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나는 재벌집 청소부-116화 (116/122)

116화 죽음의 내로남불(2)

유태수가 빠르게 묻는다.

“보호자는?”

“일단 제가 보증했습니다.”

“잘하셨습니다.”

문득 유태수가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깊은 밤 병원 주차장은 한적했고 뭔가를 발견한 듯 한 곳을 향해 걸어가기 시작했다.

병원 입구 왼쪽으로 벤치가 하나 있다.

유태수는 벤치에 앉아 말보로 레드를 꺼내 피워 물었다.

“차 과장, 가서 커피 좀 사 오지.”

“예, 사장님!”

차만대가 병원 바깥으로 걸어 나갔다.

잠시 담배를 피우는 유태수를 바라보던 백기만이 입을 열어 상황을 설명하기 시작했다.

오래전 유태수가 갑자기 가정 문제 상담소를 찾아왔다.

항상 시킬 일이나 할 얘기가 있으면 자신을 부르거나 전화를 하는데 직접 나타나자 백기만은 깜짝 놀랐다.

또한 사무실을 찾아왔다는 건 아주 중요한 비즈니스가 있다는 것을 의미했다.

“박소봉 말입니다.”

자신을 깔아뭉갠 관광차 운전사다.

당시 유태수의 차량을 운전했던 대리기사는 그 사고로 현장에서 즉사했다.

나중에 유가족과 합의가 잘 이뤄져 박소봉은 집행유예로 풀려났는데 이후가 문제였다.

심지어 배달부로 변장을 하여 경찰서 유치장까지 들어가 위협했지만 박소봉은 옴짝달싹하지 않았다.

그건 큰돈을 받았음을 반증하기도 했다.

의외로 박소봉은 강단이 있었다.

“아무튼 나라는 사람이 죽어야 하는데 죽지 않았습니다. 그럼 그들이 취할 수 있는 추후 조치는 뭘까요?”

백기만은 강력계 형사 출신답게 금방 상황을 읽었다.

“박소봉이군요.”

“맞습니다. 일은 성공하지도 못하고 돈만 지불했죠. 더욱이 박소봉이 죽는 그 날까지 입을 닫는다는 보장도 없고.”

그날 이후부터 박소봉에 대한 감시에 들어갔다.

처음에는 잘못 짚었나 했다.

시간이 오래 지나갔지만 박소봉을 향한 어떤 움직임도 없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형사 출신들에게는 그들만의 촉(觸)이라는 것이 있다.

반드시 일은 벌어진다.

다만 혹시 경찰의 감시를 의식해 박소봉에 대한 모든 경계가 느슨해질 때를 기다릴 가능성이 크다.

백기만의 예측은 맞았다.

오늘 밤 경기도 양주에서 일을 보고 돌아오던 박소봉의 승용차가 맞은편에서 달려오던 25톤 덤프와 충돌하고 말았다.

살인멸구(殺人滅口).

죽여 입을 막는다.

“커피 드시죠!”

차만대가 일회용 컵에 담긴 커피잔을 내놓았다.

“차 과장님, 잘 마시겠습니다.”

유태수는 일부러 목소리를 높였는데 차만대가 빙긋 웃었다.

회광반조는 무협 속의 이야기만은 아니었다.

지금 박소봉이 회광반조 현상을 보이고 있었다.

눈을 뜨고 올려다보는데 면전에 유태수의 얼굴이 있다.

“날 알겠소?”

박소봉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건 정신이 분명하게 돌아왔다는 뜻이다.

“당신은 배신당했습니다. 입을 봉하기 위해 어젯밤 친 것이죠.”

“압니다. 나에게도 느……낌이라는 것이 있고.”

그렇다면 얘기하기가 훨씬 수월해진다.

“누가 지시했는지? 얼마를 받았고 어떤 식으로 돈은 전달됐는지 말해 줄 수 있습니까?”

“씨…… 씨이발. 내가 뒤통수 맞고는 못 살지.”

박소봉은 느릿하지만 또렷하게 말을 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17분 후 그는 조용히 숨을 거두었다.

탁!

아침 일찍 병원장과 수술을 맡았던 의사 앞으로 누런 오만 원권 뭉치가 수북이 쌓였다.

“오억씩입니다. 모자라면 더 드리고?”

“아…… 아닙니다. 충분합니다.”

통이 커도 너무 크면 받는 쪽이 오히려 당황하는 법이었다.

데브그루 고문변호사 강석수가 서류를 살피고 있었다.

맞은편에는 유태수가 앉아 커피를 마시고 있었다.

한참 동안 서류를 살피던 강석수가 고개를 들어 빙긋 웃었다.

“지은 죄의 모든 형량을 합산하여 내리는 우리 형법 체계가 아니지만 이 정도의 기록이면 못해도 7년 이상의 징역은 받을 듯싶습니다.”

기천수가 자신에게 가한 범죄 기록이다.

교통사고에서부터 시작해 채석교와 배문덕을 보내 죽이려 했던 일, 집으로 보낸 다섯 칼잡이와 자신을 노린 건 아니지만 보름 전 정철산을 노렸던 것도 기천수가 관여했다.

그리고 박소봉을 없애 살인멸구를 시도했던 것까지다.

“우리 법이 아무리 개판이라고 해도 7년은 짧고 10년은 썩어야 할 것 같습니다.”

모든 기록을 차분하게 정리한 건 이유가 있어서다.

***

차가 멈추고 기천수가 내리자 세 명의 사내들 허리가 완전히 수직으로 굽혀진다.

“형님!”

셋 중 맨 앞에선 사내가 기천수 옆으로 붙어선다.

지배인 장영철이다.

“어딨어?”

“VIP실에 있습니다.”

이곳은 블랙 패밀리다.

정영길이 운영하던 룸살롱으로 도박 빚 대신 기천수가 빼앗은 곳이었다.

“뭐 하는 놈입니까?”

기천수가 묻는 장영철을 바라본다.

움찔!

기천수가 바라보자 장영철은 아차 한 듯 긴장했다.

피식!

하지만 기천수는 이내 미소를 지었다.

“들어가자!”

사내들은 기천수를 따라 가게 안으로 사라졌다.

엘리샤는 조심스럽게 두 손으로 술을 따랐다.

처음 본 남자다.

나이는 많아야 서른 중반을 넘기지 않았을 것 같았다.

VIP 룸은 술값이 방값이다.

술값이 오백만 원 나오면 방값을 포함해 천만 원을 계산한다.

물론 모든 시설은 풀로 갖추어져 있다.

샤워실에서 침대까지 완벽하다.

어쨌든 이 남자는 이상하다.

돈이 있어 VIP일 뿐 이 방을 찾은 사내들에게는 한 가지 공통점이 있다.

하수구보다 더 지저분하다는 것이었다.

여자를 물건 취급한다.

자신들 취향대로 여자를 다루고 주무른다.

그런데 이 남자는 아직 자신에게 농담 한마디 던지지 않았다.

- 엘리샤, VIP 방 들어가.

이런 곳의 여자들에게는 등급이 있다.

자신은 에이 플러스(A+)다.

에이 플러스는 학력, 미모 모든 면에서 탁월해야 한다.

그러다 보니 상대하는 손님들도 사회 고위급들이 대부분이다.

누군가 싶어 들어왔는데 한 번도 보지 못하고 이런 곳에서 볼 수 있는 남자는 아닌 듯 보인다.

“무엇 하시는 분이시죠?”

“전직 용병입니다.”

“용병이 뭔데요? 혹시 돈 받고 전쟁을 대신해주는 그런?”

유태수의 눈이 빛난다.

용병은 의사 변호사 검사가 아니다.

즉 여자들이 잘 모르는 직업인데 알아차리자 눈을 크게 뜬 것이다.

“혼자 오셨어요? 이제 아무도 안 오는 거예요?”

똑똑!

바로 그 순간 노크 소리가 들리며 문이 열렸다.

기천수가 들어서자 엘리샤는 깜짝 놀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기천수를 모르랴.

그는 이곳 사장이기도 하지만 뒷골목에서는 거물 중의 거물이다.

“바쁘실 텐데…….”

“아닙니다. 엘리샤, 좀 나가 있지.”

엘리샤는 고개를 꾸벅 숙이고 밖으로 나갔다.

탁!

문이 닫히자 유태수가 술병을 들어 올렸다.

“아니, 제가.”

“일단 받으시죠.”

어쩔 수 없다는 듯 기천수는 두 손으로 양주를 받는다.

스윽!

유태수는 채워진 자신의 잔을 들어 건배 시늉을 하며 단숨에 마신다.

기천수는 기다렸다는 듯 재빨리 빈 유태수 잔에 술을 채우고 자신의 잔까지 가득 따른다.

촤락!

조그만 가방에서 서류 봉투 하나를 꺼내 준다.

“보세요!”

이게 뭐냐는 듯 바라보는 기천수를 향해 읽어 보라고 했다.

기천수는 봉투 안에 든 서류를 꺼내 펼치더니 흠칫했다.

그러나 이내 평정을 찾고서 차분하게 서류의 내용을 읽기 시작했다.

“아무리 이빨 좋은 변호사를 선임해도 7년에서 10년은 각오해야 할 것이라더군요.”

서류를 읽던 기천수가 고개를 들었다.

“뉴욕의 대표적인 마피아 가문 중 한 곳인 갬비노 패밀리의 두목 존 고티가 FBI에 체포되어 법정에 섰습니다. 두목이 자리를 비운 것이죠.”

팔랑!

기천수는 읽던 서류를 놓는다.

“알다시피 존 고티는 시카고 마피아 두목 알 카포네 이후 최고의 마피아 보스로 불리는 인물이죠. 그가 감형 없는 종신형을 언도받자 사람들의 관심은 과연 그의 아들인 조 고티

주니어가 제대로 갬비노 패밀리를 이끌어갈까 흥미롭게 지켜봤습니다.”

쭈욱!

목이 타는지 기천수가 술을 비운다.

“겉으로는 존 고티 주니어가 갬비노 패밀리를 잘 이끌어가는 듯 보였지만 내부에서는 엄청난 숙청이 벌어지고 있었죠. 존 고티 주니어를 허수아비로 만들기 위해 아버지 존 고티의

충복들을 제거하기 시작했고 아들의 사람들도 납치되거나 거리에서 시체로 발견되었습니다.”

마피아는 지구상에서 가장 차가운 법으로 뭉친 조직으로 알려진다.

하지만 강력한 누군가가 자리를 비우면 새로운 인물이 그 자리를 채우기 위해 무자비한 숙청이 시작된다.

기천수는 왜 갑자기 마피아 얘기를 꺼내는지 모르겠다는 듯 유태수를 바라보았다.

“조금 전 내가 7년에서 10년을 말했죠. 기 사장님께서 아무리 동생들을 끔찍하게 챙기고 윗사람들에게 처세를 잘한다고 해도 그 시간 동안 자리를 비우면 어떻게 될 것 같습니까?”

출렁!

들어 올린 술잔이 흔들거리더니 술이 쏟아졌다.

기천수는 튀어나올 것 같은 눈으로 유태수를 바라보았다.

“다…… 당신.”

유태수가 빙긋 웃는다.

“강력한 카리스마를 가진 두목일지라도 오랫동안 교도소 생활을 하게 되면 아랫사람들의 충성심은 예전만 못하죠. 하물며 중간 간부 정도의 인물이라면 밑에 애들이 기다렸다는 듯 치고

올라와 밟을 것이고.”

기천수는 중간 간부다.

인체로 말하면 허리.

그중 가장 힘 있는 중간 간부인데 임원진으로 올라갈 날이 얼마 남지 않았다.

탁!

유태수는 술잔을 비우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오래 기다리지 못합니다.”

유태수는 문을 향해 걸어갔다.

기천수의 안색이 수시로 변한다.

뭔가 걸어가는 유태수에게 할 말이 있는 듯 보였다.

해라.

지금 아니면 기회가 없다.

머릿속에서 누군가 외친다.

“나도 오래 기다리지 못하겠습니다.”

유태수는 몸을 돌려 앉아 있는 기천수를 바라보았다.

“가장 절실한 건 내 가족의 안전입니다.”

“배문덕을 아시죠? 여동생과 같이 미국으로 떠났는데 그는 지금 마이애미에서 생선 도매상을 하며 아주 편하게 살고 있죠.”

유태수 자신을 죽이라고 채석교와 왔던 부하다.

채석교는 죽었고 그는 여동생과 감쪽같이 미국으로 떠나 버린 것이다.

“내일 당장 보내 달라고 하면 그렇게 해 드리죠.”

기천수가 놀란다.

미국이 어떤 나라인가.

9.11테러 이후 입국자에 대한 심사는 더욱 강화되었다.

우리만 동맹 혈맹 운운할 뿐 그들은 한국인을 특별하게 대우하지 않는다.

입국 목적이 분명하지 않으면 미국 땅 밟기 힘들다.

더욱이 거기서 주저앉아야 한다면 심사는 더욱 까다로워진다.

“일주일 안으로 보내주시죠.”

“그러죠!”

유태수는 웃으며 방을 나갔다.

지배인 장영철의 눈이 빛났다.

“그게 사실이야?”

앞에는 엘리샤가 있다.

빈손으로 나왔다.

VIP 룸은 공짜가 없다.

그냥 들어갔다 바로 나와도 기본이 30만 원이다.

같이 앉아 30여 분 말벗이 되기까지 했으니 족히 50만 원은 받아야 한다.

손님이 주지 않으면 사장이나 지배인이 직접 얘기를 하여 받아 준다.

가게에서 대신 주는 건 절대 없다.

그건 규정이고 변치 않는 이 바닥의 룰이다.

그래서 지금 엘리샤는 흥분해 고자질하듯 떠들고 있고 듣는 장영철의 눈이 부지런히 좌우로 움직인다.

뭔가 계산을 하는 것이 분명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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