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 한결같은 남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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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 한결같은 남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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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 한결같은 남자
2022.04.07.
“더는 멋진 말로 포장하고 싶지 않습니다.”
늘 인사처럼 하던 ‘사랑하는 여러분’이라는 말도 붙이지 않았다.
“저와 여러분들의 머릿속에서 구현하고 싶은 무궁무진한 디자인과 우리가 함께 나가야 할 길.”
서연은 스무 명이 넘는 디자이너들과 눈을 마주했다.
“그 길이 아직 많이 남아 있습니다. 그래서…….”
그때 권율이 해준 말이 떠올랐다.
‘서연 씨는 특별한 사람이니까요.’
그래. 특별한 사람……. 직원들을 잘 다독이고 앞으로 나아갈 수 있는 용기를 가진, 난 특별한 사람이야.
서연의 입꼬리가 천천히 올라가며 정면을 응시했다.
“우리 모두 새로운 마음으로 출발선에 서는 겁니다. 지나간 것은 모두 잊고. 처음부터 다시!”
촉촉하게 빛나는 서연의 눈동자가, 확신에 찬 그녀의 입꼬리가, 굳게 말아쥔 두 주먹이 새로운 출발을 말하고 있었다.
“그래서 이 창고로 불렀습니다. 이 뒤에 있는 박스들이 하나도 남지 않도록.”
걸음을 옮긴 서연이 한편에 쌓인 상자를 툭툭 두드리며 말했다.
“우리의 영혼 같은 디자인이 만드는 족족 팔려나갈 수 있게 더 멋있게, 다시 해내는 겁니다.”
영혼을 꿰뚫어 버릴 것 같은 서연의 눈빛이 좌중을 압도했다.
“우리는 모든 걸 할 수 있는…… 특별한 사람들이니까요! 그러니까 오늘부터 1일입니다.”
새로운 시작을 알린 서연은 디자인 도용을 막기 위한 재발 방지 방법을 설명했다.
더는 배신을 생각하고 싶진 않지만, 아예 그런 마음조차 품을 수 없게 싹을 잘라버릴 장치를 마련하겠다는 의지를 재차 강조했다.
준비한 말을 깔끔하게 전달한 서연이 마지막으로 직원들을 향해 말했다.
“새로운 디자인 초안으로 오후에 회의실에서 뵙죠. 김 실장님?”
서연은 김 실장에게 마무리를 부탁하곤 창고를 빠져나왔다.
그러고는 미리 와서 기다리고 있는 변호사와 의논을 시작했다. 고소 진행 절차를 꼼꼼하게 확인한 서연이 여러 가지 서류에 서명하며 물었다. 권율이 알려준 재발 방지 방안에 대해.
“아니, 이런 자료는 어디서 얻은 겁니까?”
피해 금액 환수에만 집중하던 박 변호사는 미처 생각하지 못했다는 듯 되물었다.
“절 진심으로 걱정해주는 사람한테요.”
“혹시, 다른 로펌과 접촉하셨습니까?”
그는 고객을 빼앗길까 싶어 불안해하는 눈치였다.
잠시 생각에 잠긴 서연이 박 변호사를 빤히 쳐다봤다.
“그건 아닌데. 법조계가 아닌 일반인이 이런 걸 잘 알 수 있을까요?”
“기본적으로 법에 대한 이해가 없으면 무슨 말인지 전혀 모르죠. 게다가 관련법을 이렇게 핵심만 정리하다니. 수준이 상당합니다.”
아무리 못해도 헌법은 공부했을 거라는 얘기에 서연은 고개를 갸웃했다. 교육 프리랜서와는 어딘가 멀어 보여서.
서희 씨한테 물어봤나? 그렇다면 나한테 일어난 일을 설명해야 할 텐데.
분위기상 왠지 그랬을 것 같지는 않았다.
그냥 명석한 건가?
박 변호사가 권율이 보낸 자료를 보며 연신 감탄을 쏟아내자 서연의 어깨가 괜히 으쓱해졌다.
커다랗고 다정한 남자. 대화를 나눠보면 모르는 게 하나도 없는 신기한 사람.
서연은 듬직하고 똑소리 나는 권율을 떠올리며 자기도 모르게 씽긋 웃었다.
“솔직하게 말씀해주십시오. 어디 로펌입니까? 이렇게 자료를 줄 정도면 대표님께 공을 들이고 있다는 얘긴데.”
“하하. 정말 아니에요. 하지만 이번 일이 원만하게 진행되지 않는다면 다른 생각이 들지도 모르겠네요.”
농담 반 진담 반으로 한 이야기에 박 변호사가 흠칫 놀라며 더 열심히 하겠다는 각오를 쏟아내었다.
법적인 문제가 어느 정도 해결되자, 점심시간이 훌쩍 지나가 있었다.
끼니도 거른 서연이 시간을 확인하고, 디자인 1팀 회의에 곧바로 합류했다.
충격요법이 효과가 있었는지, 잔뜩 고무된 직원들은 이전보다 더 나은 디자인 초안을 가져왔다.
그 모습에 너무 신이 난 서연은 허기도 잊은 채 정신없이 일에 빠져들었다.
하지만 모든 것이 만족스러운 건 아니었다.
늦은 오후에 올라온 여니블랙 홍보 방안은 다시 봐도 별로였다. 대규모 파티 형식으로 다시 짜보라고 지시를 내린 후 다음 일에 몰두했다.
모든 것이, 서연의 손에서 일사천리로 진행됐다.
새로운 건전지라도 끼워 넣은 듯 서연은 거침없이 나아갔고, 다들 그녀의 행보에 발을 맞추느라 분주했다.
월요일 하루를 일주일처럼 숨 가쁘게 보낸 서연이 시계를 쳐다봤다.
밤 11시가 넘은 시간.
산더미같이 쌓인 일을 처리하느라 권율에게 연락하는 것도 깜빡 잊고 있었다.
그제야 정신을 차린 서연이 디자인 시안에 깔린 핸드폰을 찾았다.
<저녁은 먹었어요? 아무리 바빠도 꼭 챙겨 먹어요.>
<운동 대신 일을 정리하러 왔어요.>
여러 개의 톡을 확인한 서연이 급하게 책상을 정리했다.
그만 집으로 돌아가 따끈한 물에 피곤을 씻어내고 권율과 통화를 하다가 자야겠다는 생각에 저절로 미소가 지어졌다.
맛있는 초콜릿을 남겨둔 아이처럼 권율과의 통화를 기대하며 운전을 하고, 샤워를 했다.
서연은 머리를 보송보송하게 말린 후, 편안한 마음으로 침대에 누웠다. 그러고는 그에게 전화를 걸었다.
1통, 2통.
<자요?>
그에게 톡을 보내고 5분 정도 기다리다 아쉬운 마음에 다시 전화를 걸었다.
하지만 대답이 없었다.
“벌써…… 자나?”
핸드폰의 검은 화면을 톡톡 두드리던 서연이 중얼거렸다.
<많이 바빠요? 앞으로 1시간 안에 전화 주면 받을 수 있어요.>
다시 톡을 남기고는 전화기를 베개 옆에 살포시 내려놨다.
깜빡깜빡…… 깜빡―.
점점 서연의 눈앞이 흐려지더니 스르륵 잠이 들어 버렸다.
***
권율은 과외를 정리하기 위해 몰아서 수업을 하는 중이었다.
다가오는 모의고사를 위해 기출문제와 오답을 점검해주느라 서연의 전화를 받지 못했다.
“쌤. 여기까지만 해요. 벌써 12시예요.”
시간을 확인한 권율이 마지막 한 문제를 더 풀라고 시키곤 가져온 자료와 숙제를 정리했다.
“5월 마지막 주에 2번 올게. 6월 모의고사 대비해야 하니까.”
“쌤. 모르는 거 있으면 연락해도 돼요?”
“톡 보내놓으면 정리해서 보내주거나, 아니면 영통으로 알려줄게.”
펼쳐놓은 참고서를 정리하는 사이, 노크 소리가 들렸다.
“끝났어?”
뽀얗고 귀여운 남자의 얼굴이 방문 사이로 뿅 하고 나타났다.
“응. 이제 끝.”
“나와. 1시간만 놀다 가.”
권율은 가방을 챙겨 인사를 하고 앳된 남자의 뒤를 따랐다. 두 사람은 거대한 성 같은 본채를 나와 별채로 향했다.
별채라고 불리기에도 부담스러운 규모의 공간에 들어서자 앳된 남자가 말했다.
“뭐 마실래?”
“술 빼고. 아무거나.”
유명 호텔의 와인바를 그대로 옮겨 놓은 듯한 공간에 앉자 앳된 남자가 능숙한 솜씨로 레모네이드를 뚝딱 만들어 건넸다.
“과외는 왜 그만둬? 엄마가 너한테 더 해줄 수 없냐고 부탁해보라고 하던데.”
권율의 절친이자 DN 그룹의 장손 원준이 물었다.
“시험 준비도 해야 하고, 데이트도 해야 하니까.”
“하긴 네가 바쁘긴 하지. 참, 저번에 데이트는 했어?”
“일이 생겨서 나중에 만났어. 준비한 데이트는 못 했고.”
원준이 이것저것 물었지만, 권율은 최소한의 것만 대답하며 말을 아꼈다. 서연의 이야기를 함부로 떠들고 싶지 않아서.
“원준아. 궁금한 게 있는데 말이야.”
뭐든지 물어보라는 듯 원준이 가까이 다가와 앉았다.
“어떤 데이트를 하면 좋을까? 인터넷을 찾아봐도 잘 모르겠어.”
“그걸 알면 내가 이러고 있겠냐. 아! 잠깐만 기다려 봐. 물어볼 사람이 있어.”
“누구?”
“미국에서 들어온 우리 막내 삼촌. 2층에 있거든. 내가 불러올게.”
재빠른 원준이 말릴 틈도 없이 2층으로 향했다.
곧 건장한 남자와 함께 그가 내려왔다. 권율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예의 바르게 인사를 건넸다.
“안녕하세요. 원준이 친구 권율입니다.”
“어. 네가 권율이구나. 우리 원준이가 입만 열면 맨날 네 얘기던데.”
원준의 막내 삼촌이 대뜸 손을 내밀었다. 45도로 상체를 숙인 권율이 그의 손을 마주 잡았다.
뭐지?
정신이 번쩍 들 정도의 악력이 느껴졌다.
그러자 권율이 허리를 반듯하게 세우며 그의 얼굴을 빤히 내려다봤다.
“최민혁이다. 반가워.”
“네. 처음 뵙겠습니다.”
손이 떨어지는 찰나에도 두 사람의 시선은 떨어지지 않았다. 꼭 서로를 가늠해 보는 것처럼.
“물어볼 게 있다고?”
소파에 털썩 주저앉은 민혁이 물었다.
“어. 삼촌. 율이가 관심 있는 여자가 있거든. 야. 근데 썸은 맞지?”
하얗고 보드랍게 생긴 원준의 물음에 권율이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원준이 상황을 간략하게 설명했다.
“그러니까. 율이가 연상의 여자를 좋아하는데. ‘모쏠’이라 어떤 데이트를 해야 할지 모르겠다. 이거야?”
“네.”
되묻는 민혁의 말에 권율이 예의 바른 목소리로 대답했다.
“삼촌은 33살에 능력 있는 미혼남이니까. 여자를 많이 만나봤을 것 아니야. 엄마한테 들은 삼촌 여친만 해도 한두 명이 아닌데. 여자들이 좋아할 만한 거 알려주면 큰 도움이 된다 이 말이지.”
원준의 부가 설명을 들은 민혁이 피식하고 웃었다.
“그 여자는 몇 살인데?”
“그건 개인정보라 말씀드릴 수 없어요. 그냥 20대 후반이라고 하겠습니다.”
단호한 권율의 말에 민혁이 다시 웃었다.
“데이트는 해봤고?”
“아직 제대로 된 데이트는 안 해봤습니다.”
“흐음. 그럼 근사한 곳에서 식사부터 해.”
근사한 곳? 그곳이 어딘지 도통 감이 오지 않았다.
“삼촌, 그러니까. 그 근사한 곳이 어디냐고!”
참된 친구 원준이 적재적소에 나섰다. 그러자 민혁이 분위기 좋은 호텔 스카이라운지와 유명 루프탑 레스토랑을 몇 군데 추천했다.
“그럼, 분위기 좋은 호텔에서 밥 먹고 그다음은 뭐 해?”
원준의 물음에 권율의 눈도 반짝거렸다.
“뭐 하긴 뭐 해. 위로 올라가야지.”
민혁이 손가락으로 위를 가리켰다.
“어딜 올라가. 옥상?”
순진한 원준의 말에 민혁이 ‘풉’ 하고 웃었다.
“밥도 먹었고, 와인도 마셨고, 얘기도 충분히 나눴고, 그럼 할 거 해야지.”
대충 말귀를 알아들은 권율의 목덜미가 붉게 물들었다. 그러고는 원준을 쳐다보며 눈으로 말했다.
네 막내 삼촌, 아무래도 좀 이상한 거 같다고.
“어른들의 연애라는 게 뭐 별거냐. 서로 친밀하고 좋은 시간 보내면 되는 거지. 안 그래?”
민혁의 입에서 흘러나오는 서른의 연애는 너무도 노골적이었다.
지금껏 몸에 좋은 유기농만 먹으며 곱게 자랐는데, 갑자기 패스트푸드를 마구 먹는 기분이랄까?
그가 말하는 연애의 기술은 가히 충격적이었다. 그건 아무래도 그의 생생한 경험담을 토대로 한 이야기라서 더 그런 거라고, 권율은 생각했다.
“그런 행동을…… 여성분들이 좋아한다고요?”
도저히 믿을 수 없다는 듯 권율이 되물었다.
피식 웃은 민혁이 더 상세한 예를 들자, 권율은 한 가지만 생각했다.
‘서연 씨는 소중해. 절대 그렇게 할 수 없어.’라고.
“이제 다 알아들었지?”
과감한 민혁의 경험담 앞에 두 사람은 말이 없었다. 한참 동안 정적이 흐르자 민혁이 고개를 갸웃거리며 물었다.
“이 모범생들아. 그러다 연애는 어떻게 할래?”
“저는, 그렇게 아픈 연애는 하고 싶지 않습니다.”
권율이 단호하게 말했다.
“연애를 영영 못 하게 된다고 해도, 좋아하는 사람한테 못되게 구는 건. 정말 싫습니다.”
“그럼, 그 연상녀는 어떻게 꼬실 건데? 쫄깃한 밀당도 없이.”
자신의 대답이 설령 오답이라 할지라도 아닌 건 아니라고 권율은 생각했다.
“소중하게, 존중하고. 든든하게 지켜주면서요. 그냥 제 스타일대로 하겠습니다.”
청정구역 같은 권율의 말에 민혁의 입꼬리가 쓱 올라갔다.
“그런 자세라면…… 뭐 나쁘지 않네. 그럼 인생 선배인 내가 본격적인 연애 비법을 전수해 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