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 TM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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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 TMI
2022.02.27.
서연은 무시가 상책이라고 생각했다. 저 끔찍한 인간들을 더는 마주하고 싶지 않아서.
뷔페 앞에 있는 의자에 가 있어야겠다는 생각으로 서연이 걸음을 옮기려는데 비아냥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이를 어쩌나. 오빠는 내가 가졌는데.”
서연이 한쪽 입꼬리를 올리며 가소롭다는 듯 웃었다.
절친까지는 아니었지만, 그래도 대학을 함께 다녔고 생일을 꼭꼭 챙기던 나름 친구의 범주에 들어 있었던 사이였다.
서연의 남다른 감각과 센스를 부러워하는 줄만 알았지, 서연의 남자친구를 탐내는 줄은 몰랐다.
아예 모르는 사람에게 뒤통수를 맞았다면 안 보면 될 일이지만, 건너 건너 아는 사람들이 걸쳐 있는 사이라 두 사람의 이야기를 모를 수가 없었다.
우여곡절 끝에 결혼했다는 소식을 전해 들었지만, 실제로 맞닥트리니 기분이 훨씬 더럽고, 불쾌했다.
“너, 여긴 왜 온 거야?”
한때는 대학 동창이자 친구였던 여자는 연분홍 치마의 허리를 짚으며 물었다.
서연은 대꾸할 가치조차 없다는 듯 앞만 보고 걸었다. 그러자 한복 치마를 휘날리며 그녀가 달려왔다. 그러고는 뻔뻔하게도 서연의 앞을 가로막았다.
서연의 눈동자가 차갑게 쏘아보자 침을 꿀꺽 삼킨 동창이 말했다.
“그럼. 질문을 바꿔서, 우리는 왜 온 거 같아?”
여자가 자신의 한복을 쳐다보라며 눈짓하자 서연은 어이가 없었다.
“비켜.”
얼음장보다 냉랭한 목소리가 들려 오자, 한때 배신했던 남자가 빠르게 달려와 여자를 말렸다.
“서연이 놀라잖아. 이게 뭐 하는 짓이야.”
“허. 나 참. 한서연이 뭐라고 아직도 절절 매. 오빠랑 결혼해서 토끼 같은 딸 낳아준 사람이 누군데!”
서연이 머리를 감싸 쥐었다.
한복을 입은 커플과 모델 같은 여자의 실랑이를 주목하는 눈들이 하나둘 늘어가고 있었다.
“서연아. 미안해. 이렇게 못난 모습만 또 보인다.”
“지금 뭐 하는 거야? 내 앞에서.”
“어찌 됐건 우리가 서연이한테 씻을 수 없는 상처를 준 건 맞잖아. 넌 왜 이렇게 매사 감정적이야. 지친다. 정말.”
기가 막히면 웃음이 나온다고 했던가.
서연이 미친 사람처럼 피식거리며 웃었다. 이 거지 같은 상황이 도저히 믿을 수가 없어서.
그러자 일이 걷잡을 수 없이 이상한 방향으로 흘러갔다.
원래도 다혈질이었던 동창은 화를 참지 못하고 들고 있던 전화기를 바닥에 내동댕이쳤다.
팍 소리와 함께 주변의 모든 시선이 단숨에 모아졌다.
몇몇은 동영상 촬영이라도 하려는지 전화기를 꺼내 들었고, 저 멀리서 검은 양복을 입은 보안요원들이 걸어오는 모습도 보였다.
“전 여친 만나니까 가슴이 막 설레? 평생에 한 번뿐인 딸내미 돌잔치에서 이게 할 짓이냐고!”
“우리, 잘 지냈냐는 인사도 아직 안 했어. 오버 좀 하지 마.”
“뭐. 우리? 우우리?”
더 험한 꼴을 보기 전에 서연은 자리를 뜨려고 했다.
정말 그럴 생각이었다.
난 친구와 호텔 뷔페를 먹고 싶었을 뿐이야. 부부싸움은 집에 가서 해. 이 미친 것들아. 라고 서연은 소리치고 싶었다.
하지만 꾹 참았다.
이를 꽉 깨문 서연이 막 발을 떼려는데 뻔뻔한 동창이 울먹이기 시작했다.
“난 빈껍데기하고만 사는데. 넌 차암 좋겠다. 아직도 이렇게 애틋하게 생각하는 남자가 있어서. 흐흡. 넌 왜 하필, 남의 돌잔치 하는 호텔에 나타나선. 사진도 다 못 찍었는데. 이게 다 뭐야.”
사람들의 날 선 시선이 서연의 얼굴로 향했다.
여기서 물러난다면 남의 남편 마음을 흔들어 놓고, 평생 한 번뿐인 돌잔치를 망친, 천하의 나쁜 여자가 되겠지.
그건, 도저히 참을 수 없는 문제였다. 그래도 정말 참으려고 했다.
“뭐야. 사람들이 왜 이렇게 모였어? 으잉. 이 잡것들이 왜 여기 있어?”
화장실을 다녀온 호진이 한때 서연의 눈물을 뽑아낸 주역들을 향해 삿대질하며 물었다.
“하. 나 참 기가 막혀서.”
친구 호진의 얼굴을 보자 참으려던 서연의 감정이 울컥해버렸다.
“서연아. 미안해. 오빠가 정말. 널 볼 면목이 없다.”
“내 이름 좀 그만 불러. 소름 끼치니까.”
마음을 굳게 먹은 서연이 매섭게 돌변했다.
“이 호텔, 저 호텔로 돌아다니면서 바람필 때는 언제고. 무슨 낯짝으로 아는 척을 해.”
서연의 말에 주변이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주목받는 것도 짜증이 나는데, 죄인처럼 서 있는 남자와 피해자인 척 울고불고하는 여자 때문에 짜증이 솟구쳤다.
“야! 넌 왜 울어? 억울해? 난 그때 피눈물 흘렸어.”
서연이 피해자 코스프레를 하는 동창의 눈을 똑바로 바라봤다.
“나 몰래 별짓 다 해놓고, 이제 와 빈껍데기? 하. 내가 더러워서 못 만나겠다고 했을 때, 좋다고 홀랑 주워간 사람이 누구야?”
“…….”
“바로 너야. 너! 이걸 뭐라고 하는지 알아? 자.업.자.득!”
그때, 주변의 누군가가 박수를 쳤다.
하. 망신살.
“야야! 상대하지 말고 가자. 에이 더러운 것들.”
호진이 호위하듯 팔짱을 끼자 서연이 뒤를 홱 돌아보며 말했다.
“부끄러움을 알아야 그게 사람이지.”
서연과 호진이 당당하게 걸어가자, 홍해가 갈라지듯 사람들이 길을 터줬다.
그러자 용기 있는 누군가가 ‘멋있다’라며 환호를 보냈다.
으. 쪽팔려.
재미있는 구경이 끝났다는 듯 사람들이 흩어진 자리에 서희가 서 있었다.
연수원 동기의 결혼식에 참석하기 위해 막 도착했는데 낯익은 모습에 홀리듯 발걸음을 옮겼다.
흥미로운 표정을 한 서희가 두 사람이 사라진 방향을 빤히 쳐다봤다. 그러고는 피식하고 웃었다.
***
재벌 회장님들만 사는 동네에서도 명당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단독 주택. 높다란 담 위로 해송들이 멋스러운 자태를 뽐내고 있었다.
지이잉―.
자동으로 열리는 주차장 문이 열리자 서희의 차가 빠르게 안으로 들어갔다.
주차장과 연결된 문을 열고 나오자 군더더기 하나 없는 단정한 정원수와 봄꽃들이 가지런히 피어 있었다.
그리고 한가운데 반듯한 직사각형 모양의 이층집이 견고한 성처럼 자리 잡고 있었다.
“저 왔어요. 할아버지.”
서희가 현관 앞에 있는 조각상의 머리를 쓱 문지르며 집안으로 들어섰다.
“우리 서 변호사 왔니?”
찔러도 피 한 방울 안 나올 것 같은 꼬장꼬장한 모습의 석구가 반갑게 아는 척했다.
수백억 하는 강남 빌딩을 대출 하나 없이 전액 현금으로 샀다는 현금 부자, 권석구.
강남 일대에 알짜배기 빌딩들의 주인이 알고 보면 한 사람이라는 기사가 나올 만큼 그는 유명한 재력가였다.
사실 석구가 일 년 동안 받는 임대료만 해도 여느 중견기업 영업이익보다 많았다.
“컨디션은 괜찮으세요?”
“오냐. 늙은이야 뭐 죽을 때까지 관리를 잘해야지.”
살가운 서희가 석구의 주름진 손을 잡으며 건강 체크에 들어가자, 외손자의 관심이 싫지 않은 석구였다.
“율이는요?”
“네가 가서 우리 일등 손자 좀 데리고 나와라. 누가 지 엄마 잡아먹을까 봐 아주 딱 붙어서는 주방에서 나오지를 않는다.”
석구가 혀를 끌끌 차자, 서희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넓은 거실을 가로질러 주방으로 가자 산해진미가 식탁에 가득했다.
집안일을 봐주는 사람들이 분주하게 움직이는 사이, 거대한 덩치의 권율이 바닥에 양반다리를 하고 앉아 엄마 연희 옆을 지키고 있었다.
그 모습을 못마땅한 얼굴로 쳐다보는 사람이 둘 있었다. 석구와 사실혼 관계인 김 여사와 서희의 엄마인 재숙.
“저 왔어요.”
“어. 서희 왔구나.”
코스모스같이 여리여리한 연희가 반가워하며 웃어 보이자, 서희의 엄마 재숙이 앞치마를 툭툭 치며 말했다.
“율아. 형 왔으니까. 너 이제 나가. 몸이라도 작아야지. 자리 차지하고 앉아 있으니까 좁다, 좁아.”
권율은 고모의 말에도 미동조차 없었다.
어렸을 때는 할아버지 집만 다녀오면 말없이 눈물짓는 엄마가 이상했다.
하지만 머리가 커지고 눈치가 생기자 엄마가 이 집에서 어떤 대접을 받는지 똑똑히 알았다.
그때부터였다. 할아버지 집에만 가면 권율이 엄마 곁을 떠나지 못하는 것이.
“이거 다 끝나면 나갈게요. 엄마, 이쪽 줄 뒤집을까요?”
“율아. 엄마가 할게. 형이랑 나가서 얘기도 하고 놀아. 아니면 상현이 뭐하나 가 봐.”
동생 상현이까지 소환해도 권율은 꿈쩍도 안 했다.
“게임하고 있겠죠. 이것까지만 하고 일어날게요.”
“괜찮다니까. 엄마가 금방 해.”
연희가 일어나라고 눈짓, 손짓해도 권율은 말없이 전만 뒤집고 있었다.
조용하고 착하지만 한 번 고집을 부리기 시작하면 할아버지 석구도 두 손 두 발 다 들게 만드는 사람이 권율이었다.
그런 걸 너무 잘 알기에 서희는 아예 식탁 의자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놔두세요. 권율 고집을 누가 꺾어요.”
서희는 접시 위에 놓인 육전 하나를 집어 먹으며 말했다.
“자네는 참 좋겠네. 든든한 아들 보초로 딱 세워놓고.”
김 여사가 비꼬듯 말하자 권율의 눈빛이 순간 차갑게 변했다.
그러자 연희가 입 모양으로만 권율의 이름을 불렀다.
“어디 아들만 그래요? 남편은 어떻고. 아주 제 마누라라면 애달파 죽는데. 세상 그런 호구가 없지. 안 그래. 올케?”
재숙의 말에 서희가 연신 헛기침을 해댔다.
“넌 목감기야? 음식 앞에 두고 왜 자꾸 기침해. 침 튀면 어쩌려고. 넌 빨리 거실로 나가. 아휴. 정신없어.”
재숙이 아들 서희를 흘깃 쳐다보자 서희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그만하라는 신호를 보냈다.
“율이 전 다 부칠 때까지 기다릴게요. 야. 권율. 얼마나 남았냐?”
서희의 물음에 연희가 대신 대답했다.
“어. 다 됐어. 율아. 이제 나가도 돼. 나머지는 엄마가 정리할 테니까.”
사람들의 시선이 부담스러운 연희가 권율의 팔을 잡아끌었다.
그러자 권율이 엉거주춤 일어나 김 여사와 고모인 재숙의 눈을 바라보며 말했다.
“엄마, 필요한 거 있으면 저 부르세요. 꼭.”
“어어. 알았어. 얼른 나가 있어. 엄마가 알아서 할게.”
김 여사의 구시렁거리는 소리가 들리자 권율이 차갑게 쏘아봤다.
그러자 김 여사의 목이 거북이처럼 쑥 말려 들어갔다.
눈치 빠른 서희가 권율의 단단한 팔뚝을 붙잡아 제 쪽으로 잡아당겼다. 그러고는 손가락으로 2층을 가리켰다.
같이 살진 않지만, 석구는 장손인 권율의 방으로 따로 만들어놓았다.
언제든지 자고 갈 수 있도록. 그건 다른 손자에게 없는 오로지 권율만의 특권이었다.
그래서인지 2층 공간은 권율을 위해 꾸며놨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아무리 서희가 첫 손자에 법무법인 서우의 후계자로 잘 나가지만, 권 씨 성을 물려받은 권율에게는 대적할 수 없었다.
두 사람은 2층으로 올라가 정원이 그림같이 내려다보이는 거실 소파에 앉았다.
“암튼, 이 효자 녀석.”
“고모가 날 효자로 만들잖아.”
외숙모인 연희가 얼마나 호된 시집살이로 고생하는지 잘 알기에 서희도 그쯤에서 말을 줄였다.
“어디 갔다 왔어?”
토요일에 정장 차림으로 나타난 서희를 보고 권율이 물었다.
“어, 동기 결혼식. 아! 내가 오늘 누굴 봤는지 알아?”
“연예인?”
“아니. 하하. 너도 그 장면을 봤어야 하는데.”
서희가 낄낄거리자 권율은 이 형이 뭘 잘못 먹었나 하는 눈빛으로 쳐다봤다.
“우리 그때 바에서 만났던 여자들 기억나? 왜 현우랑 같이. 쇼핑몰하고, 검사라는. 한서연, 여호진이라고 했지. 아마?”
서연의 이야기에 권율의 눈동자가 커다래졌다.
“왜?”
“동기 결혼식을 호텔에서 했거든. 막 로비에 들어서는데 그 여자가 딱 보이는 거야.”
권율은 호진과 호텔 뷔페를 먹으러 간다는 서연의 말이 떠올랐다.
“그런데 웬 한복 입은 남자가 한서연이라는 그 여자 앞에 딱 서더라. 막 애절한 눈빛으로 몇 마디 건네는데 어디서 한복 입은 여자가 득달같이 달려와서 생난리를 치는 거야.”
사랑과 전쟁의 한 장면 같았다고.
남편의 전 여자친구, 두 사람이 만나는 걸 발견한 부인의 오열이 가관이었다며 서희가 열심히 설명했다.
“근데 더 대박은 뭔지 알아? 알고 보니 한복 커플이 바람이 나서 한서연 그 여자의 뒤통수를 쳤다는 거야. 이야. 드라마야. 드라마.”
권율의 머릿속에 호텔 주차장에서 싸우던 진상 커플의 모습이 떠올랐다.
“처음에 구경하던 사람들도 한서연이 내연녀인가 싶어서 눈에 불을 켜더니. 나중에 얘기를 듣다 보니 아니거든. 그러니까 막 잘한다고 박수치고 그러더라.”
“그래서. 어떻게 됐어?”
“뭘 어떻게 돼. 뭐 씹은 표정으로 그 검사 친구랑 팔짱 끼고 바로 나가던데.”
권율은 순간 후회했다.
자신이 처음부터 용기 있게 나갔다면 전화를 걸어 오늘 하루 어땠냐고 넌지시 물어볼 수 있었을 텐데.
아니면 집에 가는 길에 자연스럽게 불러내 모른 척 위로라는 걸 해줄 수도 있었을 텐데. 하고 말이다.
모든 것이 아쉽고, 안타까웠다.
‘집 앞으로 가볼까? 차에 쪽지라도?’
이젠 작은 망설임 따위도 버린 권율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