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9화 두 여자(1)
식사가 끝나고도 이화진의 한국 재벌의 폐해와 단점을 짚은 얘기는 이어졌다.
재벌이 가져온 성장의 역할도 무시할 수는 없으나 이제는 덩치보다는 내실을 다지며 알차게 나가야 한다면서 말했다.
“데브그루에 투자하고 싶습니다.”
유태수는 이것이 오늘 밤 만나자고 한 메인 용건이라고 보았다.
“꼭 데브그루여야 합니까?”
“네!”
단호하다.
이화진이 데브그루라고 못 박는 건 나름대로 동서남북 철저히 파헤치고 조사를 했다는 뜻이다.
데브그루 주위에서 떠도는 이름들이 진짜인지 아닌지, 브리지워터 어소시에이츠(Bridgewater Associates) 설립자인 레이 달리오가 정말로 관여하고 있는지, 워렌 버핏이
진짜로 아시아 익스프레스 카드로 다시 태어난 태천카드에 투자를 했는지 마이클 무어와 로버트 설이 제대로 된 헤지펀드 매니저인지 말이다.
헤지펀드 매니저라고 하여 아무나 투자자로 받아 주는 건 아니다.
자신들만의 룰이 있고 가장 중요한 건 투자자의 얼굴(面)이다.
그의 주머니에서 나오는 돈이 범죄자금이라면 결코 투자자로 받아 줄 수는 없다.
투자자의 신원은 비밀에 부치지만 분명한 양지의 돈이라는 것이 증명되어야 한다.
또한 액수가 정해진다.
투자자 모두가 동일한 액수를 투자하지는 않지만 일정한 룰은 적용되는 것이다.
“얼마를 투자할 생각입니까?”
유태수가 물었다.
“미화 10억 달러면 괜찮을까요?”
“으음!”
유태수는 놀랐다.
10억 달러면 한화 1조 2,000억이다.
“설마?”
“맞아요. 내 전 재산입니다.”
전 재산을 몰빵 하겠다는 뜻이다.
재벌가에서 태어난 유태수다.
돈이 많은 재벌들이지만 돈거래만큼은 냉혹할 만큼 분명하다.
형제간의 돈거래는 거의 없다.
만에 하나 있더라도 안전한 채무 회수를 위해 철저한 법적 절차를 진행한다.
만약 데브그루의 투자가 잘못된다면 이화진의 재산 10억 달러는 순식간에 날아간다.
재벌가의 핏줄로 태어났지만 비참한 인생을 살다 떠난 사람이 한둘이 아니다.
사실 투자 역시 도박과 다를 바 없다.
자신의 안목이 잘못되면 망하는 것이고 정확히 예측하고 찍었다면 돈을 버는 것이다.
아흔아홉 명!
데브그루의 투자자 숫자다.
그 이상은 절대 받지 않는다.
99명에 말뚝을 박아 놓고 결원이 생기면 채워 나갈 뿐이다.
유태수는 이화진을 빤히 바라보았다.
10억 달러를 쏟아낸다는 건 돈을 벌겠다는 투자자의 시선임은 분명했다.
해마다 백 퍼센트 이상의 성장세를 보일 만큼 호텔 경영에 뛰어난 수완을 보이고 있는 여자가 전 재산을 펀드에 투자하겠다는 것이다.
투자는 말 그대로 실패하면 알거지가 된다.
‘이 여자야말로 연구 분석 대상이군.’
유태수는 강력한 흡연 욕구를 느꼈다.
차를 골목에 세우고 막 내린 유태수는 뭔가 기억나는 것이 있어 재빨리 핸드폰을 꺼냈다.
대문을 들어가지 않고 번호를 눌렀는데 상대가 받지 않는다.
대문에 열쇠를 꽂으려다 말고 전화를 끊고 다시 누른다.
미국 대사관에서 모든 서류 준비가 끝났다는 말을 기천수에게 전달해주기 위해서다.
갸웃!
세 번을 전화했지만 받지 않는다.
유태수는 다시 한번 저장해둔 기천수의 번호를 눌렀다.
핸드폰을 귀에 대고 있는 유태수의 표정이 점점 딱딱해진다.
이번에는 다른 번호를 눌렀다.
[예, 사장님!]
가정 문제 상담소 백기만이다.
“사장님, 기천수 씨 연락이 되지 않습니다. 당장 수배를 좀 부탁합니다.”
[알겠습니다.]
유태수는 대문을 열고 집 안으로 들어갔다.
가슴이 서늘해진다.
텔레비전을 보고 있었다.
하지만 신경은 탁자 위에 올려놓은 핸드폰에 자꾸 멎는다.
백기만으로부터 아직 어떤 연락이 없다.
딸칵!
담배 한 개비를 물고 마당으로 걸어 나갔다.
멀리 산봉우리에 조각달 하나가 떠 있고 바람 소리가 제법 세차다.
조금씩 뿌옇게 변해가는 밤하늘이 구름이 낄 듯싶다.
지이잉!
손에 들고나온 핸드폰이 요동친다.
“사장님!”
[보이지 않는대요. 카지노에도 없고 블랙 패밀리와 클럽 줄리아나에도 없습니다. 현직에 있을 때 알고 지내던 그 바닥 친구에게 부탁했는데 계속 알아보겠다고는 합니다만.]
“주소 찍어드리죠.”
그리고 재빨리 기천수 집 주소를 불러 주고 거실로 들어왔다.
아직 출근했던 정장을 벗지 않고 있었는데 상의를 다시 걸치고 집을 나갔다.
기천수의 집 골목이다.
백기만이 망설임 없이 벨을 누른다.
한 번, 두 번.
다섯 번을 눌렀지만 안으로부터 어떤 응답도 없다.
“들어가보죠.”
붉은 벽돌로 쌓아 올린 담장은 높다.
또한 CCTV가 있었지만 개의치 않는다.
백기만은 자신의 차량을 담벼락 쪽으로 더 가까이 끌고 오더니 지붕을 밟고 쉽게 집안으로 넘어갔다.
딸칵!
안에서 문이 열리고 유태수는 들어섰다.
탁!
백기만이 손전등을 꺼내 앞장섰다.
뚝!
앞서가던 백기만이 멈춰 섰다.
손전등 불빛이 땅바닥에 떨어진 지갑을 비추고 있었다.
백기만이 지갑을 들어 펼치더니 신분증을 꺼냈는데 기천수의 주민등록증이다.
백기만이 긴장한 표정으로 지갑을 넘겼고 유태수는 아무런 말도 없이 살핀다.
두 사람은 열린 현관문을 통해 집 안으로 들어갔다.
난장판이다.
한바탕 태풍이 불고 지나간 듯 집안은 어지럽혀져 있었다.
“납치된 것 같습니다.”
집안을 대충 훑은 백기만은 강력계 형사 출신답게 상황을 들여다보고 있었던 사람처럼 설명했다.
“기천수 같은 사람을 누가 납치할 수 있습니까?”
“조직 내에서 어떤 결정을 한 듯 보입니다.”
하긴 그런 거물을 집에서 납치해 갈 만한 곳은 자신이 몸담고 있는 태극동지회뿐일 것이다.
유태수는 어금니를 물었다.
백기만의 보고에 의하면 카지노, 룸살롱, 나이트클럽 모두 분위기에서 어떤 변화의 흐름을 감지할 수는 없었다고 했다.
그건 조직 내에서도 은밀하게 움직였기 때문에 아는 사람만 안다고 봐야 한다.
“직원들 어딨습니까?”
“제가 하봉철 부장더러 룸살롱을 감시하도록 지시했으며 차만대 과장은 카지노에 있습니다.”
“당장 하봉철 부장에게 전화하여 지배인 위치를 알아보라고 하시죠.”
백기만은 재빨리 전화를 걸었다.
“룸살롱 지배인 찾아봐. 지금 어디 있는지!”
자신과 만난 직후 가족이 납치되었다.
그렇다면 자신과 기천수의 마지막 동선은 룸살롱이다.
사건의 발단은 룸살롱 블랙 패밀리라고 봐야 했다.
확실히 빠르다.
형사 출신들답게 채 20분도 되지 않아 지배인 이름이 장영철이며 오늘 출근하지 않았다는 정보를 보내왔다.
‘놈이다.’
태극동지회 조직도를 보면 유흥업소 지배인은 부장급이다.
부장급은 임원 바로 아래.
직책과 직위로 판단해 볼 때 장영철에게 기천수는 경쟁자다.
형님으로 깍듯이 호칭은 하지만 내심은 누르고 밟아야 할 인물인 것이다.
“음!”
유태수의 이마가 잔뜩 찌푸려졌다.
헤어지고 얼마 지나지 않아 작전이 걸렸다면 블랙 패밀리를 중심으로 하는 사내들이 장영철의 지휘 아래 움직였을 가능성이 크다.
팟팟!
갑자기 유태수의 눈이 좁혀지고 새파란 광채가 난다.
“갑시다!”
두 사람은 차를 타고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화려한 네온사인들이 하나둘 꺼진다.
흥청망청 사람들로 넘쳐나던 거리도 조용해지고 길바닥에는 사람들이 버린 쓰레기들만 나뒹굴고 있었다.
흰색 벤츠 EQE 한대가 블랙 패밀리 주차장을 벗어난다.
부우웅!
거리로 들어선 벤츠는 성능을 자랑이라도 하듯 차량 통행이 뜸한 강남의 거리를 쏜살같이 달려갔다.
그로부터 20분 후 흰색의 벤츠 EQE가 다시 나타난 곳은 조그만 사거리였다.
쿵!
신호가 바뀌면서 멈춰 섰는데 뒤따라오던 차량이 꽁무니를 들이받아 버린 것이다.
딸칵!
벤츠 운전석 문이 열리면서 한 여자가 내렸다.
착 달라붙은 스키니 진이 눈에 들어온다.
그리고 초록색 사이로 틀어박힌 빨간색 선과 큼지막한 영문 글씨로 구찌라고 쓰인 신발은 수프림 스니커즈다.
여자는 받힌 자신의 벤츠 차량 뒤를 흘끔 보더니 꼼짝도 하지 않고 있는 뒤차로 다가왔다.
딸칵!
그때 운전석 바로 뒤쪽 문이 열리고 한 사내가 내렸다.
사내는 다가온 여자를 잡아끌더니 그대로 자신이 내린 뒷좌석으로 밀어 버린 뒤 문을 닫았다.
부우웅!
뒤차는 흰색 벤츠를 피해 사라졌고, 차에서 내린 사내는 여자가 몰던 벤츠를 끌고 사라졌다.
유치권을 행사 중이라는 현수막이 붙은 짓다 만 건물 앞으로 두 대의 차가 서 있다.
사람들 출입을 못 하도록 건물 주위로 2미터 가까운 양철 벽을 쳤는데 작은 문 하나가 열려 있다.
잡초가 드문드문 난 짓다 만 건물 공터에 구찌의 여자가 있었다.
끌려온 여자는 신호등 앞에서 내리던 당당한 모습은 찾아볼 수 없었다.
노는 물이 술집이어서 웬만해서는 놀라지 않지만 대로상에서 사람을 납치할 정도면 차원을 달리해야 한다.
잔뜩 겁에 질린 얼굴로 어둠 속에 있는 세 사내를 바라보았다.
“살려주세요!”
여자는 소리쳤다.
딸칵!
가운데 사내가 담배에 불을 붙이더니 길게 한 번 빤 뒤 여자에게 다가간다.
담배를 들고 다가오자 여자는 주춤 물러났다.
스윽!
하지만 사내는 손을 뻗어 들고 있던 담배를 건네준다.
여자는 잠시 망설이는가 싶더니 거절하면 안 된다고 판단한 듯 담배를 받아 들었다.
“담배를 피우면 마음이 조금 안정될 것입니다.”
여자는 가늘게 몸을 떨었다.
프로 냄새가 풍긴다.
“몇 가지 묻는 말에 대답만 하면 됩니다. 난 당신을 해치고 싶은 마음이 전혀 없다는 뜻이죠.”
탁!
유태수는 백기만의 손전등을 빌려와 켰다.
손전등으로 자신의 얼굴을 비춘다.
“알겠습니까? 전혀 어려운 건 없습니다. 하루 조금 지난 일이기 때문에 기억하기도 쉬울 것입니다.”
잡혀 온 여자는 엘리샤, 블랙 패밀리 최고 에이스다.
“길게 질문하지 않습니다. 당신은 장영철의 행방을 알고 있죠?”
“몰라요!”
그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엘리샤의 눈앞으로 번쩍 하며 하얀 섬광이 그어졌다.
엘리샤는 이마를 찡그렸다.
갑자기 번개가 쳤을 리도 없고 분명 눈부신 광채가 시야를 덮었다.
“아악!”
누군가 번개 천둥이라고 불러야 맞는다고 했다.
번개가 치고 잠시 후에 천둥이 울리기 때문인데 천둥 번개는 틀렸다는 것이다.
어쨌든 엘리샤 또한 그러했다.
앞가슴을 덮고 있는 상의가 갈기갈기 찢겼고 흰색의 브래지어가 나타났다.
재빨리 가슴을 가리며 감싸는 걸 보며 유태수가 말했다.
“당신 가슴 따위는 관심이 없어요. 얼굴로 먹고살아야 하는 직업이니 내가 한 번 양보한 것이오.”
두 번째 칼은 얼굴이라는 뜻이다.
“기천수 씨는 나 데이브를 만나고 사라졌소. 문제는 그날 밤 날 만나고 이름을 들은 사람은 당신뿐이라는 것입니다. 데이브 유라고 하자 당신이 보인 반응이 뭐였죠?”
“미국인이냐고?”
“맞아요. 엘리샤는 분명 그렇게 물었습니다. 그 말을 또 누구에게 했느냐는 거죠?”
“지배인이 왜 나왔냐고 물으면서 누구냐고 묻더군요.”
“그래서 데이브 유라고 말했군요?”
“네!”
“그리고?”
“그게 전부입니다.”
“거짓말하는 것 같은데요. 빨리 정리하고 가죠.”
백기만이 다가오며 거든다.
“봉사료에 대해 불만을 털어놨어요. 이것뿐이에요. 정말이에요. 거짓말 아니에요.”
엘리샤는 펄쩍 뛰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