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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 걷잡을 수 없이 (12/130)


12. 걷잡을 수 없이
2022.03.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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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연은 직원을 한 사람씩 호출했다.

호명된 사람은 컴퓨터와 핸드폰을 옆에 두고 알리바이를 설명할 기회가 주어졌다.

그리고 그 말이 맞는지, 전산 전문가와 변호사가 동석한 자리에서 바로 확인했다.

직원들은 스스로 메일을 오픈하고, 핸드폰을 확인시켜줘야만 했다.

서연은 조금이라도 수상한 내용이 발견되면 가차 없이 해당 직원의 이름을 적었다.

그런 작업이 토요일 저녁까지 쉬지 않고 이어졌다.

결국 서연은 누가 범인인지 짐작할 수 있었다. 모든 조사가 끝나자 서연은 직원들을 다시 회의실로 소집했다.

한층 무거워진 분위기가 감돌았다.

서연은 평정심을 잃지 않으려 5분 동안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직원들을 쳐다보기만 했다.

몇몇은 훌쩍거렸고, 몇몇은 퇴사를 고민했으며 몇몇은 압도적인 긴장감으로 몸을 떨었다.

하지만 서연은 전혀 흔들림이 없었다. 드디어 때가 됐다는 듯 두 주먹을 말아쥔 그녀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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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오세요. 다른 사람을 속일 수 있어도 스스로를 속일 수는 없을 겁니다.”

하지만 아무도 나오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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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말 마지막 기회입니다.”

싸늘한 서연의 시선이 한곳을 응시했다. 그러자 결코 버틸 수 없는 한 사람이 무너지듯 무릎을 꿇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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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죄송합니다. 죽을죄를 지었습니다.”

모두의 시선이 한곳으로 향하자 서연이 입술을 세게 깨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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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번만 용서해주세요. 흐흡.”

실망? 아니 실망이라는 말로 표현할 수 없을 만큼, 서연의 마음은 참담하기만 했다.

얼마 전까지 농담을 주고받을 정도로 사이가 좋았던 직원이었다.

그동안 함께 고생한 시간들, 하지만 돈 몇 푼에 당한 쓰디쓴 배신.

돈이 급한 거였다면 차라리 찾아와 도와달라고 하지. 그랬다면 기꺼이 도와줄 수도 있었다.

서연은 직원의 어려움을 나 몰라라 하지 않는 사람이었고, 심지어 도와줄 여력도 차고 넘쳤다.

게다가 힘든 일을 겪은 직원을 기꺼이 도와준 경험도 있었는데…….

그런데 왜!

왜 말도 안 되는 선택을 해 자신의 마음에 의심을 심고, 절망을 줬냐고 되묻고 싶었다.

자식 같은 디자인을 버리고, 신상품 출시도 미뤄져야겠지만 그런 것보다…… 왜 속였냐는 원망이 솟구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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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 끝까지 갈 생각입니다.”

입술을 꽉 깨문 서연의 말에 직원은 바닥에 납작 엎드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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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요일 오전, 해당 쇼핑몰을 고소하겠습니다. 또한 이 시간 이후로 안현지 대리는 퇴사 조치 되었습니다. 지금 당장, 나가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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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표님. 제가 사기를 당하는 바람에 눈이 뒤집혀서…… 정말 실수였습니다. 흐흑. 죄송합니다. 제발. 한번만 살려주십시오.”

더는 보고 싶지 않다는 듯, 무릎걸음으로 기어 오는 직원을 향해 서연이 두 손을 들어 올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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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사기를 당했다고 해서 나도 다른 사람을 속여도 됩니까? 그럼 그 사기꾼이랑 안현지 씨가 다를 게 뭡니까?”

서연의 엄중한 목소리가 회의실을 쩌렁쩌렁 울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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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으로 신상품이 출시될 때마다 누가 훔쳐가진 않을까 모두를 의심할 겁니다. 그것만으로도…… 참을 수 없이 화가 납니다. 그러니까 벌은 달게 받으세요.”

서연의 말과 행동이 칼로 잘라낸 듯 너무도 명확하고 단호했다. 제발 용서해달라는 절규에 어떠한 여지도 주지 않았다.

서연은 다른 직원들에게 행동이 과했다면 이해 바란다는 말로 양해를 구했다.

그러고는 모두 퇴근하라는 지시를 끝으로 회의실을 빠르게 빠져나갔다.

오롯이 혼자가 되어 어두운 복도를 걸었다. 그러자 서연의 눈앞이 뿌옇게 흐려졌다.

뭔가 큰 걸 잃어버린 것 같은 상실감이 마음을 제멋대로 헤집어놓았다.

어깨를 늘어트린 채 사무실로 돌아와 의자에 털썩 주저앉자 눈물이 후드득 떨어졌다.

아무리 손바닥으로 눈물을 밀어내도 의지와 상관없는 눈물이 빠르게 차올랐다.

서연은 흔들리는 시야가 어지러워 눈을 감고 의자에 몸을 기댔다. 그러자 기다렸다는 듯 허기가 몰려왔다.

‘아. 금요일 오후부터 굶었구나.’라는 걸 그제야 깨달았다.

하루가 넘도록 밥을 넘기지 못할 정도로 서연은 힘들었다. 피해 금액을 떠나 믿었던 직원에게 배신당했다는 사실에 견딜 수 없어서.

하아…….

깊은 한숨이 쉴 새 없이 터져 나오자 롤러코스터를 타는 듯 눈앞이 빙글빙글 돌았다. 그러다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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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율이 씨!”

토요일 정오, 공원 입구에서 만나기로 약속했는데.

금요일 오후에 일이 터지는 바람에 그와 만나기로 한 약속을 까맣게 잊고 있었다.

연락이 안 되는 사이, 얼마나 기다렸을까? 생각하니 속상한 마음에 저도 모르게 입술을 짓씹었다.

밤 9시 30분.

이미 어떤 변명조차 할 수 없는 시간, 서연은 자신을 원망했다.

아무리 정신이 없더라도 문자라도 한 통 넣었어야지. 눈이 돌아버리게 화가 났어도 어떻게 그럴 수 있냐고 자신을 꾸짖으며 핸드폰을 찾았다.

-부재중 전화 5

-톡 10

서연은 차마 톡을 읽을 수 없었다.

너무도 선명한 숫자들을 애써 외면한 채 부재중 전화에 찍힌 ‘권율’이라는 이름을 물끄러미 내려다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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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아. 어쩔 거야.”

서연은 자신이 한심하다는 듯 깊은 탄식을 내뱉었다.

연락도 없이 바람맞힐 땐 언제고, ‘괜찮아요?’라는 그의 위로가 듣고 싶은 자신이 한심스러웠다.

그나마 양심이 남아 있는 마음이 망설이는 사이, 물불 가리지 않는 손가락이 화면을 톡톡 두드렸다.

그러고는 통화목록이 아닌 머릿속에 있는 숫자들을 하나씩 누르기 시작했다.

<권율>이라는 이름으로 저장된 번호가 뜨며 통화 연결음이 들려왔다.

너무 화가 나서 내 전화를 안 받으면 어쩌지?

다시는 연락하지 말라고 소리치면…… 그땐 뭐라고 변명할까?

짧은 순간, 서연은 많은 것을 고민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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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보세요.]

잔뜩 흐린 날 같은 그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러자 서연의 심장이 ‘쿵’ 하고 내려앉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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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연 씨?]

서연은 무슨 말이라도 해야 했다. 하지만 변명조차 나오지 않았다. 권율은 서연의 목소리가 들릴 때까지 잠자코 기다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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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안해요.”

흔들리는 서연의 목소리가 말했다.

그러자 전화기 너머로 안도의 한숨이 가까이 들려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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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괜찮아요?]

그는 화를 내지도, 이유를 설명하라고 다그치지도 않았다. 그저 서연이 괜찮은지만 물었다.

사실 서연은 괜찮냐는 그의 물음에 보고 싶다는 엉뚱한 대답을 하고 싶었다.

10시간을 기다리게 한 염치없는 사람이지만, 따듯한 위로를 받고 싶다고 하면 안 되겠냐고도 묻고 싶었다.

하지만 차마 할 수 없는 그 말을 삼켜버리고는 대신 솔직한 대답을 내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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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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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어디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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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사……요.”

서연은 숨을 멈추고 눈을 감았다. 그리고 권율의 숨소리를 들으며 그가 내릴 결정을 기다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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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고 싶어요. 서연 씨한테.]

순간 서연의 마음이 울컥하고 일어났다. 그가 와준다는 말이 너무 반가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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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다릴게요. 여기 주소가…….”

서연은 회사 주소를 말해주고 전화를 끊었다. 그러자 통화가 끝나길 기다렸다는 듯 머릿속에서 다시 망치질을 시작했다.

이러다 운전이나 제대로 할 수 있을까?

머리가 너무 아프다고 말하면 걱정하지 말고 눈 좀 붙이라고 말해줬으면…… 정말 좋겠다고 서연은 생각했다.

그의 다정한 말이 절실한 서연이 손가락으로 관자놀이를 꾹 눌렀다. 그러자 서연의 기다란 손가락 끝이 덜덜 떨렸다.

그 순간, 직원들을 돌려보낸 김 실장이 찾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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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표님. 죄송합니다. 아랫사람을 제대로 단속하지 못한 제 잘못입니다.”

김 실장은 서연의 붉어진 눈가를 안타깝게 바라보며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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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속이려고 작정한 사람을 무슨 수로 막겠어요.”

그러자 김 실장은 고개를 숙여 재차 사과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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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나간 일은 지나간 일이고. 당장 신상품 디자인을 어떻게 해야 할지 고민해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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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자인팀 직원들이랑 일요일에 나오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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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닙니다. 내일은…… 쉬세요. 다들 피곤하고, 저도 머리가 깨질 것 같아서요.”

서연은 월요일부터 다시 잘해보자며 억지로 웃었다. 뒤통수 한 번 맞았다고 넘어질 순 없었다.

김 실장이 힘내자는 인사를 건네고는 대표실을 나가자, 서연이 천천히 자리를 정리했다.

그와 통화할 때만 해도 잠시 멈췄던 두통과 이명이 점점 심해져 몸이 앞뒤로 휘청거렸다.

하지만 서연은 권율이 온다는데 엉망인 모습으로 나갈 수 없어 화장을 고치고, 옷매무새를 점검했다.

긴장이 풀리고 고통이 느껴지자 그가 더욱 간절해졌다.

붉어진 눈동자를 감출 겨를도 없이 그저 그가 빨리 왔으면 좋겠다고만 바랐다.

바로 그때 기다리던 권율에게서 전화가 왔다.

서연은 전화기에 뜬 그의 이름을 보는 순간 그가 너무도 간절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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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하 1층에 도착했어요. 어떻게 할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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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내려갈게요.”

그와 전화를 끊은 서연이 깊은 한숨을 내뱉었다. 그러고는 다시 어깨를 펴고 고개를 들었다.

가방을 낚아채듯 팔에 걸고 빠르게 사무실 스위치를 누르려는데 눈앞이 까매졌다 밝아지기를 반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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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요한 순간에 왜 하필 말썽이야.”

어지러움을 참으며 서연이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이상해.

느릿느릿 걷는데도 심장이 100m 달리기를 하는 사람처럼 세차게 뛰었다.

왜 이러지?

고개를 갸웃거리며 엘리베이터를 타자 증상이 더욱 심해졌다.

한 층, 한 층 내려갈수록 심장이 곤두박질치기 시작하자 덜컥 겁이 났다.

과도한 스트레스로 부정맥이라도 온 건가?

서연이 제 가슴을 꾹 하고 눌렀다.

그러곤 숨이 모자란 사람처럼 급하게 공기를 들이마시며 주차장으로 가는 유리문을 밀어젖혔다.

그때, 저 멀리 서 있는 한 남자. 깨끗한 밤바다 같은 눈동자를 가진 그가 서연을 향해 천천히 걸었다.

그러자 서연의 요란한 심장이 더욱 세차게 움직였다.

‘미쳤어? 왜 이래’라고 말하기도 전, 서연의 발이 빠르게 움직였다.

그리고 어어…… 할 새도 없이 눈치 없는 눈물이 이미 턱 끝에 대롱대롱 매달렸다.

오늘따라 제멋대로인 서연의 몸이 그를 향해 돌진하듯 달려갔다.

그의 커다래진 눈동자를 애써 모른 척하며 서연이 그를 와락 끌어안았다.

춤을 추듯 흔들리던 긴 머리칼이 우드향이 배어 있는 그의 가슴팍에 무사히 안착했다. 그러자 안도의 한숨이 입술을 비집고 새어 나왔다.

하…… 이제 살 것 같아.

그의 품이 너무 따듯해 미안한 것까지 모조리 잊어버렸다.

그러다 어떤 말이라도 해야 할 것 같아 서연이 어렵게 입을 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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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시만……. 아주……. 잠시만, 이렇게 있을게요.”

그러곤 제멋대로 떠드는 입을 그대로 놔뒀다.

그의 가슴에 얼굴을 묻은 서연이 뜨거운 말을 토해내기 시작했다.

너무 지쳤다는 말을 시작으로 모든 감정이 한꺼번에 쏟아져 내렸다.

처음으로 디자인을 도둑맞고, 믿었던 직원에게 배신을 당했다고. 어찌나 손발이 벌벌 떨렸는지 서 있는 것조차 힘들었다고.

너무 화가 나 눈물이 나려는데 대표는 그러면 안 될 것 같아 참느라 괴로웠다고 말이다.

그의 셔츠를 잡은 서연의 손가락이 잘게 떨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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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 대범한 사람이 아니에요. 그러는 척 연기하는 거뿐이라고요. 이 거지 같은 역할, 지금이라도 그만두고 싶어…… 하지만. 그만둘 수가 없어요. 흐흡.”

서연이 아이처럼 펑펑 울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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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율이 씨가…….”

얇은 셔츠 사이로 전해지는 그의 온기를 더 느끼려 서연이 오른쪽 뺨을 그의 심장에 가져다 붙였다.

순간 ‘보고 싶었다’라는 말이 목구멍에 걸리자, 서연은 앞서가는 마음을 잠시 가다듬었다.

이 북받치는 상황에서도 ‘보고 싶었다’라는 말을 하는 게 맞는 건가? 고민하는 자신이 기가 막혔다.

그래, 감정이 차분해진 다음. 그때 해도 늦지 않아.

서연은 쿵쿵거리는 그의 심장을 고스란히 느끼며 그렇게 다음을 기약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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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많이, 생각났어요.”

서연의 그 말에 권율의 커다란 손이 천천히 올라갔다. 그러곤 그녀의 머리카락을 조심스럽게 쓸어내리기 시작했다.

그리고 만난 후 처음으로 그가 입을 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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