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8화 멸문지화(2)
[둘 모두를 주저앉혔다는군.]
“다행이군요. 그런데 요단강을 건넌 것입니까?”
완전히 죽여 없앴냐는 질문이다.
[그렇지 않네. 이스라엘과 아메리카 합중국의 관계가 있는 만큼 적당히 공포를 주고 우리의 뜻을 전달했지. 병원에 입원했는데 진단이 10주 나왔다네.]
“그렇군요.”
이스라엘과 미국의 뗄 수 없는 관계 속에서 두 명의 이스라엘 민간인이 튀르키예에서 교통사고로 죽는다면 그냥 넘어가지는 않을 것이다.
당장은 유야무야 넘어가도 모사드라는 천재들의 집단을 두고 있는 만큼 언젠가는 랭글리의 작품이었다는 걸 알게 된다.
그렇게 되면 양국 사이가 다소 시끄러워질 것이다.
텔아비브에서 출발하여 튀르키예를 경유한 뒤 인천공항에 도착하는 것이 교통사고를 당한 두 사내의 비행경로다.
하지만 CIA에서 한국으로 들어가지 못하게 발을 묶었다.
두 사내는 태천미술관 방범 시스템을 한 단계 업그레이드시키려는 기술자들인데 유태수에 의해 저지당한 것이다.
딸칵!
유태수는 담배를 피워 물고 창문을 열었다.
천장의 환풍기까지 돌려놓고 느긋하게 담배를 피운다.
말보로 레드를 절반쯤 피웠을 때 탁자 위에 올려놓은 핸드폰이 또다시 울린다.
오늘따라 전화기가 바쁘다.
흠칫!
액정을 보던 유태수가 놀란다.
「K」
곽(Kwak)의 약자다.
곽철종이 전화를 걸어 온 것이다.
***
오후 1시.
한강 고수부지는 평화롭다.
두 사내가 강바람을 맞으며 자전거를 타고 있었다.
둘 모두 정장을 했고 머리에만 헬멧을 썼는데 유태수와 곽철종이었다.
앉아 있으면 누군가에게 감시당하기 십상이다.
움직이는 대중 교통수단도 안전을 장담할 수는 없고 결국 한강을 따라 달리는 자전거가 가장 분명한 감시 바깥 지역이라고 판단 한 것이다.
끼이익!
갑자기 유태수가 브레이크를 잡고 멈췄다.
“지금 뭐라고 했죠?”
“무기요.”
“군사 무기?”
“아직 무기의 종류까지는 알아내지 못했습니다. 다만 엔(N)으로 보입니다.”
엔(N)이란 말에 유태수의 눈이 커진다.
“뉴클리어 웨폰(Nuclear Weapon: 핵무기)?”
“아직 분명하지는 않습니다.”
대한민국은 핵확산금지조약(Non Proliferation Treaty:NPT)에 가입한 나라다.
핵확산금지조약은 핵무기의 무분별한 생산과 사용을 막기 위해 유엔에서 결의했다.
기존 핵 보유국(미국, 영국, 러시아, 프랑스, 중국, 영국)은 핵 비보유국에 핵을 빌려줘서도 안 되고 금지조약에 가입한 비핵국가는 생산을 해도 안된다.
최소한 이 강력한 규제가 20세기 말까지는 통했다.
하지만 국제감시를 피해 쫓고 쫓기는 개발은 필사적으로 진행되었고 인도와 파키스탄 이스라엘과 북한은 어느덧 핵 보유국으로 인정 아닌 인정을 받는 상황이 되어버렸다.
그러므로 인해 가장 위협에 처한 나라가 대한민국이다.
유일한 분단국가로 경제력에서 북한은 남한에게 비교가 되지 않는다.
이것저것 통계를 따져봐도 대략 40배 가까운 차이가 난다는 것이 일반적이다.
하지만 핵무기는 경제력과 또 다르다.
최소한 동귀어진의 무기인 것이다.
잘사는 남한이 개판인 북한과 같이 죽을 수는 없는 것이다.
똥이 무서워 피하는 것이 아니다.
참는 것도 한계가 있다고 말하지만 북한의 도발만큼은 한도 끝도 없이 참아야 한다는 것이 남한의 딜레마다.
사람 목숨의 가치를 비교할 수 없지만 뼈 빠지게 일해 오늘날의 부를 이룬 남한 사람들에게 전쟁으로 인해 모든 걸 잃는다는 건 미치도록 억울할 일이었다.
더 이상 미국의 우산 아래 살아갈 수는 없다.
미국이 우산 좀 씌워주고 가져간 것이 도대체 얼마나 되는지 모른다.
이제 내 살길 내가 찾아야 한다.
그래서 제5의 과일 프로젝트가 진행되었다는 것이 곽철종의 설명이다.
물론 정확하지는 않다고 전제했지만 만약 사실이라면 한국과 미국, 한국일 일본, 한국과 중국 사이에 심각한 균열이 일어날 수 있다.
두 사람은 자전거를 세워 놓고 길가 벤치에 앉아 얘길 이어갔다.
‘핵.’
개발인지 아닌지 백 퍼센트 분명치는 않지만 제5의 과일은 핵과 관련된 것이라는 사실을 다시 한번 강조한다.
사무실로 돌아온 유태수는 잔뜩 이마를 찡그리고 있었다.
북한은 핵확산금지조약 NPT를 탈퇴하고 본격적인 핵 개발에 들어갔다.
핵 개발은 김일성 시대 때부터 시작되었다.
소련 연방이 해체되고 미국에 대항하던 국가들이 하나둘 소멸하기 시작했다.
쿠웨이트를 침공했던 이라크는 미국을 중심으로 뭉친 34개 다국적군에게 백기 투항을 하며 철수한다.
말이 다국적군이지 미군 중심의 일사불란한 전쟁이었다.
믿은 소련 연방이 해체되고 미국의 무서움을 직접 목도한 김일성으로서는 언제든지 타깃이 될 것을 인지한다.
살길은 오직 하나, 핵무기다.
최소한 미국의 공격은 받지 않는다.
김일성이 죽고 얼마 지나지 않아 리비아 국가원수 카다피가 미국의 배후 조종으로 의심되는 시위대에게 잡혀 즉결 처형됐다.
부친 김일성의 유지를 받은 김정일은 그걸 보며 더욱 주먹을 말아쥔다.
핵만이 살길이다.
북한의 핵 개발은 엄청난 주민들의 고통으로 들이닥친다.
유엔 차원의 국제적 제재가 가해지면서 북한 경제가 풍비박산이 나기 시작한 것이다.
거기에 혹독한 가뭄이 이어지면서 아사자, 특히 아이들은 직격탄을 맞는다.
국제 인도주의 단체들이 먹는 것만이라도 해결해 주어야 한다고 동분서주하며 유엔에 하소연했지만 돌아오는 반응은 냉담했다.
핵 개발을 당장 포기하면 충분한 경제적 지원을 하겠다는 유엔의 설명에도 북한은 요지부동이었다.
어쨌든 지금은 비공식 핵보유국이 되었다.
머리 위에 핵을 이고 사는 꼴인 남한이 불안할 수밖에 없는 이유다.
‘하지만.’
그렇다고 개발에 들어간다는 건 굉장한 위험을 동반한다.
이미 고기 맛을 알아버린 사람들이다.
핵 개발 사실이 알려지면 남한 역시 국제적 제재를 피할 수 없고 자원생산 없이 물건 팔아 사는 입장에서 국민 1인당 소득 40,000달러는 한순간에 사라질 것이다.
거지는 사는 것이 아니라 버텨왔기 때문에 지옥 속에서도 생존력이 높다.
하지만 부자는 그렇지 못하다.
조금만 고통스럽고 배가 고파도 참지 못한다.
유엔의 경제제재를 남한 사람들이 견딜 수 있을까.
‘힘들어도 참아 보자.’
할 수 있을까.
절대 안 된다.
그러므로 핵 개발이 그렇게 간단한 것이 아니다.
어쨌든 고민이다.
곽철종은 아직 분명치는 않다고 했다.
유태수는 일단 상황을 좀 더 지켜보기로 했다.
분명한 사실 하나는 대한민국은 태천그룹이 아니라는 것이다.
국가가 개발하지 않고 민간기업이 하는 이상한 프로젝트 제5의 과일.
그 옛날 중국에는 미인이 되기 위한 몇 가지 조건이 있었다고 했다.
내용을 하나부터 따져보면 오발선빈(烏髮蟬嬪)이라고 하여 검은 머리를 두 갈래로 길게 늘어뜨려야 한다.
오늘날로 해석하면 윤기 나는 검은 머리를 의미할 것이다.
두 번째 조건으로 아미청대(蛾眉靑黛)라고 했다.
아미청대는 눈썹이 누에나방처럼 예쁘고 검푸른색을 띠어야 한다는 건데 글쎄, 요즘 이런 눈썹을 갖고 있다면 분명 사람들이 다시 한번 쳐다볼 것이다.
세 번째가 명모류반(明眸流盼).
눈은 크고 반짝이며 항상 눈웃음을 머금어야 한다.
눈이 크고 반짝이는 건 좋다.
그런데 눈웃음을 머금어야 한다는 건 마치 기생이 꼬리치는 수작 아닌가.
입술은 붉고 치아는 희어야 한다는 주순호치(朱脣晧齒)에 대해서는 공감한다.
옥지소비(玉指素臂)는 손가락 끝이 가늘고 뾰족하며 팔은 희어야 한다는 것인데 이 또한 요즘에도 적용된다.
문제는 세요설부(細腰雪膚)다.
허리는 가늘고 피부는 눈처럼 희어야 한다는 건데 가는 허리는 옷을 벗겨보지 않는 이상 확인할 길이 없다.
지금은 패션과 도구를 통해 얼마든지 허리를 가늘게 보이도록 할 수 있기 때문이다.
발은 전족을 하고 작은 버선을 착용해야 한다는 연보소말(蓮步小襪)의 조건은 좀 그렇다.
버선 대신 스타킹이나 양말을 신으면 되지만 전족까지는 아닐 성싶다.
기향패훈(肌香佩薰)이라고 하여 피부에서 훈초를 지닌 듯 향기가 나야 한다는 건데 요즘이야 지천이 향수이니 적당한 것 하나 뿌리면 해결될 일이고 마지막으로 얼굴에는 백분을 바르고
뺨에는 붉은색 화장을 해야 한다는 홍장분식(紅粧粉飾)이다.
이러한 조건을 보면 타고나야 하는 것도 있지만 거의 다가 가꾸는 것들이다.
미인이 되기 위해서는 부지런해야 한다는 건데 눈앞의 여자는 타고난 듯 보인다.
걸치고 있는 옷은 브랜드를 알 수는 없으나 그냥 평범해 보인다.
요즘 화장술의 기본은 떡칠이라는데 아무리 보고 또 봐도 거울 앞에 오래 앉아 있었던 얼굴로는 보이지 않았다.
이병악 회장의 딸 이화진이다.
“한국 사람 맞으세요?”
그녀가 내뱉은 첫마디다.
“예!”
“한국인치고는 굉장한 배짱을 가지셨어요.”
무슨 뜻이냐는 듯 유태수는 바라보았다.
“한국에서 정신이 좀 제대로 박힌 사람은 대기업을 상대로 싸움을 걸지 않아요. 쥐도 막다른 골목에 몰리면 고양이에게 덤벼든다고 하지만 그렇지 않거든요. 고양이에게 덤벼든 쥐
봤어요?”
유태수는 재밌는 질문이다 싶어 살짝 웃었다.
“너 죽고 나 죽자고 달려드는 쥐 봤다는 사람이 있는데 그건 고양이에게 덤비는 것이 아니라 죽기 전 몸부림일 뿐이에요. 애초에 싸울 생각 하지 않아요.”
유태수는 당근 수프 한 숟가락을 떠먹었다.
둘은 식사 중이다.
소고기 안심을 이용한 스테이크에 앞서 나오는 수프다.
“난 덤비는 사람이 좋아요. 무턱대고 덤비는 사람 말구요.”
“이 사장님 논리대로라면 나야말로 무턱대고 덤비는 이판사판의 전형 아닙니까? 대기업을 상대로 싸우는 한국인 없다고 했으니.”
“이사님은 무턱대고 덤비는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철저한 준비를 한 이후에 달려들죠. 그 증거가 손을 댄 것마다 성공을 했다는 것 아니겠어요?”
“손을 댄 것마다?”
“왜 이러세요. 난 이사님이 데브그루의 숨어 있는 지휘자라는 걸 알고 있는데.”
유태수는 아니라고 말하지 않았다.
그렇다고 들켰다는 것에서 오는 표정 변화도 없었다.
살짝 웃는 얼굴을 유지할 뿐이다.
후룩!
남은 수프를 삭삭 긁어 비운다.
‘다르군.’
수프 그릇을 한쪽으로 밀어냈다.
‘이병악 회장이 열 사내와 안 바꾼다고 자랑할 만해.’
메인 요리 스테이크가 나왔다.
오기 전에 알아본 바에 의하면 이곳 스테이크는 미국식이 아닌 프랑스 쪽이라고 했다.
같은 스테이크도 프랑스 쪽은 향이 조금 짙다.
쓰윽!
고기 한 점을 썰어 입에 넣고 씹는다.
쫄깃하다.
언뜻 거칠어 보이긴 한데 그래서인지 씹는 맛이 일품이다.
두 사람은 식사를 하며 얘기를 나누었는데 이화진이 묻고 유태수는 주로 듣기만 했다.
얘기의 주된 내용은 대한민국 재계서열 1, 2위를 차지하고 있는 태천과 삼왕의 미래였다.
이화진은 지금과 같은 황제 경영 방식으로는 급변하는 글로벌 시장에서 살아남을 수 없다고 했다.
계열 분리밖에 없다고 했다.
“많이 거느리는 것이 능사가 아니라 얼마나 단단하고 강하게 다지고 단련하여 살아남느냐죠.”
말에서 차가운 의지가 묻어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