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8. 서로가 모르는 사이 2022.05.08.
“의리 없게 먼저 앞서가시네요.”
민혁이 마음에도 없는 소리를 지껄이자 서연이 여유로운 미소를 지으며 어깨를 으쓱거렸다. 그는 어색해질 수 있는 분위기를 빠르게 수습하며 화제를 전환했다. 서연이 좋아할 만한 일 얘기를 떡밥으로 던지고, 그는 잠시 생각할 시간을 벌었다. 민혁은 고개를 끄덕이며 열심히 듣는 척했지만, 머릿속에선 열심히 썸 타는 중이라는 서연의 말만 재생되고 있었다. 저렇게 빛나는 여자가 혼자일 거라고는 생각하진 않았지만, 이제 곧 연애를 시작할 것 같다는 말에 그는 규정할 수 없는 감정에 휩싸였다. 민혁은 두 번째 마주하는 서연을 빤히 쳐다봤다. 뭐지? 신경을 거스르는 이 찝찝함은……. 사실 민혁이 직원을 대동하지 않고, 하니블랙에 나타난 건 호텔 일이 신경 쓰여서였다. 하루 이틀 여자를 겪어본 게 아니다 보니, 호텔에서 뒤돌아서는 서연의 표정에서 혐오를 읽었다. 뭔가 어그러진 첫인상을 바로잡고, 단단히 오해하고 있을 서연에게 굳이 설명이라는 걸 하고 싶어졌다. 드디어 오해를 풀었다고 내심 좋아했더니, 예상치 못한 변수가 나타났다. 남자친구가 이미 있는 것도 아니고, 곧 생길 예정이라고? 첫 만남에서 받았던 깊은 인상을 본격적으로 알아보기도 전이었다. 그런데 그녀를 놓칠 위기에 처하자, 민혁의 마음이 복잡해졌다.
‘타이밍…….’
민혁은 속으로 타이밍이라는 말을 되뇌었다.
‘그래! 뭐든지 타이밍이 중요해. 더 늦기 전에 빨리 움직여야겠어.’
민혁은 호감을 사랑으로 발전시키는 건 차차 하기로 했다. 일단 썸을 타고 있다는 다른 녀석과의 거리를 벌려놓는 게 급선무였다. 더 감정이 깊어지기 전에 일단 자신의 존재부터 각인시켜야 하니까.
‘이런 긴장감…… 오랜만이네.’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사실을 깨닫자, 당황스러우면서도 묘하게 승부욕이 일었다. 민혁은 서연의 일 얘기를 진지하게 듣는 척하면서 흔들리던 마음을 다잡았다. 그러고는 아까 접어놓은 이야기를 먼저 꺼내야겠다고 생각했다. 두 사람이 과거에 좋은 인연이었든 아니었든 간에, 그건 중요하지 않았다. 기막힌 우연으로 포장해 가까이 다가갈 기회로 이용하면 그뿐이었다. 지금 둘 사이에 필요한 건 몇 년의 시간이 지난 후에 우연히 다시 만난 것을 신기해하며, 특별한 의미를 부여하는 것. 그거면 충분했다.
“그거 아십니까?”
서연의 눈동자가 동그랗게 커졌다.
“예전에 저한테 사과도 하고. 돈도 줬는데.”
그럴 리가 없다는 듯 서연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아까 수수께끼를 계속하시는 거라면 그냥 말씀해주세요. 정말 기억이 안 나서요.”
“뉴욕 워싱턴 스퀘어 파크.”
한 달 전 일도 기억이 잘 안 나는데, 몇 년 전 일이 기억날 리가 없었다. 애써 기억을 불러내려는 듯 서연이 주문처럼 ‘뉴욕, 뉴욕’을 중얼거렸다. 그러다 옅은 갈색 눈동자가 순식간에 커다래졌다.
“아! 커피 싸가지. 헙!”
서연은 자신도 모르게 나온 부적절한 단어에 얼른 입을 틀어막았다. 그러자 뭐가 그렇게 즐거운지, 민혁이 정말 큰소리로 웃었다.
“하하. 저를 그렇게 불렀습니까? 네. 그 커피 싸가지. 그게 바로 나예요. 여기서 이렇게 다 만나네요.”
무슨 반가운 동창이라도 만난 것처럼 민혁이 환하게 웃었다.
“그러게요…… 이렇게 다 만나네요.”
사실 서연에겐 썩 유쾌한 기억은 아니었다. 너무도 즐거워하는 민혁의 얼굴을 보며, 서연은 오래전 그날을 떠올렸다. 뉴욕 유학 시절, 서연을 만나기 위해 친구가 놀러 왔었다. 두 사람은 워싱턴 스퀘어 파크 근처에서 사진을 찍다가 커피를 사러 들어갔었다.
‘리나야. 자, 커피. 근처 좀 더 돌아다니다가 소호 쪽으로 넘어갈래? 쇼핑도 좀 하고.’
‘H’라는 닉네임이 적힌 테이크아웃 컵을 든 서연이 말했다.
‘저기요. 그거 제 건데요.’
갑작스러운 한국말에 서연이 뒤를 돌아봤다. 인상을 제대로 구긴 남자의 모습에 한국말이 전혀 반갑지 않았다.
‘제 거 맞는데요. 여기 ‘H’라고 쓰여 있잖아요.’
‘주문한 메뉴가 맞는지, 확인하셨어요?’
서연은 자신의 컵을 유심히 쳐다봤다. 주문한 게 맞는데, 웬 시비인가 싶어 쳐다보자 남자가 ‘H’가 적힌 컵을 내밀었다.
‘내 건 락토프리 우유가 들어있단 말입니다. 여기 표시 안 보이세요?’
동일한 메뉴에 같은 닉네임, 작게 쓰인 알파벳 한 글자를 미처 확인하지 못한 실수였다. 하지만 너무도 까칠한 남자의 반응에 서연은 어이가 없었다.
‘죄송해요. 제가 똑같은 걸로 다시 주문해드릴게요.’
서연의 사과에도 남자는 구겨진 미간을 펴지 않았다. 아주 귀찮다는 듯 서연의 손에 들린 제 음료를 뺏어 들었다.
‘됐습니다. 그리고 여기요.’
서연이 원래 주문한 음료를 다시 손에 쥐여 준 남자는 그대로 밖으로 나가버렸다.
‘아, 뭐야.’
서연은 찝찝한 마음에 재빨리 그 남자를 따라 나갔다.
‘저기요! 죄송한데, 그거 이미 입 댄 거예요.’
‘병 있으세요?’
‘아뇨! 그래도 남이 먹다 만 음료수를 드시면 안 되잖아요. 새로 하나 주문해드릴게요. 주세요. 제가 버릴 테니까.’
서연이 손을 뻗자 그가 피곤한 얼굴로 말했다.
‘제가 밤샘 3일 차라, 지금 이 커피를 못 먹으면 딱 죽을 것 같거든요. 같은 한국인이니까 너그러운 마음으로 넘어갈게요. 가세요.’
‘아, 뭐래. 제가 찝찝하다고요. 내가 먹던 걸 남이 마시는 게요.’
남자는 귀찮다는 듯 손을 휘휘 내젓더니, 그대로 고풍스러운 건물로 발걸음을 옮겼다. 참지 않는 서연이 그의 팔을 붙잡아 커피 뚜껑을 단숨에 가져갔다. 그러고는 남자의 다른 손에 10달러짜리 지폐 한 장을 올려놨다.
‘자요. 여기 커피 값. 제 립스틱 묻은 뚜껑은 가져갈게요. 같은 한국인이니까 너그럽게 잔돈은 가지세요. 그럼.’
서연은 보란 듯이 플라스틱 뚜껑을 쓰레기통에 던져버리고는 자리를 떴다. 그리 유쾌하지 않은 해프닝이었고, 특별할 것 없이 잠시 스쳐 지나간 인연이었다.
“잠깐 본 건데. 절 어떻게 기억하세요?”
“처음 봤을 때 어디서 본 것 같다고 생각했어요. 물론 한 대표님이 워낙 유명하신 분이라 그러려니 했고요.”
민혁은 신기하다는 듯 말을 이었다.
“그런데 아까 사무실에 있던 사진이요. 그날 찍은 거 맞죠? 제 기억 속에 있던 옷이랑 똑같아서요.”
“아…… 네. 그날 같이 있던 친구가 찍어 준 거예요. 그 커피 싸…… 그 3일 밤샘 했다는 까칠한 분을 여기서 다 만나네요.”
“세상 참 좁죠.”
서연은 당황스러웠다. 좋은 기억도 아닌데, 뭐 저렇게 반가워하나 싶어서. 그러다 그의 손목에서 반짝이는 시계를 힐끔 쳐다보곤 자리를 슬슬 정리해야겠다고 생각했다.
“하하. 세상은 좁고, 할 일은 참 많죠.”
“그때 받은 10달러요.”
혹시 기분이 나빴나 싶어, 서연이 민혁의 표정을 얼른 살폈다.
“지금 환율로는 라테 2잔은 마실 수 있을 것 같은데. 어때요? 커피 싸가지랑 커피 마시는 거.”
순간 서연의 머릿속이 복잡해졌다. 딱히 거절할 이유를 찾지 못해서.
“네. 하하. 부적절한 단어에 불쾌하지 않으셨으면 좋겠네요. 편하신 시간에 연락해주시면 나가겠습니다.”
선선한 허락이 떨어지자, 민혁의 입꼬리가 쓱 올라갔다.
“크흠. 그럼. 저는 내일 생방송이 있어서…… 이만 일어날까요?”
다음에 만날 기회를 잡은 민혁이 바로 자리를 정리했다.
“그리고, 오늘 저녁은 제가 사겠습니다. 최 대표님.”
“그럼, 댁까지 모셔다드리죠.”
“아니에요. 택시 타고 가겠습니다.”
“저녁도 사시고, 택시까지 타시면 제가 너무 부담스러워서요. 모셔다드리는 것 정도는 하게 해주시죠.”
민혁은 허락을 구하는 말투가 아니었다.
“하. 뭐. 그럼. 아파트 입구까지만 부탁드리겠습니다.”
굳이 실랑이를 벌이고 싶지 않아 서연이 재빨리 가방을 챙겨 들었다. 계산을 마친 서연은 하는 수 없이 민혁의 차를 타고 집으로 향했다. 그는 뉴욕에서의 추억을 적절히 꺼냈고, 서연도 적당하게 장단을 맞췄다. 담백한 이야기가 오고 가던 그때, 서연의 가방에서 진동이 느껴졌다.
<서연 씨. 저녁 먹었어요? 정말 맛있는 딸기 케이크를 발견했는데. 잠깐 주고 갈게요. 일하는 중이라, 앞으로 3시간 정도 걸려요.>
커다랗고 하얀 이모티콘을 보자 서연의 얼굴에 미소가 피어났다. 그 모습을 힐끔 쳐다본 민혁의 얼굴에 그늘이 드리워졌다. *** 권율은 동생의 마지막 과외 날짜를 조정해달라는 원준의 부탁을 흔쾌히 허락했다. 첫 번째 쉬는 시간, 권율은 서연이 보낸 답장을 읽으며 빙그레 웃고 있었다.
<집에 가는 중이에요. 그 딸기 케이크 같이 먹어요. 기다릴게요.>
“그렇게 좋냐?”
어느새 들어온 친구 원준이 권율의 어깨를 툭 치며 말했다.
“응. 내 딸기 케이크 냉장고에 잘 있지?”
“걱정하지 마. 내가 잘 넣어놨으니까. 근데…….”
“우리 공부하게, 형은 그만 나가. 엄마! 형이 공부 방해해!”
동생의 날 선 반응에 원준은 눈을 부라렸고, 권율은 피식하고 웃었다. 권율은 쉬는 시간도 없이 2시간 연속으로 수업을 하고, 마지막 숙제를 왕창 내준 후에야 가방을 정리했다. 문을 열고 나오자 거실 소파에 길게 누워 있던 원준이 벌떡 일어났다. 그러고는 주방으로 가 고급스러운 분홍색 케이크 상자를 들고 나타났다.
“차로 가자. 내가 배웅해줄게.”
권율은 원준의 엄마에게 인사를 하고, 어두워진 정원을 가로질렀다.
“야. 권율. 내가 키스를 해본 경험자로 조언을 좀 하자면 말이야.”
교양 수업을 같이 듣던 후배와 딱 한 달 사귄 원준은 뭔가 대단한 경험이 있는 것처럼 거들먹거리기 시작했다.
“됐어. 내가 알아서 할게.”
더 들을 것도 없다는 듯 권율이 말을 잘랐다. 하지만 마음 한구석에선 자신과 별반 다를 것 없는 원준이 벌써 키스를 해봤다는 사실이 신경 쓰였다.
“답답해서 그런다. 맨날 책만 쳐다본다고 될 일이 아니라고. 실제와 유사한 조건에서 연습해야 실전에서도 헤매질 않지.”
“유사한 조건에서 연습을 어떻게 해. 뭐 다른 사람이랑 하라고?”
“내가 찾아본 건데 말이야. 너한테만 특별히 전수해줄게.”
무슨 대단한 비법이라도 알아냈다는 듯 원준은 주변을 두리번거리더니 조그맣게 중얼거렸다.
“젤리.”
“무슨, 젤리?”
“젤리를 살살 녹여 먹으면서 연습하라고.”
권율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원준을 한심스러운 눈길로 내려봤다.
“네가 왜 소진이한테 차였는지 알겠다.”
차갑게 식어버린 권율의 눈빛에 원준은 억울하다는 듯 변명을 늘어놓았다.
“야! 아니야. 네가 잘 몰라서 그래. 그게…… 어, 어? 삼촌. 일찍 왔네.”
어둠 속에서 민혁이 모습을 드러냈다.
“안녕하세요.”
권율이 예의 바르게 인사를 건네자, 민혁이 반갑게 손을 흔들었다.
“과외 있었나 봐. 더 놀다 가지 왜.”
“우리 천재 권율께서 연애가 잘 되고 있거든. 또 만나기로 해서 바쁘대.”
“아. 그 연상녀. 데이트는 좋았어?”
민혁의 물음에 권율이 자신감 넘치는 표정으로 웃었다.
“앞으로 연애는 율이한테 배워야겠다.”
핸드폰을 보며 환하게 웃던 서연이 떠오르자, 민혁은 심란한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뭐야. 눈빛만으로도 여자를 사로잡던 우리 삼촌의 필살기는 어디로 가고. 하긴, 세월에는 장사가 없지. 서른이 넘었다고 다 좋은 건 아니라고 본다.”
원준의 팩트 폭행에 민혁이 헤드록을 걸며, 그의 어깨를 사납게 잡았다.
“이렇게 입을 놀리니까, 소진이한테 한 달 만에 차이지.”
두 사람이 티격태격하는 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권율이 말했다.
“저, 먼저 가보겠습니다. 원준아. 나오지 마.”
아까부터 마음이 급한 권율은 원준의 집을 도망치듯 빠져나왔다. 권율은 차에 타자마자 딸기 케이크를 조수석에 내려놓곤 바로 전화를 걸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