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32. 잘할 수 있는 일과 좋아하는 일 (32/130)


32. 잘할 수 있는 일과 좋아하는 일
2022.05.22.


1654965169771.png

 
권율은 전화로 할 말이 아닌 것 같아 만나자고는 했지만, 꼭 보라 때문만은 아니었다.

지금 필요한 건 답답한 현실을 털어놓을 누군가였다.

겉으로는 냉소적이어도 어려울 때마다 고민을 들어주고, 좋은 길잡이가 돼주는 서희를 만나고 싶었다.

16549651697715.jpg

[안 그래도 답답했는데. 빨리 와.]

16549651697715.jpg

“바로 나와. 5분도 안 걸려.”

그렇게 전화가 끊어졌다.

권율은 참을 수 없는 갑갑함에, 차에 창문이란 창문은 모조리 열어버렸다.

눈치 없는 바람은 왜 이리도 달큰한지.

무거워진 마음과 상반되는 날씨에 서연과 한 계절을 보냈다는 걸 그제야 깨달았다.

도돌이표처럼 돌고 도는 계절을 하나도 빠짐없이 함께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자 불쑥 욕심이 튀어나왔다.

16549651697715.jpg

“……같이 있고 싶다.”

권율은 이 곤란한 상황에서도 서연을 떠올리는 자신이 믿기지 않는다는 듯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그의 차가 방향지시등을 켜고 좌회전을 하자, 저 멀리 어둠 속에서 서희가 손을 흔들었다.

16549651697715.jpg

“금방 왔네. 어디서 오는 길이야?”

조수석에 올라탄 서희가 물었다.

16549651697715.jpg

“과외.”

16549651697715.jpg

“너 할아버지한테 들키지 않게 조심해. 아시는 날엔 외숙모만 피곤해지신다.”

나름 좋은 경험이라고 생각했지만, 할아버지가 엮인다면 절대 유쾌한 그림은 아니었다.

16549651697715.jpg

“오늘이 마지막이야. 다 정리했어.”

16549651697715.jpg

“그럼 다행이고.”

뭔가 달라진 분위기를 감지한 서희가 권율의 옆모습을 힐끔 쳐다봤다.

16549651697715.jpg

“어린 녀석이 뭐 이렇게 심각해. 무슨 일이야?”

16549651697715.jpg

“이런 날엔 술이라도 진탕 마셔야 하는 건데…….”

술 한 방울 마시지 못하는 권율의 입에서 뜻밖의 단어가 나오자, 서희가 대놓고 쳐다봤다.

16549651697715.jpg

“보라인가. 걔 때문에 그래?”

16549651697715.jpg

“그 얘기는 좀 있다가 하자. 형, 우리 어디 들어갈까?”

16549651697715.jpg

“현우네 집으로 가. 안 그래도 술 마시러 오라고 난리야.”

서희를 따라 몇 번 놀러 간 적이 있어서인지, 권율의 차가 곧 방향을 바꿨다.

서희는 무심한 척 핸드폰만 만지작거렸지만, 권율이 좋아하는 배달 음식을 현우네 집으로 시켰다.

금요일 밤.

세 남자가 한자리에 마주 앉았다.

아무것도 이룬 것이 없어 심란한 권율과 자꾸만 생각나는 하룻밤 때문에 골치가 아픈 서희.

거기다 꼴 보기 싫은 대표 때문에 퇴사를 고민하는 현우까지.

각자 다양한 고민거리로 마음속이 복잡했지만, 누구 하나 쉽게 입을 열지 않았다.

그저 말없이 술잔을 기울이며 안주를 깨작거릴 뿐이었다.

그러다 형들 사이에서 음료수만 만지작거리던 권율이 먼저 나섰다.

16549651697715.jpg

“형. 있잖아.”

두 사람이 기다렸다는 듯 동시에 젓가락을 내려놓으며 권율을 쳐다봤다.

16549651722893.jpg

“율아. 오늘 무슨 일 있어? 평소와 좀 다른데.”

다정한 남자 현우가 권율의 달라진 분위기를 민감하게 잡아냈다.

16549651697715.jpg

“네가 보기에도 그렇지? 같은 무표정이라도 느낌이 달라. 왜 그러는 거야. 보라 때문에 그래?”

서희가 거들고 나섰다.

16549651722893.jpg

“보라? 너 여자 친구 생겼어?”

현우가 급관심을 보이며 물었다.

16549651697715.jpg

“그건 아니래. 그런데 내가 오늘 아주 이상한 걸 봤지.”

정작 당사자인 권율은 가만히 있는데, 오히려 두 사람이 더 적극적이었다.

16549651697715.jpg

“내가 할아버지 사무실을 갔거든. 근데 율이 친구라는 여자애가 우리 할아버지랑 엄청 다정하더라고.”

16549651722893.jpg

“그게 있을 수 있는 일이야?”

16549651697715.jpg

“내 말이. 너도 알다시피 우리 할아버지가 일등 손자 권율을 제외하고 누구한테 곁을 주는 사람이 아니잖아.”

석구와 몇 번 마주친 적 있는 현우가 고개를 끄덕였다.

16549651697715.jpg

“걔는 그냥 어렸을 때부터 친구야. 성별이 여자일 뿐이지. 난 보라를 이성으로 생각해 본 적이 단 한 번도 없어. 전혀 내 스타일이 아니라고.”

권율의 단호함에 서희가 피식 웃으며 말꼬리를 잡았다.

16549651697715.jpg

“왜 귀엽게 생겼던데. 애교가 장난 아니야. 아휴. ‘할아버지잉―.’ 막 이러면서. 눈을 이렇게 뜨더라. 나 봐봐.”

서희의 몹쓸 재연에 권율은 못 볼 꼴을 봤다는 듯 고개를 흔들었다.

눈치 빠른 현우가 서희의 팔을 툭 치며 그만하라는 신호를 보냈다.

16549651697715.jpg

“그럼, 네 스타일이 뭔데? 저번부터 썸 타는 여자가 있다고 하더니. 보라는 아닌가 봐?”

16549651697715.jpg

“절대 아니야. 내 스타일은 멋…….”

순간 권율이 말을 잇지 못했다.

서연의 존재를 아는 두 사람 앞에서 할 말은 아닌데다 이상형이나 떠들자고 온 자리가 아니었으니까.

16549651697715.jpg

“뭔데. 왜 말을 하다 말아.”

술잔을 가볍게 비운 서희가 말했다.

그러자 권율이 가슴에 박혀 있던 찝찝함을 털어놨다.

16549651697715.jpg

“형, 법무법인 J&P 말이야. 최연소 파트너 변호사가 되려면 얼마나 걸려?”

전혀 예상치 못한 질문인지, 서희가 권율의 얼굴을 빤히 쳐다봤다.

16549651697715.jpg

“왜? 로스쿨 가게?”

16549651697715.jpg

“아니. 그게 얼마나 대단한 건지 알고 싶어서.”

진심이었다. 호진이 소개팅을 해주겠다던 그 남자의 위치와 능력이.

자신이 얼마나 노력하면 그 이상의 사람이 될 수 있는지도 말이다.

16549651697715.jpg

“흐음. 보자, 보자. 네가 지금 2학년이니까. 졸업까지 2년, 바로 로스쿨 진학하면 3년.”

서희가 손가락으로 접어가며 말했다.

16549651697715.jpg

“1월에 있는 변시에 철커덕 합격했다 치고, 검사를 지원하면 교육받는 데만 10개월, 변호사 하면 수습 기간만 6개월. 네 적성에 변호사가 더 맞는 것 같아. 그러면 로펌에 지원.”

아직 한참 더 남았다며 서희가 손짓했다.

16549651697715.jpg

“수습으로 일한 로펌이 처우가 괜찮아. 그럼 정식으로 지원. 거기서 운 좋게 써주면 막내 변호사로 바로 입사. 초짜에서 파트너까지 하루도 쉬지 않고 앞만 보고 막 달려.”

16549651722893.jpg

“진짜, 하루도?”

현우의 물음에 서희가 단호하게 말했다.

16549651697715.jpg

“하루도 쉬면 안 돼. 그러면 졸업부터 파트너까지 최소 15년? 넉넉잡아 25년? 그 정도는 필요하지 않을까?”

지금 한시가 급한데, 너무도 길고 긴 여정에 권율은 할 말을 잃었다.

16549651697715.jpg

“그런데 그건 다 케이스 바이 케이스고. 로펌마다 다 사정이 달라서 말이야. 하지만 J&P 같은 대형 로펌에 최연소 파트너면 난놈이네.”

서희의 ‘난놈’이라는 짧은 평가 안에 많은 의미가 들어 있었다.

16549651697715.jpg

“하아. 젠장.”

권율의 입에서 깊은 한숨과 함께 최고 수준의 험한 말이 튀어나왔다.

16549651722893.jpg

“서희야. 방금 들었어? 네 점잖은 사촌 동생이, 젠장이래.”

16549651697715.jpg

“내 말이. 권율! 왜 그래. 인마.”

심상치 않은 권율의 모습에 두 사람은 당황했다.

16549651763268.png

 

16549651697715.jpg

“매일 다니던 익숙한 길을 헤매는 기분이야. 분명 어제까지 잘 다녔던 길인데. 오늘 가보니까 생전 처음 가보는 것 같이…… 모든 게 낯설고, 혼란스러워.”

봇물이 터지듯, 권율의 고민이 한꺼번에 쏟아져 내렸다.

처음으로 느껴보는 미래에 대한 조급함이 지금까지의 모든 생각과 가치관을 무너트리는 것만 같았다.

다시 시작한 학교생활도, 앞으로의 진로와 취업도, 모두 잘 해내고 싶다는 의지를 내비쳤다.

16549651697715.jpg

“여러 개의 문 중에서 어떤 걸 열어야 할지 모르겠어. 최선이라고 생각한 선택이 꽝이면 어떡해?”

자꾸만 두렵다는 권율의 말에 두 사람의 미간이 흐려졌다.

그렇지만 그의 말이 끝날 때까지 묵묵히 기다려줬다.

16549651697715.jpg

“하. 영화에서처럼 시간을 자유자재로 썼으면 좋겠다.”

잔뜩 가라앉은 권율의 눈동자가 말했다.

16549651697715.jpg

“갑자기?”

근심 어린 얼굴의 서희가 물었다.

16549651697715.jpg

“그러면 형들처럼 빨리 자리도 잡고, 멋진 사람이 될 수 있잖아.”

길고 긴 이야기의 결론이 그렇게 나자, 두 사람은 서로를 쳐다보며 피식하고 웃었다.

16549651697715.jpg

“너, 누구한테 쫓겨?”

16549651697715.jpg

“아니.”

16549651697715.jpg

“그럼, 나 몰래 시한부 판정이라도 받았어?”

심각한 사람한테 무슨 농담이냐며 권율이 인상을 찌푸렸다.

16549651697715.jpg

“근데, 뭐 이렇게 급해?”

급할 수밖에 없는 사정을 알지도 못한다고 치부하려는데, 꽤 진지한 조언이 들려왔다.

16549651697715.jpg

“젊은이만이 가질 수 있는 열정과 패기? 희망찬 미래를 위한 개고생 감수? 다 피가 되고 살이 되는 채찍질? 나도 자주 하는 말이지만, 다 집어치우라고 해.”

서희의 말에 현우가 동조하듯 고개를 끄덕였다.

16549651697715.jpg

“잔소리를 그럴싸하게 만드는 포장지 같은 말이야.”

냉소적인 서희는 거침이 없었다.

16549651697715.jpg

“물론 20대엔 열심히 살아야지. 하지만 일단 머리를 비우면서 시간을 가져.”

비움이라.

하나라도 더 채울 생각에 급급했지. 자신이 쥐고 있는 걸 비워낼 생각은 하지 못했다.

16549651697715.jpg

“그러고 나서 너란 사람을 한 걸음 떨어져서 보란 말이야. 백지상태에서. 진짜 뭘 하고 싶은지.”

서희의 조언은 단순했다.

어지럽고 복잡하다면 깨끗하게 비워내고, 다시 채우면 되지 않겠냐고 말이다.

16549651697715.jpg

“네 말대로 시간을 자유자재로 써서 예전으로 돌아갈 수 있다면, 난 다르게 살 거야.”

16549651697715.jpg

“어떻게?”

다르게 살고 싶다는 서희의 말에 권율은 더 거창한 무언가를 기대했다.

16549651722893.jpg

“아이돌?”

갑작스럽게 끼어든 현우의 실없는 소리에 서희가 차가운 말투로 응수했다.

16549651697715.jpg

“미친! 아이돌이 얼마나 힘든데. 그냥 덕후만.”

두 사람은 어깨를 들썩이며 킥킥거렸다.

16549651697715.jpg

“다른 사람이 하니까 나도 따라 해야지, 그런 거 말고.”

16549651697715.jpg

“…….”

16549651697715.jpg

“제일 잘할 수 있는 일과 진짜 좋아하는 일을 찾아봐. 그것만 알아도 성공한 인생이라고 본다.”

잘할 수 있는 일과 좋아하는 일?

거대한 폭풍을 만난 것처럼 사정없이 흔들리던 머릿속이 점점 진정되고 있었다.

16549651697715.jpg

“일단 네 시간을 즐겨. 지나고 보니까 20대 초반에 더 놀걸. 얼마나 후회된다고.”

서희는 돌아오지 않은 시간이 제일 아쉽다고 말했다.

16549651697715.jpg

“사람 일은 알 수 없지만, 긴 인생을 놓고 보면 지금 1년은 별거 아니야. 그러니까 그걸 잘 활용해봐.”

당연한 소리일지라도, 그 당연한 소리가 진리일 수 있다고.

그러니 찬란하게 빛나는 지금을 아낌없이 즐기라고, 재차 강조했다.

서희의 조언이 끝나자 배턴터치를 하듯 현우가 나섰다.

16549651722893.jpg

“율아. 형이 말이야. 친구들 사이에서 임원을 처음 달았거든. 엄청나게 능력 있는 놈으로 지금도 소문이 자자하다고…….”

갑자기 현우의 얼굴이 벌겋게 물들기 시작했다.

웬만해선 큰 소리를 내지 않는 현우가 처음으로 언성을 높였다.

16549651722893.jpg

“모두가 우러러보는 위치에 있는 놈도! 더 높은 놈이 나타나면 쪼그라들기 마련이야.”

16549651697715.jpg

“암요. 김현우 이사님 말씀이 지당하십니다.”

서희가 격하게 맞장구를 쳐댔다.

16549651722893.jpg

“내가, 하아. 그 증거잖아. 이번에 새로 온 대표 놈을 보니까. 그 앞에선, 하. 아무것도 아니야. 정말 아무것도!”

먼지라고 했다가. 부스러기라고 했다가.

유순한 현우의 입에서 더럽고, 치사해서 회사를 때려치워야겠다는 말이 고장 난 라디오처럼 반복됐다.

16549651697715.jpg

“야! 나는 어떨 거 같냐?”

다들…… 왜 이러지?

누구나 부러워하는 자리에서 멋지게 빛나는 형들의 현실이 생각했던 것과 다르자, 권율은 당황스러웠다.

16549651697715.jpg

“내가 우리 법무법인의 후계자라서 좋은 건 1도 없어. 시니어 변호사들 비위 맞춰야지. 밑에 데리고 있는 새끼 변호사들 눈치 봐야지. 죽겠다. 아주.”

서희의 현실적인 고충을 들으니 쉬운 일이 하나도 없었다.

16549651697715.jpg

“자, 들어봐. 대표님한테 아침부터 엄청나게 깨졌어. 이놈의 회사 당장 그만둬야지, 욕하면서 퇴근했단 말이야. 근데 집에 가니까, 대표님이 우리 집에 와 있어.”

서희는 생각할수록 끔찍하다는 듯 몸서리를 쳤다.

16549651697715.jpg

“회사에선 일로 쪼고, 집에선 결혼 언제 할 거냐고 쪼고. 하아. 정말 싫다. 싫어.”

16549651722893.jpg

“그러니까 율아. 아무리 잘난 놈들도 겉으로만 멋진 척하는 거지. 속으론 별거 없다는 걸 잊지 마.”

현우의 말을 들으니 고개가 절로 끄덕여졌다.

정글 같은 현실, 그곳에서 펼쳐지는 형들의 생존기를 들으니 기분이 영 이상했다.

알고 보니 ‘공부가 제일 쉬웠어요’라는 걸 절절히 느끼며 권율이 말했다.

16549651697715.jpg

“하아. 쉬운 게 하나도 없네…….”

권율의 고민이 더욱 깊어지자, 서희가 어렵게 입을 열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