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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 하룻밤의 실수 (15/130)


15. 하룻밤의 실수
2022.03.24.


하. 얼마나 피곤했으면 땅바닥에서 잠이 들었네.

서연은 딱딱한 바닥에서 잔 것치곤 몸이 찌뿌둥하지 않은 게 신기했다. 머릿속으로는 그만 일어나야지 생각하면서도 모든 게 귀찮아져 한참을 그대로 누워 있었다.

여사님이 물걸레 청소포를 바꾸셨나? 왜 이렇게 좋은 냄새가 나지. 흐음.

어딘가 익숙한 향기에 취한 듯 서연이 코를 킁킁거리며 딱딱한 바닥에 뺨을 비벼댔다.

바닥이 왜 이렇게 따끈해. 난방을 켜놓고 잤나?

으응. 이건 뭐지?

딱딱한 바닥을 손으로 문지르는데 느낌이…… 사뭇 달랐다.

눈을 잔뜩 찌푸린 서연이 고개를 살짝 들었다. 사방이 환하면서도 뭔가 이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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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뭐야. 불도 안 끄고 잤네.”

크림색 대리석이 아닌 하얀 벽을 보곤 아직 꿈인가 싶어 흐릿하게 눈을 떴다가 감았다를 반복했다.

아무리 눈을 끔뻑거려도 하얀 벽이 도통 사라지질 않자 손으로 그곳을 짚었다.

뭐야. 아직도, 꿈인가?

하지만 꿈이라고 하기엔…… 손끝에 느껴지는 감촉이 너무도 생생했다.

순간, 눈을 번쩍 뜬 서연이 그제야 상황 파악에 나섰다.

장소는 소파, 위치는 권율의 다리 위. 게다가 손은…… 왜. 왜!

너무 놀란 나머지 서연의 어깨가 흠칫 떨렸다.

그때였다. 천장을 바라보던 권율의 턱이 천천히 내려왔다. 밑으로 더 밑으로.

아, 안 돼!

재빨리 손을 거둬들이려는 서연과 막 잠에서 깨어난 그의 붉은 눈동자가 제대로 마주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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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으헙.”

화들짝 놀란 서연이 그의 다리에서 황급히 일어나려다 우당탕 소리와 함께 바닥으로 곤두박질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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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연 씨!”

놀라긴 그도 마찬가지인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려다 저린 다리와 함께 ‘윽’ 소리를 내며 주저앉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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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으. 어떡해.”

오른쪽 볼과 이마가 분홍빛으로 변한 서연이 오뚝이처럼 먼저 일어났다. 허리가 두 동강이 난 것처럼 아팠지만 그걸 신경 쓸 여유조차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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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금 그, 그건 의도적으로 그런 게 아니에요!”

그러자 다리를 두드리던 권율이 괜찮다는 듯 손을 들어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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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 다쳤어요? 괜찮아요?”

갑자기 떨어지지만 않았다면, 따듯한 돌침대에서 숙면을 취한 것 같다고는 차마 말할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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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네. 자꾸 이상한 모습만 보이고, 하. 정말 왜 이러지.”

서연의 혼잣말에 권율이 시선을 피하며 헛기침을 해댔다.

의도치 않게 밤을 보낸 두 사람 사이엔 어젯밤보다 더 어색한 기류가 감돌았다.

특히 권율의 뺨이 발그레하게 보이는 건 기분 탓이라고. 서연은 애써 그렇게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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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그럼. 각자 세수하고. 다시 만날까요?”

갈 곳을 잃은 듯 방황하던 서연의 손가락이 욕실과 방을 번갈아 가리키고는 도망치듯 방으로 들어가 버렸다.

얼른 방문을 닫아버린 채 등을 기댄 서연이 깊은 한숨을 내쉬며 주르륵 미끄러져 내렸다.

미쳤어? 미쳤냐고!

서연은 손을 내려다보며 소리 없이 절규했다.

아니. 얘기 잘 듣다 말고 거기서 잠든 것도 모자라서. 으.

잠결에 한 실수였다고 말하면 믿어줄까?

무의식중에 벌어진 일이었지만, 그렇다고 아예 없었던 일이 되는 건 아니었다.

어떻게 선사과, 후책임? 뭐. 뭐래. 뭔 책임. 큰, 큰일 날 소리!

심란해진 서연이 긴 머리칼을 잔뜩 헤집어 놓으며 짧은 한숨을 내뱉었다. 그러고는 복잡한 머릿속을 정리했다.

말이 되는 어떤 핑계를 가져다 붙인다 해도 진심 어린 사과는 꼭 필요하다는 결론을 내린 후에야 ‘반성해’를 연발했다.

서연은 그와 다시 마주하기 전까지, 대본을 쓰듯 해야 할 말과 하지 말아야 할 말들을 추려냈다.

준비를 마친 서연이 지극히 어색한 몸짓으로 방에서 나왔다. 그러곤 아직 촉촉한 머리끝을 매만지며 그의 곁에 앉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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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흐흠. 벌써 씻었네요.”

실수를 만회하려면 시작은 물 흐르듯, 최대한 자연스럽게.

눈치를 살핀 서연이 슬슬 사과의 말을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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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율이 씨는…… 부모님이랑 살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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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나이 차이 나는 남동생도 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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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그렇구나. 갑자기 외박해서 걱정하시는 거 아니에요?”

눈썹 끝을 늘어트린 서연이 미안해하며 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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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리 연락했으니까, 걱정하지 말아요.”

후, 그럼 일단 패스. 이제 본론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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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가 잠결에 실수를 한 것 같은데. 의도적으로 그런 게 아니라 너무 피곤한 나머지…….”

지그시 바라보는 그의 까만 눈동자를 마주한 순간, 서연은 자신의 변명이 구차하다고 느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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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 아니에요. 이유 불문하고, 진심으로 말할게요. 미안해요. 율이 씨.”

진심 어린 사과를 건넸는데도 그는 괜찮다는 말이 없었다. 그저 골똘한 생각에 잠긴 듯 시선을 내린 채 손끝만 바라보고 있었다.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무겁게 닫혀있던 그의 입이 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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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과를 다른 방법으로 받고 싶은데. 가능할까요?”

무슨…… 방법?

서연은 뜬금없는 그의 말에 잠시 어리둥절하다, 명백한 잘못 앞에 일단 고개를 끄덕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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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식으로, 10번 만나고 싶어요.”

‘지금도 만나고 있잖아’라고 말하고 싶었지만, 서연은 침착하게 되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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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번이어야 할 이유가 있어요? 시간만 맞으면 지금도 충분히 만날 수 있잖아요.”

물음에 답하려는 듯 진지한 그의 시선이 서연에게로 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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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서연 씨가 신경 쓰여요. 많이 생각나고요. 그래서…….”

잠시 숨을 고른 그가 다시 말을 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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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 알고 싶어요. 내가 왜 이러는지.”

너무도 솔직한 그의 말에 당황스러운 것도 잠시, 들려오는 다음 말에 생각이 많아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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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서연 씨한테도 알려주고 싶어요. 나라는 사람에 대해서.”

알고 싶고, 알려주고 싶다라…….

서연은 참 이상하게도, 그의 제안에 거부감이 들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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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번이라는 횟수가 무의미할 수도 있겠지만, 그래도 그 기회를 꼭 채우고 싶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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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 채우면, 그다음은요?”

묻고 싶었다. 그래서 어떻게 하고 싶은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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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번을 채우는 그 날. 서로의 진심을 확인하는 건 어떨까요?”

그날 고백이라도 하겠다는 건가? 아니면 서로 간을 보자는 건가?

하룻밤의 실수와 빠른 사과, 그리고 이어진 색다른 제안.

마치 실수하기만을 기다린 사람처럼 과감하게 움직이는 남자의 모습을 서연이 물끄러미 바라봤다.

너무도 착해 보이는 까만 눈동자가 애타게 대답을 기다리는 사이, 서연은 머릿속 리스트를 점검하기 시작했다.

특별히 만나는 남자, 없고.

같이 있으면 좋은 것, 맞고.

최근 관심이 생긴 것도, 확실하고.

내키지 않으면 언제든 그만둬도, 되고.

그렇다면 망설일 필요 따윈 없었다.

더는 고민하고 싶지 않은 서연이 그와 시선을 마주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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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수를 만회하는 데엔 빠른 수습만이 최선이죠.”

초조하게 허락을 기다리던 권율의 입꼬리가 슬슬 움직이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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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한 가지. 꼭 짚고 넘어갈 게 있어요.”

사업가 아니랄까 봐. 서연은 점검해야 할 사항을 놓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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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구든, 10번을 채우기 싫다면…… 남은 횟수에 상관없이 그만두기. 어때요?”

질문하듯 물었지만, 권율의 동의를 바라는 건 아니었다. 그저 ‘언제든 정지 가능’이라는 조건을 덧붙이고 싶었을 뿐이었다.

그래서일까. 대답도 듣기 전 서연은 대뜸 손부터 내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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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다면 이걸로 깔끔하게 정리하죠.”

순순히 받아들이겠다는 듯 권율이 환한 미소로 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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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으로 잘 부탁해요. 서연 씨.”

커다란 계약이 성사된 듯 두 사람이 손을 마주 잡았다. 그러곤 똑같이 환한 표정으로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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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진지하게 협상을 마친 두 사람이 느긋하게 아침을 먹었다.

그러곤 앞으로 언제 만나면 좋을지에 대해 이야기를 나눴다.

종이로 된 계약서만 쓰지 않았을 뿐, 두 사람은 10번이라는 만남을 꽤 진지하게 받아들였다.

지이이잉―.

식탁 위에 놓인 권율의 전화기가 울렸다. 그러자 서연의 시선이 자연스럽게 발신자를 확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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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 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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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 오늘 할아버지네 집에 갈 거지?]

서연과 시간을 보내느라 약속을 까맣게 잊었던 권율은 당황한 듯 이마를 문질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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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긴 가야겠지…….”

가고 싶지 않은지, 권율이 말끝을 흐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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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럼. 형 좀 태우고 가라. 어제 술 먹고 차를 회사에 놓고 왔어. 엄마는 이미 할아버지 댁에 가셨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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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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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응. 잔소리 듣기 싫으니까 늦지 않게 와라.]

시계를 힐끔 쳐다본 권율은 집에 갈 시간이 없다는 걸 확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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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발할 때 다시 연락할게.”

전화를 끊은 권율이 아쉬운 표정으로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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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아버지 댁에 식사 약속이 있어요. 그만 가볼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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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네.”

덤덤한 척 대답했지만, 서연은 못내 아쉬웠다. 하지만 내색할 수도, 붙잡을 수도 없었다. 그저 엉망이 된 셔츠를 쇼핑백에 담아 건넬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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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 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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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만나요. 라고 해주면 안 될까요?”

다시는 안 볼 사람 같은 작별 인사는 싫다는 듯 권율이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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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곧 만나요. 율이 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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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따 전화할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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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다릴게요.”

서연의 대답이 마음에 들었는지 미소를 머금은 권율의 발걸음이 그제야 떨어졌다. 물론 아주 느릿느릿, 천천히. 자꾸 뒤돌아보긴 했지만 말이다.

권율은 서연의 집을 빠져나와 그녀가 건넨 쇼핑백을 조수석에 내려놨다. 그러곤 그리 멀지 않은 고모네 집으로 향했다.

출발한다는 연락에 미리 나와서 기다리고 있던 서희가 권율의 차를 발견하고는 가볍게 손을 흔들었다.

차가 부드럽게 멈춰 서자 서희가 조수석 문을 활짝 열고는 의자 위에 놓인 쇼핑백을 들고 앉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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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쇼핑했냐?”

아니라고 대답하기도 전, 쇼핑백을 뒤적거리던 서희가 의아한 얼굴로 다시 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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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대체 뭘 했길래, 셔츠가 화장품 범벅이야?”

당황한 권율을 보고 서희가 ‘너, 딱 걸렸어’라는 표정으로 피식 웃었다.

그러곤 아예 권율의 옷을 꺼내 제대로 펼쳐 들었다. 얼마나 샅샅이 살피는지, 불편해진 권율의 미간이 제대로 구겨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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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형, 그거 도로 넣어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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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뭐야. 여친이라도 생겼어?”

서희의 물음에 권율은 순간 고민했다. 마음이 가는 사람이 있다는 정도는 얘기하고 싶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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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직, 그런 사이는 아니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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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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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력 중.”

권율의 대답에 서희가 짓궂게 놀려대기 시작했다.

그러거나 말거나 권율은 정면만 응시한 채 서연과의 시간을 곱씹으며 아쉬움을 달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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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자친구라곤 한 번도 안 사귀더니. 웬일이야.”

과도한 관심을 보이는 서희가 꼬치꼬치 캐물었지만, 권율은 말을 아꼈다. 하지만 쓸데없이 끈질긴 서희는 포기하지 않았다.

이러다가는 계속 시달리겠다 싶어 권율은 가장 평범한 단어를 꺼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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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구야. 아직은.”

친구라고 말해놓고 권율이 피식 웃었다. 서연이 친구도 아닐 뿐더러 친구일 수도 없었기에.

그러나 친구라는 그 말에 서희의 추궁이 더 심해졌다. 그 사이 권율의 블랙 SUV가 높은 담벼락 앞에 멈춰 섰다.

차에서 내리는 순간에도 서희의 질문은 멈추질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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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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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청나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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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 사진 있냐?”

사진이라는 말에 그녀의 거실에 있던 실물 크기의 서연이 생각났다. 그러자 말릴 틈도 없이 미소가 지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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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부담스럽게 화사한 표정은 뭐지? 야. 감질나게 하지 말고. 있는 거 다 공개해 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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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뭘.”

서희의 말을 시크하게 받아친 권율이 대문 초인종을 눌렀다.

계단을 올라가면서도 서희는 사진을 내놓으라고 난리였다. 아무리 그래도 묵묵부답으로 일관하자 참지 못한 서희가 사악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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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쓰읍. 이렇게 나오시겠다. 그러면 이따가 외숙모한테 물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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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뭐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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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주변에 여자 사람 친구가 누군지 말이야.”

권율의 잇새로 한숨이 새어 나오자 때는 이때다 싶었는지, 서희가 큰 소리로 떠들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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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쏠’인 권율이 썸 타려고 노력 중인 여자. 셔츠가 화장 범벅이라는 건 포옹은 당연히 했단 얘기고. 그런데 아직 친구고, 얼굴은 엄청나게 예쁘다. 맞지?”

그만 좀 하라고 권율이 입을 떼려던 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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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게, 다 무슨 소리냐?”

정원에서 시든 꽃을 정리하던 석구가 허리를 펴며 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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