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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안달병 (4/130)


4. 안달병
2022.02.13.


연락처를 달라고 말한 서연이 몸을 틀어 권율을 바라봤다.

속으로 ‘미쳤어’를 연발했지만, 겉으로는 여유로운 표정을 잃지 않으려 애썼다.

권율의 목울대가 위아래로 움직이는 걸 확인한 서연이 그의 대답을 기다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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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연 씨.”

애타게 기다리던 그의 대답을 들으려는 순간.

빵빵빠앙―.

어느새 주행 신호로 바뀌었는지 출발하지 않는 서연을 향해 요란한 경적이 울려댔다.

서연은 허둥지둥하고 싶지 않았다.

천천히 고개를 돌려 정면을 응시하고는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액셀을 부드럽게 밟았다.

그러곤 사이좋게 핸드폰을 꺼내 서로의 연락처를 입력하는 모습을 상상했다.

그래, 이제 됐어. 내가 이 정도 했으면 돌하르방도 말귀를 알아듣겠지.

서연은 연락처를 주고받은 이후의 일까지 상상하며 저 멀리 앞서나가고 있었다.

그런 서연의 마음도 모른 채 권율은 알 수 없는 표정으로 정면만 바라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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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쪽으로 들어가시면 돼요.”

서연의 차가 강남 한복판에서도 비싸기로 소문난 단지로 들어갔다. 대형 평수만 있는 유일한 곳이라 재력가들 사이에 인기가 뜨거운 곳이었다.

서연의 집도 비싼 곳이었지만 권율의 집은 한 단계 더 높은 곳이라고 할 수 있었다.

그러고 보니 권율의 재킷 브랜드가 최상위 명품에 그의 차도 범상치 않았다는 걸 깨달았다.

부잣집 아들인가?

서연이 그의 손목에서 우아한 자태를 뽐내고 있는 한정판 명품시계를 힐끔 쳐다봤다.

그가 아무리 유능한 프리랜서라고 해도, 우리나라에 몇 개 들어오지 않은 최상위 브랜드의 한정판이라…….

그녀 자체가 성공한 사업가이다 보니 남자의 경제력을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았지만, 그의 이런 모습도 나쁘지 않았다.

돈 싫어하는 사람은 없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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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기, 세워주시면 돼요.”

권율의 손가락이 지정된 자리를 가리키자 서연의 차가 천천히 멈춰 섰다.

멋있어서 샀더니 영 시끄럽네.

조용한 주차장에 웅웅거리는 엔진소리가 귀에 거슬렸다.

중요한 대화에 방해가 될 것 같자 서연이 시동을 꺼버렸다.

그러곤 뒷자리에 던져놓은 가방에서 핸드폰을 꺼내야겠다고 생각했다.

서연의 입꼬리가 슬며시 올라가며 막 몸을 돌리려는데, 나직한 권율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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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려다주셔서 감사합니다.”

기대에 찬 서연의 눈이 초롱초롱 빛나고 있었다.

그러자 권율의 눈동자가 서연의 손을 지그시 내려다보며 옅은 미소를 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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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니에요. 이렇게 사이좋게 한 번씩 데려다주니까 공평하고 좋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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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권율이 가방을 열자, 동그랗게 커진 서연의 눈동자가 그의 행동을 빠르게 뒤쫓았다.

그래, 난 준비가 됐어. 내 번호를 먼저 불러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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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거, 해보실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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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누구나 아는 유명 팝아트 작품이 요란한 분홍색 표지에 박혀 있었다.

커다란 손이 건넨 책을 얼떨결에 받아든 서연의 눈동자가 이건 무슨 뜻이냐고 묻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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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시회 티켓을 선물하고 싶어서 팝아트 관련 책을 많이 읽었어요. 그러다 이 스티커 책을 샀는데, 주고 싶어서요.”

당연히 나와야 할 핸드폰이 아니라 예상 밖의 물건이 나오자 서연은 실망하지 않으려 무던히 노력 중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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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명한 그림을 스티커로 맞추는 건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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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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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머리가 복잡할 때 해 보니까 좋더라고요. 스트레스 받을 때 한번 해보세요.”

지금 내 머리는 너 때문에 복잡해졌어라고 말하고 싶었다. 하지만 아직 실망하기에는 이르다며 자신을 다독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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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서연 씨를 만나서 깜짝 선물을 받은 기분이었어요.”

선물이라고 말하는 그의 입술이 길게 벌어지자 서연의 심장이 마구 두근거렸다. 지금인가 싶어서.

혼자서만 다급해진 서연이 자신도 모르게 침을 꿀꺽 삼켜버렸다.

그러고는 뒷자리에 던져놓은 가방을 재빨리 집어 올렸다. 번호를 교환하려면 자신도 핸드폰이 있어야 하니까.

분주한 서연의 손이 가방의 잠금장치를 막 여는데, 권율이 너무도 예의 바른 말을 내뱉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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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심해서 들어가세요.”

벌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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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그리고 옷은 다음에 주셔도 돼요. 안 그래도 새 브랜드 때문에 바쁘실 텐데. 제가 귀찮게 해드릴 순 없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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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찮지 않은데.”

그건 잔말 말고 연락처나 부르라는 직접적인 의사 표현이었다.

하지만 권율은 전화번호가 아닌 서연을 향한 칭찬의 말만 쏟아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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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항상 일로 바쁘지만 프로다움을 잃지 않는 서연 씨의 모습. 볼 때마다 정말 감동입니다.”

권율이 너무 깍듯하게 선을 지키자 더는 연락처라는 단어를 언급하기 민망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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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 네. 뭐. 칭찬 감사합니다. 저도 오늘 즐거웠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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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시회가 서연 씨한테 좋은 영감을 줬으면 좋겠네요. 다음에 또 봬요.”

가방의 지퍼를 닫은 권율이 천천히 차에서 내렸다. 두어 번 뒤돌아 손을 흔드는 그의 뒷모습을 하염없이 바라보며 서연이 중얼거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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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종, 거절 방법인가?”

서른을 앞둔 여자에게 너무도 친절하지만, 개인 연락처를 공유하지 않는 남자. 어느 누가 봐도 명백한 거절이었다.

민망함을 추스를 시간도 없이, 서연이 주차장을 황급히 빠져나왔다.

금요일 밤, 도로에는 차가 왜 이렇게도 많은지.

서연은 신호가 걸릴 때마다 애꿎은 핸들만 팡팡 내리쳤다.

그러다 손에 잡힐 듯 잡히지 않는 권율이라는 남자를 생각했다. 막 미치도록 좋은 건 아니지만, 막 미치도록 안달 나게 만드는 그 남자를.

‘이런, 젠장’과 ‘하, 열받아’를 수십 번 외치자 어느새 집 주차장이었다. 참을 수 없는 참담함이 엄습하자 난데없이 화가 솟구쳤다.

그러다 내가 어때서라는 쓸데없는 근자감이 차오르다 이내 ‘툭’ 하고 꺾여버렸다.

거북이처럼 고개를 떨군 채 바닥만 내려다보다 미친 여자처럼 꽥 소리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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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으아악! 짜증 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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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연은 주말 내내, 슬픔과 절망으로 몸부림치다 결국 피부관리에 박차를 가했다.

월요일 아침. 김 실장은 깐 달걀같이 반지르르한 서연의 얼굴을 힐끔 쳐다보며 매출 보고를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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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속단하긴 이르지만 여니블랙의 반응이 과히 폭발적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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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출이 생각했던 것보다 준수하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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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준수라니요. 대표님. 이 정도면 초대박입니다.”

김 실장은 그동안 서연과 직원들이 고생했던 이야기를 꺼내며 감격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그러나 서연의 입술 끝은 아래로 처져 올라갈 기미가 없었다. 이상함을 감지한 김 실장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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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표님. 혹시 걱정되는 일이라도 있으세요?”

서연과 초창기부터 함께해 눈치가 빠른 김 실장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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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아.”

서연의 잇새로 무거운 한숨이 불쑥 튀어나왔다. 사적인 걸, 그것도 월요일 보고가 끝나자마자 말해도 될까? 싶어서.

김 실장은 회사에 무슨 문제라도 생겼나 싶어 서연에게 한 발짝 더 다가서며 경청할 준비를 마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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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이런 얘기를 월요일 아침부터. 하아. 해도 될지…….”

당장 털어놓으라는 듯 김 실장이 상체를 앞으로 숙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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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우. 제 친구가요.”

뜬금없는 친구 이야기에 김 실장의 상체가 제자리를 찾으며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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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남자를 만났는데. 하. 그러니까. 크흠. 만나면 눈에서 꿀이 뚝뚝 떨어질 정도로 호감을 보이거든요. 막 챙겨주고.”

계속하라는 듯 김 실장이 고개를 가볍게 끄덕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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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데, 연락처를 안 줘요. 왜, 그런 걸까요? 도대체.”

서연이 빙빙 돌려 말했지만, 연락처를 안 주는 남자의 심리가 궁금하다는 걸 김 실장은 단번에 파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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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섣부른 판단일 수 있어 매우 조심스럽습니다만, 오랜 경험을 통해 말씀드리자면…….”

서연의 귀가 쫑긋거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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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이 없다고 볼 수 있지 않을까요? 너에게는 애프터를 하지 않겠다는 의지의 표현일 수도 있고요.”

청천벽력 같은 진단에 서연이 기도하듯 양손을 마주 잡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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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다음에 만나자는 말을 하긴 했거든요. 엄청 다정하고 착하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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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가 결혼해보니까요. 남자는 생각보다 심플해요. 좋으면 그걸 어떻게든 표현하더라고요.”

김 실장이 몇 가지 예를 더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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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남편이요. 연애 초창기에 동남아 오지로 출장을 갔거든요. 저랑 연락이 너무 하고 싶어서 왕복 4시간을 걸어서 나왔어요. 딱 15분 통화를 위해서요.”

서연이 손으로 이마를 짚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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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기다 제 남동생이 군대 갔을 때요. 썸타는 여자랑 어떻게든 만나고 싶어서 어찌나 용을 쓰던지. 사격도 못하던 녀석이 특등 사수 달고, 포상 휴가 나왔잖아요.”

두 눈을 질끈 감은 서연이 고개를 숙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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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론 일반화할 수는 없지만…… 좋아하는 여자를 대하는 남자의 행동이 거의 비슷하지 않을까요?”

듣고 보니 다 맞는 말이었다.

지금까지 서연이 만난 남자들도 하나 같이 다 그랬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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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그럼. 호감도 아닌데. 만나기만 하면 꿀벌같이 달달하게 구는 건. 왜 그런 걸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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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장관리, 뭐 그런 거 아닐까요?”

어장관리?

서연은 평생 누구를 어장에 넣어 본 적도 누구의 어장에 들어가 본 적도 없었다.

생전 처음 받는 관리에 마주 잡았던 서연의 손이 무너지듯 책상 위로 떨어졌다.

그런 서연의 행동을 유심히 살펴보던 김 실장이 입꼬리를 쓱 들어 올리며 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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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친구가 아니라. 대표님 얘기…… 맞으시죠?”

회사에서 사적인 얘기를 나누는 게 부적절하지만, 초창기부터 회사를 함께 일궈온 데다 인생의 선배로 어려울 때마다 조언을 아끼지 않는 김 실장이었다.

서연은 모든 걸 털어놓고 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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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게…… 하. 맞아요.”

서연이 자신의 현재 상태를 간단히 설명했다.

눈을 감아도, 눈을 떠도 생각나는 그 남자, 권율에 대해서.

아무리 봐도 호감이고 다음에 만나자는 말도 잘만 하면서 정작 연락처를 주지 않는다고 말이다.

거절이라는 걸 알면서도 거절이 아닌 것 같아 헷갈린다는 심정을 털어놓으니 김 실장이 심각한 표정을 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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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아. 지금이 쌍팔년도도 아니고. 핸드폰, SNS, 메일 등등이 있는데. 그 남자는 왜 하나도 공유를 안 하냐고요.”

서연이 책상을 주먹으로 쿵쿵 내리치며 울분을 토해내자 김 실장이 의미심장한 눈빛으로 쳐다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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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답답해 미치겠죠?”

입을 삐쭉 내민 서연이 고개를 끄덕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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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한테 이러는 남자는 네가 처음이야. 뭐 이러세요?”

앙칼진 고양이 같던 눈매가 한없이 쳐지며 고개를 끄덕였다.

솔직히 말해 권율 같은 남자는 처음이었다.

그가 처음부터 단단히 철벽을 쳐버렸다면 서연도 일말의 미련 없이 돌아섰을 것이다.

하지만 그는 입 안을 행복하게 만드는 사탕 같았다.

너무 맛있어서 또 사고 싶은데 파는 곳을 물어도 안 알려주는 그런 감질나는 기분. 딱 그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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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대로 걸려 드셨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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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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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애는 고도의 눈치싸움이에요. 누가 더 좋아하느냐에 따라 관계의 주도권을 잡죠.”

서연은 김 실장의 조언을 한 마디도 놓치지 않겠다는 듯 눈을 크게 부릅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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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남자는 연애를 한 번도 안 해본 순진남이거나, 머리가 비상한 폭스남이거나, 아니면 둘 다일 수 있어요. 어찌 됐건 획기적인 전략이 필요합니다.”

김 실장은 아예 의자를 끌어다 앉았다.

그러고는 평정심을 잃지 말아야 하는 이유를 자세히 설명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걸 듣고 있자니 서연의 머릿속에 한 가지 생각만이 떠올랐다.

고도의 눈치싸움이든, 획기적인 전략이든 간에 아무리 좋은 방법이 백 가지라도 권율을 만나지 못한다면 무슨 소용인가 싶어서.

만남, 그래 지금 가장 필요한 건 만남이었다. 얼굴을 마주해야 필살기를 써먹든 말든 할 것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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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슨 좋은 방법이 없을까?’

우연을 가장해 자연스럽게 만날 그런 방법 말이다.

생각에 잠긴 서연은 엄지손톱 하나를 완전히 망가트린 후에야 소리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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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 바로 그거야!”

‘유레카’를 외치듯 서연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자 깜짝 놀란 김 실장도 덩달아 몸을 일으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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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장님. 이번에 애슬레저룩 좀 기획해보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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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번부터 말씀하신 운동복 시장에 도전해보시게요?”

남자 얘기를 하다 말고 새로운 기획이라니. 얼떨떨한 표정의 김 실장이 서연을 쳐다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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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통 튀는 디자인이면 좋겠어요. 이렇게요.”

표정이 한결 나아진 서연이 빈 종이에 선을 쓱쓱 그리자 곧 멋진 디자인 하나가 뚝딱 완성됐다.

김 실장은 디자인을 내려다보며 서연의 말을 받아적을 준비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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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능한 빨리 샘플을 만들어주시면 좋을 것 같아요.”

안달병을 발전적인 방향으로 치유하기 위한 그녀만의 계획이 시작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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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루라도 빨리 부탁드릴게요. 이번 주 안이면 제일 좋고요.”

김 실장은 스포츠 의류에 쓰이는 기능성 원단 몇 가지를 생각나는 대로 적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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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샘플은 제 사이즈로 부탁드릴게요. 제가 직접 입고, 성능 테스트 좀 해보려고요.”

금방이라도 뛰쳐나갈 사람처럼 허리를 빙글빙글 돌리며 서연이 말했다.

김 실장은 서연이 방금 디자인한 종이를 챙겨 황급히 사무실을 빠져나갔다.

그러자 미소를 머금은 서연이 강남 시내가 내려다보이는 넓은 창 앞으로 걸음을 옮겼다.

서연이 생각한 건 신박한 일석이조. 돈도 벌고, 남자의 마음도 얻을 수 있는 절호의 기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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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샘플테스트 하는데, 굳이 멀리 갈 필요가 있나. 집 앞에 훌륭한 공원이 있는데.”

집 근처 공원에서 매일 달리기를 한다는 권율의 이야기가 떠오른 서연이 씨익하고 웃었다.

그녀는 우연을 가장한 기막힌 필연을 준비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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