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4. 이건 아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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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4. 이건 아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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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4. 이건 아니지
2022.05.29.
“잠깐만……요. 흣.”
절대 넘어지지 않겠다는 의지로 서연이 재빨리 행거를 붙잡았다. 그러나 곧 우당탕 소리를 내며 행거와 함께 넘어졌다.
그때였다. 차갑고 날카로운 것이 서연의 등을 깊게 훑고 지나간 것이.
“하. 아파.”
“대표님! 괜찮으세요?”
문밖에 있던 코디가 곧 뛰어 들어올 기세였다.
하지만 엉덩이에 걸쳐진 바지 때문에 아직 속옷 바람이었다.
“어어, 괜찮아요. 금방 나갈게요.”
서연은 아직 충격이 가시질 않아 누운 채로 꼬물꼬물 움직여 지퍼를 올렸다.
그러곤 밖에서 초조하게 기다리고 있을 스텝을 생각해 얼른 일어났다.
“으. 멍들었나? 하. 완전 아파.”
거대한 돌에 맞은 것처럼 등과 허리가 욱신거리기 시작했다.
하지만 더 늦을 수 없어, 혼자서 마이크 줄을 연결해 티셔츠에 고정시켰다.
그러고는 바지 지퍼가 잘 잠겼는지 손으로 쓱 매만지고는 서둘러 탈의실을 빠져나왔다.
“넘어지셨어요?”
코디의 물음에 서연이 입을 삐죽 내밀며 고개를 끄덕였다.
“소리가 하도 커서 탈의실 무너지는 줄 알았어요. 괜찮으세요?”
“하. 견딜 만해요. 근데 빨리 나오느라 넘어진 행거를 그대로 놔뒀어요.”
서연이 눈썹을 불쌍하게 내리며 말했다.
“제가 치울게요. 빨리 가보세요. 아까부터 빨리 오라고 난리예요.”
화들짝 놀란 서연이 서둘러 무대로 향했다.
다행히 홈쇼핑 약관을 설명 중이라 일단 무대에 비치된 상품이 잘 보이도록 매만지고는 정면을 향해 섰다.
메인 카메라에 불이 깜빡이자, 방송을 시작한다는 수신호가 눈에 들어왔다.
큐 사인이 들어가자, 서연은 자신이 지을 수 있는 가장 화사한 미소를 지었다.
“오늘은 가볍게 입을 수 있는 청바지 2종과 그래픽 티셔츠 4종을 준비해왔습니다.”
서연이 오프닝을 시작했다.
“서연 씨. 우리 고객님은 어떤 것만 하시면 된다고요?”
“바로 청바지 타입만 선택하시면, 티셔츠는 모두 보내드립니다.”
서연이 손가락 4개를 펴 보이며 사르르 웃었다.
활용도가 높은 옷이라 그런지, 초반부터 반응이 뜨거웠다.
서연은 빠르게 올라가는 주문량을 확인하는 동시에 청바지의 원단과 부자재를 꼼꼼하게 설명했다.
그러고는 날씬해 보이는 핏을 보여주기 위해 자세를 이리저리 바꿨다.
어 뭐지?
움직일 때마다 쓰라린 게 기분이 영 이상했다.
왜 이렇게 따끔거려. 아까 넘어지면서 어디 까졌나?
카메라가 패션모델들을 비추는 사이, 서연이 손바닥으로 등을 쓸어내렸다.
그러자 날카로운 통증이 점점 더 심해졌다.
생방송 중에 자리를 비울 수도 없는 노릇이라, 서연은 일단 참아보기로 했다.
하지만 아까 넘어진 충격이 컸는지, 뒤통수며, 팔꿈치며 안 아픈 곳이 없었다.
게다가 한여름의 햇살처럼 쏟아지는 조명을 받고 있으려니, 등줄기가 축축해지는 게 느껴졌다.
‘하아. 빨리 끝났으면 좋겠다.’
서연은 고통을 잊어보려 판매량 수치만 빤히 쳐다봤다.
그래도 잘 팔려서 다행이네.
이제 리넨 재킷만 팔면 끝인가?
안도하던 그때, 뭔가 주르륵 흘러내리는 기분이 들었다.
얼른 손으로 그곳을 문지르자 허리춤이 축축했다.
으응?
“지금 55, 66 사이즈 수량 없습니다. 곧 매진 임박입니다.”
구매를 부추기는 다급한 목소리에 서연은 그나마 표시가 덜 나는 검은색 티셔츠라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서연 씨. 이 그래픽 디자인이 특별하다고요?”
질문이 오기만을 기다렸다는 듯 서연이 직접 디자인 시안을 보여줬다.
“양감이 도톰하게 느껴지도록 프린트를 3번이나 했고요. 세탁하더라도 떨어지지 않도록 특수 코팅제를 덧씌웠습니다.”
서연은 검은색 티셔츠 안에 손을 넣어 톡톡한 원단의 장점을 강조했다.
“역시. 여니블랙의 감각은 남다르죠. 지금 55, 66, 77 사이즈 매진입니다.”
하아. 미치겠네.
서연은 등이 아픈 건 둘째치고, 뭔가 흐르는 느낌이 너무도 신경 쓰였다.
‘제발 빨리 끝나게 해주세요.’
서연은 빠르게 올라가는 주문량을 힐끔거리며, 빨리 완판되기만을 간절히 기도했다.
전체 매진이라는 멘트를 듣고 나서야 서연의 입에서 안도의 한숨이 새어 나왔다.
청바지와 티셔츠 세트가 끝나자, 바로 리넨 재킷 방송이 시작됐다.
어차피 수량이 적은데다, 굳이 옷을 갈아입을 필요가 없어 입고 있는 티셔츠 위에 재킷만 툭 걸쳤다.
그때 허리춤에 고정해놓은 마이크 벨트가 움직였다. 그러자 그 사이로 뜨거운 것이 주르륵 흘러내렸다.
설마…… 피는 아니겠지?
아무리 스튜디오가 덥다고 해도 땀이라고 하기엔 양이 너무 많았다.
서연은 자신의 등에 흐르는 것이 땀이든, 피든 중요하지 않았다. 그저 무사히 생방송을 마치는 것만 바랄 뿐이었다.
그나마 다행인 건, 리넨 재킷이 활용도가 높다 보니 말 몇 마디 하지 않았는데도 날개 돋친 듯 팔려나갔다는 것이다.
“오늘도, 전 상품 완전 매진입니다.”
쇼호스트의 활기찬 마무리 멘트에 서연이 환하게 웃으며 말했다.
“하니블랙과 여니블랙을 사랑해주셔서 감사합니다. 더 좋은 상품으로 다시 찾아뵙겠습니다.”
서연은 미간 한 번 찡그리지 않고, 마지막까지 프로답게 인사를 마쳤다.
그러나 광고로 넘어가는 소리가 들리자마자, 순간 긴장이 풀렸는지 서연이 풀썩하고 주저앉았다.
“수고하셨……. 어머! 왜 그러세요!”
깜짝 놀란 쇼호스트가 다가오자 서연이 인상을 찌푸리며 말했다.
“예빈 씨. 내 등 좀 봐줘요. 아까부터 너무 아팠어.”
“악! 대표님. 등에 피! 어떡해!”
피가 난다고? 하아. 그래서 아팠구나.
안 그래도 발음이 정확한 쇼호스트의 날카로운 목소리에 모두의 시선이 서연에게로 향했다.
“대표님. 어디 찢어졌나 봐요. 피가 흥건해.”
“하아. 응급실이라도 가봐야겠다.”
서연이 휘청거리며 자리에서 일어나려는데 커다란 손이 나타났다.
“한 대표님! 이게 다 무슨 일입니까.”
당황한 얼굴의 민혁이었다.
“일어날 수 있겠어요? 자요. 잡으세요.”
“엇. 괜찮습니다.”
서연은 민혁이 내민 손을 지나쳐 여자 쇼호스트의 손을 잡았다.
그러나 서연보다 몸짓이 작은 그녀의 몸이 휘청거리자, 보다 못한 민혁이 서연의 팔을 얼른 붙잡았다.
“지금 병원으로 가시죠.”
민혁은 자신의 명품 재킷을 벗어 서연의 등을 감쌌다.
“아니, 이 비싼 거에 피 묻어요.”
“이깟 옷이야 버리면 그만이죠. 아니 이렇게 아팠으면 방송을 중단했어야죠!”
무대를 정리하라고 지시한 민혁이 서연을 부축했다.
“다른 생각 있는 것 아니니까. 넘어지지 않게 나한테 기대요.”
“다리를 다친 것도 아닌데요. 뭐. 괜찮습니다.”
거절하기가 무섭게 서연은 방송 장비에 걸려 넘어질 뻔했다.
“이러다 진짜 넘어지겠어요. 왜 이렇게 고집을 부려요.”
안 그래도 아파죽겠는데, 내가 무슨 고집을 부렸다고 이래.
“으헙!”
결국 문턱에 걸린 서연이 철퍼덕하고 넘어졌다.
“하. 진짜 말 안 듣네.”
순간, 민혁이 서연을 번쩍 안아 들었다.
“저기요! 최민혁 대표님. 저 괜찮다고요.”
“내가 안 괜찮다고요. 얼마나 더 다치려고 이래요. 불편해도 참아요.”
민혁은 상태를 알 수 없는 서연의 등이 닿지 않도록 그녀를 제 어깨에 걸치듯 올렸다.
“아니. 하아. 나 참. 이럴 필요가 없다니까요.”
보쌈이라도 당하는 사람처럼 그의 어깨에 반쯤 걸쳐진 서연이 불편함을 호소했다.
서연이 그러거나 말거나. 민혁의 긴 다리가 성큼성큼 걸어 로비로 향했다.
언제 연락을 했는지, 말끔한 정장 차림의 기사가 민혁을 보자 뒷문을 열어줬다.
“여기에 엎드리세요.”
“뭐 안 깔아도 될까요? 비싼 시트에 피 묻을까 봐요.”
위급한 상황에서도 별것 아닌 것까지 신경 쓰는 서연을 보며, 민혁이 한숨을 내쉬었다.
“괜찮으니까, 빨리 엎드리기나 해요.”
아픈 사람한테 왜 성질을 부리고 난리야.
서연은 속으로는 투덜거리면서도 최대한 시트에 몸이 닿지 않도록 힘을 줬다.
“하아. 정말 말 안 듣네. 힘 빼요.”
민혁은 서연의 팔을 베개처럼 만들고는 머리를 살짝 눌렀다.
그러고는 재빨리 조수석에 올라탔다.
“한국병원 응급실로 가세요. 장 비서가 연락했을 겁니다.”
“네. 대표님.”
커다란 세단이 부드럽게 출발하자, 서연은 고개를 옆으로 돌려 좀 편안한 자세를 취했다.
그때 아예 몸을 뒤로 돌린 민혁과 눈이 마주쳤다.
“피가 철철 나면서까지, 뭐 그렇게 책임감이 넘칩니까.”
뭐야. 지금 나 책임감 넘친다고, 혼내는 거야?
방송 사고를 안 내서 고맙다는 칭찬을 들어도 모자랄 판에, 핀잔을 들고 있으려니 서연은 어이가 없었다.
“참을 만하니까. 참았죠. 근데 지금 저한테 화내시는 거예요?”
서연의 뾰족한 시선이 민혁에게 닿자, 그는 너무도 당당하게 대답했다.
“네. 화났습니다.”
왜 저래. 정말.
“그러다 진짜 쓰러지면 방송 사고가 아니라. 방송 폭탄입니다. 다음부터는 절대 그러지 마세요.”
민혁의 과민반응에 한마디 해주려다가 번뜩 머리를 스치고 지나는 것이 있었다.
“내 전화기! 가방! 병원 가려면 있어야 하는데.”
“비서가 다 챙겨서 가져올 겁니다. 걱정하지 마세요.”
“하아. 그럼 일단 신세 좀 질게요.”
서연은 민혁이 있어서 그나마 다행이라고 안심했다.
그러다 평소보다 더 많은 물량을 완판 시킨 게 생각났다.
비록 피는 좀 봤지만, 기쁨의 미소가 새어 나왔다.
“지금…… 웃어요?”
서연이 혼자서 배시시 웃으며 발을 동동거리자, 민혁이 이상한 눈으로 쳐다봤다.
“대표님도 보셨죠? 아까 우리 제품 매진된 거요. 하나도 남김없이. 모조리 다! 크큭.”
아무리 생각해도 너무 기쁜지 허공에 떠 있는 서연의 발이 잔망스럽게 움직였다.
“한 대표님은 정말…….”
“최고라고요? 하하. 저도 알아요.”
고양이 같은 눈매가 매력적으로 휘어지자 민혁의 눈동자가 동그랗게 커졌다.
‘등에 피가 날 정도라면 상처가 작지 않을 텐데…….’
도대체 어떻게 하면 저렇게 일에 진심일 수 있는지, 민혁은 도저히 이해할 수 없었다.
바로 그때, 구급차 소리가 가까이서 들렸다.
“대표님. 응급실 앞에 잠깐 대겠습니다.”
기사의 말에 민혁이 고개를 끄덕였다.
“응급실까진 제가 걸을게요.”
“안 됩니다. 그러다 또 넘어져요.”
“저도 안 됩니다. 너무 불편해요.”
두 사람이 가벼운 실랑이를 벌이는 사이, 고급 세단이 응급실 근처에 스르륵 멈춰 섰다.
민혁은 괜찮다는 서연을 다시 어깨에 걸치듯 안았다.
그러고는 다급한 걸음으로 응급실 안으로 들어갔다.
“어떻게 오셨어요?”
“DN에서 왔습니다.”
“아! 연락 받았습니다. 절차상 접수 먼저 부탁드립니다.”
성형외과 당직이 금방 내려올 거라는 말에 민혁이 서연을 조심히 내려놨다.
“접수하고 올게요. 넘어지지 않게 얌전히 있어요.”
민혁은 서연의 개인정보를 확인하고는 금방 오겠다며 급하게 나갔다.
분주하게 돌아가는 응급실.
비명 섞인 아이의 울음과 고통스러운 신음이 들려오자 서연이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그러다 민혁이 입혀준 명품 재킷을 벗어 가지런히 개 놨다.
“나만 너무 멀쩡한가…….”
여전히 등이 욱신거리기는 했지만, 방송 때만큼은 아니었다.
“한서연 씨?”
“아. 네.”
간단한 치료 도구를 든 의료진이 다가왔다.
“보호자는요?”
“네. 제가 보호자입니다.”
앞머리가 흐트러지게 뛰어온 민혁이 말했다.
지갑도 핸드폰도 없이 왔으니 그가 보호자이긴 한데, 보호자라는 그 말이 영 어색했다.
“어디가 불편하세요?”
“옷을 갈아입다 행거랑 같이 넘어졌거든요.”
서연이 자세히 설명하는 사이, 의료진의 손길이 너무도 자연스럽게 그녀를 엎드리게 했다.
“그때 등에 날카로운 게 스친 것 같은데, 그래서…….”
서연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그녀의 티셔츠가 시원하게 들어 올려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