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0화 누가 죽을까(2)
하지만 그들은 아픈 시선으로 피해자들을 보지 않는다.
‘멍청한 놈들.’
멍청하다.
바보는 천재에 눌려 살 수밖에 없다.
우물우물!
스테이크 하나에 삼십오만 원이다.
입맛이 사라진 지는 오래다.
하지만 돈이 아까워서라도 기어이 먹고 갈 계획이다.
“사장님!”
근데 바깥에서 대기하고 있던 상무이사 지현중이 걸어왔다.
채무령의 차가 떠나는 것을 확인하고 결과가 궁금해 들어온 것이다.
“로열 살루트 온 더 락스로 얼음 넣지 말고 가득 한 잔!”
지현중은 종업원에게 주문하고 입안 가득 고기를 씹는 정철산을 바라보았다.
워낙 긴장되는 일이어서인지 차마 묻지는 못하고 정철산의 표정에서 어떤 실마리를 잡아보려고 한다.
꾸울꺽!
음식 넘어가는 소리가 억지로 삼키는 것 같았다.
쭈욱!
정철산은 옆에 놓인 물컵의 물을 마신다.
“재밌어!”
“네?”
“재밌는 분이야.”
말은 재밌다고 하는데 표정은 차갑다.
그건 일이 뜻대로 되지 않았다는 뜻이다.
데브그루의 공격적인 주식 매수사태를 대비하기 위해서는 돈이 필요하고 그러자면 현재 임시 회장직에 있는 유종태를 만나야 한다. 그것이 채무령을 만난 이유였다.
만나게 좀 해달라는 청탁을 하려는데 씨알도 먹히지 않았다.
“자네 유씨에 대해 알아?”
갑작스런 질문에 지현중의 눈이 좁혀진다.
“유씨의 절반만 따라가라는군.”
지현중이 이를 문다.
질문의 뜻을 파악한 것이다.
“어렵다는 뜻 아닙니까?”
정철산은 지그시 웃었다.
그때 종업원이 로열 살루트 한 잔을 가져다 놓았다.
벌컥벌컥!
단숨에 가득 채워진 술을 비운다.
“자네 술은 예나 지금이나 변함이 없군.”
술에 장사다.
자리와 격식을 따지지 않고, 술의 종류를 가리지 않는 호탕한 면이 지현중의 멋이다.
“술에 흔들리면 인생 쫑 내야죠.”
지현중의 눈이 빛난다.
“일단 유종태 회장 직무대행을 만나보죠. 어쩌면 우리 사정이 귀에 들어갔을 수도 있습니다.”
“당연하지. 그런데도 모른 체 하면서 날 피한다는 건 두 가지로 볼 수가 있지. 내 능력을 점검하면서 진행 과정을 보아 날 쫓아내려는 것.”
정철산은 유종태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자신과는 이종사촌이다.
나이도 정철산이 많지만 한 번도 형다운 대접을 받아 본 기억이 없었다.
하다못해 설날 세배를 위해 유장풍을 찾아가도 고개 한 번 끄덕이는 걸 본 적이 없다.
지금 유종태는 유장풍이 병원에 있는 틈을 이용해 자기 사람을 요직에 앉히고 있다.
그 폭풍이 태천건설에도 닥쳐올 것이다.
자동차의 노기술 사장이 반강제적으로 사표를 냈다.
물론 언론 보도에서는 이제 그만 쉴 때가 됐다면서 자신은 구시대의 인물이라고 했다.
그룹 컨트롤타워인 미래전략실도 완전히 바뀌었다.
‘유씨의 절반만 따라가라고.’
정철산은 계속 그 말을 중얼거린다.
“어떻게 하면 유씨의 절반을 따라갈 수 있을까?”
지현중을 보며 묻는다.
“아무나 강도가 됩니까?”
“강도? 유씨 집안이?”
“그럼 그들이 강도지, 산타클로스 할아버지는 아니잖아요.”
뺏고 탈취하고 점령했다.
칼만 들지 않았을 뿐 자신들의 앞길을 막는 많은 사람들에게 눈물과 절망을 안겨주었다.
“강도 한 번 해봐?”
“네?”
“못할 것도 없잖아. 유씨 핏줄의 절반만 닮으라는 것이 채무령 이사장님, 개인적으로 이모님도 되시는 분이 요구하잖아. 아랫사람으로서 어른의 말을 듣는 것이 삼강오륜 아냐?”
“갑자기 삼강오륜까지?”
“이봐. 나도 로열 살루트 온 더 락스 가득.”
종업원이 인사를 하고 물러났다.
그렇게 한 잔 두 잔, 마시는 술이 점점 늘어나기 시작했다.
***
유태수는 초단타매매가 가능한 슈퍼컴퓨터 앞에 서 있었다.
국내 주식시장이 폐장하면 곧바로 뉴욕과 런던 시장의 동향이 수시로 화면에 나타난다.
그의 눈은 태천건설주의 오늘 종가에 머물러 있었다,
어제 종가와 오늘 종가에서 차이가 없다.
그건 떨어질 만큼 떨어졌다는 뜻이고 반발심리에 따른 매수자가 적지 않다는 것이다.
하긴 태천건설주 정도면 웬만한 악재에도 휴지 조각처럼 구겨지지는 않는다.
위험 속에서도 이라크 공사가 잘 진행되고 있으며 호주의 대형 건설사와 손잡고 빅토리아사막에서 가스전을 개발하고 있다.
유장풍 회장의 입원 수술 사건만 아니면 이렇게 급락할 이유는 전혀 없는 것이다.
시간이 흐를수록 매수세가 강세를 보일 수 있기 때문에 지금 좀 더 빠른 속도로 매수에 집중해야 한다.
탁!
타타타탁!
자판을 몇 번 두들기자 화면이 바뀌며 숫자가 나타났다.
매수 지분 11%를 넘었다.
대략 백만 주가 넘는다.
매수 목표는 33%, 돈으로 따지면 미화 5억 달러, 한화 약 7천억이다.
이미 외국 투자자 몇몇 곳과는 의견교환이 이뤄지고 있었다.
만에 하나 태천건설도 맞대응하면서 주식을 매수한다면 지금까지 없었던 생사를 걸고 싸우는 대전쟁이 될 것이다.
바로 그때 전화가 울린다.
전화를 걸어 온 사람은 송만술이다.
“퇴근 안 했어?”
[했지. 아직 회사인가 보군?]
“그만 들어갈 생각이야. 무슨 일?”
[조금 전 내 친구에게서 전화가 왔어. 고등학교 대학을 같이 다녔는데 회사 간부와 저녁을 같이 한 모양이야. 그런데 거기서 채무령 이사장을 보았다는데.]
채무령이란 말에 유태수의 눈이 빛난다.
[문제는 채무령 이사장이 만난 사람이야. 바로 우리가 노리고 있는 태천건설 정철산 사장이었어.]
파팟!
눈에서 번갯불이 튄다.
유태수는 송만술과 좀 더 통화를 하고서 전화를 끊었다.
‘정철산.’
이모의 아들이자 자신의 이종사촌이다.
어려서부터 작은집과는 자주 교류가 있었지만 외가 쪽, 특히 이모 쪽과는 그다지 왔다 갔다 한 기억이 없다.
정철산을 만난 것도 고등학교 입학에서 처음이었다.
그리고 나중에 태천건설 과장급으로 들어왔다는 얘길 들은 것 같고 이후로는 모른다.
그러던 중 이라크로 떠났는데 그곳에서 정철산이 태천건설 사장이 되었다는 걸 알게 되었다.
순혈주의를 고집하는 아버지 유장풍의 그늘로 들어왔다는 건 능력보다는 아마 어머니의 입김이 컸을 것은 불문가지다.
‘왜 만났을까?’
유태수는 잠시 고민에 빠진다.
유태수는 직접 차를 몰고 퇴근하고 있었다.
머릿속에는 송만술의 전화가 떠나지를 않고 있었다.
이모는 죽었다.
딸이 둘이고 아들은 정철산이 유일한데 그렇게 형편이 쪼들리게 사는 것 같지는 않았다.
끼이익!
갑자기 브레이크를 밟았다.
시간이 늦어 차량 통행이 뜸했기에 망정이지 바짝 누군가 따라왔다면 추돌을 피하지 못했을 것이다.
그제야 깜빡이를 켜고 오른쪽 길가에 세운다.
‘내가 아버지라면.’
그렇게 입장을 바꿔보자 갑자기 의문이 풀리기 시작한 것이다.
회사는 정철산에게 맡겨도 자금 흐름은 아버지가 양손에 거머쥐고 놓지 않을 것이다.
정철산을 어머니의 성화에 그 자리까지 올려 주었지만 꼭두각시나 다름없다.
그렇다면 이 어려운 시기에 정철산이 할 수 있는 일은 아무것도 없다.
현금을 포함한 유동성 자산 모두가 정철산의 힘으로 어떻게 해 볼 수 있는 건 전무하다고 봐야 한다.
‘도움이었군. 구조요청.’
이제야 모든 의문이 풀렸다.
부릉!
다시 차는 출발했다.
탁!
음악을 틀었다.
귀에 익은 음악이다.
고향 체코를 떠나 낯선 미국에서 생활을 하던 드보르작이 향수병을 앓다시피 하며 만든 신세계 교향곡 2악장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어머니는 도와줄까.’
차가 이북오도청이 있는 곳으로 방향을 틀었다.
‘학창 시절 겪은 어머니라면 열 번 백 번이라도 도울 것이다. 그러나 사업가로서, 태천예술원 이사장으로서 들여다본 어머니라면 냉혹하게 거절했을 가능성이 크다.’
어머니는 철저히 두 얼굴로 이 세상을 살아온 분이다.
‘이모부와 삼 일 밤낮을 싸워가며 그 자리에 앉혀 줬으면 된 것 아니냐.’
‘나더러 회사 경영 문제까지 도와달라는 건 너무한 것 같구나.’
갸웃!
지금의 생각은 전자다.
즉 학창 시절 어머니의 모습에서 나올 법한 말이다.
태천예술원 이사장으로서 뱉어낸 말이라면 그렇게 인간적일 리 절대 없다.
‘사업은 전쟁이다. 상대를 죽이지 않으면 내가 죽는다.’
이것도 아니다.
너무 고상한 답변이다.
조팔구에게 들었던 어머니의 모습은 인정사정없는 사냥꾼이었다.
‘그것이다.’
갑자기 떠오른다.
‘유씨들은 이렇게 하지 않는다. 유씨의 절반만 따라가면 이 위기를 넘길 것이다.’
미루어 짐작한 말이지만 거의 백 퍼센트 정답일 것이라고 확신했다.
씨익!
유태수는 웃었다.
해야 할 말이 있고 하지 말아야 할 말이 있다.
성품이 온유한 사람은 절대 잔인해지지 못한다.
나는 하는데 넌 왜 못 해 하는 말처럼 어리석은 건 없다.
사람은 모두가 완전히 다르다.
그러나 단 한 가지 상황이라면 얘기는 달라진다.
‘궁서설묘(窮鼠囓猫).’
궁지에 몰리면 쥐가 고양이를 문다.
하물며 사람인데 어찌 그냥 고양이에게 잡아먹힐까.
정철산 역시 어떻게 올라간 그 자리인가.
능력이 있네 없네, 아무리 이모 아들이지만 너무하는 것 아냐 하는 누나들의 뒷담을 한두 번 들은 것도 아니다.
면전에서 대놓고 모욕을 하지 않나, 아버지는 정씨들은 왜 그 모양인지 모르겠다면서 어머니를 노려봤고 끝내 그날 밤 부부싸움이 크게 일어나고 말았다.
아무튼 그 자리에서 내려오고 싶지는 않을 것이다.
오기가 있지 그 수모를 당하고서도 무기력하게 내려온다면 그게 어디 배알이 있는 사람인가.
집 앞에 도착한 유태수는 차에서 내렸다.
싸아아!
산으로부터 솔바람이 불어왔다.
“흐흐흠!”
바람의 냄새를 맡는 듯 어금니를 물고 지그시 콧바람을 들이킨다.
‘조금 더 짙어졌다.’
사나흘 전부터 바람에 살기가 실려 오고 있었다.
곰은 4킬로 밖에서 뿜어나오는 먹이의 냄새를 알고, 표범은 2킬로 밖에 있는 사자의 냄새를 맡는다.
맹수처럼 발달한 후각은 여러 번 위험에서 자신의 생명을 구했다.
딸칵!
대문을 열고 들어섰다.
‘오지 마라.’
누군지 모르지만 자신을 노리지 말라고 소리친다.
상대가 누구든 자신은 절대 죽지 않기 때문이다.
***
어이가 없다.
또 전화다.
왜 전화를 하는지 모르지 않는다.
오늘도 거절하려다 유종태는 바쁜 목소리로 받았는데 다짜고짜 만나잔다.
찾아와도 모자랄 판에 바깥에서 보자는 건방에 유종태는 화가 났다.
그러다 이런 멍청이니까 병신 소릴 듣지 하면서 웃음을 지었다.
“예! 그러죠. 알겠습니다.”
유종태는 점잖게 말하고 전화를 끊었다.
“웃기는.”
유종태는 계속 실소를 지었다.
‘도대체 뭐 하자는 거야.’
정철산.
그를 겪은 사람들은 모두 괜찮다고 한다.
하지만 자신의 눈은 아니다.
아무튼 얼마 전까지만 해도 자신의 그림자도 밟지 못했던 사람이 만나자고 하니 나가봐야 한다.
벗어 놓은 구두를 신는다.
형님이지만 한 번도 형님이라고 생각해본 적은 없다.
저벅저벅!
유종태는 사무실을 걸어 나간다.
만나자는 약속 장소도 그렇다.
하고 많은 장소 다 놔두고 꼬막 전골집이다.
정철산의 죽은 아버지 고향이 꼬막이 많이 나는 벌교다.
언젠가 정철산이 겨울 꼬막이야말로 쫄깃한 맛이 일품이라면서 참꼬막을 보낸 적이 있었다.
꼬막은 데치는 것이 기술이라며 형수라는 사람이 직접 집에 와서 삶아주고 돌아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