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 적극적으로 움직이다
(18/130)
18. 적극적으로 움직이다
(18/130)
18. 적극적으로 움직이다
2022.04.03.
“왠지 도착했을 것 같아서 나왔는데. 내가 시간 계산 하나는 기가 막히죠?”
반가워하는 서연이 권율을 올려다보며 물었다.
그러자 더 반가웠던 권율이 고개를 끄덕였다.
“어? 잠깐만요.”
권율의 손가락이 서연의 뺨에 붙은 머리카락을 떼어냈다. 소리 없이 스친 따듯한 온기에 서연의 시선이 오르락내리락했다.
서연은 권율의 손길이 닿은 곳이 왠지 화끈거려 제 뺨을 쓱 하고 쓸어내렸다.
“밥 먹고, 산책한 다음 갈게요. 앞으로 3시간 정도, 어때요?”
더 있어도 괜찮다고 말하고 싶었지만, 서연은 말을 줄였다. 너무 속 보이는 것 같아서.
“네. 뭐. 그래요. 근데 우리 어디 가요? 하루에 두 번 만난 건 처음인데.”
“특별히 먹고 싶은 거 있어요?
“흐음. 너무 무겁지 않은 거?”
“그럼, 내가 가자는 대로 가볼래요?”
손가락으로 오케이 사인을 만든 서연이 고개를 끄덕이자 권율이 그 모습을 물끄러미 내려다봤다.
언제까지 움츠리고만 있을 거야. 시간이 얼마 없다고.
권율은 입술을 꾹 눌렀다 떼며 물었다.
“부탁이 있는데 들어줄 수 있어요?”
‘뭔데요?’라는 표정으로 서연이 쳐다보자 권율이 한 걸음 다가와 섰다.
“사실 토요일에 만나면 서연 씨한테 말하려고 했었는데.”
토요일 이야기가 나오자, 서연은 당장이라도 부탁을 들어줄 기세로 반 발짝 다가섰다. 그녀의 숨이 권율의 턱 끝에 와닿았다.
“해 봐요. 부탁.”
“손 좀 줘볼래요?”
손이라는 말에 어리둥절한 서연이 오른손을 내밀었다. 그러자 미소를 머금은 권율이 서연의 손을 가볍게 쥐었다.
동그랗게 커진 서연의 눈동자가 마주 잡은 손과 미소를 머금은 권율의 입매를 번갈아 쳐다봤다.
“부탁 들어줘서 고마워요.”
늘 손을 잡았던 연인처럼 권율이 아무렇지 않게 굴었다.
‘이 남자. 뭐지? 뭔데 이렇게 자연스러워.’
서연의 머릿속에선 내면의 목소리들이 아우성을 치고 있었다. 손바닥의 부드러움을 느낄 새도 없이 온몸이 불이 난 것처럼 뜨거웠다. 다만 내색하지 않을 뿐.
“괜찮아요?”
권율은 정지 상태인 서연에게 양해를 구하듯 물었다.
“아, 네. 그럼요. 이제 가요.”
서연의 허락이 떨어지자 권율은 기다렸다는 듯 빈틈없이 손을 고쳐 잡았다.
밤새 붙어 있었지만, 맨손에서 느껴지는 온기는 이렇게 다르구나, 라고 생각하며 입꼬리를 느슨하게 올렸다.
식사 내내 권율을 괴롭히던 압박감, 숨이 넘어가게 목을 칭칭 감았던 사슬이 서연과 함께 있는 것만으로 스르륵 풀리는 기분이었다.
“걸을 수 있겠어요? 멀지 않은 곳이긴 한데.”
고장 난 것처럼 우뚝 멈춰선 서연을 향해 권율이 말했다.
“어, 어. 그럼요.”
선선히 대답하긴 했지만, 살짝 어색해진 서연이 크로스로 맨 가방 줄을 만지작거렸다.
그러곤 두 사람이 나란히 걸었다. 물론 손을 마주 잡은 채로.
다정한 연인이라도 된 것처럼 왜 이렇게 웃음이 새어 나오는지, 깃털같이 가벼운 감정이라는 놈은 알다가도 모르겠다고 권율은 생각했다.
순간 춥지도, 덥지도 않은 바람이 두 사람 사이를 살랑거리며 지나갔다.
마주 잡은 손이 살짝 흔들리자 목이 간지러운 사람처럼 권율이 헛기침을 해댔다. 서연도 얼굴이 화끈거리는지 손등으로 뺨을 매만지며 그와 속도를 맞췄다.
그때, 맞닿은 손에서 진동이 느껴졌다.
“잠깐만요.”
손을 풀지 않은 권율이 불편한 자세로 뒷주머니에 있는 핸드폰을 꺼냈다.
“네. 원장님.”
권율은 핸드폰을 귀에 바짝 가져다 붙이고, 상대방의 이야기를 한참 동안 듣고만 있었다.
“죄송하지만, 그 특강은 어려울 것 같습니다. 저번에도 말씀드렸지만, 이번 달까지만 하고 정리하려고요.”
거듭되는 설득에 이야기가 길어지자, 권율의 입 모양이 서연에게 ‘미안해요’라고 말했다. 그러자 그녀가 얼른 괜찮다고 손짓했다.
“여름까지 시간이 얼마 안 남아서요. 돈 때문은 아니니까 굳이 올려주지 않으셔도…… 네. 그럼요. 나중에 꼭 연락드릴게요.”
도돌이표같이 반복되는 원장의 이야기에 권율은 ‘이동 중’이라는 말로 급작스러운 전화를 마무리했다.
“통화가 길어져서 미안해요.”
권율이 핸드폰을 뒷주머니에 대충 찔러넣으며 사과했다.
“일이, 바쁜가 봐요.”
“지금 맡은 곳에서 자꾸 더 봐달라고 해서요.”
“아, 번호표 뽑고 대기 타야 한다더니. 서희 씨 말대로 능력자인가 보다.”
“그건 아닌데. 앞으로 바빠질 예정이라서요.”
사실 권율은 자신이 과외 아르바이트를 시작한 이야기를 털어놓고 싶었다.
고등학교 때부터 잘 알고 지내던 원장의 간곡한 부탁을 단칼에 거절할 수 없었다고. 게다가 학생들이 잘 따라오는 모습에 보람을 느껴 그만두지 못했다는 것을 말이다.
그걸 사촌 형인 서희가 교육 관련 프리랜서라고 포장하는 바람에 본의 아니게 거창한 사람이 됐다는 말도 덧붙이고 싶었다.
하지만 처지가 처지인지라 말을 줄일 수밖에 없었다.
여러 가지 이유로 과외 일을 오래 붙들고 있을 수 없어 미리 정리한다고 양해를 구했는데, 학부모들의 반응이 좋다는 이유로 특강까지 맡아달라니.
심지어 서연과 함께 있을 때 전화를 받아 더욱 당황스러웠다.
“바쁘면 언제든지 알려줘요. 데이트는 다음에 해도 되니까.”
“아니에요. 서연 씨와 보낼 시간은 충분해요.”
권율이 단호하게 말했다.
그는 서연과 만나기 위해 공부 계획을 다시 짜고, 운동 시간도 조정할 생각이었다. 다가오는 시험과 리포트 자료 조사도 부지런하게 해두면 전혀 문제없을 테니까.
거기다 원래 잠이 없어, 하루에 3시간만 자도 충분했다. 부족한 공부는 일찍 일어나 메꾼다면 학업에 지장 받는 일도 없을 거라고 생각했다.
권율은 서연을 그리워하며 시간을 낭비하는 것보다 서연을 원 없이 만나고 해야 할 일에 집중하는 편이 더 효과적이라고 이미 결론 내렸다.
하지만 서연은 권율의 사정을 알 리 없었다. 그녀는 자신의 일상을 공유하며, 바쁜 요일과 새 시즌 일정을 미리 알렸다.
“우리 데이트에 차질이 생기지 않도록 참고할게요.”
권율은 서연이 바쁜 시기와 중간고사 기간이 겹치자 오히려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똑같이 바쁘면 못 만나더라도 어느 정도 참을 수 있을 것 같아서.
권율이 생각을 갈무리하는 사이, 서연이 하늘을 비스듬하게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흐음. 오늘 날씨 되게 좋다. 계절이 바뀌려나 봐요. 바람이 상쾌해.”
서연이 씽긋 웃어 보이자, 권율이 그녀의 손을 제 쪽으로 살포시 잡아당겼다. 서연과 더 가까이 닿고 싶었다.
그러자 서연의 긴 머리칼이 권율의 어깨를 스치고 지나갔다.
레몬을 머금은 달달하고 상큼한 복숭아 향기.
“서연 씨 향기가 더 상쾌해서 좋은데요.”
입안에 사탕을 문 것처럼 권율이 달콤한 칭찬을 쏟아냈다.
웬만해선 수줍어하지 않는 서연이 긴 머리를 귀 뒤로 꽂으며 배시시 웃었다. 그렇게 상쾌한 밤거리를 마음이 말랑해진 두 사람이 걸었다.
“다 왔어요. 여기예요.”
회색 벽돌로 쌓아 올린 네모반듯한 외관. 권율이 눈짓한 곳을 서연이 바라봤다.
“우리 동네에 이런 곳이 있었어요? 나 여기 처음이에요.”
기대에 찬 서연의 얼굴이 좋아 권율이 환하게 웃었다. 그러곤 깍지를 낀 손을 가볍게 흔들며 오렌지빛 조명이 반짝이는 식당 안으로 들어갔다.
일요일 저녁.
서연의 취향을 저격하는 메뉴, 부담스럽지 않은 산책. 다시 마주 잡은 손에서 느껴지는 온기와 꿀을 바른 듯 다정한 대화가 3시간 동안 이어졌다.
첫 번째 데이트는 서로의 걱정과 근심을 잊게 해주는 특별한 시간이었다.
***
빛과 어둠의 경계가 모호한 새벽.
서연은 침대에 누워 멍하니 천장을 바라보고 있었다.
어젯밤 권율과 헤어진 후 시작된 고민이 꿈속에서도 저를 괴롭히더니 결국엔 서연의 아침잠을 깨워버렸다.
사업을 시작하고, 직원이 하나둘 늘어가면서 서연의 걱정이 많아졌다.
이제 월세를 밀리거나 공장 대금을 맞추지 못해 걱정할 일은 없었지만, 규모가 커진 만큼, 걱정의 크기도 똑같이 커져만 갔다.
하아—.
“월요일 아침부터 재수 없게 무슨 한숨이야.”
그렇게 자신을 꾸짖다가 또 새로운 고민이 시작됐다.
직원들 얼굴을 어떻게 보지?
미친 사람처럼 직원들을 다그치던 자신의 모습을 떠올리자 예전처럼 살가운 얼굴로 대할 수 있을까 싶었다.
직원들을 향한 걱정은 곧 공장에서 생산한 신상품들로 옮겨갔다. 그 많은 걸 어떻게 처리할까에 대해서.
전량 폐기? 모른 척 할인판매? 그것도 아니면 창고에 쌓아놨다가 봉사단체에 기부?
하. 미치겠네. 앞으로 어떡하냐고!
돈도 돈이지만, 피땀 흘려 만든 디자인을 쓰레기통에 버리긴 싫었다.
발가락을 꼼지락거리며 고민을 이어가던 순간, 핸드폰이 가볍게 진동했다.
<잘 잤어요?>
커다랗고 귀여운 곰 이모티콘을 함께 보낸 권율의 톡이었다.
서연은 빙긋 웃고 말았다. 조금 전까지 머리를 싸매고 고민하던 실타래들이 거짓말처럼 스르륵 풀리는 기분이었다.
이 남자는 무슨 촉이라도 있는지, 고민이 생겼다 하면 불쑥 나타났다.
<율이 씨는 좋은 꿈 꿨어요?>
<네. 자는데 깨운 거 아니죠? 오늘부터 일찍 나가야 해서 가기 전에 연락해요.>
아침 7시. 시간을 확인한 서연이 중얼거렸다.
“우리 율이 씨는 참 부지런하기도 하지. 벌써 나가?”
남자의 이름 앞에 ‘우리’라는 단어가 자연스럽게 붙었다.
<아까, 아까 일어났죠. 아직 침대에 붙어 있지만요.>
<잘했어요. 꼭 해주고 싶은 말이 있어서요. 오늘 하루, 다 잘될 거니까. 너무 걱정하지 말아요.>
CCTV라도 들여다보는 것처럼, 어지러운 마음을 보듬어주는 그가 신기했다.
<서연 씨는 특별한 사람이에요. 그러니까 힘내요.>
서연의 마음이 놀랍도록 평온을 되찾았다.
<아! 그리고 별건 아니지만, 디자인 관련해서 메일 하나 보냈어요. 도움이 되기를. ^^>
그냥 단순한 연락이었다. 하지만 어떤 거창한 말보다 서연에게는 깊은 위안이 되었다.
게다가 어젯밤 메일주소를 묻더니 어느새 디자인 등록과 관련해 새로운 자료를 보낸 모양이었다.
“나는 특별한 사람이다. 그래, 특별…….”
서연은 그의 주문 같은 말을 가슴에 새겼다. 그러자 더는 누워 있을 수 없었다.
권율에게 ‘고마워요’라는 답장을 남기고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러고는 바로 출근 준비를 시작했다.
제일 멋진 옷을 입고, 당당해 보이는 메이크업을 마쳤다.
그러곤 신발장에서 제일 비싸고 화려한 하이힐을 꺼내 신었다. 이 신발이 좋은 곳으로 데려다주기를 바라면서 말이다.
“가보자고!”
전투화 같은 하이힐을 멋지게 신은 서연이 현관 거울을 뚫어지게 바라보며 외쳤다.
선명한 구두 굽 소리, 기울어진 곳 하나 없이 정확히 일직선을 이루는 어깨, 투명하게 빛나는 검은 눈동자. 그리고 여유롭게 올라간 입꼬리.
한층 당당해진 서연이 회사로 출발했다.
서연이 회사에 도착하자 삼삼오오 모여 있던 직원들이 빛의 속도로 사라졌다.
시선이 마주칠까 두려워하는 직원들을 보며 서연이 짧은 한숨을 내쉬었다.
다들 디자인 유출로 한바탕 난리가 났었던 일을 알고 있는 모양인지 서연을 피하느라 여념이 없었다.
하긴 모르는 게 이상하지. 그 사달이 났는데.
참을 수 없는 이 찝찝함, 서로가 더 불편해지기 전에 털고 가야 했다.
“최 비서님. 디자인 팀 직원들 전부 지하 창고로 모이라고 하세요.”
곧 디자인 팀 직원이 모였다는 최 비서의 말에 서연이 자리에서 천천히 일어났다.
또각또각—.
누런 상자들이 쌓인 축축한 지하공간은 갑자기 모여든 사람들로 온기가 돌았다. 하지만 서연의 예리한 구두 소리가 들리자 곧 얼음물을 뒤집어쓴 듯 조용해졌다.
서연이 최 비서와 함께 맨 앞줄에 정면으로 섰다. 다들 큰 잘못을 저지른 사람들처럼 시선을 내리깐 채 경직된 모습으로 서 있었다.
그때 잔뜩 가라앉은 서연의 목소리가 들려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