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2화 살아야 한다(2)
정장 차림의 백인 둘이 나타났다.
뒤를 따르는 백인의 손에 여행용 가방 한 개가 들려 있다.
두 사람의 걸음은 빨랐고 작은 팻말 하나가 앞을 막는다.
「여기서부터는 사유지이므로 외부인은 출입을 할 수 없습니다.」
하지만 팻말은 두 백인의 발길을 전혀 막지 못했다.
두 백인은 산길을 내려갔고 저만치 바다가 내려다 보이는 곳에 2층 저택이 들어온다.
“저기로군!”
두 백인이 걸어서 대문 앞에 도착하며 벨을 눌렀다.
잠시 후 문이 열리면서 유태수가 나타났다.
“어서 오세요!”
미국 대사관에서 나온 인물들이다.
직원이지만 CIA다.
“지나치게 사적인 일에 치우치면 곤란합니다.”
“미스터?”
“체임벌린!”
“체임벌린, 가서 브룩스에게 전해요. 나와 일하고 싶은 마음이 아직도 유효하다면 내가 하는 일에 왈가왈부하지 말라고.”
유창한 영어에 체임벌린이 멈칫 한다.
“분명히 말하지만 나보다는 이 저택 주인 쪽이 더 숨기려 들 것이오. 즉 절대 언론보도 따위는 없다는 뜻이죠. 고생할 일 없습니다.”
스윽!
체임벌린이 들고 있던 가방을 건네주었다.
“행운을 빕니다.”
“미스터 체임벌린, 언제 술 한잔합시다.”
그러면서 유태수는 가볍게 거수경례를 했다,
체임벌린이 웃음을 지었다.
“언제든지 마시겠습니다. 미스터 배.”
“이쪽은?”
“제이콥!”
탁!
유태수는 가방을 왼손으로 옮기고 악수를 청했다.
“나도 포함되는 것입니까? 미스터 배.”
“물론이오.”
두 사람은 곧장 돌아서서 멀어져 갔다.
가방에는 밀가루 반죽을 해 놓은 것 같은 덩어리가 있었다.
가느다란 전기선과 전기를 작동하는 스위치와 소형 배터리까지 여러 전기 장비들이 들어 있었다.
갈색의 반죽 덩어리는 컴포지션(Composition) C 계열의 폭약이다.
C3 계열에서도 세분된 C-2.
주로 특수부대의 침투 작전 또는 인질 구출 작전 때 많이 사용되는데 폐쇄된 강철문이나 단단한 벽 따위를 허물 때 사용한다.
장점은 폭발하는 그 부위 근처만 완전히 부서진다는 것이다.
검은색 지하실 문은 두꺼운 강판이다.
망치로 때렸지만 조금도 흠결이 생기지 않을 정도였는데 백기만과 하봉철의 눈이 커진다.
팍!
타타탁!
능숙하게 폭약을 문에 붙이고 전선을 잇는 유태수의 손놀림에서 프로의 냄새가 짙게 풍긴다.
이라크에서 얻은 실전 경험이다.
네이비 씰 출신 코헨은 유태수에게 많은 군사기술을 가르쳐 줬으며 또한 빠르게 배워가는 걸 보며 놀라기도 했다.
탁탁!
다시 한번 손잡이 근처에 붙인 폭약을 확인하고 인계전선과 스위치, 배터리 작동까지 살핀 뒤 선을 따라 뒤로 물러났다.
“두 분은 잠깐 한 계단 올라가시죠.”
두 사람은 재빨리 굽어진 계단으로 피했다.
영화 속에서만 보던 일이 지금 눈앞에서 벌어지려는 것이다.
무섭기도 하면서 흥미롭다.
마치 자신들이 임무를 부여받고 작전 중인 특수부대 요원이 된 것 같기도 했다.
처처척!
뒤로 물러나 벽 뒤로 숨은 유태수가 말했다.
“귀 막아야 합니다.”
툭!
스위치를 눌렀다.
쿠우욱!
마치 작은 둑이 터지는 소리가 들렸다.
밀폐된 지하였기에 소리는 컸지만 생각처럼 집이 흔들리며 지진이 온 것 같은 상상과는 약간 차이가 있었다.
쏴라락!
천장 일부 인테리어가 부서지며 쏟아져 내렸다.
화악!
두 사람은 놀랐다.
꿈쩍도 않던 철문이 완전 휴지 조각처럼 휘어져 반쯤 넘어져 있었다.
탁!
유태수는 벽에 붙은 스위치를 올렸다.
지하실이 환해졌다.
지하실이라기보다는 목욕탕에 가까운 모습이다.
커다란 욕조가 있고, 벽 쪽으로 사우나로 보이는 문 세 개가 있었다.
벌름!
유태수의 콧구멍이 넓어졌다 좁아졌다를 반복했다.
고개를 돌리자 백기만과 하봉철도 이마를 찡그리며 불쾌한 냄새를 맡은 얼굴이다.
“피비린내!”
경찰 출신답게 백기만이 가장 먼저 중얼거렸다.
흠칫!
유태수의 눈이 천장에 멈췄다.
천장에 어른 팔뚝만 한 열십자로 이어진 쇠 파이프와 걸린 쇠사슬로 된 도르래가 보인다.
시선을 따라 이동하자 도르래 끝에 갈고리가 있다.
‘피.’
갈고리에 피가 말라붙어 있다.
한눈에 사람을 거꾸로 매다는 데 사용했다는 걸 알 수 있었다.
“이사님!”
오른쪽 사우나 문을 연 하봉철이 소리쳤다.
유태수가 다가갔다.
“욱!”
알몸의 여자가 누워 있었는데 가희경이었다.
몸에 큰 상처도 없고 흐트러진 머리카락과 벗겨진 알몸을 제외하면 고문을 당하거나 두들겨 맞은 폭행 흔적은 없다.
“누…… 누구?”
가희경이 입술이 달싹거렸는데 눈에 초점이 없다.
하봉철이 약에 취했다고 설명한다.
유태수는 하봉철에게 속히 걸칠 수 있는 옷을 가져다 주도록 했다.
두 번째 역시 예상대로였다.
거기에는 아들 기철무가 있었는데 엄마와 달리 그는 몸 곳곳에 상처가 있고 바닥에 아직 채 굳지 않은 피도 있었다.
맞았다는 건 그만큼 저항을 했다고 봐야 했다.
기철무 또한 의식을 차리지 못하고 이상한 소리를 했다.
백기만이 세 번째 문을 열어 놓고 기다리고 있었다.
보지 않아도 누가 있을지 짐작이 되었는데 들어선 유태수는 이마를 찡그렸다.
정육점에 걸린 커다란 고깃덩이다.
왼쪽 장딴지는 정강이뼈가 보일 만큼 상처가 컸고 얼굴은 퉁퉁 부어 기천수의 모습은 전혀 찾아볼 수가 없었다.
그 역시 약에 취한 듯 고통스런 표정은 없었고 자꾸 잠꼬대를 하고 있었다.
헉헉거리며 하봉철이 뛰어 들어왔다.
세 사람이 납치될 당시 입었던 옷들을 찾아왔는데 기철무는 일단 입혔지만 가희경이 여자라 문제였다.
“일단 옷으로 덮어 놓기만 하시죠.”
하봉철이 가희경의 옷을 들고 사라졌고 유태수는 기천수의 몸을 살폈다.
“이건 칼자국 아닙니까?”
백기만이 허벅지 상처를 보며 말했다.
“회칼로 포를 뜨듯 피부를 벤 것입니다.”
잘려 나간 피부는 상처가 소독이 되지 않아 고름이 앉기 시작했고 무의식중에 대소변을 본 듯 냄새까지 지독했다.
“백 사장님!”
“예!”
“약에서 깨어나면 위험해질 수도 있습니다.”
지금은 약 기운에 살아 움직인다.
그러나 약효가 떨어지면 출혈이나 깊은 상처로 인한 쇼크사가 올 수 있다.
“여기서 가장 가까운 곳이?”
“속초가 좀 가깝고 강릉이 멀긴 하지만 큰 병원은 강릉 쪽에 있다고 봐야죠.”
“하 부장님과 함께 세 사람을 깨어나기 전에 병원으로 옮겨야겠습니다. 머뭇거릴 시간 없습니다.”
백기만이 당혹스런 표정을 지었다.
누가 봐도 사건이다.
119 대원들이 모를 리 없고 병원 응급실 역시도 상처를 보면 전문가들이니 금방 알아차린다.
경찰에 신고할 것이 뻔했다.
“구워삶아요. 구급대원이든 의사든 한 10억씩 챙겨주는데도 싫다는 놈 있겠습니까?”
10억이라는 말에 백기만이 소스라친다.
“알겠습니다.”
백기만은 재빨리 바깥으로 나갔다.
때마침 가희경에게 옷을 덮어주고 하봉철이 나왔다.
“후우!”
무척 힘들었는 듯싶다.
“왜 그러십니까?”
백기만이 놀란 표정을 하고 있자 묻는다.
“일단 가자고.”
두 사람은 바깥으로 달려 나갔다.
산길을 벗어난 두 사람은 길가에 세워 놓았던 승용차 시동을 걸고 출발했다.
“정말 줄까요? 말이 10억이지.”
핸들을 잡은 하봉철이 떨리는 목소리로 묻는다.
“글쎄, 워낙 큰돈이기 때문에 나도 잘 모르겠군. 하지만 한 가지는 알 수 있네. 이미 성품 보았잖아. 한번 같이 일하는 사람은 절대 버리지 않는다는 것.”
하봉철이 슬쩍 고개를 돌려 본다.
“아무리 돈이 어마어마하게 많은 사람도 그렇게 큰돈을 마구 쓸 수는 없지. 신뢰야. 죽지 않고 살아 있다면 반드시 살려낸다는 약속이지.”
두 군데서 같은 청부를 받았다.
첫 번째는 채무령이다.
그녀가 돈 많다는 걸 모르는 이 없다.
하지만 처음 사건 의뢰를 받을 때 빼고 지금까지 괜찮은 정보를 여러 번 전달했지만 보너스 따위는 없었다.
단돈 십 원도 건너오지 않은 것이다.
반면 데이브 유는 다르다.
이미 여러 가지 명목으로 일억 원 가까이 통장에 들어왔다.
어디에 목숨을 걸어야 하나.
답은 정해진 것이다.
부우우웅!
차는 새벽을 뚫고 빠르게 달려갔다.
유태수는 다시 2층으로 올라왔다.
다섯 사내는 방안에 나동그라져 있었는데 하나같이 노끈에 손과 발이 묶여 있었다.
강력계 형사 출신 하봉철의 포승줄로 묶는 포승법은 완숙했다.
대충 묶은 듯해도 누구도 풀지 못했다.
“오늘따라 동해 바다 파도가 거셉니다. 저 파도 속에 던져지면 어떻게 될 것 같습니까?”
날고 긴다는 사내들이다.
웬만한 일에는 겁을 먹지 않는다.
태극동지회의 영향력은 사회 구석구석에 깊이 침투해 있어 경찰 아니라 검찰도 함부로 터치를 하지 못했다.
데이브 유.
이상한 사내다.
한 사람만 그렇게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다섯 모두가 그 흔한 객기 하나 부리지 못했다.
상대가 내미는 회칼 앞에서도 어디 죽여보라고 목을 들이밀었던 배짱을 도무지 찾을 수가 없는 것이다.
시키는 대로 이행할 뿐이다.
지이잉!
울리는 벨소리에 유태수는 압수한 핸드폰을 바라보았다.
「영철이 형님」
액정에 이름이 떠 있다.
“이 전화 누구 거죠?”
걸려 온 전화를 들었다.
“내 겁니다.”
차전표가 말했다.
휘익!
유태수는 차전표에게 전화기를 던져 주었다.
차전표는 눈치를 보며 얼른 받지 않았다.
“안 받을 거요?”
그제야 차전표는 통화 버튼을 터치했다.
[인마, 뭐 하는데 전화를 늦게 받아?]
대뜸 차가운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죄송합니다.”
[별일 없지?]
흘끗!
유태수의 눈치를 살폈다.
하지만 유태수는 담배를 물고서 창밖을 바라보고 있다.
창밖을 본다고 귀까지 창밖에 두지는 않았을 것이다.
더구나 어디서 구했는지는 몰라도 폭약을 이용해 지하실 문까지 날려 버렸다.
최소한 다이너마이트는 되어야 열리도록 설계된 문이다.
“예!”
대답은 이미 정해져 있었다.
심각한 문제가 생겼다고 해봤자 자신들에게 돌아올 건 없다.
제대로 대답을 했다가는 당장 유태수의 칼에 맞고 바다에 던져질 것이다.
죽음은 가깝고 형님은 멀다.
“20분이면 도착할 거야. 묻으라는 사인 떨어졌으니 준비들 해.”
통화가 끝났다.
유태수는 여전히 창밖에 시선을 던지고 있었다.
순간 차전표는 슬며시 손가락으로 112를 누르기 시작했다.
톡! 톡!
11 두 글자를 눌렀다.
이제 2자만 누르면 경찰과 선이 닿는다.
통화를 못 해도 발신지 추적을 하여 금방 찾아올 것이다.
평생 보고 싶지 않은 짭새들이 이토록 보고 싶을 줄이야.
나타나면 형님이라고 부르고 싶을 정도다.
“그 번호 누르면 다 죽습니다. 당신은 물론이고 여기 동생들까지.”
툭!
너무 놀라 핸드폰을 떨어뜨렸다.
죽는다는 말에 놀란 것이 아니었다.
분명 창밖을 보고 있었는데 어떻게 자신이 112를 누르려 한다는 걸 알았단 말인가.
유태수는 일어나 차전표의 손에 들린 핸드폰을 빼앗았다.
그리고 방을 나가 사라졌다.
도로가에서 움푹 들어온 작은 공터는 이곳 저택의 주차장이다.
물론 사유지라는 팻말이 붙어 있는데 그곳에 차가 멈췄다.
문이 열리고 장영철과 운전을 한 금치수가 내렸다.
두 사람은 숲속으로 난 길을 따라 걸어갔고 오 분 정도 지나 저택 대문 앞에 멈췄다.
스윽!
벨을 누를까 하다 대문을 밀어 봤는데 쉽게 열린다.
그으윽!
문을 열고 들어선 두 사람은 깜짝 놀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