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2화 마존이라는 사람(2)
정말로 막다른 골목에 몰린 쥐란 말인가.
아니면 죽고자 하면 산다는 필사즉생인가.
언제부터 자신에게 이런 승부욕이 있었던가.
정철산은 검찰청 앞에서 자신은 결백하다고 호기롭게 소리치는 재벌 총수들을 볼 때마다 부러웠다.
전혀 두려움이란 없었다.
아무리 돈이 많다고 저런 자리에서 표정 하나 변하지 않고 당당할 수 있다는 것이 신기하면서 과연 나라면 저럴 수 있을까 반문해봤지만 이내 고개를 저었다.
자신 없다.
속된 말로 바짝 쫄아 말도 못 하고 들어갔을 것이다.
그런데 지금 이 두려움이란 눈을 씻고 찾아봐도 없는 심신이 곤혹스러울 만큼 놀랍다.
벌컹!
그때 문이 요란하게 열리면서 지현중 상무이사가 뛰어 들어왔다.
“어디 갔습니까? 유종태 사장이 사람을 보냈다면서요?”
“자넨 어디서 들었어?”
“비서실 아니면 누가 말해줍니까?”
“말하지 말라고 했는데. 이미 갔어.”
그리고 전해온 이야기를 해주자 지현중이 버럭 소릴 질렀다.
“개자식! 머슴처럼 부려 먹고.”
지현중이 이를 부드득 갈았다.
***
골목을 올라왔다.
상당히 가파른 경사길인데 마치 등산을 한 기분이었다.
천천히 녹슨 대문 앞으로 걸어간 유태수는 잠시 걸음을 멈췄다.
「개조심」
언제 누가 썼는지는 몰라도 희미해진 것이 무척 오래된 듯 보인다.
딸칵!
말보로 레드 한 개비를 피워문다.
조금만 돌아가면 청와대가 보일 것이다.
서울에 살면서도 이런 산동네가 있다는 건 전혀 몰랐고 집들은 초라하고 낡았지만 경치만큼은 빼어났다.
사실인지 아닌지 알 수는 없으나 조선시대 유명 화가들이 그린 진경산수화 중 상당수가 이 동네라는 말을 들었다.
멈칫!
느긋하게 담배를 피우고 있던 유태수가 놀란다.
저 아래 누군가 부지런히 올라오고 있었는데 자세히 보니 송만술이었다.
“송 과장!”
“전화를 안 받으셔서.”
그제야 유태수는 자신의 핸드폰을 꺼냈다.
꺼져 있다.
오늘 정치인과 점심을 같이 했는데 결례가 될까 봐 꺼놨고 이후 깜빡한 것이다.
“전 사장님에게서 전화가 걸려 왔어. 배 이사와 급히 통화를 하고 싶다는 거야.”
전 사장은 아시아 익스프레스 카드사 전극준이었다.
“급한가 보던데.”
유태수는 핸드폰 전원을 켜고 곧바로 전화를 걸었다.
“사장님, 배 이사입니다.”
[몇 번을 걸었는데 통화가 어려워서…… 한 시간 전쯤 놀라운 전화 한 통을 받았습니다.]
“놀라운 전화?”
[정철산 태천건설 사장이 전화를 걸어왔습니다. 물론 예전부터 가끔 통화도 하고 식사를 하는 사입니다.]
유유상종이라고 했던가.
태천그룹 식구이면서도 철저히 왕따를 당하고 있는 두 사람은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서로를 찾았다.
바쁠 땐 전화로 소통했고 몇 번 골프도 같이 쳤다.
자리가 만들어지면 자연스럽게 자신들이 차별받고 있다는 것을 확인하고 서로 위로하면서 와신상담 절치부심한 것이다.
하지만 유장풍은 그런 기회조차 허락하지 않으려는 듯 둘을 매우 혹독하게 짓눌렀다.
자리에 앉아 있기는 해도 다른 생각은 꿈을 꾸지 못하게 통제한 것이다.
통제의 방법은 간단했다.
따돌림!
아무도 그와 말하지 않고, 재계의 어느 관계자도 유장풍을 비롯한 유씨 일가의 계산을 알기에 그들과 가까이하지 않았다.
[사실 며칠 전 그분과 만나 저녁을 같이했었습니다. 그 자리에서 날 무척 부러워하더군요. 데브그루와 소믈리에의 관계를 모르는 만큼 자신이 처한 얘기를 망설이지 않고 토해
내놨습니다. 저도 조금 놀랐죠. 그런데.]
잠시 숨을 가다듬은 전극준이 말을 이었다.
[이번 일로 자신을 쫓아낼 계획을 갖고 있다면서 그냥은 물러나지 않겠다고 했죠. 비장의 카드가 있다는데.]
“비장의 카드?”
[묘한 웃음만 지을 뿐 내용은 말하지 않더군요. 그런데 조금 전 유종태 회장 직무대행이 보낸 비서 정준구가 가져온 제안을 거절했다는 겁니다.]
정준구가 꺼낸 위로금과 퇴직금에 대한 얘기를 하며 전극준은 전화를 끊었다.
송만술이 궁금한 듯 한참 바라본다.
“볼일 보고 와. 난 그만 돌아가 봐야겠어. 바쁘네.”
“여기까지 왔는데 일 보고 같이 가지 그래.”
“같이 가자고?”
유태수는 담배를 발로 비벼 끄고 철 대문으로 다가섰다.
줄을 당겨 대문에 걸린 종을 쳤다.
뎅! 뎅!
집안은 조용했다.
개는 없다.
있다면 이 소란에 조용할 리 없다.
잠시 후 발걸음 소리가 나더니 덜컹 하고 대문이 열렸다.
멈칫!
문이 열리고 유태수는 깜짝 놀랐다.
비쩍 마른 노인 한 명이 두루마기까지 걸친 한복 차림으로 서 있다.
“어서 오게. 때가 되니 사람이 오는군.”
노인은 마치 유태수가 찾아올 줄 알고 의관까지 갖춘 채 기다리고 있었다는 표정이다.
“자네는 여기서 기다리시게.”
송만술은 들어오지 못하도록 했다.
유태수는 송만술을 돌아보며 눈짓을 했다.
기분 나쁘게 생각하지 말라는 뜻이었다. 유태수는 노인을 따라 안으로 걸어 들어갔다.
방은 단출했다.
특이한 건 천장을 따라 사방 벽으로 선반이 만들어져 있고 그 위로 제목조차도 읽을 수도 없는 한문으로 된 책들이 빼곡하다는 것이었다.
“우선 이 늙은이의 절부터 받으시지요.”
“어르신, 무슨 말씀을!”
유태수는 깜짝 놀라며 허리를 숙이려는 마존을 제지했다.
“하늘은 높고 땅은 낮지요. 하늘이 오셨으니 땅으로서 예를 취하는 건 당연한 것입니다. 인연은 대충 만들어지지 않는다니까요.”
마존(魔尊).
인간의 길흉화복을 너무 잘 알기에 오히려 사람들이 피한다고 했다.
그를 만나면 좋은 소리도 듣지만 나쁜 얘기도 들어야 한다.
인간은 결코 나쁜 얘긴 들으려 하지 않기에 마존을 더욱 두려워하고 멀리하는 것이다.
촤락!
두루마기 옷고름이 방바닥을 스치는 소리가 울린다.
무릎을 꿇고 큰절을 하는 상황에서 유태수는 덤덤했다.
어쩌면 마존이야말로 자신과 네오의 관계를 이미 알고 있을지 모른다는 생각을 한 것이다.
마존은 정좌하고 앉았다.
“전화 통화만 하지 않았다면 뜨거운 찻물일 텐데.”
미리 우려 놓은 녹차를 따라주었는데 문밖에서 전극준과 통화를 하는 바람에 찻물이 식었다는 뜻이다.
정확히 도착 시간까지 헤아렸으나 전화가 올 줄은 몰랐던 모양이다.
어쨌든 대단한 사람임에는 틀림없었다.
“차 맛이 어떻습니까?”
차를 한 모금 마신 유태수에게 묻는다.
“난 차에 대해 잘 모릅니다.”
“허허허!”
마존이 웃는다.
“그렇군요. 살아나기 위해서는 얼굴을 바꿔야죠.”
투툭!
하마터면 찻잔을 떨어뜨릴 뻔했다.
자신이 성형을 한 사실까지 알고 있다.
그렇다면 유장풍의 막내아들이라는 것 또한 알고 있을 가능성이 크다.
“많이 아시는군요?”
유태수의 목소리가 가라앉았다.
“이 늙은이를 죽이겠습니까?”
유태수의 얼굴은 웃고 있으나 눈빛은 얼음처럼 차갑다.
마존은 유태수의 눈에서 살기를 간파한 것이다.
“제왕지목(帝王之木)이라고는 하지만 아직은 드러날 때가 아니죠. 이 늙은이 입을 통해 정체가 노출될 위험이 있으니 죽여 없애는 것도 한 가지 생존 방법이긴 합니다.”
“내가 당신을 죽일 것 같습니까?”
“그건 내 뜻이 아니니 알 수가 없지요.”
유태수는 차를 한 모금 마셨다.
“그분을 죽일 생각입니까?”
유태수는 잔을 내리고 마존을 바라보았다.
“그분?”
“낳고 길러준 분 말입니다.”
유태수는 뚫어져라 마존을 바라보았다.
아는 것이 너무 많다.
마치 삼국지 속의 제갈공명이 환생한들 이보다 더 미래를 잘 알고 판단할까 싶다.
“당신이 보기에는 어떻소?“
마존은 빙긋 웃었다.
의미심장하다.
마치 잘 알면서 묻느냐는 것 같기도 했다.
“잘 마셨소.”
유태수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오래 앉아 있을 일이 더 이상 없을 것 같았다.
“벌써 가십니까?”
“말이 통하는 사람과는 시간 낭비하는 것 아니지요.”
흠칫!
말이 통하는 사람이라는 얘기에 마존이 깜짝 놀라는 표정이다.
말이 통한다는 걸 요즘은 소통이라고 한다.
자신과 유태수는 소통한 적이 없다.
어떤 면에서, 무슨 내용이 서로 의견을 같이했는지 이해가 되지 않는다.
“길이 좋아 오래 사시겠습니다.”
대문 앞을 나서며 유태수가 말했다.
길이 좋다는 말은 일 킬로 가까운 오르막길을 두고 하는 얘기다.
등산하듯 오르내리면 당연히 건강해질 것이고 오래 산다는 뜻으로 한 말이다.
비탈진 골목길을 내려가는 유태수를 바라보는 마존의 이마는 펴지지 못했다.
말이 통하는 사람과는 오래 앉아 있을 필요가 없다는 말이 도무지 해석이 되지 않는다.
어떤 마음을 담아 건넨 얘기일까.
유태수는 시야에서 사라졌으나 마존은 움직이지 않았다.
해답을 찾아야 한다.
파팟!
돌아서서 두 발자국 내딛던 마존의 눈이 섬광을 일으켰다.
“아아아!”
떠올랐다.
유태수가 던진 말의 뜻을 알아차린 것이다.
나에 대해 그렇게 잘 아는 사람이니 긴말은 하지 않겠다.
한 마디로 그 입을 적절하게 절제하면 제 명대로 살겠지만 아는 것이 많다고 경솔하게 입을 열면 큰 화를 당할 것이라는 뜻이다.
“흐흠!”
차라리 협박이 낫다.
함부로 세 치 혀를 놀렸다가는 쥐도 새도 모르게 죽는 수가 있다고 말하는 것이 깔끔할 수가 있다.
그런데 지그시 웃으며 말했다.
이보다 더 부드러움 속에 돌이킬 수 없는 강력한 경고가 들어간 말이 있을까.
‘그렇게까지 말하지 않아도 자네에 대한 내 입은 함부로 열리지 않는다네. 자네는 선택받은 사람 아니던가.’
유태수는 선택받고 지목당한 사람이다.
그런 사람을 적으로 두는 건 미련한 짓이다.
‘걱정 말게. 난 자네의 싸움을 조용히 구경하고 싶을 뿐이니.’
탁!
대문이 닫혔다.
***
비가 내린다.
일주일 전에도 예보에 없던 큰비가 내렸는데 오늘도 그러했다.
서울을 비롯한 경기 동부지역으로 10에서 30밀리 정도 내릴 것이라고 했는데 그냥 쏟아진다.
이미 50밀리를 넘긴 비의 양으로 기상청은 호우주의보를 발령했다.
부우웅!
차가 지하 주차장을 빠져나왔다.
벅!
버버어!
와이퍼가 쏟아지는 빗물을 쓸어 내린다.
신호가 바뀌자 검은색 승용차가 빗속으로 달려간다.
비에 흠뻑 젖은 차가 아파트 주차장으로 들어섰다.
주차장은 비 맞은 차량들 출입으로 바닥에 물이 흥건했는데 지하 1층은 만차다.
어쩔 수 없이 한 층을 더 내려갔다.
지하 2층도 자리가 쉽게 눈에 보이지 않는다.
2층을 쭈욱 한 바퀴 돌던 정철산의 눈에 구석진 곳 공간 하나가 들어왔다.
차를 앞으로 지나쳐 세웠다가 후진으로 정확히 집어넣고 시동을 껐다.
딸칵!
운전석 문이 열리는 순간 바깥에서 누군가가 잡아당겼다.
그리고 운전석에서 나오려는 정철산을 조수석으로 사정없이 밀어 버린다.
빠악!
정철산이 본능적으로 저항하려 들자 구둣발로 찍어 버린다.
덜컹!
그때 뒷문이 열리고 다른 사내 하나가 올라탔다.
부우웅!
정철산의 몸이 조수석 쪽으로 반쯤 걸친 채 차는 다시 시동을 걸어 아파트 주차장을 빠져나갔다.
부우웅!
지하 2층 주차장을 빠져나가는 차량을 보며 누군가 전화를 건다.
“작전이 벌어진 모양입니다. 알겠습니다.”
빼곡하게 주차된 차량들 중 검은색 SUV 한 대가 재빨리 사라진 정철산의 차량을 따라나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