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나는 재벌집 청소부-117화 (117/122)

117화 멸문지화(1)

삶은 선택이라고들 한다.

어떤 선택을 하느냐에 따라 삶이 달라지는 것 또한 사실이다.

아직까지는 자신의 선택이 실패했다고 규정하고 싶지는 않았다.

중고등학교 시절부터 싸움은 타고난 듯 잘했고 이른바 친구들 사이에서 자연스럽게 우두머리 노릇을 했었다.

또한 힘으로 해결이 되는 뒷골목 생활 역시 잘 맞은 옷처럼 몸에 맞았다.

그럭저럭 두뇌 회전도 좋아 태극동지회 중간 간부까지 올라왔으니 이 바닥에서는 성공한 인생이다.

하지만 진짜 성공은 지금부터다.

백 명의 중간 간부 중 임원급으로 올라가는 사람은 채 열 명이 안 된다.

나머지는 그렇게 주저앉거나 아니면 밑의 후배들에게 발리고 밟히며 사라진다.

쭈욱!

집에서 마시는 술이 얼마 만인지 모른다.

진열장에서 마개 한번 따지 않은 야마자키(Yamazaki)를 절반가량 비운다.

야쿠자 간부가 선물해준 일본 최고의 위스키다.

딸칵!

자신의 서재에서 마시는데 갑자기 문이 열리고 잠옷 차림의 아내 가희경이 들어선다.

“여보!”

기천수는 깜짝 놀란다.

벽시계는 새벽 3시 30분이다.

요즘 전시회 준비하느라 바쁜 아내인데 아직 일어날 시간이 아니다.

“벌써 일어난 건 아닐 테고?”

“별일이네. 이 늦은 시간에 혼자서 술을 마시다니, 당신 집에서는 술 안 마시잖아.”

“오늘따라 갑자기 술 생각이 나서 말이야.”

어색하게 웃는다.

아내가 다시 돌아나갔다.

그리고 잠시 후 다시 들어오는데 손에 술잔이 들려 있었다.

“나도 한 잔 줘봐.”

술잔을 내미는 아내를 보며 기천수의 눈이 커진다.

아내가 술 마시는 걸 본 적이 없다.

“한 잔 줘. 설마 비싼 술이라고 마누라 주는 것도 아까워?”

기천수는 아무 말 않고 술병을 들어 아내가 내미는 잔에 따라 주었다.

아내는 코끝으로 술 냄새를 맡더니 눈을 살며시 감았다.

“으음! 향기 좋다.”

그러더니 찔끔 입술에 대고 맛을 보았다.

쩝쩝 소리를 내며 맛을 보더니 눈이 커졌다.

“장난 아니다. 이거 술 맞아?”

이번에는 조그만 양주잔에 담긴 술을 절반 정도 마시고 다시 고개를 들어 놀란다.

“기가 막혀. 독하다고 들었는데도 왜 이렇게 부드럽게 넘어가는 거야.”

“고급술은 그래서 다르다는 것 아니겠어.”

쭉!

나머지는 비우더니 또다시 잔을 내밀었다.

“한 잔 더 줘봐.”

“와인 마시듯 하다가는 큰일 나.”

“얼른 줘.”

기천수는 아내의 잔에 다시 술을 따라준다.

“요즘 일이 잘 안되나 봐?”

“아냐. 그게 아니고.”

“여보, 언제까지 내가 모를 것이라고 생각했어. 나 당신 평범한 사업가 아닌 거 알아. 한국판 마피아로 불리는 태극동지회 간부라는 것 알고 있어.”

팍!

기천수는 들고 있던 술잔을 떨어뜨렸다.

“그 정도 말에 술잔까지 떨어뜨리냐. 저런 새가슴으로 무슨.”

아내는 눈을 흘기더니 꼼짝 말고 그대로 서 있으라고 해 놓고 바깥으로 나갔다.

잠시 후 쓰레기통과 휴지를 가져와 엎질러진 물과 유리 파편을 깨끗하게 줍고 닦아 낸다.

“남편이 그런 집단에서 돈을 벌어오는데 내가 모른 체 할 수 있겠어. 나름대로 좀 알아봤는데 정말 무섭긴 하데.”

“당신이 알고 있었다니…….”

바닥을 깨끗이 청소하고 허리를 세운 아내는 자신의 잔에 담긴 술을 조금 마셨다.

“마음대로 해. 나와 철무 신경 쓰지 말고, 혹시라도 우리가 걸리적거린다면 피해 줄 용의도 있어.”

“그런 말이 어딨어?”

“말해봐. 이 시간까지 잠을 못 자고 술을 마시는 이유가 뭔데?”

기천수는 다시 가져다준 새 잔에 술을 채우고 느릿하게 입을 열었다.

어둠을 이용해 골목을 걸어오는 사내들이 있었다.

평소 환하게 밝히던 가로등이 오늘따라 모두 꺼졌고 캄캄하여 근거리에서 확인하기 전에는 얼굴 모양을 알 수 없다.

쭈욱 이어지는 골목 좌우의 담장을 따라 걸어가던 사내들의 걸음이 멈춘다.

“여깁니다.”

“확실해?”

우두머리 사내가 재차 묻는다.

사내들은 모두 다섯이다.

뚝!

우두머리 사내의 시선이 대문 앞에 세워진 CCTV를 바라본다.

“찍히지 않게 조심해.”

사내들은 어느새 눈만 나오는 털모자를 뒤집어썼다.

철컥!

대문 열리는 소리가 들리고 다섯 명 모두가 안으로 들어갔다.

맨 뒤에 걸어 들어가는 사내가 흘끗 2층을 본다.

마당 안쪽으로 이층 단독이 있는데 1층은 불이 꺼져 있고 2층 오른쪽 창문에 불빛이 보인다.

“좋은 곳에서 사는군. 하긴 형님 정도면 이런 곳에서 살 자격이 있지.”

철컥!

막힘이 없다.

잠긴 현관문도 허망하게 사내들 손에 열린다.

사내들 손에는 어느새 시퍼런 사시미 칼이 쥐어져 있었고 일제히 안으로 들어갔다.

딸칵!

우두머리 사내는 안으로 들어가지 않고 담배를 피워물었다.

잘 단장된 마당을 둘러보다 커다란 단풍나무 아래 있는 벤치를 발견하고 걸어간다.

털썩!

벤치에 앉아 담배를 피우는 장영철은 우당탕 소리가 들리는 2층을 흘끗 바라보았다.

자고 있는 아들 기철무 목에 날 선 회칼이 붙어 있다.

“아들놈 숨통 끊는 것 보기 싫으면 조용히 갑시다.”

“안돼! 내 아들.”

가희경이 자지러지며 달려들자 옆에 있는 사내가 발로 복부를 찍어 버린다.

“씨발년!”

“악!”

가희경은 비명을 지르며 그대로 고꾸라졌다.

“엄마!”

“처, 철무야!”

가희경은 필사적으로 일어나려고 했지만 몸이 말을 듣지 않는 듯 온몸을 부르르 떨었다.

갑작스런 습격이다.

조금도 예상하지 못했기에 기천수는 오히려 멍한 표정이 되어 버렸다.

“안 되겠다. 마누라와 새끼 둘 중 누구 한 명 가지치기를 해야 정신을 차릴 모양이다.”

가지치기란 사지 중 하나를 자른다는 뜻이다.

“누가 보냈냐?”

기천수가 잇새로 물었다.

“그걸 지금 질문이라고 하는 것입니까? 갑시다. 좋게 말할 때.”

“가지. 대신 아들과 집사람은 놔줘라.”

“좆 까는 소리 하고 있네.”

빠아악!

일어나려는 가희경의 얼굴을 다시 한번 구둣발로 차버린다.

그녀가 쿵 소리를 내며 나동그라졌고 두 사내가 동시에 기천수에게 달려들었다.

푹!

슈악!

칼이 들어온다.

하지만 기천수는 피하거나 반격하지 않았다.

지금 들어오는 칼은 무조건 받아야 한다.

피하면 칼끝이 아들과 아내를 향할 것이다.

“끅!”

기천수는 비명을 지르며 무너져 내렸다.

“어서 가자!”

사내들은 준비를 치밀하게 한 것처럼 보였다.

마취제가 묻은 손수건으로 세 사람의 입을 가렸다.

순간 20여 초가 채 지나지 않아 셋 모두 푹 늘어졌다.

***

유태수는 자리에서 일어나 대문 앞에 배달된 조간신문을 펼쳐 들었다.

「이건 계획적인 데브그루의 사냥이다.」

섬뜩할 만큼 타이틀 기사가 시선을 채운다.

1면 머리기사로 태천건설을 향한 외국계 투기자본 데브그루의 인수합병 시도에 관한 기사가 실렸다.

유태수는 차분한 시선으로 보고 기사를 읽었다.

‘국부 유출.’

걸핏하면 한국 언론에 등장하는 자극적인 단어다.

재벌 총수 일가가 적은 지분으로 기업을 넘어 그룹 전체를 지배하는 한국식 기업구조에 대한 문제점이나 비판은 찾아볼 수가 없다.

재벌 총수가 경영권을 승계시키는 과정에서 다양한 불법, 편법적인 문제가 야기되고 있는 것에는 침묵한다.

작은 계열사 등에 총수 일가 2, 3세 지분을 몰아주고 일감 몰아주기 등으로 기업 규모를 키운다.

그리고 합병 등을 통해 일감 몰아주기 규제를 회피하는 방식은 편법적 경영권 승계를 위한 정형화된 공식이 된 한국 재벌 문화에 대해서는 입도 벙긋 않는다.

‘전형적인 아버지의 수법.’

돈으로 언론을 휘어잡고 양 손아귀에 들어온 그들을 동원해 필사적으로 홍보하고 두둔을 당하며 국민 정서를 자극한다.

‘하긴 그 아버지에 그 아들이니.’

피식!

유태수는 웃었다.

‘법대로!’

태천그룹은 불법 탈법을 자양분 삼아 성장했지만 자신은 합법이라는 토대 위에 건물을 짓고 있을 뿐이다.

지이잉!

전화가 왔다.

송만술이라는 이름이 찍혀 있었다.

[아침은?]

“아직.”

[신문 봤어?]

“지금 막!”

[우릴 너무 까는데, 벌떼처럼 달려들어 할퀴고 물어뜯어.]

“뺏기지 않으려니 언론을 이용한 공격을 해대겠지. 유씨 집안의 특기야.”

[유씨 집안.]

뉘앙스가 묘하게 들린 모양이다.

“아마 지구상에서 똥 묻은 개가 겨 묻은 개를 가장 잘 나무라는 곳이 그 집안이야. 웃긴다고.”

[네가 그걸 어떻게 알아?]

유태수는 움찔했지만 미소를 지었다.

“내가 적도 모르고 싸우는 줄로 아는 건 아니지?”

유태수는 강하게 받아치며 송만술의 의심을 완전히 날려 버리려 했다.

“언론 신경 쓰지 말고 주총 준비나 잘하라고.”

[오케이!]

송만술이 전화를 끊었다.

잠시 핸드폰을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이제는 아주 깊게 낌새는 잡은 모양인데.”

고주식과 달리 눈치가 워낙 빠르다.

상대 마음을 관통하는 독심술 같은 안목이 대단한 송만술이다.

송만술을 중요한 비즈니스에 대동하거나 같이 가는 이유 또한 그런 놀라운 장점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지이잉!

밥을 하기 위해 일어서려는데 또다시 전화가 울린다.

낯선 번호다.

잠시 울리는 핸드폰을 내려다보던 유태수는 통화를 해보기로 마음먹는다.

“여보세요!”

[데이브?]

여자다.

“누구십니까?”

[안녕하세요. 이화진입니다.]

이화진이라는 말에 언뜻 떠올리지 못하고 이마를 찡그렸다.

물론 이름이 귀에 익기는 했다.

[이병악 회장.]

“아아!”

유태수는 그제서야 놀란 표정을 했다.

- 열 사내놈과 안 바꿔.

이화진에 대한 아버지 이병악의 평가다.

고전을 하던 타임스퀘어 호텔을 맡은 지 3년 만에 흑자로 돌려놨고 이제는 태천의 더 원 팰리스를 추월한 국내 1등 호텔이다.

[오늘 시간을 내주셨으면 하고요.]

불쑥 전화를 걸어 시간을 내달라는 부탁도 아닌 요구를 한다.

무례한 행동이 틀림없지만 화가 나거나 하지는 않았다.

여자이기 때문에 화가 나지 않는 것이 아니다.

직설적이다.

대부분의 비즈니스는 두 가지 방식으로 이뤄진다.

질질 시간을 끌고 상대와 밀당을 해가면서 끈기 있게 상대가 지치길 기다린다.

또 하나는 정면공격이다.

자신이 제안할 수 있는 조건을 분명하게 말하고 상대의 동의를 얻는다.

시간을 끌며 한 푼이라도 깎아 보겠다는 식의 비즈니스는 이제 구시대의 유물이다.

21세기 비즈니스는 숨기지 않는다.

자신이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가감 없이 드러낸다.

그렇다고 오장육부까지 보여줄 건 없지만 최대한 신의와 사실을 토대로 이뤄진다.

이화진에게서 그런 신선함을 느낀 것이다.

유태수는 저녁 약속을 한 뒤 곧장 밥솥에 쌀을 안쳤다.

미국 대사관에서 연락이 왔다.

기철무와 가희경의 비자가 나왔고 미국으로의 출국 준비가 완벽하게 끝났다는 얘기였다.

어젯밤에 전화를 했는데 다음 날 점심시간이 채 되지 않아 완성 보고를 받은 것이다.

알았다면서 전화를 끊은 유태수는 야릇하게 웃었다.

태극동지회와 태천그룹은 깊이 묶여 있다.

태극동지회는 무력을 제공했고 태천그룹은 그들에게 양지에서의 번영을 약속하며 둘은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며 승승장구한 것이다.

[오랜만일세.]

전화가 걸려 왔고 탁한 목소리가 들린다.

“사이먼!”

CIA 중동 지역 책임자 사이먼이었다.

[목소리가 좋네.]

“다행이군요.”

두 사람은 웃으면서 서로의 안부를 묻고 가벼운 농담도 주고받았다.

[어제 튀르키예에서 연락이 왔네.]

한참 얘기를 나누던 중 사이먼이 화제를 바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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