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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오늘은 여기까지 (2/130)


2. 오늘은 여기까지
2022.02.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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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율은 서연에게 손수건을 다시 건네며, 인상적이었던 그날을 떠올렸다.

2년 전 여름.

권율이 할아버지와의 저녁을 위해 호텔 주차장에 막 도착했을 때였다.

연예인보다 더 화려한 외모를 가진 여자가 권율의 차 앞을 가로질렀다.

그가 서연을 기억하는 건 모델처럼 큰 키와 스타일리시한 외모 때문만은 아니었다. 뒤따라온 커플의 경악스러운 행동과 그걸 대처하는 그녀의 자세 때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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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연아, 내 말 좀 들어봐. 진짜 오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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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빠, 오해는 무슨 오해! 우리 사이, 네가 생각하는 그거 맞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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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넌 좀 가만히 있어.”

서연을 집요하게 따라온 두 사람은 너무도 특이했다.

여자는 쓸데없이 당당했고, 남자는 말도 안 되는 변명을 늘어놓는 게 우스웠다.

뻔한 삼각관계인가 싶어 자리를 피하려는데 무미건조한 목소리가 들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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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발 좀 꺼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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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연아, 미안해. 네가 새 브랜드 만든다고 너무 바쁘니까 내가 잠깐 눈이 돌았었나 봐. 얘가 순진한 날 유혹했어. 난 이용만 당한 거라고.”

서연이 한쪽 입꼬리를 비스듬하게 올리며 싸구려들끼리 잘 어울린다는 덕담 아닌 덕담을 쏘아붙였다.

그런데도 남자는 물러서지 않았다. 오히려 서연의 팔을 붙잡으며 애걸복걸하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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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연아, 오빠가 죽을죄를 지었어. 지금 네 앞에서 얘 전화번호도 지우고 다시는 안 만날게. 한 번만. 응? 딱 한 번만 용서해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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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수? 하, 나 참. 그 실수 스무 번도 넘게 했거든.”

여자는 남자를 뺏기지 않겠다는 듯 지금까지 만났던 바람의 역사를 줄줄이 읊기 시작했다.

다양한 장소와 생각보다 많은 만남, 서연은 혐오스럽다는 듯 몸을 돌려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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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얘, 너 가져. 난 더러워서 도저히 못 만나겠으니까.”

인내심이 반쯤 끊겨버린 서연의 눈동자가 그녀를 쏘아봤다. 그러자 너무도 뻔뻔한 그녀가 고개를 한껏 치켜세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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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연아, 난 너 없으면 안 돼.”

두 여자 사이에 서 있던 남자가 다시 매달리며 구질구질한 변명을 늘어놓자, 서연의 미간이 와락 구겨졌다.

더는 못 참겠는지, 심한 말을 쏟아낸 서연이 목걸이를 잡아 뜯어 바닥으로 던져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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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것도 너 가져. 같잖아서 정말.”

그러고는 티끌 하나 없이 반짝이는 블랙 슈퍼카에 올랐다. 곧 웅장한 엔진소리와 함께 서연이 주차장을 빠져나갔다.

그 모습이 어찌나 당당하고 멋있는지, 권율은 영화의 한 장면을 보는 것만 같았다.

너무도 강렬했던 이미지였기에 권율은 서연과 눈이 마주친 순간, 그녀를 알아봤다.

그날, 차마 세 사람 사이를 뚫고 지나갈 수 없어 운전석 옆에 서서 상황을 지켜봤으니 서연은 자신을 기억하지 못할 것이었다. 하지만 그 이후 괜찮았냐고 물어보고 싶었다.

잠시 상념에 빠진 권율에게 서연이 먼저 말을 걸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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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수건이 젖어서 어떡하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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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괜찮습니다. 어차피 빨 건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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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율이 씨는 어떤 일 하세요?”

탄산수 때문에 젖은 손수건을 가지런히 접어 건네던 서연이 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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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리랜서입니다.”

서연과 대각선에 앉아 있던 서희가 고개를 쭉 빼며 대신 나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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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프리랜서도 분야가 다양한데. 어느 쪽인지…….”

서연이 권율에게 질문을 던졌으나 서희가 다시 답변을 가로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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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쉽게 말하자면 교육 관련 컨설팅이라고 생각하시면 됩니다. 실력이 아주 좋아서 의뢰 들어오는 사람들만 봐주고 있어요. 번호표 뽑고 기다린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죠. 하하.”

입꼬리를 살짝 올린 서연이 친절한 목소리로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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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촌끼리 매우 친하신가 봐요. 그래도 사촌 동생이 직접 말할 기회는 주세요.”

그건 서희의 행동이 거슬린다는 뜻이었다.

서연의 말뜻을 바로 알아들은 서희가 피식 웃으며 한발 물러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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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끼는 사촌 동생이다 보니, 제가 너무 나섰네요.”

알면 됐고.

서연은 미간을 구기지도, 정색하지도 않았다. 하지만 서희의 행동이 과하다는 의사를 간접적이지만, 정확하게 표현했다.

이들의 긴장감을 눈치 챈 권율이 분위기를 바꾸려 서연에게 말을 걸었다. 두 사람의 대화는 과하지 않았고, 부담스럽지 않은 주제가 물 흐르듯 연결됐다.

잠시 뾰족했던 서연의 마음이 부드럽게 녹아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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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 한 대표님, 잔이 비었네요.”

이미 여러 차례 회식을 함께해서인지, 서연의 주량을 아는 현우가 술병을 들었다. 그러자 권율이 서연의 잔 위로 손을 올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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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형. 서연 씨, 직원들이랑 회식하고 왔대요.”

그건 술을 주지 말라는 권율의 완곡한 표현이었다.

서연은 자신의 잔을 사수하고 있는 그의 손등을 물끄러미 내려다봤다.

배구선수처럼 커다란 손 위로 툭툭 불거진 핏줄이 이상하게도 매력적으로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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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말…… 취했나?’

물을 흘리질 않나, 손수건을 떨어뜨리질 않나. 이젠 처음 보는 남자의 손등까지 특별해 보이는 게 영 이상했다.

더 마실 수 있었지만, 서연은 그의 배려를 무시하고 싶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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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사님, 저번에 박 팀장이랑 같이 갔던 고깃집이요. 거기서 회식했거든요. 얼마나 서비스가 좋은지 직원들이랑 정말 많이 달렸어요. 그러니까 오늘은 여기까지만 할게요.”

서연이 거절하자, 권율은 잔 위에 있던 손을 천천히 거둬들이며 느슨하게 팔짱을 꼈다.

그에 반해 서연은 자신의 행동이 어색해 괜스레 빈 잔만 만지작거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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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게 알코올을 분해하는 데 좋다는 기사를 봤어요. 천천히 드세요.”

불투명한 이온 음료가 쓱 하고 나타났다.

생각보다 자상한 남자의 모습, 서연은 오랜만에 느끼는 살뜰한 보살핌에 피곤이 풀리는 기분마저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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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 우리 회의가 언제죠?”

현우의 물음에 이온 음료를 넘기던 서연이 대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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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요일 오후 2시로 알고 있어요.”

두 사람의 이야기를 잠자코 듣고 있던 권율이 손가락으로 테이블을 톡톡 두드렸다.

그러고는 다음 주 금요일에 특별한 일이 있는지 떠올리다 뭔가 결심한 표정으로 주먹을 살짝 쥐었다 폈다.

서연이 음료수를 홀짝이며 현우와 이야기를 나누는 사이, 호진이 몸을 기대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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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 빼고 무슨 얘기를 이렇게 재밌게 해? 히힝.”

취기가 오르는지 얼굴이 발그레한 호진이 자꾸만 헤헤거리자, 서연이 그녀의 상태를 빠르게 확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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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래도 그만 일어나야겠어요. 호진이가 여기서 더 취하면 잠들 수 있거든요.”

오랜 경험으로 친구의 술버릇을 잘 알고 있는 서연이 자리를 정리하고 나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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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자, 그럼. 함께 갈 수 있는 사람들은 한 차로 갑시다.”

서글서글한 현우의 말에 권율이 몸을 앞으로 내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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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우 형, 제가 술을 안 마셨으니까. 서연 씨랑 호진 씨를 데려다줄게요.”

권율의 말에 현우와 서연이 동시에 그를 쳐다봤다.

현우는 과묵한 권율이 적극적으로 나서는 게 의아했고, 서연은 그의 제안이 나쁘지 않았다.

술기운 때문일까?

서연은 그의 진지한 눈빛과 넓은 어깨가 왠지 믿음직스러워 보이기까지 했다. 만에 하나 호진이 잠든다고 하더라도 충분히 커버가 가능할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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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럴래? 한 대표님, 그래도 괜찮겠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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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야 고맙죠. 호진이가 더 취하기 전에 가야 하거든요. 만약 잠들면 도와줄 사람도 필요하고요.”

서연의 시선이 그의 널찍한 어깨에 못 박히듯 꽂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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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럼, 이만 일어나죠.”

각자 계산을 마친 사람들이 주차장으로 향했다.

서연은 호진의 팔짱을 끼고 걸었고, 권율은 두 사람과 속도를 맞추며 걸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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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으. 지하라 그런지. 좀 춥다.”

술이 깨려는지 호진이 몸을 부르르 떨며 팔을 쓱쓱 문지르자, 권율이 서연을 쳐다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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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연 씨, 제가 호진 씨한테 재킷을 빌려 드려도 될까요?”

권율은 옷을 벗어주려는 호진이 아니라 서연에게 물었다. 꼭 허락을 구하는 것처럼.

서연이 고개를 가볍게 끄덕이자, 그가 재킷을 서연에게 내밀었다.

아니, 이걸 왜 날 줘.

청량한 우드 향이 나는 재킷을 얼떨결에 받아든 서연이 호진의 어깨에 가볍게 걸쳐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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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마워요. 율이 씨. 잘 입을게요.”

호진의 고맙다는 인사에도 권율은 서연의 갈색 눈동자만 쳐다봤다.

말한 건 호진인데, 왜 자꾸 나한테만 말하고, 쳐다봐? 나한테 관심이라도?

무척 신경 쓰이는 서연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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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에 기회가 되면 다 같이 또 뵙죠. 서희랑 저는 대리기사님을 기다려야 하니까. 먼저 출발하세요.”

다정한 현우의 말에 다들 적당한 거리에서 의례적인 말들을 주고받았다. 서연은 호진과 뒷자리에 나란히 앉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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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율이 씨, 호진이네 집 먼저 가주세요. 여기서 가깝거든요.”

주소를 알려주자 권율의 차가 천천히 주차장을 빠져나갔다. 서연은 호진이 잠들지 않도록 계속해서 말을 걸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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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데, 율이 씨?”

그때, 호진이 운전석을 향해 몸을 내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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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자 친구 있어요?”

갑작스러운 호진의 질문에 당황하기는커녕 기다렸다는 듯 권율이 바로 대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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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니요.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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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오. 그럼 어떤 스타일 좋아해요?”

호기심 어린 친구의 질문에 서연이 상체를 살짝 움직여 그의 대답을 기다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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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당하고, 멋진 여자요.”

권율의 말에 호진이 손가락으로 서연을 가리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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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 당당하고 멋진 여자는 우리 한서연인데. 얘도 남자친구 없어요. 히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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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검사님. 취했네, 취했어. 자자, 내 어깨에 기대.”

서연은 호진의 허리를 잡아당겨 이상한 말이 나오는 걸 차단했다.

그러고는 룸미러에 비치는 권율의 눈빛을 확인했다.

눈동자만 봐서는 그의 감정을 읽을 수 없자 재빨리 몸을 틀어 사이드미러에 그의 입매가 보이는지 살폈다.

뭐야. 안달 난 사람처럼.

그가 당당하고 멋진 여자를 좋아하거나 말거나, 무슨 상관인가 싶어 서연이 짧은 한숨을 내뱉었다.

호텔에서 출발한 지 15분 만에 권율의 차가 호진의 오피스텔 주차장으로 들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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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율이 씨, 잠깐만 기다려줄래요? 호진이가 취한 것 같아서 집까지 데려다주고 올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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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같이 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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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뇨. 괜찮아요.”

건물 안으로 사라졌던 서연이 15분 만에 나타났다. 그러자 권율이 차에서 내려 조수석 문을 열어줬다.

옅은 갈색 눈동자가 권율을 올려다보자, 그가 씽긋 웃으며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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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뒤에 앉으면 목소리가 잘 안 들려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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뭐라 설명할 수 없는 감정을 느낀 서연은 일부러 모호한 얼굴로 조수석에 앉았다.

하지만 안전벨트를 잡아당기려 몸을 튼 서연의 입가에 연한 미소가 걸려 있다는 걸 사이드미러가 알려주었다.

차가 주차장을 빠져나가자 서연이 천천히 숨을 들이마셨다.

흐음. 바닐라, 우드, 레몬…….

바로 옆에 앉아서 그런지 권율 특유의 향기가 더 진하게 풍겨왔다.

서연은 그가 쓰는 향수의 이름을 물어볼까 고민하다 괜히 마른침만 삼켰다.

그러다 뭔가 빠진 듯한 허전함을 느꼈다.

뭐지…… 뭘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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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옷! 호진이가 입고 갔는데, 어쩌죠? 지금이라도 가서 가져올까요?”

차가 이미 큰 대로에 접어들었지만, 돌아가려면 충분히 갈 수 있는 거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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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에 주세요.”

다음?

그가 다음을 말하자 자연스럽게 서연은 그와의 다음 만남을 생각했다.

느낌이 가볍지 않은 이 남자와 다음에 만난다면 어떨까? 하고.

그와 만난 지 몇 시간 안 됐지만, 서연이 예전에 만났던 남자들과 권율은 다를지도 모른다는 기대감이 스쳤다.

기대라니, 서연은 이질적인 감정이 낯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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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진이한테 받아서 김현우 이사님께 맡기든지 할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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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급한 거 아니니까, 편할 때 주세요.”

그가 직접 만나서 옷을 돌려달라고 했더라도 나쁘지 않았을 것이다. 서연은 이미 그가 궁금했으니까.

하지만 그는 야심한 밤에 들려오는 라디오처럼 그저 편안한 주제를 꺼낼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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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보다 근처에 사시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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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게요. 오가다 만났을 수도 있겠는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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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혹시 운동 좋아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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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은 통 못 했는데. 율이 씨는 운동 좋아할 것 같아요.”

서연이 그의 우람한 팔뚝을 힐끔 쳐다보며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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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집이랑 서연 씨 집 중간에 공원이 있거든요. 특별한 일 없으면 매일 한 시간 정도 달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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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마다요?”

형들이 없어서 그런지, 권율은 한결 편안한 표정으로 자신의 운동루틴을 설명했다. 서연은 집으로 가는 내내 권율의 이야기에 푹 빠져 끊임없이 웃었다.

솔직히 말하자면 생각보다 유쾌한 그를 더 알고 싶다 정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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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도 연락처를 물어보면 알려줄까? 아니면, 먼저 말해줄까?’

아파트 입구가 보이자 서연의 머릿속이 복잡해졌다. 그러나 그 고민은 곧 무색해졌다.

그는 서연에게 아무것도 묻지 않았다. 그저 깍듯한 인사를 건넬 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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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즐거웠습니다. 조심히 들어가세요.”

호감…… 아니었어?

서연은 그가 보였던 관심이 단순한 예의였나 싶어 혼란스러웠다.

속으론 아쉽다는 말이 절로 나왔지만, 서연은 먼저 나서지 않았다. 두 사람의 사이엔 일로 엮인 김현우 이사가 있었으니까.

현우로 인해 알았지만, 현우로 인해 나설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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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려다주셔서 감사합니다.”

서연은 연락처를 물어볼 기회를 다시 한번 주고 싶어, 일부러 느긋하게 가방을 정리하다 천천히 내렸다.

허. 이래도?

느림보 같은 서연이 엘리베이터에 오르자, 뒤따라온 권율이 손을 흔들며 웃었다.

웃긴 왜 웃어. 연락처도 안 물어볼 거면서.

엘리베이터 문이 스르륵 닫히자마자 서연이 거칠게 앞머리를 쓸어넘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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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 내가 그렇게 별론가?”

이건 뭐랄까.

당연히 받을 거라고 기대한 상을 놓친 기분?

그건 한서연 인생에 절대 존재하지 않았던 첫 번째 거절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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