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 우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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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우연
2022.02.24.
바람을 등지고 선 서연이 권율을 바라봤다. 긴 머리칼이 춤을 추듯 서연의 뺨에 와 닿았다.
운동선수처럼 거대한 덩치와 너무도 남자다운 이목구비가 수줍어하는 표정과 묘하게 어울렸다.
벚꽃이 눈송이처럼 흩날렸다면 그가 더 아련해 보였을지도 모르겠다고 서연은 생각했다.
“그날, 서연 씨가 커피를 닦아내고 냅킨을 그대로 쓰레기통에 버렸으면 어쩌나…….”
“…….”
“아니면 내 전화번호가 들어 있다는 걸 알고도 일부러 버렸을까 봐…… 걱정했어요.”
마주 보고 선 두 사람 위로 구름이 지나가자 눈 부신 햇살이 쏟아져 내렸다.
서연의 눈이 가느다래지자 권율이 커다란 손을 들어 올려 그늘을 만들어줬다.
“그러다, 또 기대했어요.”
한 뼘밖에 안 되는 손 그늘 덕분에 한결 편안해진 서연의 눈동자가 권율의 입술을 바라봤다.
“오늘이라도 서연 씨에게서 전화가 올지도 모른다는. 그런 기대요.”
기다렸구나.
서연이 그렇게 안달을 내며 듣고 싶었던 그 말을 권율이 들려줬다.
그가 들려줄 다음 말을 기대하며 서연의 시선이 그의 턱 끝에 못 박히듯 고정됐다.
“잠잠한 전화기를 10분에 한 번씩 들여다보면서도 오늘이 가기 전에는 짧은 문자라도 왔으면 좋겠다. 그랬어요.”
“왜요?”
서연이 불쑥 물었다. 정말 궁금해서.
바에서 왜 날 쳐다봤냐고, 호진이에게 재킷을 벗어주며 왜 내 허락을 구했냐고, 왜 연락처를 묻지도 않고, 넌지시 달라고 말했는데도 모른 척했냐고 말이다.
서연의 ‘왜요’라는 한 마디 안에 많은 질문이 숨어 있었다.
권율은 생각을 정리하려는지 시선을 위로 올려 햇살을 마주했다.
얇아진 그의 눈매와 침을 삼키며 위아래로 크게 움직이는 목울대를 서연이 물끄러미 올려다봤다.
“생각이 많았어요. 재고 따지려고 한 게 아니라. 서연 씨한테 내가 괜찮을까. 싶어서요.”
서연은 어떤 말을 해야 할지 망설였다.
그때 배달 오토바이 한 대가 그녀의 뒤로 빠르게 달려왔다.
그러자 권율의 커다란 팔이 서연의 어깨를 제 쪽으로 잡아당겼다. 너무도 조심스러운 움직임이었는데 그의 팔이 닿는 어깨가 아픈 듯 얼얼했다.
가깝다. 너무.
서연은 갑자기 높은 곳에 오른 사람처럼 잠시 귀가 먹먹해졌다.
침을 꼴깍 삼키자 귀에서 달칵 소리가 났다. 그러자 주변의 소리가 다시 선명하게 들려 왔다. 그의 목소리도.
“아무래도 안 되겠어요. 어디 좀 앉을까요?”
서연이 올려다본 시선 끝에 그의 날카로운 턱선이 오토바이가 또 오는지 두리번거리고 있었다.
인도 한복판에서 할 얘기는 아닌 것 같아 서연도 고개를 끄덕였다.
권율은 서연을 안전한 길 안쪽으로 옮겨놓은 후에야 커다란 팔을 거둬들였다.
어깨를 누르던 묵직한 팔이 사라지자, 따듯하게 입고 있던 겨울 코트를 벗어버린 듯 허전했다.
두 사람은 오던 길을 되돌아가 여린 잎이 돋아난 나무 밑 벤치에 앉았다.
그러곤 무슨 말을 먼저 꺼내야 할지 서로의 눈치만 살폈다.
어색해진 서연이 말캉한 젤리가 들어있는 음료수를 홀짝거리며 오물오물 볼을 씰룩거렸다.
그러다 아무래도 안 되겠는지, 그녀가 먼저 입을 열었다.
“난, 거절당했다고 생각했어요.”
거절이라는 단어가 나오자 권율이 아예 상체를 돌렸다. 그가 입술을 달싹거렸지만, 서연이 한발 빨랐다.
“한 번도 거절당해본 적이 없어서 당연히 율이 씨도 나한테 호감일 거라고…… 생각했어요. 나 되게 재수 없죠.”
“아니요. 전혀.”
당황한 그가 두 손을 들어 세차게 흔들자 서연이 피식하고 웃었다.
“처음 만났을 때 연락처를 안 줘서 한 번, 두 번째 만났을 때 물어봤는데도 안 줘서 다시 한번. 그리고 다른 건 비밀이에요.”
우연을 가장해 만나고 싶어 공원으로 운동을 나갔던 건 차마 말할 수 없었다.
“서연 씨 얘기를 듣고 보니, 비겁했네요.”
“이제 알았어요? 아, 진짜 그때 생각만 하면…….”
서연이 답답하다는 듯 제 가슴을 가볍게 두드리자, 당황한 그의 얼굴이 붉게 물들었다.
“그럴 수밖에 없는 이유가 있었다고 하면 너무 핑계 같을까요?”
피치 못할 사정이 있었던 사람처럼 그가 말했다.
꿰뚫어 버릴 것 같은 서연의 눈빛이 그에게로 향했다.
그러다 그의 말을 믿어주고 싶었다. 그를 단정할 순 없지만, 상황을 모면하기 위해 괜한 말을 꾸며낼 것 같진 않아서.
“그 대신 두 번은 안 돼요. 난 거절에는 약하지만, 핑계에는 강하거든요. 이젠 안 봐줄 거예요.”
“그럼, 연락 기다려도 돼요?”
“아니요. 기다리지 말고 직접 하세요. 대신…….”
동그랗게 뜬 갈색 눈동자가 권율의 얼굴을 정면에서 쳐다봤다.
“기다리세요. 아직 알려주기 싫어요.”
당당하고, 단호한 모습. 그게 한서연이었다.
“네. 기다릴게요.”
서연의 감정을 이해한다는 듯 권율이 답했다.
“근데 언제 알려줄 거냐고 안 물어요? 내가 알려주기 싫어서 핑계 대는 걸지도 모르잖아요.”
그가 순순히 받아들이자 그 모습이 싫지 않으면서도 투정을 부리듯 서연이 말했다.
그러자 그가 빙그레 웃으며 시선을 아래로 내렸다.
속눈썹이 왜 이렇게 예뻐. 하아. 저 남자한테 지금 당장 알려주고 싶다. 내 전번.
서연의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권율은 서연이 원하는 대로, 마음이 가는 대로 하라고 말했다.
너무도 깔끔한 남자, 곤란한 행동 따위는 절대 하지 않는 남자. 그게 권율이었다.
하지만 서연은 저 깔끔한 남자 때문에 머릿속이 복잡했다.
전화번호는 다음에 알려준다고 해도 오랜만에 만난 기념으로 밥 한 끼 먹을 수 있지 않을까? 싶었다.
그러다 마음 깊은 곳에 숨겨놓은 브레이크 등이 빨갛게 들어왔다.
낄 때 끼고 빠질 때 빠질 줄 알아야지. 지금은 쿨하고 멋있게. 원래 한서연 스타일대로 빠져야 할 때라고.
너무도 아쉬웠지만, 그래도 자리를 정리했다.
“……그만 갈까요?”
서연의 시선이 앉아 있는 권율을 내려다보자 예전 서연이 그랬던 것처럼, 그가 일부러 느릿느릿 옷매무새를 단장하기 시작했다.
이미 너무도 단정한 셔츠의 어깨선을 맞추고 양쪽 소매도 쓸어내려 정리했다.
으, 이 싫지 않은 느림보.
단장을 마친 그가 마지못해 몸을 일으켰다. 아래를 바라보던 서연의 시선이 순식간에 하늘로 향했다.
“밥 먹자고 하면, 다음에. 라고 하실 거예요?”
그래도 고맙네. 밥 먹자고 해줘서.
모범생처럼 ‘연락이 올 때까지 기다릴게요’라고 했다면 서연은 살짝 섭섭할 뻔했다.
“마음이 흔들릴지도 모르니까. 그만 꼬셔요. 수저도 들기도 전에 010 막 이러면서 번호 불러줄지도 몰라요.”
서연의 농담에 그가 어깨를 들썩이며 웃었다.
그런 격한 반응은 처음이었다.
“서연 씨가 그렇게 말하면 제발 밥 먹으러 가달라고 사정하고 싶은데요.”
“정말 그러지 마요. 방금 뭐 먹으러 가면 좋을까 생각했어요. 벌써 침 고인다.”
유쾌한 선 긋기. 서연은 이미 마음을 바꿀 생각이 없다는 듯 가벼운 농담 안에 무거운 진심을 담고 있었다.
“그 대신, 부탁 하나만 해도 돼요?”
부탁이라는 말에 서연이 고개를 끄덕였다.
“옷이요. 현우 형 말고 저한테 직접 주세요. 만나서.”
권율은 그것만큼은 물러서지 않겠다는 듯 서연에게로 한 걸음 더 다가섰다.
그러자 그의 따듯한 숨이 서연의 정수리 위로 내려앉았다.
“언제요?”
“다음 주 토요일?”
“어, 그때는 호진이랑 약속이 있어요. 호텔 뷔페 가고 싶다고 노래 부른 지가 오래라 꼭 가야 해요.”
권율의 눈썹이 밑으로 살짝 내려온 게 실망한 기색이 역력했다.
“다음다음 주 토요일, 괜찮아요?”
서연이 고개를 옆으로 기울여 권율의 까만 눈동자를 마주했다. 그러자 그가 고개를 끄덕였다.
“어디서요?”
“집 근처 공원 입구요.”
“몇 시요?”
“12시요. 근데 운동하는 시간 아니에요?”
“하루 째죠. 뭐. 누가 출석 부르는 것도 아닌데.”
“오오. 박력 있다.”
서연이 몸을 옆으로 틀어 걸어갈 자세를 취하자 권율의 기다란 다리가 성큼 다가와 나란히 섰다. 자기 자리가 서연의 옆이라는 듯.
두 사람은 적당한 거리에서 걸었다.
주차장까지 가는 길이 1Km쯤 떨어져 있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지만 아무도 내색하지 않았다.
“만약에. 누가 급한 일이 생겨서 못 나가면 공원 안에 운동기구 있잖아요.”
“운동기구요?”
“커다란 바퀴같이 생긴 애요. 허리를 좌우로 이렇게 움직이는 거요.”
서연이 만세를 부르듯 두 팔을 올려 좌우로 몸을 쭉 펴자, 권율이 곧바로 알아들었다.
“거기 기둥 밑에 메모라도 붙여놓기로 해요. 난 피치 못할 사유로 못 나오고, 다음 약속은 언제, 어디서, 몇 시에 보자. 어때요?”
황당한 서연의 말에 권율이 웃었다.
전화번호만 있다면 이런 수고는 필요치 않았다.
하지만 두 사람 사이에 약간의 사연이 있었으니 불편을 감수해야만 했다.
“뭐랄까. 되게…….”
“이상하죠.”
실없는 이야기를 나누다 보니 어느새 낯익은 서연의 차 앞이었다.
“오늘 정말 반가웠어요. 서연 씨.”
“2주 뒤 토요일 정오, 장소는 공원 앞. 꼭 나와요.”
서연이 가볍게 손을 흔드는 순간, 권율은 아쉬웠다.
밥이 안 되면 어디 들어가서 커피라도 마시면 안 되냐고 다시 졸라볼까도 생각했다. 왠지 그러면 들어줄 것 같아서.
운전석에 앉은 서연이 창문을 살짝 내리고는 잘 가요. 라고 말하곤 미련 없이 떠났다.
권율은 못 박히듯 서서 아쉬움을 삼켜야만 했다.
***
서연은 매일 매일 권율을 생각했다.
하루에 열두 번도 더 하던 생각이 미술관 만남 이후로 폭발적으로 많아졌다. 아니, 아예 머릿속에 권율의 방을 따로 만들어놓고 수시로 꺼내 그를 확인했다.
디자인이 잘 안 풀릴 때나, 직원들이 가져온 디자인이 형편없을 때나, 키가 큰 남자의 뒷모습을 볼 때나. 그냥 아무 때나.
차라리 호진과의 약속을 다음번으로 미루고 권율을 만났으면 어땠을까.
서연은 호진을 만나기 위해 호텔로 가는 길 한복판에서도 그를 생각했다.
토요일 정오, 공원 입구에서 만나자고 했었는데.
다음 주 같은 요일, 같은 시간, 같은 장소에서 권율을 만나면 오늘보다 더 반갑겠지. 그래 그럴 거야.
서연은 제 마음을 애써 진정시켰다.
상념에 젖은 서연이 발레파킹을 맡기고 호텔로 막 들어섰다.
높다란 천장이 은하수라도 된 것처럼 크리스털 장식으로 반짝이자 그가 또 생각났다. 예쁜 것을 보니까 그냥 이유 없이, 그렇게 말이다.
커다란 남자를 머릿속에서 쫓아내기 위해 서연이 톡을 보냈다.
<나 로비. 어디셔?>
<도착하기 10초 전>
서연이 톡을 확인하자마자 호진이 헐레벌떡 나타났다.
“우리 늦었어?”
“한 10분? 이거, 이거 돈 좀 벌더니, 마음가짐이 글러 먹었어. 옛날엔 한 시간 전에 와서 대기 타더니.”
“하아. 그러게. 내 배에 기름이 좀 꼈지. 크큭. 화장실 좀 갔다 올게. 장을 비우고 와야 초밥 하나라도 더 들어가지.”
호진이 깔깔거리며 화장실로 가자 서연은 잠시 로비를 서성거렸다.
토요일 점심이라 그런지 결혼식이며, 돌잔치를 하는 사람들로 주변이 시끄러웠다.
서연은 또 그를 생각하며 천장만 바라봤다.
투명한 낚싯줄에 걸린 크리스털들이 서연의 마음처럼 살랑살랑 흔들리고 있었다.
“한, 서연? 서연아.”
누군가 서연의 이름을 불렀다.
자신에게 반말을 할 수 있는 몇 안 되는 사람. 익숙하지만 불쾌한 목소리가 들리자 서연의 이마가 단번에 구겨졌다.
“꼭 아는 척을 해야겠어? 뭐 좋은 사이라고.”
퉁명스러운 목소리에도 남자가 천천히 다가왔다. 곱디고운 한복을 입은 남자가 서연을 애틋한 눈빛으로 쳐다보며 말했다.
“넌, 여전히…… 예쁘구나.”
이걸 고맙다고 해야 하나, 꺼지라고 해야 하나. 서연이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고는 상대할 가치조차 없다는 듯 몸을 돌려버렸다.
그러자 한복을 입은 남자가 바짝 서연의 옆으로 따라붙었다.
“2년도 더 지났는데. 넌 정말…… 그대로네.”
“배신의 아이콘께서 하실 말씀은 아닌 것 같은데. 특히 그 복장으로.”
서연의 검지가 남자의 위아래를 허공에서 훑었다.
“서연아. 나 말이야. 결혼했어. 근데…… 서연아, 하루도…….”
“됐어. 거기까지!”
알고 싶지 않은 TMI였다.
서연은 전 남자친구의 말을 댕강 잘라버렸다.
이럴 줄 알았으면 권율을 만나는 건데. 재수 더럽게 없네. 라고 중얼거리는 사이, 귀청이 떨어져 나가는 소리가 들렸다.
“오빠! 거기서 뭐 해! 너, 너너, 한서연?”
서연이 눈을 질끈 감아버리며 중얼거렸다.
“아홉수, 삼재, 망신살. 이런 젠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