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4. 어쩌다 보니, 그렇게 (14/130)


14. 어쩌다 보니, 그렇게
2022.03.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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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연의 씻으라는 한 마디에 권율의 얼굴이 순식간에 붉어졌다. 그러나 여전히 고개를 숙이고 있던 서연은 이번에도 알아채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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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갑자기, 왜…… 씻으라고 하는지.”

짧은 한숨을 내쉰 서연이 중얼거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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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율이 씨 셔츠가 내 눈물과 콧물 범벅이라 눈 뜨고 봐줄 수가 없어요. 너무 축축해서 찝찝하지 않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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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괜찮은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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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안 괜찮아요. 생각 같아서는 율이 씨 지저분해진 셔츠를 당장 벗겨…… 아, 아니! 오해하지 말고요.”

흠칫 놀란 권율이 한 발짝 뒤로 물러나는 걸 확인한 서연이 양팔을 휘저으며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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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럴 수 없으니까. 크흐흠. 일단 들어가서 흐린 눈으로 셔츠를 벗고 바로 문밖에 놔두세요. 그럼 내가 어떻게든 수습해 볼게요.”

서연은 권율의 손에 들린 흰 티셔츠를 다시 꼭 쥐여 주며, 자세히 설명했다.

행사용으로 만든 티셔츠라 작더라도 그냥 입으라고.

그래도 너무 작으면 그 위에 지금 입고 있는 후드집업을 걸치라고.

만약 씻는 게 부담스럽다면 수건으로라도 꼭 닦으라고 신신당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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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았죠? 그, 그럼. 난 내 방에서 씻고 나올게요. 얼굴이 말이 아니라서.”

서연은 자신이 늦더라도 편하게 있으라고 말하곤 방으로 호다닥 사라졌다.

권율은 서연이 사라진 방문을 물끄러미 바라보고는 오른손을 들어 눈을 가려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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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도 가슴이 터질 것 같은데. 여기서 씻으라니.’

곧 폭발할 것 같은 심장을 진정시키려 권율은 연신 심호흡을 해댔다.

우두커니 서서 거친 숨을 들이마시다, 서연의 방문을 힐끔 쳐다본 후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달칵—.

넓은 욕실에 불이 들어오자, 물 자국 하나 없이 깨끗하고 모던한 공간이 눈에 들어왔다.

여전히 흔들리는 숨을 쏟아낸 권율이 오렌지빛 조명 아래에서 후드집업의 지퍼를 천천히 내렸다.

정체를 알 수 없는 이상한 얼룩과 화장품으로 엉망이 된 셔츠. 그제야 권율이 피식하고 웃었다. 자신이 눈을 감고 서 있는 동안 서연이 얼마나 당황했을지 그려져서.

그러다 멍하니 주의를 둘러봤다.

어디서부터 어디까지 씻어야 하지?

판단이 서지 않는지 잠시 고민하던 권율이 거울에 비친 자신의 눈을 똑바로 응시하곤 서서히 단추를 풀기 시작했다.

그러고는 얼마 지나지 않아 서연과 똑같은 향기를 풍기며 나왔다.

권율이 소파에 앉아 어색한 시간을 보낸 지 20여 분 만에 서연이 나타났다. 손으로 반쯤 얼굴을 가린 채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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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흐흠. 쌩얼을 보여줘도 될지……. 그렇다고 화장을 다시 하기도 그렇고. 아. 몰라, 몰라. 그냥 오픈할게요. 평소와 달라도 이해 부탁해요.”

서연이 손바닥을 내리자 평소와는 다르게 순둥이같이 귀여운 얼굴이 나타났다.

권율이 신기하다는 듯 눈을 떼지 못하자 민망해진 서연이 권율의 옷을 정리하며 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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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율이 씨는 저녁 먹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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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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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마…… 나 때문에?”

아니라는 대답이 들려오지 않자 급 미안해진 서연이 냉장고에서 이것저것 꺼내기 시작했다.

메뉴와 언제까지 먹어야 하는지에 대한 메모지가 붙은 유리그릇을 식탁 위에 늘어놓자 권율이 소파에서 일어나 다가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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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안일을 봐주는 여사님이 만들어주시는 건데. 손맛이 좋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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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기에도 맛있어 보여요.”

서연은 데워야 하는 음식들을 돌리고, 보기 좋게 요리들을 담아냈다.

한식부터 간식까지 금방 한 상이 뚝딱 차려지자 두 사람이 사이좋게 마주 앉았다.

불과 몇 시간 전까지만 해도 깨질 듯한 두통과 이명에 시달리던 서연은 펑펑 울었다는 것이 믿기지 않을 정도로 마음이 편안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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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거 알아요? 우리 집에 처음 온 남자라는 거.”

처음이라는 말에 권율이 입술을 꾹 말아 넣으며 계란말이를 서연의 접시 위에 놓아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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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고생했는데. 많이 먹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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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흐흠. 율이 씨도요.”

계란말이를 한입 크게 베어 문 서연이 시선을 돌리며 중얼거렸다.

그러자 권율도 서연을 따라 계란말이를 입으로 가져가며 생각했다.

공원으로 가는 동안의 설렘.

그러다 끝내 나타나지 않는 서연을 초조하게 기다리던 시간.

온갖 불길한 생각들로 가득했던 머릿속. 그런데 지금 서연의 집에서 밥을 먹고 있다니…….

권율은 이 사실이 도저히 믿기지 않아 말없이 뒷덜미를 쓰다듬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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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맛있어요.”

그건 지금 말할 수 없이 좋다는 뜻의 다른 표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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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행이다. 우리 후식도 먹어요.”

서연이 차돌박이 쌈이 놓인 접시를 권율의 앞에 밀어주며 말했다.

한밤의 저녁 식사와 뒷정리를 끝낸 두 사람이 딸기와 따듯한 캐모마일 차를 들고 소파에 앉았다.

가까이 앉아 있는 것만으로도 서로의 온기가 느껴져 배시시 하고 웃음이 새어 나왔다.

그러나 달달한 분위기도 잠시 두 사람은 살짝 어색한 듯 말이 없었다.

서연은 애꿎은 딸기를 들어 놨다 하며 말을 줄였고, 권율은 머그잔의 손잡이를 손가락으로 문지르며 연신 헛기침을 해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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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흠. 앞으로 어떻게 할 생각이에요?”

권율의 물음에 서연의 얼굴이 순식간에 어두워지더니 한참 동안 입술을 꾹 다문 채로 앉아 있었다.

괜한 걸 물었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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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 모르겠어요.”

긴 침묵을 깨고 서연이 입을 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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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대로 혼내주고 싶은 마음 반, 안타까운 마음 반……. 그냥. 지금은, 그래요.”

커다란 딸기를 콕콕 찍어 입안 가득 넣어버린 서연이 말했다.

그러자 씁쓸한 목소리와는 다르게 서연에게서 달콤한 딸기 향이 났다.

잠시 고민하던 권율이 자리에서 일어나 핸드폰을 가져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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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 기사에서 봤는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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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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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시만요.”

권율의 손가락이 분주히 움직였다. 그러고는 이내 1년 전 기사를 찾아서 보여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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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가짜 상표가 문제. 상표법으로 보호받는 방법.

서연이 기사를 꼼꼼하게 읽고 나자, 권율은 특허청과 법원 사이트에 들어가 관련 항목을 보여줬다.

그러고는 서연이 할 수 있는 방법과 보장받을 수 있는 권리에 관해 설명하기 시작했다.

아직 담당 변호사에게 듣지 못했던 내용을 어찌나 알아듣기 쉽게 설명하는지, 일목요연한 그의 말이 귀에 쏙쏙 들어와 박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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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임을 무는 것 못지않게 중요한 문제라고 생각해요. 재발 방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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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건 그렇죠. 앞으로 이런 일이 두 번 다시 일어나지 않는 게 중요하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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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게 절대적일 순 없겠지만. 어느 정도 안전장치는 될 수 있을 거예요.”

권율은 어떻게 해서든 서연에게 힘이 되어주고 싶었다.

그게 울고 있는 그녀의 등을 토닥여주는 일이나, 1년 전 스쳐 지나간 신문 기사를 보여주며 작은 도움을 줄 수 있는 일일지라도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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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마워요. 이런 방법이 있다는 건 생각도 못 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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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혹시 도움이 필요하면 서희 형한테 말해줄까요?”

서희라는 이름이 나오자 서연이 손을 빠르게 내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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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니에요. 호진이도 검사니까. 자세한 건 친구한테 물어볼게요.”

작게나마 도움이 된 것 같자 권율의 입꼬리가 슬쩍 올라갔다. 그 모습을 힐끔 쳐다본 서연이 옆으로 다가와 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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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1년 전 기사를 어떻게 기억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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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그냥 사진기 같은 거예요. 한번 본 건 그대로 저장돼요. 쓸데없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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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머릿속에, 다요?”

눈이 동그랗게 커진 서연이 검지로 제 머리를 톡톡 두드리자 권율이 고개를 끄덕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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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럼 특별히 공부할 필요도 없겠네요. 모조리 다 기억하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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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도 공부는 해야죠.”

눈매가 부드럽게 휘어지는 권율을 보며 서연은 신기한 능력이 더 있는지 꼬치꼬치 캐물었다,

하지만 권율은 민망해하며 별것 아니라는 말만 되풀이했다.

권율에 대한 정보를 더 알아내지 못한 서연은 다 먹은 접시와 잔을 들며 일어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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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데 오늘 만나면 뭐 하려고 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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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건, 비밀이에요. 나중에 꼭 해야 하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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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오. 비밀이라고 하니까 되게 궁금하다.”

서연이 개수대에 그릇을 담가놓고는 서랍에서 인공눈물을 하나 꺼내 소파에 털썩 주저앉았다. 손가락으로 비틀어 딴 것을 양쪽 눈동자에 털어 넣자 권율이 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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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이 뻑뻑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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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까 그렇게 많이 울었는데, 이제는 눈이 건조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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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자레인지 좀 쓸 수 있어요?”

서연이 고개를 끄덕이자, 권율이 물에 적신 수건을 전자레인지에 데웠다. 그러고는 적당한 온도로 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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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 좀 감아볼래요? 머리는 소파에 기대고요. 네. 그렇게요.”

눈을 감고 머리를 기댄 서연의 눈두덩이 위에 그가 따듯한 수건을 올렸다.

불편하지 않을 정도의 무게감, 거기다 관자놀이까지 전해지는 따듯함이 좋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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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거 처음 해 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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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이 아플 때 온찜질을 해주면 좋다는 기사를 봐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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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그렇구나. 알려줘서 고마워요. 근데 나 이거 하는 동안, 얘기해줘요. 심심하지 않게.”

무슨 얘기를 할까. 생각하던 권율이 힐끔 시계를 쳐다봤다.

서연의 집에 들어왔을 때만 해도 11시가 안 됐었는데 시간은 벌써 자정을 넘어가고 있었다.

더 있다 가면 서연 씨가 불편할까?

권율은 소파에 기대어 있는 서연을 물끄러미 바라보며 생각했다.

30분 정도는 괜찮겠지? 사실 만난 지 2시간 조금 지난 거잖아.

그러다 침묵이 더 길어지면 곤란할 것 같아 천천히 입을 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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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끔 괜찮은 동화책을 읽는데. 들려줄까요? 옛날이야기처럼?”

여전히 눈을 감은 서연이 ‘좋아요’라고 말했다.

어둠마저 가라앉은 깊은 밤.

권율의 나직한 목소리가 이야기를 시작했다. 나름 재미와 교훈을 한꺼번에 주는 스토리를 고르고 골라서인지 내용도 훌륭했다.

재밌다는 서연의 말에 살짝 신이 난 권율이 이야기 하나를 더 꺼내 들었다.

감미로운 목소리가 두 번째 이야기를 마칠 때까지 서연은 말없이 듣고만 있었다.

다시 시간을 확인한 권율은 그만 일어나야겠다고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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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연 씨. 눈 괜찮아요?”

대답이 돌아오지 않았다.

권율이 서연에게로 바짝 다가가자 소파에 기대어 있던 그녀의 머리가 힘없이 떨어졌다. 미지근해진 수건과 함께.

어…… 어?

어느새 잠이 들었는지 팽팽한 긴장감이 빠져나간 서연의 몸이 권율의 어깨에 ‘툭’ 하고 와 닿았다.

그대로 얼어버린 권율은 마른침만 삼킨 채 손가락 하나 움직이지 못했다.

어쩌지. 안아서 방으로 옮길까?

하지만 허락도 받지 않은 상태에서 서연의 방에 들어가는 건 곤란했다.

그렇다고 밤새 이 불편한 자세로 있을 수도 없었다.

그냥 깨울까? 아니면 이대로 재울까?

한참을 망설이던 권율이 서연을 깨우기 위해 상체를 돌리려던 순간, 서연의 머리가 미끄럼틀을 타듯 주르륵 내려와 털썩하고 떨어졌다. 정확히 권율의 다리 위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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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장 난 로봇처럼 모든 행동이 멈춰버린 그가 눈동자만 내려 서연의 상태를 확인했다.

금요일부터 한숨도 못 잤다고 하더니, 이미 곤하게 잠이 든 서연을 차마 깨울 수가 없었다.

안쓰러운 권율의 눈동자가 서연의 얼굴을 마음껏 바라봤다.

큼직큼직한 이목구비가 제 손바닥보다 더 작은 얼굴 안에 들어 있다는 게 신기한 듯 권율은 손바닥을 펼쳐 크기를 재보기도 했다.

그러다 허공에서 그림을 그리듯 서연의 옆모습을 따라 손가락이 움직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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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연 씨. 내가 이렇게, 옆에 있어 줄게요. 그러니까 힘들면 언제든 말해요.”

자리에서 일어날 수도, 제대로 숨을 제대로 쉴 수도 없는 상황이 어색하면서도. 권율은 이 순간이 미치도록 좋았다.

그런 그의 애틋한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서연은 권율의 다리에 뺨을 비비더니, 곧 몸을 뒤척였다.

그녀의 다리가 소파 가장자리에 아슬아슬하게 걸려 있자, 권율이 빈주먹을 오므렸다 피며 떨어지지 않게 조심히 손을 뻗었다.

바로 그때, 자세가 불편한 서연의 몸이 빙글 돌아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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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얇은 티셔츠 너머로 느껴지는 따듯한 숨결, 거기다 입을 오물거릴 때마다 미쳐버릴 것 같은 간지러움…….

권율은 자신의 배에 이마를 가져다 붙인 서연을 내려다보며 뼈가 하얗게 도드라질 정도로 빈주먹을 말아쥐었다.

길고 긴 밤. 권율에게 참을 수 없는 인내의 시간이 이제 막 시작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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