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 가보자고
(5/130)
5. 가보자고
(5/130)
5. 가보자고
2022.02.17.
서연의 지시에 따라 김 실장과 디자인 팀 직원들이 바쁘게 움직였다.
기능성 원단으로 활동이 편한 레깅스를 만들고, 브라톱과 엉덩이를 살짝 가려주는 맵시 좋은 집업 후드까지 완성됐다.
여니블랙의 로고를 오른쪽 다리와 등판에 새기는 데까지 정확히 3일이 걸렸다.
직원들이 분주한 사이 서연도 가만히 있지 않았다.
역동적이면서 섹시한 운동복 디자인을 여러 개 만들었고, 홈쇼핑에 들어갈 디자인도 수정해 공장에 넘겼다.
그 바쁜 와중에도 권율과 우연을 가장해 만날 계획은 차질 없이 진행되고 있었다.
첫째 날에는 가벼운 마음으로 집 근처 공원을 답사했다.
정확한 위치를 확인한 서연이 그가 출몰할 시간대를 예상했다.
매일 운동을 한다는 건 규칙적인 걸 좋아한다는 거고, 그렇다면 왠지 시간을 정해놓고 오지 않을까 싶어서.
아침 시간일 수도 있겠지만, 보통 모든 일과가 끝난 시간이라면 저녁 7시에서 10시 사이. 주말에는 오전 시간일 수 있겠다고 생각했다.
“오늘은 꽝이네.”
둘째 날은 저녁 8시가 조금 넘은 시간에 나갔지만 그를 만나지 못했다.
셋째 날에는 공원 근처 빵집과 커피전문점의 동선을 확인했다.
커피나 빵 봉지를 들고 걸어가다가 우연히 만나는 설정도 나쁘지 않을 것 같아서.
넷째 날에도 전의를 불태우며 공원을 열심히 돌아다녔다. 그러자 회사 직원들이 서연의 혈색이 좋아졌다는 덕담을 건넸다.
그다음 날에는 레깅스의 불편한 착용감을 수정하도록 지시했다.
“봉제선이 자꾸 엉덩이에 말려 들어가고, 가랑이도 끼는 게 걸을 때마다 신경 쓰여요. 절개를 하나 넣어주세요.”
서연의 지시에 따라 직원들이 샘플을 빠르게 수정했다.
우연을 가장한 계획은 의도치 않게 서연의 건강과 운동복 사업을 날로 발전시켰다.
그러다 여섯째 날에는 권율과 비슷한 뒤통수를 보고 심장이 덜컥 내려앉았다.
어찌나 마음이 두근거리는지 자신도 모르게 공원 운동기구에 몸을 숨겼다.
“하. 나 참. 모양 빠지게 이게 뭐 하는 짓이야. 정신 차려. 한서연.”
곧 당당한 모습으로 운동기구 뒤에서 나왔으나 심장을 두근거리게 만든 남자는 권율이 아니었다.
그러자 민망함이 울컥 쏟아져 내렸다.
남자의 마음을 얻기 위해 이렇게까지 해야 하나. 심한 자괴감이 들었다.
“아이 씨. 안 해! 안 해! 내가 다시는 나오나 봐라.”
별 소득도 없이 어두운 밤거리를 걷자 허무하기도, 서글프기도 했다. 허공을 향해 한숨을 쏟아내던 서연이 무심코 하늘을 올려다봤다.
반짝이는 별은커녕 칙칙한 어둠으로 가득한 도시의 밤하늘이 서연의 마음만큼이나 외로워 보였다.
그러다 바람 빠지는 소리를 내며 웃었다.
권율은 알지도 못하는데, 혼자 북 치고 장구 치고. 이게 뭐 하는 짓인가 싶어서.
열심히 노력했지만, 아무것도 남는 게 없었다.
한번 마주치기라도 해야 매력을 뽐내든 꼬시든 할 거 아니냐며 조금만 더 가보자고 자신을 다독였다.
입술을 앙다문 서연이 어깨를 다시 반듯하게 폈다. 확실한 목표 앞에서 쉽게 포기하지 않는 게 한서연이니까.
***
권율을 곧 만날 수 있을 거라는 생각은 착각이었다.
그걸 확인하기까지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2주가 지나자 그를 만나야 할 이유도 불분명해졌다.
그나마 소득이라면 나타나지 않는 권율을 기다리며 동네의 괜찮은 빵집과 카페를 알게 됐다는 정도?
서연은 권율에게 안달 난 마음이 그에게 관심이 있어서인지, 아니면 자신이 여전히 인기가 많다는 걸 증명하고 싶어서인지 이제 헷갈릴 정도였다.
“이 정도 했는데도 못 만난 거면, 인연이 아니야. 이제 그만하자. 여기서 더 하면 추하다. 추해.”
일요일 오후 1시.
느지막이 일어나 씻지도 않은 얼굴로 모자 하나를 눌러쓴 서연이 밖으로 나왔다.
그러곤 혼잣말을 구시렁거리며 터덜터덜 걸었다.
“그래도 헛된 시간은 아니었잖아. 그거면 됐지.”
그나마 평소 해 보고 싶었던 운동복 디자인을 원 없이 했다는 것에 위안 삼으며 애써 건설적인 결론을 내린 서연이었다.
씁쓸한 마음을 아이스 아메리카노로 달래며 달콤하고 짭짤한 빵이 가득 든 봉지를 소중히 안아 들었다.
“나를 위로해주는 건 너희들뿐이야. 나는 공평한 사람이라 너희 모두를 빠짐없이 내 배 속에 넣을 거야. 빨리 가자. 우리 집으로.”
서연은 봉지를 열어 맛있는 냄새가 폴폴 나는 빵을 흐뭇하게 바라봤다.
그때였다.
어딘가 익숙하고 매력적인 향기가 스치듯 지나갔다. 순간 서연이 우뚝 멈춰 섰다.
무슨 조향사라도 되는 듯 자리에 서서 방금 지나간 향기를 잠시 음미했다.
어? 이건…….
우연을 가장해서라도 만나고 싶었던 그 남자. 권율의 향, 바로 그것이었다.
비슷한 향수를 뿌려도 사람마다 가지고 있는 체취가 다르기에 권율 특유의 청량한 향이 말도 안 되게 싱그러운 땀 냄새와 섞여 서연의 비강으로 파고들었다.
서연은 그 자리에 멈춰서 바닥을 물끄러미 내려다봤다.
네모반듯한 보도블록 위로 무릎이 삐쭉 튀어나온 서연의 회색 추리닝이 시야에 걸렸다.
왜 하필…….
순간 당황한 서연은 마주치면 절대 안 된다는 일념 하나로 앞만 보고 걸었다.
얼마나 걸었을까.
분명 바람에 날아간 그 향기가 코끝을 맴돌며 가깝게 느껴졌다.
이제 코까지 고장 났나?
아무래도 이상해 서연이 고개를 들어 올리자 반가움으로 가득 찬 목소리가 왼쪽 귓가에서 들려왔다.
“서연 씨? 서연 씨…… 맞죠?”
이런. 이렇게 만나고 싶진 않은데.
서연은 모자의 캡을 앞으로 조정해 눈썹을 완전히 덮어 얼굴을 가렸다.
“닮은 사람인가 싶어서, 긴가민가했어요. 그런데 정말 서연 씨네요.”
운동을 하다 왔는지, 그의 앞머리가 햇빛에 촉촉하게 빛나고 있었다.
“아, 네. 안녕하세요.”
서연은 어색한 인사를 건네며 아무 죄도 없는 그를 원망했다.
많고 많은 날 중에 왜 오늘이냐고.
캣우먼처럼 매력적인 날도, 대학생처럼 귀여웠던 날도, 운동선수처럼 멋있는 날도 있었는데. 왜, 왜, 왜!
2주 동안 별짓을 다 하다 더는 못하겠다고 나자빠진 날, 결심이 무색하게 왜 나타난 거냐고. 이 무릎 나온 회색 추리닝처럼 모양 빠지게.
권율은 커다란 상체를 아예 접다시피 해 모자 속에 가려진 서연과 마주하려 애쓰고 있었다.
그의 깊은 눈매를 마주한 순간 막 달리기를 하다 온 사람처럼 심장이 터질 듯 쿵쿵거렸다.
“그동안 잘 지내셨어요?”
그의 물음에 ‘아니요’라고 말하고 싶었다.
당신이 모르는 2주 동안 아무도 시키지 않은 개고생을 하느라 얼마나 힘들었는지 아느냐고. 도대체 운동은 몇 시에 나오는 거냐고 묻고 싶었다.
하지만 서연은 복잡해진 감정을 감추며 의례적인 말만 중얼거렸다.
“아. 네. 율이 씨는요?”
그는 여전히 예의 바른 말투와 근사한 목소리로 자신의 근황을 간단히 전했다.
서연은 궁금했던 그의 소식을 들으니 반가우면서도, 반가워하는 제 마음이 불편했다.
“2주 만이네요. 우리. 그날 주차장에서 헤어지고요.”
우리라니. 한서연과 권율이 우리라는 이름으로 묶일 수 있는 사이인가?
“그런가요?”
서연은 애써 모르는 척 대답했다.
냉랭한 서연의 태도에 권율은 어찌할 바를 모르는 듯 손을 가만히 놔두지 못했다.
그래도 대화를 계속 이어나가고 싶은지 열심히 말을 걸었다.
“전시회는 가셨어요?”
“아직. 바빠서요.”
사실 서연이 바빴던 건 권율을 우연히 만나기 위해 애먼 짓을 하느라였다.
“그거, 다음 주까지인데.”
“그 안에 갈 수 있겠죠. 뭐.”
서연은 그의 시선을 피했다. 세수를 안 하고 나와서가 아니라. 그의 다정한 눈빛에 자꾸 흔들릴 것 같아서.
“저번에도 말씀드렸죠. 공원에서 매일 운동한다고요.”
그래. 그 말을 기억하는 바람에 쓸데없이 나만 바빴지.
“아. 네. 보통 몇 시에 하세요?”
서연은 궁금했다. 그가 도대체 몇 시에 운동하는지.
“평일 월, 수, 금은 오전 7시에 하고, 화, 목은 저녁 7시. 그리고 주말에는 12시요.”
하. 그런 줄도 모르고 매번 엉뚱한 시간에 기다리고 있었으니 만날 턱이 있나.
그동안 헛다리를 짚었던 시간이 주마등처럼 지나가자 억울한 마음이 들었다. 하지만 눈치 없는 마음은 그를 만나 반가운지 자꾸만 두근거리고 난리였다.
그건 서연이 길 한복판에서 그의 얘기를 들으며 서 있는 것만 봐도 알 수 있었다.
“저도 좋아하는데. 특히…….”
뭐…… 뭐를? 좋아하는데. 혹시?
“이 집 빵 중에 몽블랑이 제일 맛있어요. 드셔보셨어요?”
권율이 서연의 품에 안겨 있는 빵 봉지를 가리키며 물었다.
하. 그럼 그렇지.
서연은 그에 대한 얄팍한 기대가 꺾이자, 깊은 한숨을 쏟아냈다. 더럽고 치사스러운 이따위 감정 소모는 그만두겠다고.
“아. 네. 기회가 되면 먹어보겠습니다. 그럼!”
서연은 권율에게서 매몰차게 돌아서려 했다.
이 만남을 끝으로 다시는 보고 싶지 않다고 굳은 의지를 보여 주려 했다. 정말 매서울 정도로 차갑게. 그렇게 돌아서고 싶었다.
하지만 의지가 과했는지, 힘이 과했는지.
서연이 들고 있던 일회용 커피 컵에 힘을 준 순간 ‘퍽’ 소리와 함께 뚜껑이 날아가며, 아이스 아메리카노가 폭발하듯 쏟아져 내렸다.
이런 젠장. 이런 미친. 이런 바보. 이게 뭐야!
갈색 커피와 얼음들이 서연의 손목을 지나 회색 추리닝으로 어지러운 물길을 만들었다.
“서연 씨, 괜찮아요?”
아니요. 난 여기까지인가 봐요.
오늘 정말 수치스러워서 못 살겠으니까. 다시는 만나지 마요.
서연은 입술을 꽉 깨문 채 눈을 지그시 감았다.
그러자 권율이 주위를 빠르게 두리번거리며 말했다.
“잠시만요. 어디 가지 말고, 여기 꼭 있어요.”
그는 바로 옆 커피전문점으로 뛰어 들어갔다.
이를 꽉 깨문 서연이 날아간 커피 뚜껑을 줍고 바닥에 나뒹굴고 있는 얼음들을 발로 쓱쓱 밀어 버렸다.
“제가 치울게요.”
황급히 다가온 그가 커다란 발을 쓱 움직이자 잔해들이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여기요. 이걸로 닦으세요. 운동을 나오느라 손수건이 없어서 커피숍에 말하고 가져왔어요.”
누런 냅킨의 까슬까슬함이 서연의 손등에 와 닿았다. 물론 그의 따스한 손길이 그 얄팍한 종이 뒤에서 존재감을 뽐내고 있었지만.
“감사합니다. 부주의한 모습을 또 보이네요.”
두 번째였다.
처음 만났을 때도 탄산수를 흘리더니, 이제는 커피를. 하…….
“아니에요. 저 이거요. 가다가 필요하면 쓰세요.”
권율이 두툼한 냅킨 뭉치를 서연의 빵 봉지 안에 재빨리 밀어 넣었다.
“아. 율이 씨. 그 옷이요. 현우 이사님께 드릴게요. 그럼, 이만.”
더는 그와 마주할 자신이 없어 돌아섰다.
그의 입술이 달싹거렸지만, 그걸 들어줄 여유조차 없었다. 다리는 불쾌하게 축축했고, 볼썽사납게 그려진 커피 자국 때문에 인내심이 바닥이었다.
정말 최악이야. 이걸로 끝! 절대 안 돼. 생각도 하지 마. 그러면 넌 미친 거야.
서연은 그에게서 도망치듯 집으로 돌아왔다.
“엄마가 아홉수에 삼재라고 조심하라고 했는데. 하아. 엄마 말만 잘 들었어도. 하. 혹시 망신살도 있었던 거 아니야?”
욕실로 가는 길. 다리에 붙어있던 바지를 벗어 던진 서연이 짜증을 쏟아냈다. 그래야 이 수치스러운 상황이 말이 될 것 같아서.
서연은 소나기처럼 쏟아지는 샤워기 앞에서 한참을 서 있었다.
권율의 다정한 눈빛과 당황한 얼굴이 끊임없이 재생되자 도저히 안 되겠는지 두 손으로 얼굴을 가려버렸다.
“하아. 이봐요. 권율 씨. 제발 좀 나가요. 내 머릿속에서.”
서연이 고개를 세차게 흔들며 머릿속에 사는 권율을 쫓아버렸다.
한참 만에 욕실에서 나온 서연이 우유를 따듯하게 데웠다.
그러고는 빵 봉지를 거꾸로 들어 식탁 위에 모두 쏟아놓았다.
무거운 빵들이 후드득 소리를 내며 떨어지자 그 위로 권율이 넣어준 누런 냅킨이 살포시 내려앉았다. 그리고 하얀 종이 하나.
응?
서연의 손가락이 그 종이를 천천히 집어 올렸다.
두 번 접힌 종이를 펼치자 반듯한 글씨가 모습을 드러냈다.
- 010-XXXX-XXXX 연락 기다릴게요.
그렇게 알고 싶었던 숫자들이 거기 적혀 있었다. 순간 그를 만나기 위해 노력했던 시간이 영화의 한 장면처럼 재생됐다.
말없이 종이를 내려다보던 서연의 고개가 천천히 올라갔다.
그러자 그녀의 어깨가 일직선을 이루며 곧게 펴졌다.
입가가 슬며시 벌어지며 바람 빠지는 소리가 크게 새어 나왔다.
“허. 하아. 하…… 나 참.”
서연이 그의 전화번호가 적힌 종이를 집어삼킬 듯 쳐다봤다.
“……아무리 기다려 봐라. 내가 전화하나!”
그제야 서연의 가지런한 이가 환하게 모습을 드러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