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 진짜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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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 진짜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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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 진짜 모습
2022.03.27.
“이런…….”
예상치 못한 석구의 등장에 더 당황한 건 서희였다. 오히려 권율은 아무렇지 않은 표정으로 인사를 건넸다.
“할아버지. 여기 계셨어요?”
“오냐. 그런데 서희가 방금 하던 말은 다 뭐냐?”
아무것도 아니라고 권율이 대답하기 전, 서희가 한발 빨랐다.
“율이가 너무 여자를 멀리해서 제가 농담으로 지어낸 말이에요.”
서희가 오른팔로 석구의 어깨를 감싸며 앞서갔다.
“박 씨 아저씨 있는데, 뭐 하러 화단을 정리하세요? 힘드시게.”
그러곤 고개를 살짝 돌린 서희가 입 모양으로 ‘미안’이라고 말했다.
짧은 한숨을 내뱉은 권율이 앞서가는 두 사람을 따라 천천히 걸었다.
“율이 애미야.”
집 안으로 들어온 석구가 장갑을 벗으며 부르자, 정갈한 앞치마 차림의 연희가 주방에서 종종걸음으로 나왔다.
“입이 텁텁하구나. 서재로 마실 것 좀 내오거라.”
“예. 아버님.”
석구가 서재로 사라지자 권율과 눈이 마주친 연희가 작게 속삭였다.
“어제는 왜 안 들어오고. 할아버지 댁에 오면서 셔츠를 입어야지. 후드티가 뭐야.”
“서희 형이랑 같이 오느라 시간이 없었어요.”
“어제 형이랑 있었어? 그래도 2층 가서 셔츠로 갈아입어. 얼른.”
권율은 서희의 눈치를 살피며 고개를 끄덕였다. 조금 전 실수한 서희가 말을 맞춰줄 것 같아서.
연희는 권율을 2층으로 보내고는 구수한 둥굴레차를 타서 서재로 향했다.
똑똑―.
“들어와.”
시선 하나, 손짓 하나 조심스러운 연희가 고풍스러운 서재에 들어섰다. 그러자 석구의 매서운 눈길이 하나뿐인 며느리에게로 쏠렸다.
“둥굴레차입니다.”
통창을 등지고 앉아 있는 석구 앞에 푸른빛이 도는 다기를 내려놓고 물러나려던 참이었다.
“율이 말이다.”
아들의 이름이 나오자 눈이 커다래진 연희가 상체를 숙인 채로 얼어붙었다.
“예. 아버님.”
“여자친구가 있니?”
너무도 생소한 단어에 연희가 두 손을 마주 잡으며 대답했다.
“없습니다.”
“서희 말로는 여자친구가 있고, 얼굴이 예쁘다던데.”
연희는 간밤에 아들이 외박한 이유가 서희에게 연애 상담을 하려고 그랬나 싶었다.
그래도 직접 확인한 게 아니다 보니 섣불리 아니라고 할 수도, 맞는다고 할 수도 없었다.
모른다고 하면 집에서 뭐 하느라고 귀한 자식에게 관심도 없냐는 핀잔을 들을 테고. 맞는다고 하면 누구냐고 꼬치꼬치 캐물으며 잔소리를 들을 게 뻔했다.
잠시 고민하던 연희는 자신이 알고 있는 범위 내에서 솔직하게 대답했다.
“율이 주변에 여자친구는 진보라라고, 어려서부터 같이 공부하던 친구밖에 없습니다.”
“진보라? 그 JS 화재보험 집 손녀 말이냐?”
“예. 어려서부터 영재교육원을 같이 다니던 친구입니다.”
영재교육원이라는 말에 석구의 눈이 반짝거렸다.
“그럼 여자친구는 그 보라라는 아가씨가 유일하다. 이 말이냐?”
“그렇습니다. 아버님.”
연희의 대답에 석구가 관심을 보이며 이것저것 묻기 시작했다. 보라의 학창 시절의 성적과 성격, 생김새와 부모의 성품, 그리고 집안 분위기까지.
“부회장이라는 아버지 인상은 좋아 보이던데. 그 집 엄마는 어떠냐?”
석구가 관심을 갖는 게 이상했지만, 차마 잘 모른다고 할 수 없어 솔직하게 털어놨다.
“대성건설 외동딸이라 그런지…… 생긴 것도 화려하고, 성격도 당당합니다.”
“대성건설? 그 정도면 자신감이 넘칠 만하구나.”
국내 건설회사 중 3위 안에 드는 알짜 기업의 외동딸이라는 말에 석구의 머리가 빠르게 돌아갔다.
“중간에 연락이 끊겼었는데 보라 엄마가 율이 소문을 듣고 저한테 전화를 했더라고요. 율이랑 수업을 같이 짜고 싶다고 말입니다.”
“추진력 있어 좋구나.”
JS 화재보험과 대성건설이라는 말에 석구의 마음이 관대해졌다.
어려서부터 잘 알던 사이. 게다가 똑똑하고, 집안은 나무랄 것 없이 좋다는 말에 더 잴 것도 없었다.
“연락처는?”
“누구, 말씀이신지…….”
말귀를 착착 알아듣지 못한다는 듯 석구가 혀를 차며 말했다.
“그 집 엄마든, 보라라는 아가씨든 말이다.”
“번호가 안 바뀌었다면 둘 다 가지고 있습니다.”
“잘 됐다. 그 아가씨랑 만날 수 있게 약속을 잡아놔.”
난데없는 소리에 연희의 눈이 커다래졌다. 그러자 이런 것까지 설명해야 하냐는 듯 석구가 한숨을 내쉬었다.
“율이가 좋은 집안 여식이랑 연을 맺어야 하지 않겠니. 어려서부터 알고 지냈겠다, 똑똑하겠다, 집안 좋겠다. 괜찮은 아가씨라면 다른 남자가 채가기 전에 약혼이라도 시키면 좋고.”
갑작스러운 말이었지만, 호랑이 같은 시아버지에게 차마 말대꾸할 수 없어 마주 잡은 손등만 세게 쥐었다.
“어중이떠중이 같은 집안이랑 결혼하는 건 너 하나로 족하지 않겠냐, 이 말이다.”
입술을 꽉 다문 연희가 하고 싶은 말을 억지로 삼켰다.
“너도 알다시피. 율이가 나한테 어떤 손자냐.”
빛나는 희망이자 집안의 자랑인 종손. 게다가 하나뿐인 아들이 좌절했던 꿈을 실현해줄 유일한 존재.
석구에게 권율은 그런 존재였다.
“상현이야 권 씨이니 당연히 챙겨야 하지만, 서 씨 손주들이야 다르지 않겠니. 내 재산의 대부분은 율이한테만 물려줄 생각이다.”
석구는 앞으로의 자신의 계획에 대해 장황하게 설명하기 시작했다.
그러면서 권율의 빛나는 앞날을 위해 연희가 해야 할 의무와 역할을 강조할 때는 매서운 회초리를 든 사람 같았다.
“그러니까. 내 말은…… 우리 일등 손자에게 걸맞은 엘리트 교육을 받은 아가씨. 훌륭한 집안과 그에 못지않은 명석함이 뒷받침되어야 한단 말이다.”
아무것도 확인한 것이 없는데 석구는 권율과 보라와의 관계를 단정 짓고 있었다.
“만약 율이가 그 보라라는 아가씨와 사귀고 싶다면 애미된 입장에서 적극적으로 나서는 게 네 역할이다.”
“명심하겠습니다.”
석구는 원하는 대답을 듣고 나서야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러곤 며느리의 어깨를 톡톡 두드리며 인자한 미소를 지었다.
“별 볼 일 없는 네가 이 집안에 들어와 잘한 거라고는 율이 낳은 것밖에 더 있니? 율이가 없었다면 언감생심 이 집안에 발이라도 들여놓을 수 있었겠냐. 이 말이다.”
그건 인자함을 빙자한 비웃음이었다. 순간 연희의 등줄기가 차갑게 얼어붙었다.
아들을 둘이나 낳고 남편 뒷바라지에, 시댁 일이라면 열과 성을 다해 쫓아다녔건만 돌아오는 건 멸시와 냉대뿐이었다.
석구가 나간 고풍스러운 서재. 이방인처럼 서 있던 연희는 연한 살이 너덜너덜해질 때까지 입안을 짓씹었다.
***
육해공이 총출동한 산해진미를 앞에 두고도 불편한 분위기가 계속됐다.
일주일에 한 번 석구의 집에서 함께하는 식사 시간은 언제나 똑같았다.
집안의 권력자 석구의 일장 연설과 권율에 대한 한없는 사랑.
그걸 지켜보는 나머지 가족들의 불만 어린 시선. 거기다 무표정한 얼굴로 도덕책 같은 대답만 내뱉는 권율의 목소리.
오늘도 별반 다르지 않았다.
석구는 윤기가 자르르 흐르는 갈비찜 하나를 들어 권율의 밥 위에 올려놓으며 말했다.
“우리 일등 손자. 요즘 컨디션이 어떠신가?”
“좋습니다. 할아버지.”
시원스러운 권율의 대답에 석구가 자애로운 미소를 지었다.
“공부하느라 힘들면 김 원장네 보약이라도 한 채 지어주랴?”
“밥이 보약이잖아요. 엄마가 너무 잘 챙겨주셔서 약은 안 먹어도 될 것 같습니다.”
엄마에게 좋은 말이 돌아가길 바라며 권율이 말했다.
“그래도. 열심히 공부하려면 여름 오기 전에 몸을 보해 놔야지.”
분위기상 석구의 잔소리가 길어질 것 같자, 눈치 빠른 권율이 물을 한 모금 마시곤 대답했다.
“지어주시면 감사히 먹겠습니다.”
기어코 원하는 대답을 받아낸 석구가 이번엔 연희를 쳐다봤다.
“김 원장한테 연락해 놓을 테니까. 택배로 받을 생각하지 말고, 약이 다 될 때까지 지키고 서 있다 직접 가서 받아와.”
“예. 아버님.”
가지런히 두 손을 포갠 연희가 그러겠다고 했지만, 석구의 잔소리는 끝이 없었다.
그러자 권율의 미간에 금이 가기 시작했다. 연희의 고통이 모두 제 탓인 것 같아서.
식탁 분위기가 무겁게 가라앉자 보다 못한 서희가 나섰다.
“할아버지. 저는요?”
질투라도 하는 듯 가벼운 말투로 말했지만, 보약을 받아먹고 싶어서 하는 얘기는 아니었다. 그저 연희와 권율이 편하게 식사를 마칠 수 있도록 도와주고 싶을 뿐.
“저도 매일 재판 나가느라고 피곤해요. 할아버지.”
“잘 나가는 서중길 대표는 뒀다 뭐 하려고?”
“에이. 회사에서 맨날 혼내는 무서운 아버지랑 인자하고 소중한 할아버지랑 어디 같나요?”
외손주의 넉살에 껄껄 웃은 석구가 함께 지어주겠다고 하자, 서희는 그냥 해본 소리라고 대충 얼버무렸다.
“서희야. 사시 동기 중에 말이다.”
“옙! 할아버지.”
“대학교 2학년 때 1차 붙은 사람이 있었니?”
“2학년에 1차는 힘들죠. 소년 급제 자체가 쉽지 않고요. 이젠 사시가 없어져서 아예 불가능해졌지만요.”
순간, 온 식구들의 시선이 서희에게로 향했다. 하루 이틀 겪는 것도 아닌데 괜한 말을 해서 일장 연설만 길어질 게 뻔하다는 듯.
“그렇지? 허허. 이러니 우리 율이가 대단하다는 거다.”
아니나 다를까. 권율에 대한 무한한 신뢰가 석구에 입에서 흘러나왔다.
“너도 알다시피 다른 사람들은 고시원이다, 학원이다, 얼마나 열심히 하니? 군대에서 틈틈이 공부해서 제대한 주에 시험을 다 보고.”
사랑이 넘쳐흐르는 석구의 말에 서희가 ‘그럼요. 대단하죠’를 연발했다.
“난 말이다. 행시 1차 발표 나기 전부터 이미 합격할 줄 알았다. 우리 율이가 안 된다면 대체 누가 되겠니.”
넥타이로 목을 칭칭 동여맨 것 같은 기분……. 씹지도 않은 밥을 억지로 삼킨 권율이 말했다.
“경험 삼아 본 거라 2차는 부족해요.”
헛된 희망을 품지 말라는 의미였다.
“초시에 동차 합격은 정말 어려워요. 할아버지.”
진심 어린 말이었지만 석구는 오히려 응원하고 나섰다.
“이번에 안 되면 내년에 준비하면 되잖니. 아직 졸업하려면 시간도 넉넉하고.”
“1차는 정말 운이 좋았어요. 그러니까…….”
어떤 기대도 하지 말라고 말하고 싶었다. 그러나 도통 말이 통하지 않았다.
“역시, 우리 일등 손자는 이렇게 겸손해. 인성도 아주 넘버원이야.”
석구는 식탁에 앉아 있는 가족을 빙 둘러보더니 모두가 너무도 잘 알고 있는 권율의 엘리트 스토리를 시작했다.
자랑을 해도 해도 자꾸 하고 싶은지 석구는 너무도 행복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율아. 공직에 꼭 나가야 한다. 장관도 하고, 여차하면 국무총리도 하고. 까짓것 대통령을 못 할까.”
거기까지만 했으면 딱 좋았을 텐데…….
석구는 굳이 하지 않아도 될 말을 잊지 않았다.
“네 아버지가 요란하게 연애하는 바람에 이루지 못한 꿈, 그 꿈을 율이 네가 대신해내야 한단 이 말이다.”
원망 섞인 석구의 눈길이 연희에게로 향하자 권율이 몸을 틀어 가림막을 만들었다.
“예. 할아버지. 열심히 하겠습니다.”
“오냐. 오냐. 이 할아버지가 믿을 사람은 너뿐이다.”
부담스러운 덕담은 식사가 끝날 때까지 계속됐다.
그나마 집안의 막내인 상현이 재잘거리지 않았다면 모두 숨이 막혔을 것이다.
권율의 동생인 상현이 노트북을 사달라며 재롱 아닌 재롱을 선보이는 바람에 자리가 화기애애하게 마무리될 수 있었다.
“다음 주에 시간 나면 서초동 사무실로 나오고.”
“예. 할아버지.”
배웅을 나선 석구는 든든한 권율의 어깨를 톡톡 두드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차에 올라탄 권율은 빠르게 시동을 걸었다. 그러고는 단단히 옥죄는 할아버지의 시선으로부터 도망치듯 출발했다.
4차선 도로로 들어서자, 권율의 잇새로 진한 한숨이 새어 나왔다.
손바닥으로 명치를 두드리던 권율은 약국을 보자마자 핸들을 꺾었다. 비상깜빡이를 켠 채 약국으로 뛰어 들어간 권율이 말했다.
“소화제 주세요.”
뒷주머니에서 꺼낸 그의 지갑 안에 사진이 박힌 카드가 들어 있었다.
<권율. 학사과정, 경영대학, 경영학과 전공/ 한국 대학교 학생처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