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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 자신만의 방법 (9/130)


9. 자신만의 방법
2022.03.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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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율의 표정이 심상치 않자 눈치 빠른 서희가 이를 놓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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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번에 데려다주더니 뭐 연락하고 그러는 건 아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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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락처도 모르는데 어떻게 연락해.”

그제야 안심이라는 듯 서희가 고개를 끄덕이며 말을 이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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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암튼 처음 만난 날도 보통 아니다 했어. 오늘도 성격 장난 아니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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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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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막에 뭐라고 했는지 알아? ‘부끄러움을 알아야 사람이지.’ 이러면서 홱 가버리더라.”

권율은 서희의 말에 맞장구치지 않았다.

성격이 보통 아닌 게 어때서. 따질 건 따지고, 할 말이 있으면 참지 말아야 하는 게 당연한 거 아니냐고. 말하려다 말았다. 서희의 괜한 오해와 관심을 받고 싶지 않아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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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형. 밥 먹으래.”

동생 상현이의 목소리에 두 사람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평소에도 화려한 저녁상은 석구의 생일이라 그런지 호화롭기 그지없었다.

특수 제작된 14인용 식탁의 가장 상석에는 석구가, 오른쪽에는 장손인 권율, 왼쪽에는 아들 재형이 앉았다.

첫 손자이지만 외손자인 서희는 두 번째 줄로 밀려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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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일등 손자. 먹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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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 할아버지.”

권율은 석구가 수저를 들 때까지 기다렸다가 식사를 시작했다.

저녁을 먹으면서도 석구의 관심은 오로지 권율에게만 쏠려 있었다.

다른 식구들은 늘 있는 일이라는 듯 그러거나 말거나 조용히 식사에 집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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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율아. 자자. 이 굴비 좀 먹고.”

석구가 굴비의 가장 가운데 살만 발라 권율의 밥 위에 올려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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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굴비 말이다. 저 앞집에 영진유통 김 회장이 내 생일이라고 가져왔지 뭐니.”

권율이 입을 오물거리며 예의 바르게 대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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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니 글쎄. 언감생심도 유분수지. 미국에 유학 중이라는 제 손녀를 우리 율이한테 은근 찍어다 붙여서. 어찌나 불쾌하던지.”

아무도 그의 말에 토를 달지 않았다. 그저 묵묵히 식사를 이어갈 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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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껏 학교 다니면서 1등 말고는 해 본 적 없는 우리 손자랑 어디 이름도 모르는 학교 다니는 손녀랑 가당키나 하냐. 이 말이다.”

석구의 과한 칭찬에 권율은 목이 턱 막히는 기분이었다.

하지만 더 여러 번 씹어 넘길 뿐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세상 이치가 성적으로만 되는 게 아니라고 설명한들 어마어마한 잔소리만 돌아올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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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이. 할아버지 영진유통이면 백화점도 있고, 마트도 있고. 엄청 좋은 회사예요. 그런 집안과 사돈이면 땡큐죠.”

서희가 참지 않고 나서자 석구가 수저를 탁 소리 나게 내려놨다.

그러자 재숙이 아들 서희에게 눈을 흘기며 가만히 있으라는 신호를 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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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깟 돈? 김 회장보다 내가 더 많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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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휴. 그럼요. 어르신이 우리나라 다섯 손가락 안에 드는 현금 부자신데.”

손가락 다섯 개를 활짝 핀 김 여사가 촐싹거리며 나서자 권율의 미간이 살짝 구겨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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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율이 결혼만큼은 고르고 골라서. 최고로 훌륭한 아가씨랑 맺어줄 거다. 하늘이 양심이란 게 있으면 이번만큼은 이 늙은이 소원을 들어주시겠지. 안 그러냐. 율이 애미야.”

석구의 싸늘한 눈빛이 식탁 끝자리에서 밥을 먹는 연희에게로 향했다.

그러자 그녀의 낯빛이 파랗게 질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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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그럼요. 아버님.”

연희의 대답에도 석구의 표정이 영 미덥지 않은 눈치였다.

입바른 소리를 해 붙이려는데 권율이 육전을 집어 석구의 입 앞으로 가져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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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아버지. 육전 좋아하시죠. 따듯할 때 드세요. 대신 천천히, 꼭꼭 씹으시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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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허. 역시. 나 생각해주는 건 우리 일등 손자뿐이지.”

석구의 눈동자에는 오로지 권율 한 사람만 들어 있었다.

아들도 딸도, 잘 나가는 외손자들도, 귀여운 막내 손자도 다 필요 없었다.

천재로 소문나 알아서 엘리트 코스만 밟고 있는 장손.

이 많은 재산은 아들이 아닌 오로지 권율에게만 물려주겠다고 공표할 만큼 집안에서 권율은 절대적인 존재였다.

불편한 식사 자리가 끝나자 다들 간단히 다과를 하고 서둘러 자리에서 일어났다.

석구는 권율의 손을 잡고 배웅을 하며 헤어짐을 아쉬워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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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율아, 진보라가 네 동창이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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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아버지가 보라를 어떻게 아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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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초동 건물에 들어오는 JS 화재보험 집 손녀 아니냐. 그 집 아버지를 계약 때문에 만났는데. 아는 척을 하더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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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네.”

지금 권율은 서연의 생각으로 머리가 터질 것 같아, 동창의 이야기를 흘려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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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똑똑하냐? 그 보라라는 아가씨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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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뭐. 예전에 같이 수업을 듣긴 했어요.”

대수롭지 않은 권율의 대답에 석구가 흐뭇한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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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허. 그렇구나.”

다른 곳에만 정신이 팔린 권율은 석구의 관심을 가볍게 넘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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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아버지, 수요일 저녁에 올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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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냐. 이거 가져가고.”

다른 가족들은 안중에도 없이 오로지 권율에게만 오렌지색 명품 쇼핑백을 건넸다.

권율은 서희의 눈치를 한번 살피고는 고개를 숙여 감사의 인사를 전했다.

정작 서희는 아무렇지도 않은데, 재숙의 미간이 흐려진 걸 신경 쓸 겨를도 없이 권율은 집으로 향했다.

그날 밤 집으로 돌아온 권율은 서연에게 쓸 쪽지를 쓰고 지우고를 반복했다.

길게도, 짧게도 썼다가, 좋은 글귀를 적었다가. 그래도 영 안 되겠는지 가차 없이 구겨버렸다.

깊은 한숨을 내뱉은 권율이 천장을 바라봤다.

이게 뭐 하는 짓인지, 그녀의 말대로 왜 거리를 뒀는지. 고민했던 지난날이 미치도록 한심스러웠다.

그러자 그의 가슴에서 강한 열망이 솟구쳤다.

그녀에게 닿고 싶다.

지금 당장이라도 달려가 그녀의 갈색 눈동자를 보며 아무 말이라도 들어주고 싶다.

홀린 듯 자리에서 일어난 권율이 무작정 집 밖으로 나갔다. 그러고는 서연의 아파트까지 단숨에 달렸다.

이렇게 멀지 않은 거리에 당신이 있는데. 아직 일주일이나 더 기다려야만 하다니.

어딘지도 모르는 그녀의 집을 생각하며, 아파트만 한참을 올려다봤다.

그러다 씁쓸한 마음을 달래며 겨우 돌아섰다.

***

월요일 오전, 디자인 1팀 회의.

서연은 여름 신상품 디자인을 보고 한숨을 내쉬고 있었다.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대실망하는 중이었다.

서연은 미간을 찡그린 채 고민하고 있었다.

고칠까? 엎을까?

그러다 그나마 건질 수 있는 디자인과 당장 쓰레기통으로 직행해야 할 디자인을 빠르게 골라냈다.

그러자 누가 못질을 하는 것처럼 머리가 욱신거리기 시작했다.

서연이 관자놀이를 꾹꾹 누르며 디자인을 들었다 놨다 하자, 다들 그녀의 눈치를 보느라 정신이 없었다.

하아.

깊은 한숨을 내뱉은 서연이 의자를 뒤로 젖히자 회의실 분위기는 찬물을 끼얹은 듯 얼어붙었다.

두 손으로 이마를 감싸 쥔 서연이 잠시 천장을 올려다봤다.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다시 똑바로 앉은 서연이 추려놓은 디자인을 몇 개 더 빼버렸다.

그러곤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양손으로 허리를 짚었다.

누구 하나 숨소리조차 내지 않았다. 오랫동안 함께해온 김 실장마저도.

서연은 그나마 고칠 수 있는 디자인을 화이트보드에 붙이기 시작했다. 하지만 5장뿐이었다.

화이트보드에서 몸을 돌린 서연이 회의실 테이블을 양손으로 짚었다.

그러고는 흡사 맹수의 눈빛으로 직원 하나하나와 눈을 마주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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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하는 여러분.”

서연은 기쁠 때나 열받을 때나 언제나 ‘사랑하는 여러분’으로 말을 시작했다. 물론 느낌은 완전히 달랐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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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여러분들을 믿습니다. 실망하고 싶지도, 질책하고 싶지도 않습니다. 왜냐하면…….”

서연이 똑바로 몸을 일으켜 어깨를 쫙 폈다. 태산같이 높다란 존재감이 회의실을 압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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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분히 할 수 있으니까요. 안 그렇습니까?”

믿는다는 말이 제일 무서운 말이라는 걸 직원들은 알고 있었다.

서연은 언성을 높이지도 얼굴을 붉히지도 않았다.

그저 믿는다. 할 수 있다. 라고만 했다. 너무도 진지한 얼굴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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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여기 화이트보드에 있는 5장의 디자인들도 새롭게 태어날 수 있다는 기적을 보여주십시오. 왜냐. 여러분들의 실력이라면 가능하니까요.”

서연은 화이트보드를 노크하듯 톡톡 두드리며 말을 이어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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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 주 월요일 같은 시간. 이 회의실에서.”

잠시 숨을 고른 서연이 씩 하고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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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러분들의 능력을 감탄할 시간을 갖겠습니다.”

직원들은 짧은 한숨조차 내뱉을 수 없었다. 서연은 김 실장을 제외한 나머지 직원들을 돌려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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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죄송합니다. 대표님.”

김 실장이 깍듯하게 고개를 숙이자, 서연이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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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자인이 하나같이 너무 뻔합니다. 아무래도 분위기를 좀 바꿔야겠는데. 아이디어 있으세요?”

서연은 디자인실의 총책임자인 김 실장을 질책하지 않았다.

이건 한 사람을 몰아붙인다고 될 일이 아니니까.

차라리 새로운 방법을 생각해 문제를 해결하는 게 여러모로 효과적이라는 걸 잘 알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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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턴을 뽑는 건 어떠세요?”

잠시 생각에 빠진 서연의 오른손이 피아노를 치듯 테이블을 두드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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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조건 감각과 능력 위주로. 3개월 이후 성과에 따라 정규직 채용과 특별보너스 지급. 포트폴리오와 자신만의 룩북 만들어서 제출하라고 하세요. 하니블랙과 여니블랙 둘 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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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대표님.”

서연이 씽긋 웃으며 한 마디를 덧붙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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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 비서님한테 얘기해놓을 테니까. 오늘 점심은 법인카드로 드세요. 디자인 1팀 직원들 사기도 올려주시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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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면목 없습니다. 대표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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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회사 대들보들 격려 좀 해주시고. 한서연이 재수는 없어도 그렇게 나쁜 여자는 아니라고 편도 좀 들어주시고요.”

서연은 항상 이런 식이었다.

은근한 채찍과 확실한 당근. 그리고 이어지는 부담스러운 믿음과 뜨거운 격려. 넌 특별한 능력자라는 세뇌 아닌 세뇌.

다음번엔 이것보다 더 잘할 수 있어. 해 보자. 안 해봤잖아. 가보지도 않고 어떻게 알아. 좀만 더 힘내면 가능할 것도 같은데. 거의 다 왔어. 라는 부추김이 뒤따라왔다.

서연은 직원에게 절대 언성을 높이거나 기를 죽이지 않았다.

일명 넌 할 수 있어 요법.

서연만의 독특한 방법이 짧은 시간 안에 회사를 급성장시키는 원동력이 되었다.

서연은 홀로 사무실로 돌아왔다.

책상을 쓱 한 번 쳐다보고 창가로 걸음을 옮겼다. 서연의 한숨이 커다란 창에 부딪혀 뜨겁게 되돌아왔다.

그러다 한 사람이 떠올랐다.

아쉬운 눈빛으로 미술관 주차장에서 한참을 서 있었던 그 남자, 권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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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고 싶다.”

4번 만난 남자가 뭐 그렇게 특별하다고 보고 싶다는 말이 절로 나오다니. 말해놓고도 민망한지 서연이 피식 웃었다.

그러다 머릿속에 박혀 있던 그의 전화번호가 떠올랐다.

지금 당장이라도 그에게 전화한다면 오늘 저녁에라도 만날 수 있을 텐데. 전화를 걸까. 말까.

한서연이에요. 라는 짧은 문자라도 보낼까. 말까.

잠시 고민하던 서연이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고는 다시 책상으로 와 앉았다.

월요일마다 올라오는 매출 보고서를 펼쳐 억지로 눈을 잡아끌었다.

하지만 그 남자, 권율이 다시 생각났다.

그날 잘 들어갔을까.

오늘도 내 전화 기다리고 있을까. 10분에 한 번씩 확인한다고 했는데. 내가 전화하면 깜짝 놀라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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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휴. 디자인이 이 지경인데. 남자 생각할 때냐. 정신 차려.”

서연은 자신에게 혀를 쯧쯧 차며, 보고서 한 장을 겨우 읽었다.

그런데 더는 진도가 나가지 않았다.

볼펜으로 책상을 탁탁 치던 서연이 달력을 뚫어지게 쳐다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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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일 월, 수, 금은 오전 7시에 하고, 화, 목은 저녁 7시. 그리고 주말에는 12시요.’

 
서연은 권율이 말한 운동 시간을 떠올렸다.

그러고는 빙그레 웃었다.

그래. 목요일이 좋겠어. 역시, 사람을 깜짝 놀라게 하는 건 목요일이 제격이지.

망설일 것 없이, 문제가 있다면 빠르게 해결하면 될 일이었다. 그게 바로 한서연만의 방법이니까.

그러곤 대망의 목요일이 오자, 서연은 칼퇴근했다.

6시 30분에 집으로 돌아와 좋은 냄새가 폴폴 나게 목욕도 하고 가볍게 화장도 다시 했다.

그러고는 여니블랙의 섹시한 운동복을 입고 집을 나섰다.

제자리 뛰기로 몸을 푼 서연이 천천히 달렸다.

쿵쿵거리는 심장을 안고 그녀가 달려간 곳은 권율이 운동하고 있을 공원이 아니라 빵집이었다. 평소 애정하는 빵들을 한 아름 사 들고, 딸기주스도 2병 샀다.

그러고는 그 자리에서 한 병을 따서 홀짝거리며 걸었다.

서연이 100m쯤 걸었을 때 익숙한 남자가 멀리서 걸어오는 게 보였다. 서연이 입가에 묻은 딸기주스를 혀로 쓱 핥아먹으며 웃었다.

10, 9, 8, 7, 6, 5, 4, 3, 2, 1. 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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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 연 씨? 서연 씨!”

그제야 서연을 발견한 권율이 반갑게 뛰어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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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율이 씨!”

완벽한 모습의 서연이 권율을 향해 반갑게 손을 흔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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