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 거침없는 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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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 거침없는 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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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 거침없는 입
2022.05.15.
“으응? 디퓨저 바꿨어? 냄새 좋다.”
예리한 녀석.
그의 향기를 맡았는지, 호진은 사냥개처럼 코를 킁킁거렸다.
그러다 서연을 쓱 쳐다봤다.
“씻었네. 언제 들어왔어?”
호진이 검사다 보니, 가벼운 질문도 생각을 잘 하고 대답해야만 했다.
사소한 거라고 대충 대답했다가, 말이 안 맞으면 거침없이 파고드는 경우가 있었다.
“거래처 대표랑 약속이 있어서. 저녁 먹고 한…… 2시간?”
“으응. 얼굴에서 광이 나길래. 화장품 바꿨어? 으윽. 힘들어.”
다크서클이 내려앉은 호진이 소파에 허물어지듯 쓰러졌다.
“아. 내일 저녁에 홈쇼핑 방송 있어서 팩 좀 했지.”
대충 핑계를 둘러댄 서연이 침실 쪽을 힐끔 쳐다봤다.
“아. 그러네. 나도 알람 맞춰놓고 주문해야겠다.”
호진이 발가락으로 무릎 스타킹을 끌어내리며 중얼거렸다.
그러더니 그녀의 눈빛이 식탁 위에 놓인 딸기 케이크로 향했다.
“내일 방송이라더니. 뭔 홀 케이크를 혼자 먹고 있어. 무슨 날이야?”
“어, 누가 선물로 줘서. 이리 와. 같이 먹자.”
“히히. 내가 먹을 복이 있다니까.”
서연이 아무렇지 않은 척 새 접시를 꺼내 케이크 한 조각을 자르자, 호진이 흐느적거리며 식탁에 와 앉았다.
“누군지 몰라도 돈 좀 썼네. 여기 SNS에서 유명한 곳인데.”
“아, 그래? 몰랐네.”
서연은 방에 숨어 있는 권율이 신경 쓰여 미칠 것만 같았다.
그녀는 어떻게든 호진을 빨리 보내려 머리를 굴리기 시작했다.
내일 방송이라 일찍 잔다고 할까?
안 돼! 그러다 자고 간다고 하면 어떡해. 여호진이 우리 집에서 자고 간 게 하루 이틀도 아닌데.
“흐음. 맛있다. 한 조각 더 줘 봐.”
차라리 이 케이크를 통째로 들려 보낼까?
깜깜한 방에서 긴장하고 있을 권율을 떠올리며, 서연은 일단 케이크를 또 잘랐다.
최대한 자연스럽게 호진을 돌려보낼 방법을 고민하던 그때였다.
지이이잉―. 지이잉.
“응? 이게 무슨 소리야?”
중앙지검 막내 검사 여호진의 눈이 식탁에 놓인 잠잠한 전화기로 향했다.
헙. 율이 씨 전화 오나 보다. 어쩌지. 이러다 들키겠어.
당황한 그가 전화기를 찾지 못하는지, 진동 소리가 계속되자 호진이 두리번거렸다.
“핸드폰 진동 소린데?”
등줄기가 축축하도록 식은땀이 돋아난 서연이 빠르게 머리를 굴렸다.
그냥 이실직고 할까? 아직 사귀는 건 아니지만 데이트는 한다고?
그러기엔 방에 숨어 있는 그림이 너무나 수상했다.
“방에 누구 있어?”
호진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방에 있긴 누가 있어. 윗집 소리지.”
아무렇지 않은 척 말했지만, 서연은 빨리 결정해야만 했다.
솔직하게 말할 것인지, 아니면 다른 곳으로 시선을 돌릴 것인지.
침실로 향하는 호진의 발걸음이 영화의 슬로모션처럼 보였다.
곧 발각될 처지라는 걸 직감한 서연이 눈을 질끈 감으며 외쳤다.
“서, 서희 씨!”
그러자 호진이 뒤를 홱 돌아봤다.
‘후우. 먹혀들었어!’
호진의 뺨이 붉게 물드는 걸 확인한 서연이 호기롭게 질렀다.
“너 여기 좀 앉아 봐! 내가 안 그래도 말이야.”
사고를 제대로 친 강아지 표정으로 호진이 느릿느릿 걸어왔다.
“네가 하도 바쁘다고 난리를 쳐서 그냥 넘어가려고 했어. 그런데 오늘 잘 왔어. 아주, 혼쭐이 나야지. 그냥.”
서연은 일부러 식탁을 탁탁 두드리며 호통을 쳤다.
호진이 뒷머리를 긁적이며 민망해하자, 때는 이때다, 하고 서연이 더 다그쳤다.
그 사이 침실에선 더는 진동 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이 언니가 말이야. 그날 너 괜찮은지 보러 갔다가, 어휴……. 얼마나 깜짝 놀랐는지 알아?”
서연의 호통에 호진이 배시시 웃으며 얼굴을 붉혔다.
“사람이 살다 보면 말이야. 남녀 사이에 예기치 못한 접촉 사고도 일어나고 뭐 그러는 거지. 뭘 또. 하하. 처음이니까 좀 봐줘.”
호진이 능청스럽게 웃으며 케이크를 먹기 시작했다.
“나 같은 유교걸은 못 참지. 어디서 남녀가 야밤에 응? 그렇게. 그러느냔 말이야!”
서연은 호진을 민망하게 만들어서 돌려보낼 계획이었다.
그러나 호진이 깔깔거리며 말했다.
“야! 한서연. 네가 무슨 유교걸이야. 나 참. 너의 과감했던 언행들을 어디 한번 읊어 봐?”
으응? 무……슨.
단둘이 있다고 생각한 호진은 거침이 없었다.
서로가 너무도 잘 알고 있는 흑역사 중에 흑역사를 적나라하게 까발렸다.
“너 리나 결혼식 때 폐백하고 나온 형진 오빠한테 어? 해진 의료재단 집 장남 피로연에 꼭 데려와야 한다고. 완전 내 스타일이라고! 어? 무슨 일이 있어도 필참 시키라고 진상처럼 굴었어, 안 굴었어?”
“아니, 하하. 그때는 농담으로 그런 거지. 너는 별걸 다 기억한다.”
서연은 방에서 다 듣고 있을 권율을 떠올리며 정성스럽게 변명을 시작했다.
“내가 그래서 뭐. 피로연에서 그 남자랑 놀았어? 말만 그렇게 했지. 멀리 떨어져 앉아서는 눈길도 안 줬어. 너희들하고만 놀았지.”
권율이 새겨듣기를 바라며 그날 아무 일도 없었던 것을 강조하고 또 강조했다.
“하긴. 그날 피로연에서 빵빵한 재벌 집 남자들이 너랑 어떻게든 만나보려고 난리 치는데. 나라도 그 장남이랑 안 놀지. 그때 한참 동안 핸드폰에 불났었지. 그치?”
입술을 꽉 깨문 서연이 다 식어 빠진 홍차를 호진에게 건넸다.
차 마시는 동안이라도, 그만 좀 떠들라는 무언의 압박이었다.
하지만 서연의 의도와는 달리 텁텁한 홍차를 단숨에 들이켠 호진이 다음 말을 시작했다.
“너 작년에 영화제 시상자로 갔을 때 기억 나?”
“하, 그 얘기는 또 뭐 하러 꺼내.”
정색할 수는 없었지만, 서연이 복화술로 속삭였다.
“그만 좀 해라.”
“하하. 그만하긴 뭘 그만해. 야! 너 배우 션 만난다고 이태리 장인이 만든 수입 원단 사다가 직접 드레스 해 입고.”
호진의 요망한 입을 막고 싶었지만, 그러기엔 평소 서연의 언행도 만만치가 않았다.
차라리 화제를 돌리기로 작정한 서연이 딴소리를 중얼거렸다.
“하아. 떡볶이 먹으면 안 되겠지?”
“떡볶이는 무슨. 참아.”
“그래도 먹고 싶은데.”
“암튼, 너 그때 배우 션이랑 눈 마주치는 순간, 그냥 덮…… 흡.”
깜짝 놀란 서연이 호진의 입을 단숨에 막아버렸다.
“우리 호진이가 이렇게 사소한 것까지 다 기억하고 있다니. 어떻게, 라면 끓여줄까? 배고파?”
서연은 제멋대로 떠드는 호진의 입을 라면으로 막아버릴 생각이었다.
“이 시간에 라면은 무슨. 하아…….”
갑자기 포크를 내려놓은 호진이 깊은 한숨을 내뱉었다.
“왜. 회사 일 때문에 그래?”
“하. 왜 이렇게 되는 일이 없냐. 뭐, 일도 일이고. 그냥 마음이 엄청 심란한 게…… 좀 걸리는 것도 있고.”
잠시 망설이던 호진이 본격적으로 서희 얘기를 꺼내놓았다.
야. 뭐 그렇게까지 자세히……. 그 사람 사촌 동생 여기 있다고.
흔들리는 서연의 눈동자가 수심으로 가득 찬 호진의 얼굴과 침실 방문을 번갈아 쳐다봤다.
“정말 좋았다고. 처음 하는 일탈치곤 엄청나게 말이야.”
온몸이 화끈거릴 정도로 과감하고, 디테일한 설명에 서연은 제 귀를 막아버리고 싶었다.
이젠 나도 모르겠다. 너와 서희 씨의 이미지는 알아서 해라.
“그런데 연락처를 물어보기도 뭣하고. 알려주기도 좀 그렇고.”
서연은 호진의 진한 아쉬움을 단번에 읽어냈다.
‘뭐야. 그 까칠남이랑 연락하고 싶어서 심란한 거야? 그런 거라면 진즉에 말을 하지.’
호진의 마음을 눈치챈 서연이 말없이 핸드폰을 들었다. 그러곤 친구의 넋두리를 가볍게 넘기며 열심히 자판을 두드렸다.
“넌 사람이 진지하게 얘기하는데, 뭐 하냐?”
“지금 서희 씨한테 네 번호 보냈어.”
“뭐! 이런 미친.”
말은 그렇게 해도 호진은 싫지 않은 표정이었다.
“나한테 백날 떠들어봐라. 답이 나오나. 이젠 둘이 해결해.”
서연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호진의 전화기가 울렸다.
“이것 봐! 서희 씨도 네가 궁금해 미치겠는데. 지금까지 참고 있었던 거야. 됐지? 얼른 받아.”
“싫어. 집에 가서 차분한 마음으로 받을 거야.”
호진이 전화가 끊길 때까지 핸드폰만 뚫어지게 쳐다보자, 서연은 얼른 상황을 정리하고 싶었다.
네가 가야 나도 수습이라는 걸 할 거 아니야. 저 커다란 남자도 방에서 꺼내고.
아무리 그래도 친구에게 가라고 재촉할 수 없어 서연은 호진을 살살 구슬리기 시작했다.
얼마나 기다렸으면 바로 전화를 했겠냐며 호진의 흔들리는 마음을 자꾸만 자극했다.
“그 남자도 내가 궁금했겠지?”
“말이라고. 또 전화 오기 전에 빨리 가 봐.”
“내가 막 부탁한 줄 알면 어쩌지?”
걱정하는 호진을 안심시키려 서연이 문자 내용을 직접 보여줬다.
“봐봐. 이건 내가 자발적으로 보내는 거라고. 여기 문자에도 썼지? 필요하다면 서희 씨한테 증언도 해줄 수 있어.”
서연은 호진의 물건을 손에 쥐여 주며, 어서 가보라고 재촉했다.
그러나 호진은 엉덩이를 뭉개며 엉뚱하게도 잘생긴 남자의 사진을 보여줬다.
“서연아. 이 남자 어때?”
“으음. 잘생겼네.”
호진을 빨리 보낼 생각에 서연이 건성으로 대답했다.
“J&P 최연소 파트너 변호사거든. 얼굴도 완전 네 취향이지? 다음 주 주말에 소개팅할래?”
서연은 침실 쪽을 힐끔 쳐다보고는 단번에 거절했다.
“내가 소개팅할 시간이 어딨냐. 저번에 말했잖아. 디자인 유출 때문에 정신없다고.”
“그래도, 매달 선보러 나가는 것보다야 낫잖아.”
그 얘긴 왜 또 꺼내.
“요렇게 잘나고, 멋진 남자랑 연애하면 어머니도 안심하시겠지.”
하. 미치겠네. 이걸 어떻게 수습하지…….
서연이 눈을 질끈 감아버렸다.
“나중에라도 급한 불 꺼지면 만나 봐. 네 연락처 지금 넘겼으니까.”
“뭐?”
“이 언니가 오늘의 은혜는 바로 갚았다. 크흐흠. 그럼 난 집에 가서 장군님이랑 진지한 대화 좀 나눠볼까나.”
거대한 폭탄을 투척한 호진이 자리에서 가뿐히 일어났다.
“이번에 내가 서희 씨랑 잘 되고, 너도 그 변호사 오빠랑 잘 되면. 더블데이트 해도 좋겠다. 그치?”
인제 그만 좀 가. 제발.
서연은 호진을 얼른 보낼 생각에 대충 얼버무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띠리릭―.
문이 닫히자 잠금장치를 이중으로 건 서연이 방으로 뛰어 들어갔다.
***
어두운 방 안에 갇혀 있던 권율은 뭔가 큰 잘못을 저지른 사람처럼 안절부절못하고 서 있었다.
옷장이라도 있으면 숨을 텐데. 처음 들어온 서연의 침실은 모든 것이 탁 트여 있었다.
어둠에 익숙하지 않은 눈동자를 깜빡이며, 여차하면 욕실로 뛰어가야겠다고 생각하던 차였다.
지이이잉―. 지이잉.
갑자기 주머니에 넣어 놓은 핸드폰이 진동하기 시작했다.
재빨리 꺼내 무음으로 바꾸려는데 너무 급한 나머지 하마터면 바닥에 떨어트릴 뻔했다.
이러다 걸리겠네.
금방이라도 문이 벌컥 열릴 것처럼, 방으로 다가오는 목소리가 가깝게 들렸다.
마른침을 꿀꺽 삼키며 얼음처럼 굳어 있는데 서연의 입에서 엉뚱한 이야기가 흘러나왔다.
뭐야. 형이랑 호진 씨랑……. 그날?
권율은 거실에서 들려오는 충격적인 이야기에 집중했다.
그러다 들려오는 내용에 그의 인내심이 뚝 하고 끊겨버렸다.
서연과 호진의 대화 속에 등장하는 남자들, 하나같이 평범하지 않았다.
몇 명은 장난이라고 넘긴다 해도, 두 사람의 이야기 속에 나오는 등장인물들은 하나같이 드라마 속 남자 주인공들 같았다.
경제지를 수시로 장식하는 사람들. 대단한 배경과 외모를 가진 남자들이 하나같이 서연에게 목을 매는 상황이라니.
그러고 보니 서연을 배신하긴 했지만, 그녀의 전 남자친구 또한 보통 사람은 아니었다.
권율은 서연의 인기를 실감하느라 사촌 형의 활약상 따위는 관심조차 없었다.
‘도저히 이렇게는 안 되겠어.’
자신이 처한 현실을 깨달은 권율은 오로지 한 가지만 생각했다.
‘절대 놓치고 싶지 않아.’
이제 막 가까워지기 시작했는데, 자신보다 더 매력적인 존재가 그녀 앞에 나타난다면…….
권율이 지독한 불안에 휩싸인 순간, 방문이 열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