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론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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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론칭
2022.02.03.
“특별 보너스로 백만 원씩 쏴 드렸습니다!”
맛집으로 소문난 한우전문점은 기쁨에 찬 환호성으로 가득했다.
연 매출 700억에 빛나는 여성 의류 쇼핑몰 직원들이 세컨드 브랜드 출시 기념으로 회식 중이었다.
가장 중심에 서 있는 하니블랙의 대표, 한서연.
빛나는 피부에 숱이 풍성한 긴 머리칼, 옅은 갈색 눈동자가 인상적인 뚜렷한 이목구비였다.
모델처럼 큰 키에 블랙 투 버튼 바지정장이 기가 막히게 잘 어울리는 당당한 모습으로 그녀가 말을 이었다.
“내 배 아파 낳은 내 새끼라는 마음으로, 쑥쑥 키워주시기를 바랍니다. 그런 의미로 건배!”
생각지도 못한 특별 보너스에 잔뜩 신이 난 직원들은 서연의 건배 제안에 격하게 반응했다.
행복한 파도타기가 끝나자, 서연의 주위로 직원들이 모여들었다. 셀 수 없을 만큼 많은 잔이 오갔지만, 그녀는 쌩쌩하기만 했다.
“그런데요. 대표님. 요런 거 물어도 될지…….”
괜찮다는 듯 서연이 고개를 까닥하자, 얼굴이 발그레한 막내 직원이 쪼르르 다가와 물었다.
“이상형이 어떻게 되세요? 항상 궁금했거든요.”
선생님의 첫사랑 이야기를 궁금해하는 학생 같아 서연이 피식하고 웃었다. 그러다 막내 직원의 찰랑거리는 술잔을 내려다봤다.
아무래도 주당인 선배 곁에 있기가 버거워 피신을 온 모양이라 토끼 같은 막내를 잠시 숨겨줘야겠다고 생각했다.
“흠. 내 이상형은 단순해요.”
대표의 이상형이 궁금한지, 주위에 있던 몇몇이 엉덩이를 들썩이며 가까이 다가와 앉았다.
“오로지 됨됨이.”
“됨됨이요?”
서연이 씽긋 웃으며 설명을 덧붙였다.
“감당이 안 될 만큼 잘 벌고 있는 상황에서 남자의 경제력은 그다지 중요하지 않아요.”
거기다 외모라는 기준은 지극히 주관적이라 남들이 아무리 잘생겼다고 해도 내가 싫으면 그만이라고도 했다.
“인성은 돈 주고 살 수도, 노력한다고 가질 수도 없으니까. 가장 중요해요.”
서연은 큰 언니 같은 포스로 인생에 필요한 보약 같은 말들을 쏟아냈다.
누군가는 꼰대라고 비난하겠지만, 잘난 외모에 혹해 쓰레기 같은 인성을 모른 척한다면 인생이 시궁창에 빠지는 건 한순간이라는 것을 재차 강조했다.
그건 서연이 경험을 통해 얻은 생생한 후기 같은 것이었다.
그동안 서연이 만난 남자친구들은 하나같이 잘생긴 외모에 부잣집 아들.
함부로 대해도 되는 사람과 아닌 사람을 귀신같이 구분해내는 약삭빠른 인성.
거기다 조금만 가까워졌다고 생각하면 어김없이 해오는 집착과 어쭙잖은 간섭.
사람만 달랐을 뿐 공장에서 찍어낸 공산품 같은 남자들의 행태에 신물이 난 상태였다.
“하지만 심장을 두근거리게 만드는 매력도 있어야 해요. 그런 남자를 만날 때까지, 연애는…… 일단 멈춤.”
서연이 멋쩍게 웃어 보이자, 막내 직원이 큰 깨달음을 얻은 것처럼 중얼거렸다.
“결국은 인성이 훌륭한 매력쟁이를 찾으시는 거네요. 에이, 대표님도……. 그런 유니콘 같은 남자가 어디 있겠어요.”
막내 직원의 결론에 다들 수긍하는 분위기라 서연은 자신의 기준이 까다로운가를 다시 한번 생각했다.
아무렴 어떤가. 그런 사람이 어딘가에 있다면 만날 날이 오겠지.
서연은 연애에 있어 시행착오도, 쓸데없는 감정 소모도 더는 겪고 싶지 않았다.
“없으면 말고요.”
서연이 어깨를 한번 으쓱해 보이고는 고깃집 벽에 걸린 전자시계를 힐끔 쳐다봤다.
‘이 정도 시간을 보냈으면 됐겠지? 슬슬 정리하자.’
서연은 눈앞에 있는 술잔을 들고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사랑하는 여러분.”
서연의 갑작스러운 부름에 모두가 그녀를 찬양하듯 올려다봤다.
“저는 이 잔을 끝으로 물러나겠습니다. 그리고…….”
여기저기서 2차도 같이 가자는 말이 애원처럼 들려왔다.
“이 법인 카드를 김 실장님께 맡기겠습니다.”
카리스마 넘치는 서연이 손을 들어 시끄럽게 보채는 직원들을 진정시키고, 사뭇 진지한 목소리로 말했다.
“아시다시피 2차는 자유입니다. 가실 분들만 우리의 회식 구호를 외쳐주세요.”
대표인 그녀의 말에 다들 비장한 표정으로 주먹을 말아쥐었다.
“우리는 개가 아니다! 집에는 두 발로 걸어간다! 부적절한 행동은 퇴사의 지름길이다! 건배!”
구호를 선창한 서연이 잔을 비우자, 거대한 파도를 타듯 모든 직원이 일사불란하게 움직였다.
탁―.
술잔을 내려놓은 서연이 직원들의 배웅도 거절한 채, 고깃집을 나섰다.
오롯이 혼자만의 시간, 왁자지껄한 현실에서 영혼이 빠져나온 사람처럼 공허함이 온몸을 휘감았다.
씁쓸한 마음을 허공에 쏟아버리고 중학교 때부터 절친인 호진에게 톡을 보냈다.
<고깃집에서 막 나왔어. 먼저 가 있을게. 천천히 와.>
서연은 빨간 불이 반짝이는 택시를 황급히 잡아탔다.
“S 호텔이요.”
목적지를 말한 서연이 등받이에 몸을 기대며 크리스털로 반짝이는 손가락으로 관자놀이를 꾹꾹 눌렀다.
준비기간만 2년. 세컨드 브랜드의 출시는 여간해서 겁을 내지 않는 서연을 잔뜩 긴장시켰다.
공장으로 가기 직전, 엎어진 디자인만 수십 개. 브랜드 출시까지 피가 마르는 시간이었다.
쉬고 싶다는 말이 절로 나오는 서연이 회원제로만 운영되는 S 호텔 프라이빗 바로 향했다.
지금 누구보다 위로와 휴식이 필요한 사람은 서연, 자신이었으니까.
***
매력적인 머스크 향이 은은하게 풍기는 입구.
서연이 회원 카드를 내밀자 말끔한 차림의 직원이 반듯하게 허리를 숙였다.
공간을 향기로 꾸며주는 디자이너가 있다더니, 호텔 로비에서도 느끼지 못한 특유의 향이 바 입구에서부터 에스코트하듯 서연을 따라왔다.
서연은 향기에 취한 듯 나른한 얼굴로 안내받은 원형 테이블에 앉았다.
“위스키 온더록스 한 잔이랑, 레몬 탄산수요.”
단정한 몸짓의 직원이 물러나자, 서연은 천천히 주위를 둘러봤다.
어두운 조명과 우드톤의 모던한 실내장식.
세련된 공간만큼이나 술잔을 기울이는 사람들의 모습도 평범해 보이지 않았다.
그러다 한 남자와 눈이 마주쳤다.
스치듯 마주친 까만 눈동자가 서연의 시선을 사로잡았다. 하지만 거기까지.
남자를 만나기 위해 온 자리가 아니었기에 휴식 같은 시간을 달래줄 술친구를 기다리고 있었다.
서연은 귓가를 농밀하게 적시는 재즈 선율을 즐기며 자신 앞에 놓인 크리스털 잔을 톡톡 두드렸다.
그러자 투명하게 빛나는 사각의 얼음들이 달그락 소리를 내며 춤을 췄다.
무겁게 가라앉은 마음을 떨쳐내려 서연이 가볍게 한 모금을 넘겼다.
어. 뭐지?
눈빛을 주고받던 남자와 다시 시선이 얽혔다.
처음 보는 남자의 깊은 눈매와 코끝을 스치는 묵직한 오크 향이 서연의 오감을 자극했다.
하지만 큰 의미를 부여하진 않았다. 친구가 오기 전까지의 단순한 호기심이라고.
서연의 눈동자가 그 남자의 눈을, 얼굴을, 그의 전체적인 실루엣을 살폈다.
그건 디자이너의 직업병 같은 것이었다.
사이즈를 맞추고, 잘 어울리는 스타일을 매치해보는 것이 그녀의 오래된 습관이었다.
키는 190 정도? 사이즈는 110에, 2XL가 잘 어울릴 것 같고……. T존도 입체적이고, 콧대부터 입술까지 내려오는 선이 단정하네.
하지만 무엇보다 그의 깊은 눈매가 서연의 시선을 사로잡았다.
“나 참. 지금 뭐 하는 거야.”
서연은 처음 보는 남자에게 지나친 관심을 쏟는 것 같아 한쪽으로 쏠렸던 시선을 재빨리 거두어들였다.
그러고는 호진에게 톡을 보내 위치를 확인했다.
곧 도착한다는 호진의 답장을 받은 후에도 일부러 핸드폰을 만지작거리며 쓸데없는 관심을 분산시켰다. 그렇지 않으면 그에게로 향하는 눈길을 멈출 수 없을 것 같아서.
“오래 기다렸지? 으읍.”
뛰어왔는지 가쁜 숨을 몰아쉬던 호진은 서연의 술잔을 들이켜곤 인상을 구겼다.
“잘 나가는 대표로 인생에 꿀만 빨면서, 왜 이렇게 쓴 걸 마셔. 윽. 사약이 따로 없네.”
“넌 달달한 걸로 시켜. 난 이 맛이 좋더라.”
물을 급하게 들이켠 호진이 달콤한 하우스 와인을 시켰다.
“우리 한 대표님은 고깃집에서 회식하다 온 게 아니라. 어디 패션쇼 맨 앞줄에서 사진 찍히다 온 것 같네.”
가슴선이 살짝 드러나는 블랙 재킷 안에 같은 색 뷔스티에를 받쳐 입은 서연을 보고 호진이 말했다.
“이번에 나온 우리 신상품. 어때?”
“하니블랙은 언제나 옳지. 원단이며 절개가 남다르니까.”
서연은 얘기가 나온 김에 여니블랙 이야기를 시작했다.
그러다 잔뜩 무거워진 마음을 풀러 와놓고 또 일 얘기를 시작하는 자신이 우습다는 듯 피식하고 웃었다.
인제 그만 화제를 바꿔야겠다고 생각한 서연이 호진에게 건배를 제안했다. 그때 테이블 사이로 기다란 그림자가 나타났다.
“한 대표님?”
서연과 호진이 동시에 위를 올려다보자, 말끔한 남자가 웃으며 서 있었다.
“김 이사님! 여기 웬일이세요.”
“친구랑 약속이 있어서요. 지금 막 도착했는데, 여기서 한 대표님을 다 만나네요.”
두 사람이 반갑게 안부를 주고받자, 남자의 정체가 궁금한 듯 호진이 두 사람을 번갈아 쳐다봤다.
“여기는 DN 홈쇼핑 김현우 이사님. 하니블랙 홈쇼핑 진출의 일등 공신이자, 나의 든든한 조력자. 이쪽은 제 절친이자 중앙지검 검사 여호진이요.”
현우와 호진이 가볍게 눈인사를 주고받았다.
“우리 이럴 게 아니라 같이 한잔하죠. 안 그래도 이번에 론칭한다는 여니블랙이 궁금했었는데.”
“저야 좋지만…… 약속 있다고 하지 않으셨어요?”
“남자들끼리 만나면 말없이 술이나 마시죠. 괜찮으시면 일행을 여기로 불러도 될까요?”
서연이 호진에게 허락을 구하는 눈빛을 보내자 그녀가 고개를 끄덕였다.
현우는 가방을 서연의 맞은편에 내려놓고 일행에게 물어보고 오겠다며 자리를 옮겼다. 그가 자리를 비우자마자 호진이 속삭였다.
“저 남자랑 썸?”
“전혀! 일만 하는 사이. 성격이 서글서글한 게 괜찮아. 너 관심 있으면 소개해줄까?”
서연의 말에 호진이 손을 휘휘 내저으며, ‘온다’라고 중얼거렸다.
어? 저 남자는…….
현우가 데리고 온 남자는 둘이었다.
한 명은 변호사 서희, 다른 한 명은 눈이 여러 번 마주쳤던 그 남자.
“안녕하세요. 권율입니다.”
서연의 귓가에 차분한 중저음의 목소리가 맴돌았다. 이름 없는 눈빛남이 ‘권율’이라는 이름을 갖자 존재감이 상당했다.
서로 간단한 소개가 오고 간 후 서연과 현우는 회의를 하는 것처럼 진지한 대화에 빠져들었다.
서연은 새 브랜드의 본질과 앞으로 구현해 나갈 이미지들을 설명하느라 여념이 없었다.
일에 대한 스트레스를 털어내려 온 자리는 더 열정적으로 일에 파고드는 시간이 되어가고 있었다.
서연이 쇼핑몰 앱을 켜 공들여 만든 디자인을 보여주자, 현우가 입꼬리를 부드럽게 올리며 말했다.
“다음 주 하니블랙 회의에 새 브랜드 샘플도 가져오세요. 실물을 보고 얘기하면 더 좋을 거 같아서요.”
“……그럴까요?”
“네. 지금은 좀 편하게 놀고요. 한 대표님은 너무 워커홀릭이에요.”
멋쩍게 웃은 서연이 주위를 둘러보다 권율과 다시 눈이 마주쳤다.
그는 기다렸다는 듯 천천히 입꼬리를 들어 올렸다.
진하게 눈빛만 주고받았던 남자의 미소가 햇살을 머금은 풀잎처럼 싱그러웠다.
그는 이를 드러내지도 과하게 눈웃음을 짓지도 않았다.
그게 더 순수해 보인달까?
서연은 그런 그의 미소에 입매를 살짝 들어 올려 화답했다.
“이 두 사람, 닮아 보여요?”
현우가 권율과 서희를 가리키며 물었다.
운동하는 사람처럼 커다랗고 듬직한 권율과 하얀 피부에 차가운 인상을 가진 서희는 닮은 구석이라고는 하나도 없었다.
하지만 현우가 묻는 데는 다 이유가 있을 것 같아 서연은 두 사람을 유심히 쳐다봤다.
“전혀요. 무슨 사인데요?”
두 사람을 번갈아 쳐다보던 호진이 먼저 물었다.
“사촌지간이요. 그리고 더 재미있는 건 두 사람의 이름이에요.”
이름?
서연이 고개를 갸웃거리며 두 사람의 이름에서 재미있는 점이 뭘까 생각했다.
“아! 나 알 것 같아요. 장군 이름, 맞죠?”
흥미로운 퀴즈를 맞히듯 호진이 손을 번쩍 들고 말하자, 현우가 고개를 끄덕였다.
“이 집 할아버지가 장군 덕후시라, 손주들 이름을 다 장군으로 지으셨대요.”
“우와! 신기하다. 다들 이름이 뭔데요?”
호진이 흥미를 갖자, 현우는 이름에 얽힌 비하인드 스토리를 떠드느라 정신이 없었다.
서연이 피식 웃으며 레몬 탄산수를 입술에 가져간 순간 투명한 액체가 서연의 입술 끝으로 주르륵 흘러내렸다.
당황한 서연이 냅킨을 가져다 달라고 말하려던 순간.
“이것 쓰세요.”
권율이 체크무늬 손수건을 서연의 턱에 자연스럽게 가져다 댔다.
“!”
얇은 손수건 너머로 그의 체온이 고스란히 느껴졌다.
눈동자만 내려 쳐다본 그의 손톱은 투명한 빛이 날 정도로 깔끔했다.
거기다 얼굴에 닿는 손끝에서는 청량한 우드 향이, 손수건에서는 상큼한 섬유유연제 향이 났다.
눈이 마주친 순간부터 묘하게 눈길을 끌더니, 이게 다 무슨 일인가 싶게 서연의 마음이 살짝 흔들렸다.
“어, 감사합니다.”
당황한 서연이 손수건을 움켜잡으려다 단단한 감촉에 화들짝 놀랐다.
“허, 죄송해요.”
서연이 황급히 손을 놔버리자 손수건이 권율의 다리 위로 떨어졌다.
자기도 모르게 손수건을 주우려던 서연이 떨어진 위치를 확인하고는 재빨리 손을 거둬들였다.
“크흠. 취했나? 오늘따라 왜 이러지.”
당황해하는 서연의 옆모습에 권율의 시선이 내려앉았다. 그러자 그의 입가에 은은한 미소가 번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