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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 침묵에 대한 변명 (17/130)


17. 침묵에 대한 변명
2022.03.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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급하게 소화제를 삼킨 권율이 약국을 빠져나왔다.

그의 손에 들린 약봉지 안에는 소화제와 두통약이 여러 개 들어 있었다.

매주 불편한 식사가 끝나고 나면 으레 소화제를 넘겨야만 했다. 그렇지 않으면 일주일 내내 답답했으니까.

그렇다고 석구를 미워하는 건 아니었다. 그저 그의 지나친 관심과 사랑에서 멀어지고 싶을 뿐.

하지만 도망갈 처지는 못 됐다.

그러면 중간에 낀 연희가 더 힘들어질 테니까.

그가 공부에 두각을 나타내면서 연희에 대한 석구의 태도가 다소 누그러들었다.

뒷바라지를 제대로 하라는 명목이었지만, 권율은 그것만으로도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소리 없이 흐르는 엄마의 눈물이 그나마 줄어들 수 있어서.

차에 올라탄 권율이 비상깜빡이를 끄고 방향 지시등을 켰다.

딸각딸각―.

핸들을 돌리는 그의 손등에 핏줄이 솟았다 가라앉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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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질이 따로 없네.”

혼잣말을 중얼거린 권율이 서늘하게 웃었다.

영재로 소문나 2등을 해본 적도, 공부가 싫었던 적도 없었다. 결코 단 한 번도.

오히려 새로운 걸 알아가는 재미에 푹 빠져 손에서 책을 놓지 않았다. 책 속의 세상이 너무도 황홀해서.

가벼운 내용이든 무거운 내용이든 도서관에 들어앉아 온종일 책만 읽어도 살 수 있을 것 같은 날도 있었다.

책장을 넘길 때마다 풍겨오는 잉크 냄새가 너무 행복해, 그렇게 책벌레로 살았다.

그러다 할아버지인 석구가 말하는 엘리트 코스가 시작됐다.

모두가 부러워하는 성적, 원치 않는 유명세, 각종 대회를 휩쓸고 받아온 상장만 해도 거실을 뒤덮고도 남을 정도였다.

각종 모의고사에서 받은 넘사벽 점수, 수능 만점, 한국대 수석 입학. 정말 군말 없이 달렸던 시간이었다.

대학에 들어가면 수면 위로 올라가 잠시 숨을 쉴 수 있는 여유가 있을 거라고, 그렇게 생각했었는데. 그건 안일한 착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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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율아. 모두가 우러러보는 자리. 그 정점에 서야 한다.’

 
다시 시작된 새로운 길.

그 길을 위해 다양한 스펙을 쌓았다. 다시 돌아오지 않는 대학에서의 1년이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사시가 사라진 자리. 요직으로 갈 수 있는 유일한 시험인 행시를 거쳐 사무관이 되고, 장차관이 되면…… 좋을까?

할아버지가 말한 대로, 아니 운이 좋아 국무총리가 된들…… 과연 행복할까?

애틋한 사랑의 결과로 실패한 아버지의 꿈을 이루고, 할아버지의 한을 풀어주는 것이 인생의 궁극적인 목표가 될 수 있을까?

그렇게 살아가는 꼭대기에서의 삶이…… 정말 만족스러울까?

그때부터였다.

눈가리개를 한 경주마처럼 앞만 보고 달려야 하는 상황이 버거워지기 시작한 건.

누구를 위해. 무엇을 향해. 이렇게까지 해야 하나? 나란 사람은 아예 없는 것처럼.

숨 쉴 틈도 없이 몰아치는 덫에 걸린 동물, 그게 권율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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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고 싶다.”

그러다 불쑥 서연이 떠올랐다. 전방을 주시하던 권율의 눈이 힐끔 시간을 확인했다.

과거 스쳐 지나갔던 찰나의 인연.

제대 기념으로 만나자는 현우의 말에 나갔던 자리, 예상치 못한 재회. 거대한 파도에 휩쓸리듯 흔들렸던 감정.

모든 것이 처음이었다.

그 짧은 시간에 이성에게 호감을 갖게 된 것은.

워낙 강렬했던 그녀의 첫인상 때문이었을까? 아니면 손수건을 사이에 두고 손을 마주 잡은 그 순간이었을까?

누군가 왜 서연이냐고 묻는다면 해줄 수 있는 대답은 모른다……일 것이다. 이미 감정이 제멋대로 움직인 걸 무슨 수로 설명하겠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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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연 씨…….”

입안을 맴돌던 빛나는 이름이 권율의 잇새로 흘러나왔다.

그러자 순식간에 머릿속이 서연으로 잠식됐다.

골치 아픈 상념에 빠져 있다가 마법 같은 그녀의 이름을 부르고 피식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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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 보고 싶다.”

그러다 처음 그녀를 데려다주던 날이 떠올랐다.

아마 모르겠지? 그날 얼마나 연락처를 알고 싶었는지.

권율은 친구를 데려다주고 오겠다는 서연을 기다리며, 얼마나 연습했는지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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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흐흠. 한강이라도 좀 걸을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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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은 늦었지만, 커피 어떠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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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에 또 만날 수 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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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혹시, 위아래로 몇 살까지……. 하.’

 
그날 권율은 서연과 단둘이 더 있고 싶어 어떻게든 시간을 끌고 싶었다.

일부러 본 건 아니지만 예전에 받았던 그 상처는 다 나았는지 궁금하다고. 혹시 아직도 힘들다면 모두 들어주고 싶다고. 모든 걸 솔직하게 털어놓고 싶었다.

하지만 차마, 그럴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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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아…….”

그날의 기억이 떠오르자 깊은 한숨이 허공을 갈랐다.

22살이라는 나이, 뭐 하나 이룬 것 없는 대학생이라는 신분.

태양처럼 빛나는 그녀가 아예 남자로 봐주지 않으면 어쩌나. 고민하던 시간이 떠올랐다.

그날 서연을 집까지 데려다주고 돌아오며 아쉬운 마음을 접고 또 접었었다. 여러모로 자신은 걸맞은 사람이 아니라고 생각했으니까.

그런데 말릴 틈도 없이 시작된 마음이 자꾸만 그녀에게로 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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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우 형. 저번에 말씀드린 서류요. 금요일에 회사로 가도 돼요?’

 
서연이 홈쇼핑에 간다는 날에 맞춰 현우에게 연락을 했다. 중요한 서류도 아니었지만, 서연과 다시 마주치고 싶어서.

얼떨결에 성사된 두 번째 만남에서도 그녀는 미치도록 매력적이었고, 심장이 터져나갈 만큼 아름다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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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락처를 주면, 다음에 돌려주기 편할 것 같은데…….’

 
고맙게도 연락처를 물어봐 주는 서연에게 당장이라도 번호를 주고 싶었다.

처음부터 물어보려고 했는데 말 못 할 사정이 있었다고 지난날을 사과하면서 말이다.

하지만 그녀에게 못 할 짓인 것 같아 참고, 또 참았다. 실망하는 서연의 얼굴을 보며 발걸음이 떨어지질 않았다.

포기…….

그래, 권율은 정말 포기하려고 했었다.

서연을 향한 마음이 더 커지기 전에, 그나마 감당할 수 있는 지금. 마음을 접는 게 맞는 거였으니까.

그래서였다. 서연을 생각하지 않으려 2주 동안 공부와 운동에 미쳐 있었던 것이.

드디어 포기했다고 믿었던 날, 신기루처럼 서연이 나타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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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네. 보통 몇 시에 하세요?’

 
말갛게 빛나는 그녀의 눈동자가 운동하는 시간을 물어오자, 머릿속이 그대로 암전돼 버렸다. 포기했다고 자신했던 시간은 모든 거짓이었던 것처럼,

어느새 풀려버린 마음의 브레이크가 그녀에게로 돌진했다. 그녀의 손에 들린 커피가 폭발하듯 그렇게.

커피를 뒤집어쓴 그녀를 본 순간 권율은 깨달음을 얻은 사람처럼 더는 고민하지 않았다. 대뜸 커피숍으로 뛰어 들어가 전화번호부터 적었다.

그날이 떠오르자 과거의 억눌렀던 감정과 현재의 죄책감이 동시에 밀려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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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안해요.”

권율은 그녀가 들을 수 없는 사과를 내뱉고는 뻔뻔하게도 ‘그래도’라는 단서를 붙였다.

나이가 어리면 호감조차 품으면 안 돼요? 난 서연 씨를 더 알고 싶은데.

편견 없이 진지하게 봐달라고 하면 양심이 없는 걸까요? 그냥…… 이렇게 옆에 있는 것만으로도 난 행복한데.

이미 너무 멀리 와버려서 돌아갈 수도 없다고. 그녀에게 말하고 싶었다.

하지만 권율은 진실 대신 침묵을 선택했다.

그건 서연이 자신을 온전히 봐주길 바라는 비겁한 마음에서 시작된 변명이었다. 아니, 진실을 꺼내면 기회조차 사라질까 봐 두려움을 빙자한 핑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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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의 차가 붉은 신호에 걸리자 권율의 눈동자가 코발트블루로 물들어가는 하늘을 바라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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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고 싶다. 정말…….”

신호가 바뀌기를 기다리며 핸들을 톡톡 두드리다 도저히 참아지지 않는 마음이 서연의 전화번호를 눌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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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율이 씨.]

반가운 서연의 목소리. 복잡한 상념이 사라락 자취를 감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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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디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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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이죠. 할아버지 집에서 맛있는 거 많이 먹었어요?]

다정한 물음에 권율의 눈가가 부드럽게 휘었다. 오른발이 액셀을 지그시 밟자 차가 천천히 속도를 올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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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냥. 한식이요. 서연 씨는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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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직요. 밥을 먹을까 말까. 운동을 할까 말까. 고민하고 있어요.]

집으로 향하던 목적지는 어느새 서연의 집으로 핸들을 돌리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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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둘 다 해결해준다면, 나올래요?”

답답해 미쳐버릴 것 같은데. 나 좀 위로해주면 안 돼요? 라는 뜻의 다른 말이었다.

권율은 잠시 서연의 대답을 기다렸다.

고민하는 숨소리가 나직하게 들려오더니, 서연이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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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만나면 횟수는 어떻게 돼요?]

만날 때마다 확인 도장이라도 찍어줘야 하나 싶어 권율이 빙그레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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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감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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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아요. 밥 먼저 먹고, 산책해요. 우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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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으로 15분. 곧 만나요.”

권율의 말에 서연이 화들짝 놀라며 서둘러 자리에서 일어나는 소리가 들렸다. 서연의 목소리가 뚝 하고 끊겼지만, 그녀의 여운은 권율의 마음에 남았다.

권율은 꼬리에 꼬리를 문 차들의 행렬에 합류했다. 사방에서 켜진 브레이크 등으로 인해 권율의 얼굴에 붉은빛이 어렸다.

피식. 이유 없이 그가 웃었다.

그러곤 핸들 위에 올려진 오른손을 들어 제 심장을 꾹 하고 눌렀다.

서연을 만난다는 생각에 얼마나 신이 났는지 춤을 추듯 뛰는 심장박동을 느끼며 그렇게 또 웃었다.

그러다 맞은편에 서 있는 버스광고에 시선을 빼앗겼다.

<선의 미학. 국내 최초 단독 전시.>

전시회 광고를 보자 미술관에서 서연과 마주쳤던 그날이 떠올랐다.

서연에게 팝아트 티켓을 선물하고 우연히라도 만나고 싶어 일주일 내내 같은 전시회를 찾았다. 아마 그 사실을 서연이 안다면 커다란 눈동자가 더 동그래지겠지?

만약 토요일에 서연을 만나지 못했다면 일요일에도 갈 생각이었다. 연락도 없는 그녀를 잠자코 기다리는 것보다, 그림을 마주하는 것이 그나마 견딜 수 있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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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연히 율이 씨도 나한테 호감일 거라고…… 생각했어요.’

 
돌담길을 함께 걸은 후 서연이 했던 말이었다.

그러자 봇물이 터지듯 그녀가 미치도록 보고 싶어졌다.

차선을 바꾼 권율의 차가 지름길을 내달렸다.

어느새 어둠이 내려앉은 거리.

뜨거워진 마음을 달래려 권율이 창문을 내렸다. 그러자 끝자락에 걸린 봄바람이 그의 앞머리를 살짝 흔들고 지나갔다.

권율은 오른손으로 머리를 쓸어올리며, 이미 너무도 특별해진 그녀를 떠올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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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 번째, 데이트네.”

몇 번의 만남이 있었지만, 처음이라는 단어가 주는 의미가 얼마나 남다른지 권율은 다양한 감정에 휩싸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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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나자마자 속이 든든해지는 걸 먹여야지. 날씨가 완벽하니 조금 멀리 산책을 하는 것도 나쁘지 않겠어.’

그러다 어떤 표정으로 무슨 이야기를 나눌까 행복한 고민에 빠졌다.

별것 아닌 계획을 세우는데도 한껏 들뜬 마음이 서연의 아파트가 시야에 들어오자 더욱 요란스러웠다.

주황색 신호를 놓치지 않으려고 빠르게 핸들을 돌려 미끄러지듯 주차장으로 들어갔다.

서연의 차가 보이는 곳에 주차를 하고, 설레는 마음으로 흐트러진 앞머리를 쓱쓱 매만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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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미 있는 시간을 보내다 보면…….”

‘진심을 알아줄 날이 오겠지’라는 뒷말을 끝내 내뱉지 못했다. 진실하지 못한 침묵, 씁쓸한 속내가 설렘으로 가득했던 얼굴에 그늘을 만들었다.

무거워진 마음을 힘겹게 내려놓은 권율이 핸드폰을 찾는 사이, 서연이 주차장 유리문 사이로 모습을 드러냈다.

네이비 라운드 티셔츠에 그보다 옅은 청치마, 귀여운 하얀 운동화 차림으로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곧 권율의 차를 발견한 서연이 오른팔을 번쩍 들어 반갑게 흔들었다. 그러자 그녀의 긴 머리카락이 춤을 추듯 흔들렸다.

그 모습이 어찌나 사랑스러운지, 권율은 도저히 참을 수가 없었다. 재빨리 죄책감을 던져버리고 단숨에 운전석에서 내렸다.

그러고는 머릿속을 완전히 점령해버린 그 이름을 불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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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연 씨!”

비겁하더라도, 이렇게 시작하고 싶다고.

권율이 흐리게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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