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 변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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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 변수
2022.03.10.
전화를 기다렸냐는 서연의 말에 권율은 뭐라고 대답해야 할지 고민했다.
‘공원을 3바퀴나 돌면서 당신만 생각했다고 하면 믿어줄래요? 이틀만 더 견뎌보자 참고 또 참았다고 하면, 기뻐해 줄래요?’
권율은 동그랗게 뜬 서연의 눈동자를 바라보며 생각을 다시 정리했다.
복잡한 마음이 얽히고설킨 권율의 표정이 이루 말할 수 없이 이상했다.
“어…… 안 기다렸나 보네.”
권율의 대답을 기다리던 서연이 중얼거렸다.
“아니요! 어떻게 말하는 게 서연 씨한테 어필할 수 있을까 생각했어요.”
솔직한 권율의 말에 서연이 코를 쓱 문지르며 웃었다.
라면도 다 먹었겠다 슬슬 본론을 꺼낼 타이밍이다 싶어서.
사실 서연은 공원 벤치에서 빵을 나눠 먹을 때부터 전화번호를 알려주고 싶어 입이 간질간질하던 참이었다.
그런데 그가 어필할 방법을 생각 중이라고 하니 기회를 주고 싶었다.
“어디 해 봐요. 어필.”
진짜 시킬 줄 몰랐는지 살짝 당황한 권율을 보며 서연이 피식 웃었다.
“마음에 안 들면 말해주세요. 그러면 빠르게 태세전환 할게요.”
“오케이. 나 그렇게 빡빡한 사람 아니에요.”
권율은 서연이 먼저 다가와 준 것에 대한 진심 어린 감사와 애써 모른 척했던 과거의 일을 다시 사과했다.
그러고는 앞으로의 계획을 차분하게 설명하기 시작했다.
물론 ‘지금 연락처를 알려준다면’이라는 전제가 이미 깔려 있었지만.
그는 절대 귀찮게 하지 않겠다는 약속을 내뱉더니 여차하면 새끼손가락이라도 걸 기세였다.
게다가 자신이 생각하는 적절한 연락의 횟수와 방법을 얘기할 때는 얼마나 표정이 진지한지 커다란 계약을 성사시키기 위해 나온 사람 같았다.
‘이렇게 노력하지 않아도 알려주려고 했어요’라고 말하려다 말고, 서연은 생각했다.
아. 어쩌면…….
이 남자 말대로 새로운 사람이 다가왔을 때 속으로 많이 고민했을 수도 있겠다.
스스로를 겁쟁이라고 평가할 만큼 신중한 사람이 이렇게 용기를 내기까지 얼마나 노력했을까.
생각이 거기까지 미치자, 서연은 그의 마음을 편하게 해주고 싶었다.
“한 번만 불러줘도 기억할 수 있어요?”
예기치 못한 서연의 말에 바둑알같이 까만 눈동자가 커다래지더니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010-9…….”
9까지 말하던 서연이 입술을 쭉 내민 채로 멈췄다.
“핸드폰, 안 가져왔어요?”
“달릴 때 걸리적거려서요.”
“차라리 지금 전화를 걸어줄까요?”
“아니요. 그냥 불러주세요. 숫자를 기억했다가 집에 가서…… 바로 전화할게요. 괜찮죠?”
헛기침을 해댄 서연이 고개를 끄덕이고는 번호를 마저 불렀다.
그러자 권율의 시선이 서연의 분홍빛 입술만을 바라봤다.
진지한 그의 시선에 서연은 멋쩍으면서도 마음이 몽글몽글한 순두부처럼 흔들리는 게 이상했다.
“잘 외웠는지 확인할게요. 전화가 안 오면 곤란하니까.”
말해놓고도 민망한지 서연이 한적한 찻길을 바라봤다.
“크흐흠. 여기, 여기다 써 봐요. 내 번호.”
그러고는 오른손을 쓱 내밀었다.
권율의 표정을 읽지 않으려 고개를 돌렸는데도 신기하게 그의 미소가 서연의 눈에 들어왔다.
그는 기다란 손가락을 천천히 움직여 손바닥 한가운데에 숫자를 그리기 시작했다.
겉으로 보기에는 뭉툭해 보이는 검지가 얼마나 가볍게 움직이는지 깃털이 손바닥을 간지럽히는 착각이 들 정도였다.
“맞죠?”
간지러움을 참지 못한 서연의 어깨가 잘게 흔들리며 고개를 끄덕이자 그의 얼굴에도 함박웃음이 걸렸다.
“서연 씨. 이따가…… 진짜 연락해도 되죠?”
혹시나 서연의 마음이 바뀔까 싶어 권율이 확인하듯 물었다.
“그럼. 안 하려고 했어요? 안 되겠다. 손 좀 줘봐요.”
그가 바지에 닦아낸 손을 내밀었다.
“자요. 우리 회사에서는 내 허락이 필요할 때, 이렇게 사인을 해요.”
서연이 그의 커다란 손바닥 위에 현란한 서명을 남기자, 권율의 귀가 어깨와 잠시 붙었다 떨어졌다.
“결재했으니까. 꼭 연락해요. 기다릴게요.”
손안에 소중한 것이라도 들었는지 권율이 빈주먹을 살짝 쥐자 그의 손등에 핏줄이 파랗게 돋아났다.
그의 행동 하나하나를 눈여겨보던 서연은 오늘의 깜짝 만남은 이쯤에서 정리해야겠다고 생각했다.
정식으로 만날 토요일이 남았으니까.
“그만 일어날까요?”
서연의 말에 못내 아쉬운 듯 권율은 아주 천천히 편의점 테이블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데려다줄게요.”
두 사람은 가벼운 대화를 나누며 천천히 걸었다. 편하게 동네 산책을 나온 사람들처럼. 그렇게.
하지만 권율의 머릿속에선 토요일 일을 물을까, 말까. 심각하게 고민 중이었다.
그가 입도 못 뗀 사이, 순간이동이라도 한 것처럼 어느덧 서연의 아파트 입구였다.
서연과 함께 있으면 시간이 어찌나 빨리 지나가는지…….
권율은 토요일 일은 다음에 꼭 물어야겠다고 생각하며 서연에게 인사를 건넸다.
“오늘 즐거웠어요. 잘 자요.”
“나도 즐거웠어요. 조심히 가요.”
서연은 차마 발길이 떨어지지 않았지만, 어색한 미소를 지으며 천천히 몸을 돌렸다.
열 걸음쯤 걷다 뒤를 돌아볼까도 생각했지만, 토요일을 위해 오늘은 이만 아껴두기로 했다.
그런 서연의 뒷모습이 사라질 때까지. 권율은 물끄러미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
***
서연은 목요일 밤부터 하늘을 붕붕 날아다니는 기분이었다.
누군가가 권율의 연락에 너무 오버하는 거 아니냐고 묻는다면 서연은 이렇게 대답할 것이다.
나도 이럴 줄 몰랐다고.
자기 전 걸려온 전화 한 통과 커다란 외양과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하얗고 귀여운 이모티콘들의 아침 인사가 뭐라고.
이렇게 실없는 사람처럼 아침부터 실실거리는지 정말 모르겠다고 말이다.
‘하. 이건 다 반전 매력을 가진 그 남자 때문이야.’
그래서일까. 서연은 금요일 아침부터 제정신이 아니었다.
수정해야 할 디자인을 보면서도, 매출 보고서를 읽어내리면서도, 홈쇼핑 MD와 통화 중에도. 자꾸만 피식거리느라 광대가 아플 지경이었다.
나른한 금요일 오후, 서연은 여니블랙 홍보 회의에 들어가서도 더는 실실거리지 않으려 일부러 근엄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그러나 곧 권율에게 머릿속을 점령당하고 말았다.
‘하. 나 참. 일해야 하니까. 내 머릿속에서 잠깐 나갔다 와요.’
괜히 죄 없는 사람을 타박하다 말고 무심코 손을 쳐다봤다.
‘내일 손이라도 잡으면 어쩌지? 관리라도 좀 받을까?’
그와 손을 잡기로 이미 약속된 사람처럼 서연은 고민하기 시작했다. 네일 디자인도 그렇고, 손등도 좀 거칠어 보이는 게 영 거슬려서.
양쪽 손톱과 손등을 번갈아 쳐다보던 서연은 퇴근하는 길에 네일숍이나 들러야겠다고 생각하던 중이었다.
똑똑―.
대답도 하기 전, 최 비서가 회의실로 황급히 들어왔다.
서연이 무슨 일이냐는 눈빛으로 쳐다보자 최 비서가 들고 있는 태블릿을 서연에게 내밀었다.
고개를 내려 화면을 쳐다보는 서연의 눈동자가 쏟아질 듯 커다래졌다.
분주한 손가락이 사진을 확대하고 넘기고, 다른 사진을 또 확대하고 넘겼다.
“이게, 다 뭐예요?”
“다른 쇼핑몰에 오늘 올라온 신상품입니다.”
몰라서 묻는 게 아니었다. 왜 하니블랙 신상품이 다른 쇼핑몰에 버젓이 올라온 것인지 물어보는 것이었다.
“김 실장 이하 디자인 1팀. 하…… 아니. 내가 직접 가죠.”
서연이 벌떡 일어나자 기획홍보팀 직원들이 심상치 않은 분위기를 감지하고 눈치만 살폈다. 지금 서연의 표정이 이루 말할 수 없이 살벌해서.
“디자인 2팀도 대기하라고 하세요. 그리고 박 변호사님 회사로 들어오라고 하시고, 공장에 연락해서 생산 중단시키세요.”
“네. 대표님.”
서연은 회의실 안에 있는 직원들을 휙 둘러보고는 말했다.
“여니블랙 홍보방안 다시 짜서 월요일까지 보고하세요. 이렇게 해서는 어림도 없습니다.”
날카로운 구두 굽 소리가 들리더니 서연이 회의실을 빠져나갔다.
그러고는 엘리베이터를 기다릴 새도 없이 계단으로 내려가 디자인 1팀 사무실로 향했다.
문이 벌컥 열리고 서연이 들이닥치자 컴퓨터 화면만 바라보던 직원들의 고개가 하나둘 돌아가기 시작했다.
“사랑하는 여러분. 모두 앞으로 나오십시오.”
말은 사랑한다고 하지만 목소리는 전혀 그렇지 않았다. 차갑다 못해 누구 하나 가만히 두지 않겠다는 말투였다.
“제가 지금 이상한 걸 발견했는데. 누가 이걸 설명하시겠습니까?”
서연은 태블릿이 잘 보이도록 정면으로 들었다.
그러자 하니블랙의 신상품이 다른 쇼핑몰에 신상품 마크를 단 채 버젓이 게시된 화면이 보였다.
“내 새끼가, 왜 남의 집 새끼가 돼서 이러고 있을까요?”
여간해서 당황하지 않는 김 실장이 화면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디자인 유출이라니. 도저히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어떤 분의 소행인지 알기 전까지는, 아무도 회사 밖으로 나갈 수 없습니다.”
서연이 내뱉은 말은 빈말이 아니었다.
디자인팀 직원들은 토요일 밤까지 회사 밖으로 단 한 발짝도 나갈 수 없었다. 그건 서연도 마찬가지였다.
서연은 먼저 디자인팀 전 직원을 한곳에 모이라고 지시했다.
그러고는 회사에 있는 컴퓨터를 끄고 직원들의 핸드폰을 거뒀다. 모두 서로의 눈치만 살필 뿐 쥐 죽은 듯 조용했다.
디자인 유출을 조사할 전산팀 인원이 부족하자, 서연은 그 자리에서 전문가들을 섭외했다.
그들이 오기 전, 서연은 김 실장을 따로 불러 이번 일을 상의했다. 물론 모두가 용의선상에 올랐지만 상의할 사람이 김 실장뿐이었다.
“어떻게 하실 생각이십니까?”
“영원한 퇴출. 이런 사람은 디자인 밥을 먹으면 안 됩니다.”
서연의 날카로운 눈빛에선 자비란 찾아볼 수 없었다.
박 변호사와 로펌 직원들이 도착했다는 말에 서연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러고는 한참 동안 대응 방안을 논의했다.
서연이 다시 회의실에 돌아온 건 밤 9시.
물론 그사이 직원들에게 고가의 도시락 저녁도 먹였다. 잡을 땐 잡더라도 직원들을 굶길 순 없으니까.
그러고는 한 사람씩 불러 회사에 일이 생겨 집에 들어가지 못한다는 연락을 하라고 시켰다.
서연이 보는 앞에서, 그것도 회사 전화로. 서연과의 통화를 원하는 가족이 있다면 직접 통화도 불사했다.
일이 심상치 않게 돌아가자 모두가 군말 없이 서연의 말을 따랐다. 그만큼 사태가 심각했기에.
전화가 모두 끝나자 서연이 회의실 중앙에 섰다.
저녁을 굶어서인지, 너무 신경을 곤두세워서인지. 누군가 빈속을 날카로운 손톱으로 할퀴고 지나가는 기분이었다.
미간을 잔뜩 구긴 채 잠시 속이 진정되기를 기다리던 서연이 직원들을 빙 둘러봤다.
“사랑하는 여러분.”
나직한 목소리에서 위엄이 느껴졌다.
“저는 이 자리에서 실망을 말하고 싶지 않습니다.”
눈을 마주치는 직원도, 눈을 내리깐 직원도 서연의 눈길을 피해갈 수 없었다.
“그렇다고 용서를 말하고 싶지도 않습니다.”
회의실의 분위기는 말로 표현할 수 없을 만큼 냉랭했다.
“당연히 선처도 없습니다. 저는 제가 할 수 있는 최대한의 대가를 치르게 하고, 벌을 받게 할 생각입니다.”
숨소리 하나 들리지 않는 회의실에 또각또각 서연의 구두 굽 소리만이 선명하게 들렸다.
“그리고 피치 못할 사정이 있었다고 해도 어떤 면죄부도 주지 않을 생각입니다.”
서연은 테이블 위에 놓인 자신의 핸드폰을 들어 올렸다.
“그래서…… 앞으로 어떤 일이 벌어질 수 있는지 말씀드리겠습니다.”
서연은 한쪽 입꼬리를 느슨하게 올리며 말을 이어나갔다.
“부정 경쟁 방지 및 영업비밀보호에 관한 법률 위반. 타인이 제작한 상품의 형태를 양도, 대여한 자는 3년 이하의 징역 또는 3천만 원 이하의 벌금에 처한다…….”
어려운 법률을 서연이 줄줄 읽기 시작했다. 박 변호사가 알려준 대로.
“거기다 하니블랙의 디자인인 만큼 저작권법 위반도 추가하겠습니다.”
서연은 아직 발톱을 드러내진 않았지만, 곧 덮칠 준비를 완벽히 마친 포식자의 눈빛을 하고 있었다.
“향후 대응 방안을 스포하자면, 우리 디자인을 훔쳐 간 쇼핑몰을 고소할 예정이며 디자인 유출의 당사자에게도 걸 수 있는 민사소송을 모조리 할 생각입니다.”
확고한 의지를 드러내는 단호한 말투. 모두를 꿰뚫어 보는 서늘한 눈빛.
범인이 아닌 사람도 저절로 손발이 덜덜 떨릴 만큼, 서연의 존재감이 압도적이었다.
“자, 그럼 한 사람씩 결백을 증명할 시간을 가져볼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