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7. 밤새 간호해주는 남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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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7. 밤새 간호해주는 남자
2022.06.09.
권율은 너무 놀란 나머지 손발이 차가워지는 걸 느꼈다.
‘서연 씨가 다쳤다고? 게다가 홈쇼핑에서?’
기분이 이루 말할 수 없이 찝찝했다.
도대체 얼마나 다쳤기에 20바늘이나 꿰맸는지.
마음 같아서는 지금 당장이라도 달려가 서연의 상태를 확인하고 싶었다. 하지만 아픈 사람을 귀찮게 할 수는 없었다.
자포자기 상태로 걱정만 쏟아내고 있는데, 귀가 번쩍 뜨이는 말이 들려왔다.
‘잠결에 바로 누울까 봐 걱정이라고?’
권율은 고민하기 시작했다.
밤새 그녀가 똑바로 눕지 않도록 도와주면 어떨까 하고.
그는 절대 다른 마음을 품고 하는 말이 아니라며, 서연의 빠른 회복을 돕고 싶다는 점을 강하게 어필했다.
물론 머릿속에 들어 있는 온갖 지식을 총동원해 열상의 후유증과 흉터가 생기는 인과관계를 자세히 설명하긴 했다.
그러자 서연의 허락이 어렵게 떨어졌다.
‘지금…… 잘 준비를 하고 오라고?’
당황한 권율이 흠칫 놀랐다.
원래 계획은 서연이 안전하게 자는지 옆에서 지켜볼 생각이었는데.
이건 뭐랄까.
같이 자도 된다는 공식적인 허가를 받은 기분?
그러자 권율의 심장이 고장이라도 난 것처럼 날뛰기 시작했다.
‘후우. 진정하자.’
권율은 티가 나지 않도록 연신 심호흡을 해댔다.
권율은 곧 가겠다는 말을 남기고 전화를 끊었다. 그러고는 농구공이 2개나 들어가는 커다란 백팩에 짐을 싸기 시작했다.
여분으로 갈아입을 옷과 서연에게 읽어줄 적당한 책들, 노트북, 핸드폰 충전기, 달달한 간식 등등.
생각나는 모든 것을 차곡차곡 빈틈없이 집어넣었다.
“하아―.”
권율은 짐을 싸는 도중에도 심장이 너무 두근거려 자꾸만 거친 숨을 쏟아냈다.
“그래도 미리 씻어서 다행이다.”
바로 서연의 집에 갈 수 있다는 생각에 기분이 좋아진 권율은 입고 있던 옷을 하나도 빠짐없이 새로 갈아입었다.
드디어 모든 준비가 끝나자, 그는 바람같이 집을 빠져나왔다.
서연의 집으로 향하는 길.
“다 나을 때까지 더 잘해줘야지.”
권율은 걱정과 안쓰러운 감정에 휩싸여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상념에 빠진 것도 잠시, 그의 차가 10분 거리에 있는 서연의 아파트에 도착했다.
권율은 자꾸만 조급해지는 마음을 억누르며, 25층까지 단숨에 올라갔다.
딩동―.
문이 열리는 짧은 시간 동안, 권율은 서연이 많이 다쳤으면 어쩌나 너무도 불안했다.
“율이 씨. 어서 와요.”
곧 반가운 서연의 얼굴이 나타났다.
“괜찮아요?”
권율은 현관에 들어서자마자 신발도 벗지 않은 채, 서연의 상태를 살피느라 정신이 없었다.
어찌나 꼼꼼하게 묻고 확인하는지, 서연은 브리핑을 하는 것처럼 자신의 상태를 설명해야만 했다.
“하하. 율이 씨. 등만 다쳤어요. 다른 데는 멀쩡해요.”
서연은 눈썹 끝을 애처롭게 내린 권율을 보며 킥킥거렸다.
그러고는 현관문을 이중, 삼중으로 잠갔다.
순간 권율의 얼굴에 물음표가 그려지자 목덜미를 느릿하게 쓸어내린 서연이 말했다.
“아하하. 오해하지 말아요. 율이 씨를 못 나가게 하려는 게 아니라…….”
서연이 멋쩍어하며 말을 이었다.
“부모님한테 내일 저녁에나 오라고 했는데. 만에 하나, 혹시라도 갑자기 오실까 봐요.”
서연은 저번처럼 당황하지 않아야 한다는 걸 재차 강조했다.
그리고 혹시 있을 수 있는 긴급 상황을 대비해 권율의 신발을 바로 신발장에 넣어버렸다.
권율은 서연의 말을 격하게 수긍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의 부모님이 불시에 방문한다면……. 그건 생각만으로도 심장이 덜컥 내려앉는 일이었다.
“근데 그 가방엔 뭐가 들었어요?”
권율의 문짝 같은 어깨에 걸려 있는 커다란 가방을 보며 서연이 물었다.
“서연 씨한테 필요할까 싶어서요. 이것저것 가져왔어요.”
서연이 관심을 보이자, 권율은 소파에 그녀를 엎드리게 하고는 바닥에 앉았다.
그러고는 가방에 든 것들을 하나씩 꺼내 보여줬다.
생각보다 다양한 물건이 나오자, 서연이 다시 킥킥거렸다.
“정말 만반의 준비를 다 하고 왔네.”
“병원도 같이 못 가주고, 해줄 수 있는 게 이런 것뿐이라 미안해요.”
“아니에요. 이렇게 옆에 있어 주는 것만으로도 충분해요.”
서연이 손을 뻗어 이마를 덮은 권율의 앞머리를 쓸어올렸다.
그러자 투명하게 빛나는 까만 눈동자가 스르륵 감겼다가 다시 나타났다.
“근데, 벌써 1시가 넘었어요. 우리 그만 잘까요? 나 너무 피곤해요.”
“내가 어떻게 해줄까요?”
뭔가 긴장한 티가 역력한 권율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침대로 가요.”
특별한 의미가 없는 가구일 뿐인데 권율의 얼굴이 평소보다 붉게 물들었다.
“그리고 가방은 여기에 둬요.”
재빨리 가방을 내려놓은 권율이 서연의 손을 살포시 붙잡았다.
“천천히 일어나요.”
권율은 그녀가 귀한 보물이라도 되는 것처럼 조심, 또 조심해서 침실로 데려갔다.
그리고 방으로 들어가서는 서연을 잠시 세워둔 채 침대를 유심히 살폈다.
입술을 앙다문 그가 고개를 이리저리 돌리더니 말했다.
“서연 씨. 혹시 베개 더 있어요? 있는 곳만 알려주면 내가 꺼낼게요.”
서연이 붙박이장을 가리키자 그가 커다란 베개를 여러 개 꺼냈다.
권율은 튼튼한 성벽을 쌓듯 각을 맞춰 베개들을 배열했다.
그리고 손으로 툭툭 두드려 무너지지 않는 것을 확인한 후에야 서연에게 말했다.
“여기 가운데 누워 봐요.”
권율은 베개 샌드위치 사이의 햄처럼 서연을 가운데에 눕혔다.
그는 서연이 아무리 움직여도 등이 아프지 않도록 이불을 더 깔았다.
“어때요? 괜찮아요?”
“어, 옆으로 누우니까 엎드리는 것보다 훨씬 편해요.”
편하다는 서연의 말에 권율이 환하게 웃었다.
“근데, 이렇게 하면 율이 씨는 어디에 누워요?”
“난 안 자도 괜찮아요.”
‘이건 또 무슨 소리야’라는 서연의 눈빛이 권율에게로 향했다.
“나 때문에 서연 씨가 불편할 수 있잖아요. 편하게 자요.”
“맞아요. 나 지금 엄청 불편해졌어요. 율이 씨가 내 옆에서 안 잔다고 해서.”
서연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권율은 침대 옆 조명을 끄고는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그러고는 삐걱거리는 몸짓으로 천천히 몸을 눕혔다.
여러 개의 베개와 이불, 거기다 커다란 남자까지. 서연은 널찍했던 킹사이즈 침대가 꽉 들어차자 피식하고 웃었다.
권율은 침대가 꿀렁거리지 않게 서연을 향해 천천히 몸을 돌려 그녀의 손에 스르륵 깍지를 꼈다.
“다치지 마요.”
귓속말을 속삭이듯 권율이 말했다.
“다치지 않을게요.”
졸음이 쏟아지는지, 서연이 눈을 천천히 깜빡였다.
그러자 권율이 서연의 손등에 뺨을 비볐다.
“아프면 바로 얘기해요.”
“그런데 율이 씨. 내가 잠버릇이 좀 험해요. 발로 막 찰 수도 있어요.”
갑작스러운 서연의 고백에 권율이 빙그레 웃었다.
“상관없어요. 그러니까 편하게 자요.”
권율이 서연의 손등에 촉하고 입술을 가져다 붙였다.
그러자 익숙한 복숭아 향기가 코끝을 스쳤다.
‘흐음. 서연 씨 냄새.’
순식간에 마음이 편안해진 권율이 사르르 눈을 감았다가 떴다.
“그래도 자다가 너무하다 싶으면 깨워요. 알겠죠?”
그녀의 부탁에 권율이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서연은 느리게 재생되는 영상 속의 사람처럼 서서히 눈을 감았다.
얕은 숨소리가 규칙적으로 들려오자, 권율의 입꼬리가 느슨하게 올라갔다.
이 믿기지 않는 상황이 꿈인가 싶다가도.
제 눈앞에서 편안한 모습으로 잠든 서연을 보자, 온 마음이 행복으로 찰랑거렸다.
그러다 그녀가 나을 때까지 이렇게 재워주고 싶다는 생각이 들자 욕심부리지 말라며 자신을 꾸짖었다.
권율은 눈을 천천히 깜빡이며 서연의 모습을 실컷 담았다.
아무리 봐도 도대체가 질리질 않았다.
보면 볼수록 어찌나 더 보고 싶은지, 마음 같아서는 지나가는 시간을 단단히 붙잡고만 싶어졌다.
권율은 행복감에 취해 그렇게 한참을 서연만 바라보고 있었다.
그때였다. 갑자기 서연이 꿈틀거리기 시작한 것이.
처음에는 이불을 발로 차내더니, 그다음엔 머리로 베개를 밀어버렸다.
권율의 기다란 팔이 아무리 이불도 덮어주고, 베개를 다시 베어줘도 그때뿐이었다.
곧 이불이 사라지고, 베개가 바닥으로 떨어졌다.
‘이러다 감기 걸리겠는데.’
보다 못한 권율이 무릎에 걸린 이불을 끌어 올리려 상체를 일으켰다.
그 순간 꼬물꼬물 움직이던 서연이 권율의 가슴에 한쪽 팔을 턱 하니 올려놓았다.
“!”
그러자 권율의 모든 행동이 정지됐다.
권율이 천천히 몸을 뒤로 눕히자 이번에는 서연의 다리가 ‘척’ 하고 그의 허벅지 위에 올라왔다.
“서연 씨, 이러면…….”
‘곤란해요’라는 말을 삼키다, 잠버릇이 험하다는 서연의 말이 떠올랐다.
잠에 취한 서연은 권율을 커다란 베개라고 생각하는지 몸의 절반을 비스듬하게 걸쳐왔다.
권율은 옴짝달싹 못 한 채 어두운 천장만 하염없이 바라봤다.
“진정해.”
그는 자신의 달뜬 마음을 자제시키려 기도하듯 같은 말만 중얼거렸다.
“흣.”
이번에는 서연의 손이 권율 몸 안쪽을 파고들며 꽉 끌어안았다.
팔에서 느껴지는 깃털 같은 숨결, 따듯한 온기와 말랑한 감촉, 목덜미를 간지럽히는 그녀의 머리카락, 그리고 달콤한 복숭아 향기.
너무도 생생하게 전해지는 감각에 권율의 목울대가 크게 일렁거렸다.
‘그래도 서연 씨 등이 바닥에 닿지 않아서 다행이야.’라고 했다가.
‘나는 지금 간호 중이다.’를 반복적으로 되뇌었다.
권율은 아무리 자신을 다독여도 세차게 흔들리는 감정이 가라앉질 않자, 질끈 눈을 감아버렸다.
***
암막 커튼 사이로 얇은 빛줄기가 비치자 서연이 천천히 눈을 떴다.
너무 피곤해서인지, 손가락 하나 움직이지 않은 채 멍하니 벽만 바라보고 있었다.
으음?
그러다 자신의 정수리에서 느껴지는 따듯한 바람에 서연이 고개를 뒤로 젖혔다.
‘난 또 왜 이러고 있어.’
서연은 그의 한쪽 팔에 꽁꽁 묶인 자신을 확인하곤 깜짝 놀랐다.
그의 턱 끝을 지그시 올려다보던 서연이 몸을 반쯤 들어 올렸다.
그가 심혈을 기울여 쌓아놓은 베개는 이미 무너진 채였고, 이불은 발밑에 가 있었다.
‘도대체 밤새 얼마나 난리를 친 거야.’
서연은 그가 팔로 꽁꽁 묶어놓은 이유를 알 것 같자, 미안한 마음마저 들었다.
그러다 서연은 잠든 그의 얼굴을 물끄러미 내려다보곤 원래처럼 몸을 눕혔다.
일요일에 만나기로 한 그가 이미 옆에 누워 있고, 부모님도 저녁 때나 오라고 했으니 이 정도 여유는 만끽해도 될 것 같았다.
서연은 그의 가슴에 귀를 붙이고 웅장하게 뛰고 있는 그의 심장 소리를 들었다.
그러자 입꼬리가 느슨하게 올라갔다.
비록 등은 다쳤지만, 이렇게 함께 있을 수 있는 것이 나쁘지 않아서.
서연은 규칙적으로 오르락내리락하는 그의 가슴을 멍하니 바라봤다.
‘엄마 오기 전까지 뭐 하지? 일단 밥부터 먹고…….’
딩동―.
순간, 당황한 서연의 어깨가 흠칫 튀어 올랐다.
‘올 사람이 없는데. 누구야?’
서연은 혹시라도 부모님이 온 거라면 어떻게 하면 좋을지 빠르게 머리를 굴렸다.
딩동―.
초인종이 두 번째로 울리자, 권율의 눈이 번쩍 떠졌다.
서연은 자다가 일어난 권율이 놀라지 않도록 안심시키며 말했다.
“율이 씨. 일단 방에 있어요. 내가 나가보고 올게요.”
“혹시 부모님이시면…… 인사드려도 될까요?”
방금 일어나서 정신도 없을 텐데, 권율은 생각보다 용감하게 나왔다. 그러자 서연이 빙그레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만약에 엄마나 호진이면 부를게요. 그때 나와요.”
권율은 헝클어진 머리를 손으로 빠르게 쓸어내리며 혹시 모를 대면을 준비했다.
서연은 침실을 빠져나와 문밖에 있는 사람을 확인했다.
“으응? 저분이 왜?”
전혀 예상치 못한 사람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