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 따듯한 위로가 필요한 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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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 따듯한 위로가 필요한 순간
2022.04.28.
비틀거린 것도 잠시, 호진은 서희의 팔을 단단히 붙잡았다.
물론 서희가 뿌리칠 수도 있었지만, 그러기엔 호진의 눈빛이 너무도 안쓰러웠다.
꼭 밖에서 오돌오돌 떨고 있던 비 맞은 강아지 같달까?
기다란 속눈썹으로 겨우 막아놓은 눈물이 톡 하고 건드리면 주르륵 흘러내릴 것만 같았다.
“하. 여호진 검사님. 일단 이걸 좀 놓으시고…….”
서희가 천천히 팔을 빼려는 순간, 호진이 가슴팍에 쏙 하고 들어왔다.
작고 말랑한 감촉이 전해지자, 서희의 깊은 한숨이 천장을 향해 쏟아졌다.
“그래. 참자. 참아! 울고불고한 사람을 안타깝게 여겨야지.”
혼잣말을 대놓고 중얼거린 서희가 고개를 내렸다.
그러곤 매달리듯 자신의 허리를 끌어안고 있는 호진을 지그시 바라봤다.
‘측은지심, 그래 누구나 보편적으로 가지고 있다는 그 측은지심 때문에 이러는 거야.’
서희는 사자성어 하나를 머릿속에 떠올리고는 천천히 손을 올렸다.
토닥토닥―.
그녀의 작은 거실에는 어떠한 말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그저 차가운 남자의 따스한 손길이 내는 토닥거리는 소리만 들릴 뿐.
한참을 그렇게 서 있던 서희가 팔을 내리며 물었다.
“이제 좀, 괜찮아요?”
그러자 호진이 서희를 더 당겨 안으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더요.”
아니, 여기서 더?
“속도 안 좋을 텐데. 그만 씻고 자요.”
서희는 최대한 다정한 목소리로 호진을 구슬렸다.
하지만 호진이 또 고개를 가로저었다.
“나도 집에 가야죠. 여기 계속 있을 수는 없잖아요.”
“……그냥 좀 같이 있어 주면 안 돼요?”
평소의 서희라면 어림없는 소리라고 면박을 줬겠지만, 일단 호진의 등을 두어 번 더 토닥이며 말했다.
“우리가 서로 위로를 주고받는 사이가 아닌 건…….”
그러다 하려던 말을 잠시 멈췄다.
도대체 한서연 씨는 왜 안 와.
내가 집에 데려다줬다고 해서 안 오는 건가?
하아. 힘들다고 우는 사람을 놓고 갈 수도 없고. 어떡하지?
그때 서희의 생각을 깨운 건 작은 떨림이었다.
호진의 여린 어깨가 어찌나 잘게 흔들리는지, 서희는 일단 그녀가 진정될 때까지 함께 있어야겠다고 생각했다.
“한 시간만 더 있다 갈게요. 그 안에 하고 싶은 말 있으면 다 해요.”
왠지 그래야 할 것 같아 내린 결정이었다.
엉뚱한 농담을 하며 야생마 같이 날뛰던 발랄함은 어디로 가고, 병이 든 화초처럼 축 처진 모습이 안쓰러워 보여서였다.
호진도 그의 제안이 나쁘지 않은지, 고개를 천천히 끄덕였다.
“그렇게 힘들어요?”
어느새 두 사람은 소파에 나란히 앉아 있었다.
“하아. 서희 씨가 아는 거라곤 내 이름과 직업뿐이고.”
호진이 소파에 등을 기댄 채 손으로 제 눈을 가려버렸다.
“어차피 또 만날 일 없을 테니까. 그냥…… 마음껏 떠들게요.”
서희는 호진을 지그시 바라보며 그녀가 할 다음 말을 기다렸다.
“몹쓸 병 같은 거예요. 나 자신을 못살게 구는 거…… 굳이 그렇게까지 열과 성을 다하지 않아도 되는데. 뭐든지 열심히 하려는 거요.”
잔뜩 가라앉은 목소리가 서희의 귓가를 울렸다.
호진은 취기인지, 진심인지 알 수 없는 마음으로 가족 이야기를 꺼냈다.
수재라고 소문난 오빠의 그늘에 가려져 살다 보니, 지독한 관심병에 걸린 것 같다고 했다.
“오빠를 따라 검사가 되어야겠다고 생각했어요. 부모님이 오빠를 정말 자랑스럽게 생각하셨거든요.”
호진은 자신도 부모님의 자랑이 되고 싶어 죽도록 공부해 검사가 됐다고 말했다.
그러자 이번엔 누구 동생이라는 꼬리표가 따라붙었다며 씁쓸하게 웃었다.
갑자기 무거운 주제가 나오자 서희는 무슨 말을 해줘야 할지 난감하기만 했다.
“더 열심히 한 죄밖에 없어요. 남들보다 더.”
눈을 가린 호진의 손가락 사이로 물기가 배어났다.
“누구 동생이라는 이름보다 수사 제대로 하는 검사로 불리고 싶어서. 그래서 더 노력한 것밖에…… 없는데.”
매뉴얼대로 한 일이 비난을 받을 때마다 모든 걸 던져버리고 싶다고.
언제쯤이면 오롯이 평가받을 수 있을지, 그런 날이 오기나 하는 건지 힘들다고도 했다.
서희는 울음을 참아내려 안간힘을 쓰는 호진의 구겨진 턱을 바라봤다.
그녀의 말대로 아는 건 이름과 직업뿐이지만, 지금 충분히 괜찮다고 말해주고 싶었다.
‘그래도 될까? 하아. 내가 뭐라고 어쭙잖은 위로를…….’
할 말을 고민하던 서희는 자신이 막내 시절 겪었던 억울한 일들을 털어놓기 시작했다.
물론 생각하고 싶지도 않은 과거였지만, 그녀의 기분이 좀 나아지기를 바라면서 말이다.
‘내 치부까지 들춰내면서 지금 이게 뭐 하는 거야.’
민망해진 서희가 마른세수를 하며, 피식하고 웃었다.
“그러니까 웬만하면 좀 버텨봐요. 혹시 알아요. 오빠보다 더 높은 자리로 갈지.”
서희는 세상일은 아무도 모르는 거라며 호진을 위로했다.
“그래도 정말 못 참겠으면, 연락줘요. 자리 알아봐 줄 테니까.”
그는 차가운 듯 따듯했고, 무심한 듯 다정했으며, 북받치는 마음을 다스리는 재주가 있었다.
호진은 손으로 만든 어둠 속에서 나직하게 들려오는 그의 목소리에 기댔다.
그가 말할 때마다 달라지는 공기와 나란히 앉아 있는 것만으로도 느껴지는 그의 온기.
게다가 눈물이 맺힌 턱 끝을 닦아주던 그의 손수건에선 시트러스 향이 났다.
그러다 그의 품에서 느꼈던 체온과 감촉이 떠올랐다.
참 따듯했는데…….
더 있어 달라고 하면 안 될까?
호진은 그에게 한 번 더 부탁하고 싶었다. 오늘만큼은 혼자 있고 싶지 않다고.
왜 그러는 건지, 이유는 알 수 없었다.
사나웠던 일진의 연장선인지, 아니면 고단했던 하루를 이렇게라도 마무리하고 싶은 건지.
그것도 아니면 둘러대기 좋은 취기라는 핑계 때문인지.
호진은 규정할 수 없는 감정에 휩싸였다.
천천히 손을 내리고, 고개를 돌렸다.
걱정 어린 남자의 시선과 마주한 순간, 알 수 없는 용기가 솟아났다.
그대로 그의 입술로 다가갔다.
당황하던 것도 잠시, 따듯한 위로를 쏟아내던 그의 입술은 무척이나 달콤했다.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그나마 정신을 차린 서희가 호진과의 간격을 벌리며 말했다.
“하아. 여호진 씨…….”
“…….”
“잘 생각하고 행동하세요. 여기서…… 하. 더는 위험해요.”
촉촉한 호진의 시선이 붉어진 서희의 입술로 향했다.
“내일 아침, 후회하면 어쩌려고 이래요.”
호진의 여린 어깨를 붙든 서희의 손바닥이 뜨거웠다.
“후회……. 지금이 아니면 더 후회할 거 같아요. 그냥, 내 기분이 그래요.”
흔들리는 호진의 눈동자 안에 많은 것이 들어 있었다.
고민과 걱정, 허탈함과 자포자기, 그리고 작은 일탈을 원하는 열망.
“여기서 더 나가면 못 멈춰요. 이건 마지막 경고라고요.”
서희의 그 경고는 호진이 아닌, 자신에게 보내는 위험신호였다.
“……위로가 필요해요. 따듯한 위로.”
“위로. 위로라…….”
애초부터 그가 호진을 아는 척하지 않았다면, 일어나지 않았을 일이었다.
“어차피 우리는…… 서로를 위로하는 사이가 아니니까. 내일은…… 없어요.”
이 모든 것이 이성을 흔드는 취기든, 한순간의 치기든, 호진에겐 상관없었다.
오늘만큼은, 그가 옆에 있었으면 좋겠으니까.
“뭐, 따듯한 위로라면. 그러죠.”
그의 허락이 떨어지자, 호진이 그의 입술을 덧그리듯 매만졌다.
서두르지 않고 한참을 그렇게 바라보다, 촉촉하게 맞닿았다.
그러다 잠시 숨을 고르고, 다시 시선이 얽혔다.
그러자 커다란 품이 호진을 번쩍 안아 들었다.
다시 겹쳐진 입술 사이로, 서로의 숨결이 뜨겁게 이어졌다.
***
꽉 막힌 도로를 바라보던 서연은 답답하다는 듯 창문을 살짝 내렸다.
그러다 열린 창문 틈 사이로 고무 타는 냄새가 났다.
“진짜 사고가 났나 봐요. 어? 경찰차다.”
경광등을 반짝이며 경찰차와 소방차, 구급차까지 연이어 지나갔다.
“아까 형한테 전화 왔잖아요. 호진 씨 집에 잘 도착했다고요. 금방 갔을 거예요.”
그러니 걱정하지 말라고 권율이 말했다.
“그렇긴 한데. 자는 얼굴이라도 봐야겠어요.”
시간이 늦어지긴 했지만, 친구가 잘 있는지 확인은 해야 할 것만 같았다.
“나 내려주고, 율이 씨는 바로 가요.”
“주차장에서 기다릴게요. 서연 씨 차도 없는데. 어떻게 그냥 보내요.”
어차피 호진의 상태를 확인만 하고 갈 생각이라 서연도 굳이 거절하지 않았다.
“그럼, 부탁할게요.”
그렇게 말하고도 30분 가까이 도로에 서 있었다.
사고가 크게 났는지 30분이면 도착할 거리를 1시간이 넘게 걸려 겨우 호진의 오피스텔에 도착했다.
“오래 걸릴 거 같으면 전화할게요.”
“천천히 해요. 나 신경 쓰지 말고.”
차에서 내린 서연은 중학교 때부터 친구인 호진을 떠올렸다.
웬만해선 힘들어하거나 울지 않는데, 얼마나 속상하길래 그러나, 걱정이 앞섰다.
“썸 두 번만 탔다가는 친구한테 큰일 생겨도 모르겠네. 호진이한테 신경 좀 쓰자. 응?”
거울처럼 비치는 엘리베이터 문을 바라보며 서연이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서연은 익숙한 복도를 지나 호진의 집 문 앞에 섰다.
“자겠지?”
술에 취하면 으레 잠을 자는 호진을 떠올리며, 서연이 도어락 비밀번호를 눌렀다.
발소리를 죽이고 조용히 신발을 벗으려는데, 남자 신발이 현관에 떡하니 놓여 있었다.
‘뭐야. 간다더니, 아직도 안 갔어?’
중문에 손을 가져다 대려는데, 뭔가 촉촉하게 맞붙었다 떨어지는 소리가 들렸다.
으응? 이건…….
서연은 순간 얼음처럼 굳어졌다.
‘여호진. 너…… 너. 하아. 미쳤어. 미쳤어.’
하지만 친구의 사적인 영역을 간섭할 수는 없었다.
현관에서 보이지 않는 구조였지만, 서연은 허리부터 푹 숙였다.
그러고는 부모님 몰래 놀러 가는 사람처럼, 최대한 조용하고 신속하게 움직였다.
서연은 현관문을 소리 나지 않게 닫자마자, 주차장까지 미친 듯이 뛰었다.
오래 걸릴 줄 알고 운전석에 기대 있던 권율은 얼굴이 발그레한 채 나타난 서연을 보고 깜짝 놀랐다.
“왜 그래요?”
“일단 출발! 빨리, 빨리!”
영문을 알 수 없지만, 출발하라는 재촉에 권율이 얼른 시동을 걸고 빠르게 핸들을 돌렸다.
권율의 차가 큰 도로로 빠져나올 때까지 서연은 연신 손부채질만 해댔다.
그래도 안 되겠는지, 창문을 끝까지 내리고는 참았던 숨을 한꺼번에 쏟아냈다.
“뭐 이상한 거라도 봤어요?”
이상한 거 범주 안에, 서희 씨도 들어갈 수 있나?
“저기. 하아…… 아, 아니에요.”
서연은 잠시 고민했다.
자신의 절친과 그의 사촌 형이 그렇고 그런…… 관계가 된다면 어떻게 생각하느냐고. 말을 해야 할지, 말아야 할지에 대해서.
하지만 아무리 친구라 해도 남의 사생활을 마음대로 떠들고 다닐 수는 없기에 일단 입을 다물기로 했다.
“호진 씨는 괜찮아요?”
아니요. 라는 말이 단번에 튀어나올 뻔했다.
하지만 그 말도 삼켜야만 했다.
“뭐, 그런 거 같아요. 일단은.”
서연이 시끄러운 머릿속을 정리하는 사이, 어느새 아파트 주차장 입구가 보였다.
이럴 줄 알았으면 야경이나 보고 올 걸 하는 아쉬운 마음이 들었다.
“오늘 저녁 너무 맛있었어요. 다음엔 무슨 일이 있어도 꼭 야경 보러 가요.”
멋쩍게 웃은 서연이 안전벨트를 풀며 말했다.
“서연 씨가 일부러 그런 것도 아닌데요. 뭐.”
괜찮다는 그의 말에, 그동안 미안했던 일들이 순식간에 떠올랐다.
회사에 일이 터져 10시간 넘게 기다리게 한 것도 모자라서, 얼떨결에 외박시킨 일도 그렇고.
만취한 친구를 만나러 가겠다고 데이트 일정을 어그러트린 일까지.
‘말을 안 해서 그렇지. 속으론 아주 속상하겠지?’
매번 일이 생길 때마다 이해해주는 권율에게 고마운 마음을 표현하고 싶어졌다.
“저……. 율이 씨.”
부드러운 서연의 시선이 권율의 턱 끝에 내려앉았다. 그러고는 그곳을 향해 천천히 손을 뻗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