는 것이다.”
작년에는 바빠 참석하지 못하고 아내와 아이들, 그리고 여동생 가족들만 갔었다.
“올해는 가야죠.”
말은 그렇게 했지만 올해도 어려울 듯싶었다.
데브그루의 움직임이 심상찮기 때문이다.
“회장님 건강은 좀 어떻습니까?”
“할 말이라는 게 뭐니?”
유장풍의 건강 상태를 가장 정확히 아는 사람은 주치의뿐이다.
아내인 채무령도 남편이지만 함부로 면회가 안 되고 병세에 대한 자세한 내용을 알지 못하는 것이 유장풍을 둘러싼 두꺼운 벽이다.
그걸 모르지 않기 때문에 자신이 묻는다고 뭔가 대답을 얻으리라는 생각은 하지 않았다.
인사치레로 물었던 것인데 너무 단호하게 거절당한다.
우걱우걱!
점점 씹히는 고기 맛이 불편해지기 시작했다.
좀체 웃음이 없는 채무령이긴 하지만 오늘따라 목소리까지 더욱 가라앉아 있다는 느낌에 섣불리 말을 꺼내기가 망설여졌다.
하지만 스스로 해결하기에는 워낙 문제가 컸기 때문에 입을 열지 않을 수가 없었다.
“시장이 조금 꿈틀거려서 말입니다.”
그제야 채무령이 고개를 들어 본다.
“데브그루가 심상찮습니다. 태천건설 주식을 공격적으로 매수하고 있습니다.”
꿈틀!
채무령의 이마가 살짝 찌푸려졌다.
이어 정철산은 현재 상황을 설명해주었다.
이야기를 듣고 있던 채무령이 종업원을 부르더니 와인 한 잔을 요구했다.
채무령은 와인이 올 때까지 조용히 식사만 할 뿐 말이 없었다.
채무령은 종업원이 가지고 온 와인을 한 모금 마시고서야 입을 열어 말했다.
“너희 쪽 지분이 어떻게 되니?”
“우호 지분을 모두 합치면 삼십구 퍼센트, 약 사십 정도 됩니다.”
“그럼 나머지는 데브그루 쪽으로 봐야 하는 거니?”
“그건 아직 모르죠.”
“너에게 우호적이지 않은 대상으로 분류가 된다면 이익을 위해서라면 언제든지 널 등질 수 있다는 의미 아니냐. 너희 이모부 밑에서 그토록 오랫동안 사업을 배웠으면서 아직도 생각이 그
정도밖에 되지 않는 거야? 사업에서는 딱 두 가지만 있는 것이다. 내 편과 적.”
“잘 알고 있습니다.”
“공격적으로 들어온다면 어쩔 거냐?”
“우리도 당연히 지분을 늘려야죠. 문제는 유동성 자산입니다. 건설에서 수익을 내면 뭐합니까? 내 마음대로 지출하고 결재할 수 있는 액수가 한정되어 있는데.”
그룹 차원에서 금고를 열어 도와주지 않으면 데브그루의 공격에 속수무책으로 당할 수도 있다는 걸 넌지시 뱉는다.
“유 사장은 만나봤니?”
“통화는 했죠.”
“뭐라든?”
“걱정할 것 없다고 하죠, 뭐.”
“거봐.”
“일이 그렇게 간단하지 않습니다.”
“철산아!”
갑자기 채무령이 목소리를 깔았다.
“너희 엄마가 떠나면서 했던 말이 무엇인지 아니? 아들 하나 있는 놈이 야물지 못해 걱정이라더구나.”
정철산은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유씨들의 절반만 닮았으면 원이 없겠다고 했지. 어떠냐? 네가 보기에 유씨들을 많이 닮는 데 성공했다고 보니?”
피식!
정철산이 실소를 흘렸다.
“어린애도 아니고.”
“어린애도 아닌 사람이 날 찾아와? 이딴 일로?”
갑작스런 노기에 정철산의 눈이 커졌다.
“쯧쯧!”
한심하다는 듯 혀를 차더니 남은 와인은 마저 비웠다.
“장사하는 사람들 입에 달고 사는 말이 뭐였니? 위기야말로 기회라고 하지 않았니, 다시 말해야 알아듣겠느냐? 네 어머니는 유씨 집안 자식들의 절반만 따라가길 소원하셨다.”
채무령은 핸드백을 챙겨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만 가마!”
채무령은 꼿꼿하게 허리를 펴고 일어나 걸어갔다.
정철산은 굳은 표정으로 걸어가는 채무령을 한참 바라보더니 피식 웃고 만다.
부우욱!
식어버린 스테이크를 잘라 포크로 찍어 넣는다.
입안 가득 고기를 씹는 정철산의 입가에 점점 미소가 번졌다.
‘유씨 집안 자식들의 절반만 따라가라.’
틀린 말은 아니다.
어머니는 평생 노래처럼 그 말을 입에 달고 살았다.
도대체 유씨들은 어떻게 사는 것일까.
왜 어머니는 돌아가면서까지 유씨 집안 사람들을 반만이라도 닮기를 원했을까.
오래 고민하지 않고도 해답은 금방 얻는다.
그들은 목표를 정하면 결코 좌고우면하지 않는다.
목표를 달성함으로써 생기는 여러 가지 피해는 차후 문제다.
우선은 그 목표를 바르게 가든 거꾸로 가든 일단 기어이 이루고 본다는 것이다.
순리가 아닌 욕망의 길을 달리기 때문에 피와 죽음, 절망과 희생은 필연적으로 따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