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나는 재벌집 청소부-111화 (111/122)

111화 마존이라는 사람(1)

유종태는 약속 장소에 들어섰다.

물론 꼬막을 맛있게 먹었던 기억은 있지만 고급 호텔이나 이름난 식당만 다니다 비린내 나는 어패류 식당에 들어서자 기분이 확 깬다.

더욱 가관인 건 누구도 자신을 알아보지도 못했고 안내는 더욱 없었다.

“일행 있으세요?”

카운터에 앉아 있던 여자가 묻는다.

식당 안은 손님들로 가득했다.

“유 사장, 여기!”

귀에 익은 목소리가 들린다.

고개를 돌리자 한 사내가 자신을 향해 손을 흔들며 알은체를 했다.

유종태는 통로를 따라 정철산이 앉아 있는 식탁으로 다가갔다.

정철산은 머리에 요리사 모자를 쓰고 있는 사내와 마주 앉아 있었는데 유종태가 다가가자 말했다.

“형님, 내가 얘기했죠. 태천그룹 차기 주인 될 내 동생 유종태 사장님.”

“이름 많이 들었습니다. 어서 오십시오.”

유종태는 불콰한 얼굴로 앉아 있는 정철산을 보았다.

정말 가지가지 한다더니 기가 막힐 노릇이다.

이따위 식당 주인에게 자신을 소개하다니, 속에서 뜨거운 것이 확 치밀어 올랐다.

“아우님, 난 그만 가봐야 할 것 같아. 그럼!”

주인은 유종태에게 깍듯하게 허리를 굽힌 뒤 걸어서 사라졌다.

“아줌마, 여기 소주잔!”

지나가는 종업원에게 큰 소리로 말했다.

“아냐, 아냐. 난 금방 가봐야 합니다. 술 생각 없어요.”

“그런 게 어딨어. 우리가 몇 년 만에 마주 앉은 건데 이런 날은 한잔해야지.”

얼렁뚱땅 반말이다.

면전에서 숨도 제대로 쉬지 못하던 정철산이 술기운 때문인지 호방하게 목소리를 높여 말했다.

“자, 받아.”

종업원이 가져온 술잔에 소주를 따르는데 한 손이다.

뚝!

자신도 모르게 두 손이 나갔는데 정철산이 한 손으로 따르자 슬며시 오른손을 빼려다 멈칫했다.

한 손으로 술잔을 쥐고 있지만 오른손이 왼손 소맷자락을 잡고 있으니 두 손으로 받는 모양새다.

“동생과 마주 앉아 술 마셔본 지가 언제야. 십 년 넘었지?”

“할 얘기라는 것이 뭡니까?”

전화로 말하면 안 되냐고 했으나 워낙 중요하여 불가하다는 것이다.

이런 말은 직접 얼굴을 보고 하는 것이라는 말에 내용을 알면서도 오늘 밤이 퍽 재밌겠다는 생각에 나왔다.

“우리 유 사장님 굉장히 급하시네.”

멈칫!

유종태의 표정이 굳어진다.

자신이 알던 정철산이 아니다.

아무리 술기운을 빌었다고 해도 너무 자신만만하다.

‘이 더러운 기분은 뭐지.’

갑자기 나오지 말았어야 할 자리에 나왔다는 걸 깨달았다.

“안 되겠습니다. 다음에 얘기하죠.”

느낌이 좋지 않아 자리에서 일어서려는데 정철산이 말했다.

“밑에 직원들에게 보고는 받으셨을 것입니다. 데브그루에서 금융위에 정식 공시까지 해가면서 덤벼들고 있더군요. 크게 특별한 사항이 없다면 우리도 맞서야 할 것 아니겠습니까?”

“연락 못 받았습니까?”

“무슨 연락?”

“이번 데브그루의 노림수에 정식으로 대응할 자신이 없으면 그 자리에서 내려오셔야 합니다.”

피식!

갑자기 정철산이 웃음을 짓더니 채워진 빈 잔을 훌쩍 마셨다.

“커어!”

트림을 하며 다시 빈 잔에 술을 채운다.

“사장님, 대응할 자신이고 뭐고 할 필요가 있습니까? 우리가 주식을 매입하여 지분을 늘리면 되는 일인데.”

“그럼 그렇게 하세요.”

“돈을 주시죠. 태천건설이 적자 경영한 적은 없는데 회사 금고에 돈이 없습니다. 사장으로서 작금의 위기를 헤쳐 나가고 싶어도 누군가 그 돈을 모조리 쓸어간 탓에 곳간이 텅

비었습니다.”

“내가 가져갔단 말입니까?”

정철산이 자세를 바로잡고 정색했다.

“사장님, 계백 장군 아시죠? 내가 말입니다. 초등학교 때부터 대학 졸업 때까지 누군가 누굴 존경하냐고 물으면 일관되게 계백 장군을 얘기했습니다. 초등학교 2학년 때는 전교에서

계백 장군은 나 혼자 존경한다고 나왔다면서 선생님이 이상한 얼굴로 보더군요. 광화문 네거리에 있는 사람들은 난 관심 없습니다. 오로지 계백입니다.”

“뭔 소리를 하고 싶은데?”

유종태가 짜증을 냈다.

“계백 그 미친놈이 고작 오천 명을 데리고 김유신의 5만과 붙었어요. 10대 1의 싸움, 당연히 패했죠. 하지만 계백은 그냥 죽지 않았죠. 나당 연합군 중 절반은 골로 갔다고

합니다.”

유종태의 이마가 좁혀졌다.

뭔가 의미 있는 말이라는 걸 간파했으나 정확한 뜻을 읽지는 못하고 있었다.

“내가 가진 1퍼센트도 안 되는 주식은 위력도 없고, 태천바이오가 소유한 12퍼센트와 여기저기 우호주를 박박 긁어모으면 39퍼센트, 약 40 정도는 끌어 올리겠더군요. 상대가

상대인 만큼 40 중반 아니면 그 이상까지 채우려면 8,000억은 쏟아야 할 것 같던데.”

데브그루뿐만이 아니다.

유장풍의 입원으로 인해 태천의 모든 주가가 폭락하면서 호시탐탐 노리고 있던 외국 투기자본들이 벌떼처럼 달려들어 저울질하고 있다.

조지 소로스가 운영하는 퀀텀펀드는 대영제국의 중앙은행을 굴복시켰고 동남아의 외환위기를 불러왔다.

국제 투기자본들이 그래서 무서운 것이다.

현재 겉은 평범한 것 같아도 밑에서는 절대 그렇지 않다.

폭풍전야.

유종태는 그렇게 규정하고 비상 경영체제로 전환하려는 계획을 갖고 있었다.

“판사들이 그런 질문을 많이 한다지요. 묻는 말에 예, 아니오로만 대답하라고 말입니다. 나 또한 판사의 입을 빌려보죠. 자금 지원만 해준다면 얼마든지 막아낼 자신 있습니다. 일부러

날 흔들어 쫓아낸 뒤 사장님의 밀명을 받고 낙하산으로 내려온 누군가가 일거에 평정하고 능력을 대내외에 과시한 뒤 내 자리에 말뚝을 박으려 한다는 것도 압니다.”

그러므로 우리 서로 구차한 변명이나 거짓말 따위는 주고받지 말자.

깨끗하게 거래하자.

예, 아니오로 대답해라.

“그래도 이종사촌이라고 대우했는데.”

“싫다?”

“사직서 써놓고 기다리는 것이 좋을 것 같습니다. 정철산 씨.”

유종태가 자리에서 일어나 돌아가려 할 때 나직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동귀어진이라고 알죠? 너 죽고 나 죽자. 이라크에서 있었던 모든 사건의 전모가 내 주머니에 들어 있다는 걸 까먹은 모양이군.”

뚝!

유종태가 그대로 멈춰 선다.

“유장풍 회장의 큰아들이 모든 사건의 최종 배후다. 아버지로부터 능력을 인정받기 위해 정보기관을 동원해 납치된 노동자를 죽인 것이다.”

휘청!

흔들거렸다.

유종태는 이를 깨문다.

애써 평정을 찾기 위해 노력했고 일어났던 자신의 자리에 다시 앉는다.

벌컥!

마시지 않았던 잔을 단번에 비웠다.

고개를 들어 불그스레 달아오른 정철산의 얼굴을 노려보았다.

“해보자는 거요?”

“뭘 해보자는 것입니까? 뭔가 오해가 있는 모양인데 난 내가 지금 앉아 있는 자리를 유지할 수 있게 해달라는 말을 한 것입니다.”

사장 자리를 지키게 해달라는 건 곧 인수합병을 노리고 공격해오는 데브그루로부터 회사를 보호해달라는 뜻이다.

인수합병의 위기를 빌미로 자신을 쫓아내려는 유종태와 버티려는 정철산이다.

한참을 노려보던 유종태가 다시 자리에서 일어났다.

“믿겠습니다.”

걸어가는 유종태의 등에 대고 말했다.

이윽고 유종태가 식당에서 사라지고 정철산의 달아오른 두 눈이 붉게 빛을 내기 시작했다.

능력 있는 CEO라는 말은 하고 싶지 않다.

하지만 세계 금융위기를 비롯해 크고 작은 어려운 일이 있을 때마다 차분하게 헤쳐 나갔고 흔들린 적은 있었지만 넘어지지는 않았다.

‘소리 없이 강한 사람.’

삼왕그룹 이병악 회장이 어느 신문과 인터뷰에서 자신을 그렇게 표현했었다.

눈에 띄는 업적은 없지만 그렇다고 실패한 일도 없다.

가장 큰 위기였다면 오래전 있었던 이라크 고속도로 공사 현장에서 발생한 노동자 납치사건이다.

물론 뒤에서 유장풍이 지시했겠지만 모양새는 유종태가 진두지휘를 한 것이었다.

사건의 당사자인 건설의 사장이지만 옆에서 보조하는 데 그쳤다.

하지만 사건이 해결될 때까지의 모든 흐름을 지켜보았고 어느 한순간 모든 기록과 증거물을 보관해둘 필요성을 느꼈다.

물론 보관의 필요성은 불안한 자리 때문이었다.

실수한 것도 없는데도 인사철만 되면 항상 건설의 자기 이름이 오르내린다.

그럴 때마다 피가 마른다.

그러려니 했다.

이른바 그들이 말하는 유씨의 적통이 아니기에 당연히 겪어야 하는 아픔이라고 생각했다.

지렁이도 밟으면 꿈틀거린다는 걸 보여주고 싶다.

쫓겨나든, 물러나든 그냥 저항 한 번 못해보고 자리를 내주기는 죽어도 싫다.

술이 가져온 무모한 배짱이 아니다.

일남일녀.

둘 모두 대학 졸업했고 각자 가야 할 길을 열심히 가고 있다.

사람에게는 명예라는 것이 있다.

명예는 물러날 때 얻거나 잃는다.

지금 물러나면 모든 걸 뒤집어쓸 뿐 아니라 지금까지 건설 분야에서 얻었던 소리 없이 강하다는 전문경영인의 명예는 사라진다.

쭈욱!

정철산은 술잔을 비웠다.

***

깜깜무소식이다.

가타부타 말이 없고 전화 한 통화도 없다.

그 사이 데브그루는 더욱 시장을 주물렀고 어느 사이엔가 태천건설을 노리고 있다는 소문이 확실하게 퍼졌고 언론에도 오르내리기 시작했다.

그렇게 시간이 흐르면서 데브그루는 태천건설 주식을 25퍼센트까지 끌어 올렸다.

그러던 차에 한 사람이 정철산을 찾아왔다.

유종태의 수행비서 정준구였다.

“앉으시죠!”

두 사람은 소파에 마주 앉았다.

“불편한 자리 오래 끌고 싶은 맘 저도 없지만 사장님께서도 없을 것이니 본론부터 말씀드리죠. 유종태 회장 직무대행의 뜻은 이렇습니다. 사장님께서 그만 물러나시는 것입니다. 사직에

따른 퇴직금과 위로금은 충분히 드릴 것입니다.”

정철산은 예상한 듯 놀라거나 당황하지 않았다.

“물러나라?”

“물러나시는 것이 가장 좋은 난국 타개책이라고 하시더군요.”

“그렇군요. 내가 물러나면 유종태 사장이 보낸 인물이 데브그루의 공격에 맞설 테니까.”

“거기까진 내가 관여할 일이 아닙니다. 난 회장직무대행의 의견을 전달할 뿐입니다.”

“조금 전 성함이 어떻게 되신다고 했죠?”

정준구의 이마가 살짝 찌푸려진다.

정말 몰라서 묻는 것일까.

분명 정준구라고 했다.

그뿐만 아니라 계열사 사장이면 유종태 수행비서라는 걸 절대 모를 리 없다.

“정준구입니다.”

“나도 한 마디 전달을 부탁해도 될까요?”

“물론입니다. 하십시오.”

“내일까지 날 찾아와 이 사태를 해결할 자금을 결재해 주지 않으면 그냥 내 길 간다고 말해주시죠. 그만 가보십시오. 바쁠 테니.”

그리고 자신이 먼저 자리에서 일어나 버린다.

혼자서 뻘쭘한 모양이 되어버린 정준구의 표정이 굳었다.

엉거주춤 일어나 창문을 열고 담배를 피워 무는 정철산을 바라보았다.

당장 쫓아가 이런 싸가지 없는 새끼가 하면서 죽통을 한 방 날려버리고 싶다.

저 새끼가 뭘 믿고 이렇게 큰소릴 치는 거지 하면서 매섭게 노려본 뒤 헛기침을 하고 사장실을 걸어 나갔다.

탁!

문이 닫혔다.

정철산은 뿌연 매연에 덮인 서울을 바라보았다.

후우우!

매연 연기 짙은 서울 하늘로 담배 연기를 내뱉는다.

“훗훗~”

갑자기 웃는다.

이틀 전에는 술기운을 빌어 그런 용기를 냈다고 치자.

그런데 지금 정준구에게 보여준 자신의 냉철함은 뭔가.

자신에 대해 스스로가 놀란다.

상대는 천하제일거부의 맏아들이다.

결코 그가 보낸 비서를 향해 그런 배짱 있는 말을 서슴없이 뱉어낼 용기가 없는 사람이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