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 첫 키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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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 첫 키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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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 첫 키스
2022.05.19.
“미안해요! 율이 씨.”
딱 소리와 함께 천장에 설치된 간접조명에 불이 들어왔다.
어둠에 익숙해진 눈을 찌푸리며 권율이 손으로 그늘을 만들었다.
“깜깜한 곳에서 답답했죠? 이렇게 오래 걸릴 줄 몰랐어요.”
서연은 벽에 기대어 앉아 있던 권율에게 다가갔다.
그러고는 그의 손을 잡아 올렸다.
전혀 힘을 주지 않은 몸이었지만, 무거운 팔을 잡아당기는 것만으로도 서연의 몸이 앞뒤로 휘청거렸다.
“이럴 줄 알았으면, 호진이한테 율이 씨랑 같이 있다고 말할 걸 그랬어요.”
서연의 눈동자가 그의 표정을 살피느라 분주했다.
스르륵 자리에서 일어난 권율은 아무 말이 없었다.
그는 한 치 앞이 보이지 않는 뿌연 안개 속을 헤매는 사람처럼 생각에 잠겨 있었다.
뭘…… 해야 할까.
도대체 어떤 사람이 돼야, 그 대단한 남자들과 어깨를 나란히 할 수 있을까.
권율은 서연을 놓기도, 놓치고 싶지도 않았다.
“기분, 나빴어요?”
썩 유쾌하진 않았지만, 그건 그녀 때문이 아니었다.
“아니에요. 그런 거.”
아니라는 권율에 말에도 마음이 놓이지 않는지, 서연은 침실 창가에 있는 작은 소파로 그를 이끌었다.
“아까 호진이가 한…… 얘기는요.”
서연은 변명이 아닌 설명을 하고 싶었다.
그가 충분히 오해할 만한 내용이었으니까.
“걱정하지 말아요. 호진 씨랑 서희 형 얘기는 못 들은 걸로 할게요.”
“미리 알고는 있었지만, 친구의 사생활이라 말할 수 없었어요.”
권율은 고개를 끄덕이며 생각했다.
그게 중요한 게 아니라고. 정작 더 중요한 건 따로 있다고 그녀에게 말해주고 싶었다.
하지만 가려진 진실이 그의 발목을 붙잡았다.
당당하게 자신을 밝히지도 못하면서, 중요한 걸 운운할 자격이 있는지 말이다.
권율은 자신이 너무 한심스러워, 무거운 한숨을 쏟아냈다.
차라리 여기서 모든 걸 털어놓고 처분을 기다릴까?
너무도 버거운 죄책감이 그를 엄습했다.
“우리 율이 씨…… 기분이 별론가 보다.”
서연이 고개를 비스듬하게 틀어 눈을 마주쳐 왔다.
그러고는 너무도 미안한 표정으로 말했다.
“율이 씨만 괜찮다면, 호진이한테 우리 얘기를 할까 봐요.”
작은 손이 스르륵 손깍지를 껴왔다.
“잘…… 모르겠어요.”
부드럽고 말랑한 살결이 감겨오자, 정답이 정해진 일을 자꾸만 미루고 싶어졌다.
“만약에 호진이가 서희 씨랑 사귀면…… 어떨 것 같아요?”
손깍지를 들어 올린 서연이 권율의 손등에 촉, 하고 입술을 가져다 붙였다.
그러자 불안하고, 두려웠던 권율의 감정이 기름을 끼얹은 듯 폭발했다.
“서연 씨……. 미안해요. 난 말이에요…….”
‘그래 지금이야’라는 듯, 권율의 입이 제멋대로 움직였다.
“서연 씨가 아무 데도 안 갔으면 좋겠어요. 그래서 내 욕심이 모든 걸 망쳤어요.”
불안함으로 달궈진 그의 얼굴이 무너지듯 서연의 목덜미에 내려앉았다.
그러자 가볍게 솟아오른 서연의 어깨가 다시 제 자리를 찾았다.
권율은 천천히 숨을 들이마시며, 다음 할 말을 떠올렸다.
씁쓸한 권율의 마음도 모른 채, 서연의 어깨에선 달콤한 복숭아향이 났다.
“율이 씨.”
여전히 손깍지를 풀지 않은 서연이 권율의 손등에 뺨을 기댔다.
“나, 선은 좀 봤어요. 엄마가 하도 난리 쳐서. 그런데 소개팅은 안 할 거예요.”
너무도 듣고 싶은 말이었다.
“우리 8번의 데이트도 남았고, 율이 씨 편지도 아직 한 통밖에 못 받았고. 그리고 또…….”
너무도 고마운 말이 들려오자 권율이 고개를 들었다.
“있잖아요. 서연 씨. 꼭 해야 할 말이 있어요.”
이젠 정말 말해야만 했다. 더는 서연을 속일 자신이 없어서.
그녀가 묻지 않았지만, 처음부터 사실을 말했어야만 했다.
여러 번의 기회가 있었고, 이제껏 그걸 놓쳤지만 어쩌면 지금이 최선의 기회일지도 모른다고…….
“처음 만난 날부터, 하루도 빠짐없이 고민했어요.”
그는 2년 전 호텔 주차장에서 처음 마주쳤던 일을 떠올렸다.
매몰차게 돌아서던 서연의 모습이 지금 권율의 머릿속에 계속해서 재생되고 있었다.
“처음엔 그만두려고 했고, 그다음엔 용기가 나지 않았어요. 그래서…… 솔직하지 못했어요.”
입안에서 뱅뱅 맴돌던 그 말을 막 꺼내려던 참이었다.
“율이 씨 마음, 뭔지 알 것 같아요.”
서연이 진지한 권율의 입술에 촉, 하고 입을 맞췄다.
이럴 때가 아니라고, 아무리 꾸짖어도 두 번째 입맞춤은 권율의 마음을 잔뜩 흔들어놓았다.
동그랗게 커진 권율의 눈동자를 바라보며, 서연이 말을 이었다.
“사실 나도 솔직하지 못했어요. 내 감정이 맞는 건지 잘 몰라서요.”
오래 연애를 쉬어서 그런지, 서연은 마음을 표현하는 게 어색하다고 말했다.
“그런데 율이 씨와의 만남은 뭐랄까. 선물을 기다리는 아이처럼 기대돼요.”
“나도 그래요.”
이번엔 권율이 서연의 입술을 머금었다. 조금 더 깊게.
원래 하려던 말은 달콤한 입맞춤에 사라져버리고, 결국 진실은 저 너머로 모습을 감춰버렸다.
“잔뜩 기대하고 설레는 기분, 좀 더 느껴보고 싶어요. 그래서…….”
서연은 8번의 데이트를 하며 충분히 시간을 가지고 싶다고 말했다.
권율은 ‘시간을 벌 수 있어 다행이다.’라고 안심했다가.
‘아무것도 모르는 사람을 기만해놓고도 좋아한다고 말할 수 있어?’라며 자신을 꾸짖었다.
엉망진창인 마음을 자꾸만 헤집다가도 맞닿은 그녀의 숨결이 미치도록 좋았다.
“서연 씨. 그 데이트가 끝나는 날. 내 얘기 들어줄래요?”
“얼마든지요.”
서연의 눈매가 부드럽게 휘어졌다.
“고마워요.”
‘그리고 미안해요.’라는 말을 속으로 되뇌었다.
그러다 권율은 서연의 머리를 다정하게 쓰다듬었다.
“너무 예뻐요.”
그가 고개를 비스듬하게 틀자 서연의 하얀 뺨에 그림자가 드리워졌다.
아슬아슬하게 맞닿은 입술 사이로, 따듯한 공기가 맴돌았다.
“키스, 하고 싶어요.”
권율은 충동적이었지만, 너무도 간절했다. 이렇게라도 자신의 마음을 표현하고 싶어서.
붉어진 서연의 입술 사이로 깃털 같은 웃음이 새어 나왔다.
그녀의 허락이 떨어지자, 권율은 그녀의 말캉한 입안으로 서서히 파고들었다.
기쁨과 절망이 공존한다면 이런 기분일까.
현실에서 느낀 불안함과 당당할 수 없는 것에 대한 절망감이 뜨거운 숨결에 흔적도 없이 녹아내렸다.
세상에 이런 감촉이 있다는 걸 왜 지금껏 몰랐을까.
그녀와 터질 듯한 열기를 나눠 마시고, 빠르게 내달리는 똑같은 심장박동을 느끼며 생각했다.
‘가까이. 더 가까이 닿고 싶다.’
격렬해진 그의 열망이 과감하게 모습을 드러냈다.
그녀의 움푹 팬 허리를 손으로 받치고, 살랑거리는 산들바람처럼, 때로는 거대한 폭풍처럼 그녀를 몰아붙였다.
그러자 서연의 몸이 점점 뒤로 물러나며 서서히 무너져 내렸다.
권율은 서연의 가녀린 팔을 자신의 어깨에 올리고, 그녀의 목덜미를 부드럽게 어루만졌다.
그저 마음이 시키는 대로 그렇게 움직였다.
서연이 움직일 때마다 나는 흐릿한 복숭아 향기…….
그리고 그녀의 모든 것을 삼켜버리고 싶게 만드는 달콤한 입술.
첫 키스, 그것은 남다른 인내심과 참을성을 가진 권율을 송두리째 흔들어놓았다.
버거운 감각에 매몰되어 숨이 막힐 때 즈음, 그의 머릿속엔 한 가지 생각만이 가득했다.
솔직하지 못해 미안하다고.
하지만 이런 나라도…… 한번만 봐주면 안 되겠냐고.
비겁한 용서를 빌다, 그녀의 촉촉한 입술에 매달리듯 다가갔다.
솔직하지 못한 자신을 미워하라고 말하면서도, 옆에만 있게 해달라며 애원하듯 더 끌어안았다.
가쁜 숨을 내쉰 서연이 권율의 목덜미를 어루만지자, 두 사람 사이를 맴돌던 온기가 천천히 떨어졌다.
“……율이 씨.”
서연의 가벼운 입맞춤이 사납게 일렁거리던 감정을 서서히 가라앉혔다.
그러자 권율이 그녀의 뺨을 가볍게 그러쥐며 눈을 맞췄다.
“내가 더 노력할게요.”
그가 할 수 있는 말은 그것뿐이었다.
“그래요. 우리 서로 노력하기로 해요.”
서연의 눈매가 부드럽게 풀어지자, 권율이 그녀의 이마에 입술을 가져다 붙였다.
‘노력, 그래 더 노력하자.’
그래도 안 되면 죽을 만큼 더 노력하고, 뭔가 확실해질 때까지. 그렇게 해보자.
그러다 보면 언젠가는 서연 씨 앞에서 당당할 날이 있겠지.
서연을 향한 권율의 마음이 더욱 단단해지고 있었다.
***
권율이 서연의 집을 빠져나온 건 11시가 다 된 시간이었다.
집으로 향하는 길, 신호에 걸린 차 안에서 권율은 생각에 잠겼다.
앞으로 어떻게 하면 좋을까에 대해서 말이다.
그러다 자기도 모르게 제 입술을 매만졌다.
강렬했던 그 감촉이 생생하게 느껴지자 공기가 모자란 사람처럼 깊게 숨을 들이마셨다.
어둠이 내려앉은 도로엔 화려하게 빛나는 광고판들만이 한적한 거리를 비추고 있었다.
무심코 시선이 멈춘 곳에 DN 로고가 박힌 광고판이 보였다.
그러자 자신이 했던 그 말이 불쑥 떠올랐다.
‘소중하게, 존중하고. 든든하게 지켜주면서요. 그냥 제 스타일대로 하겠습니다.’
민혁을 향해 내뱉었던 과거의 그 말이 권율의 얼굴을 화끈거리게 했다.
“……그러면 안 되는 거였는데.”
너무도 성급했고, 충동적이었다.
어느 것 하나 속 시원한 것 없는 현실로 돌아오자, 진한 아쉬움이 남았다.
사실 권율의 모든 것은 서연을 만나면서 달라지고 있었다.
지금껏 누군가에게 뒤처졌다는 생각을 한 번도 한 적이 없었는데, 왜 이렇게 작아지는 건지.
혼자서만 너무 앞서가는 거 아니냐는 친구들의 핀잔에 겸손의 말을 지껄이던 과거가 우습게 느껴졌다.
‘어떻게 하면 좋을까…….’
이미 자신의 분야에서 확실하게 이름을 알린 사람, 중요한 결정을 흔들림 없이 해낼 수 있는 용기. 거기다 수많은 직원을 책임지는 그녀가 권율을 끊임없이 자극했다.
더 나은 사람이 되어야 한다고, 꼭 그래야만 한다고 말이다.
게다가 서연의 주변에는 그녀와 걸맞은 사람들뿐이었다.
다들 하나같이 빛나는 트로피를 거머쥐고 모두가 부러워하는 자리에 앉아 있는 사람들.
그에 비해 자신은 너무도 평범한 대학생이라는 현실이 견딜 수가 없었다.
과연 그들과 서연을 사이에 두고 경쟁이라는 걸 할 수 있을까?
온통 머릿속이 서연의 생각으로 가득한 순간, 전화가 울렸다.
서희였다.
“어. 형.”
[너는, 아까부터 왜 전화를 안 받냐.]
그러고 보니, 서희의 전화 때문에 호진에게 들킬 뻔했던 일이 떠올랐다.
“중요한 일이 있어서. 왜, 무슨 일 있어?”
[보라가 누구냐?]
보라?
그 이름이 왜 서희의 입에서 나오는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형이 보라를 어떻게 알아?”
[오늘 할아버지 사무실에 갔었거든. 골치 아픈 서류 때문에.]
서희는 자신이 목격한 이상한 그림을 설명하기 시작했다.
[그 보라라는 여자애가 얼마나 스스럼없이 구는지. 할아버지한테 내가 모르는 손녀라도 있는 줄 알았다니까.]
도대체 보라는 할아버지랑 뭘 한 거지?
두 사람의 연결고리를 찾다가 불현듯 할아버지가 했던 말이 떠올랐다.
‘JS 화재보험 집 손녀 아니냐. 그 집 아버지를 계약 때문에 만났는데. 아는 척을 하더구나.’
그 일 때문인가?
[듣고 있냐? 할아버지랑 그 여자애랑 한두 번 만난 사이가 아닌 것 같더라고.]
서희의 말이 길어지자, 그걸 가만히 듣고 있던 권율은 아예 핸들을 돌려버렸다.
“형, 지금 좀 만나. 바로 갈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