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38. 2주 동안 (38/130)


38. 2주 동안
2022.06.12.



 
고개를 갸웃거린 서연이 현관문을 열었다.


“쉬시는데 죄송합니다.”

그는 어제 서연의 가방을 가지고 있던 민혁의 비서였다.


“아, 네. 무슨 일로…….”

“제가 대표님 차 키를 깜빡하고 가져갔습니다. 죄송합니다.”

그는 서연의 차 키를 얼른 건넸다.


“괜찮습니다. 제가 여러 번 번거롭게 해드리네요.”

“아닙니다. 아. 그리고 이건…….”

그는 비단 보자기로 싼 상자와 호텔 스티커가 붙은 과일 바구니를 건넸다.


“대표님께서 제 실수를 사과하신다는 의미로 보내신 선물입니다.”

“아, 아니. 괜찮습니…… 으윽.”

서연은 평소처럼 손을 내젓다 뻐근한 통증이 느껴지자 미간을 구겼다.


“꼭 받아주시면 안 될까요? 제가 저희 대표님께 입장이…….”

매우 곤란하다는 말을 삼키는 비서에게 도로 가져가라는 말을 차마 할 수 없었다.


“아, 그럼. 감사히 잘 먹겠습니다.”

서연이 두 손으로 받으려 하자 비서가 무거운 과일 바구니와 상자를 현관문 안쪽으로 쓱 밀어 넣었다.


“그리고 월요일 오전 9시에 병원 진료가 예약되어 있습니다.”

“…….”

“첫 진료인 만큼 대표님이 동행하고 싶다는 뜻을 밝히셨습니다.”

‘뭐야, 이 남자. 비서 보내서 은근히 압박하고 있네.’

“그건 괜찮습니다.”

서연이 단번에 거절하자 건장한 비서가 너무도 간절한 눈빛으로 말했다.


“저희 대표님께서 이번 사고로 책임을 통감하며, 첫 진료인 만큼 성의를 보이고 싶다는 뜻을 간곡히 전달하셨습니다. 그래도 거절하신다면…….”

비서의 눈동자가 세차게 흔들렸다.

그는 자신이 서연의 차 키를 가져간 것도 모자라서 중간에 이야기를 제대로 전달하지 못한 사람이 된다는 걸 어필했다.

서연은 그의 표정을 보며 생각이 많아졌다.

위에서 시킨 일을 성실히 수행하는 사람에게 이러쿵저러쿵 따질 수가 없었다.


‘차라리 내가 최민혁 대표한테 직접 말할까? 아니면 내일 하루만 같이 갔다가 앞으로는 싫다고…… 하아, 귀찮아.’

서연은 쓸데없는 고민을 안겨주는 민혁이 귀찮으면서도 허락을 기다리는 그의 비서가 안쓰러웠다.


“……알겠습니다.”

서연은 일단 그를 돌려보내고 다시 생각하기로 했다.


“그럼, 내일 8시 20분까지 모시러 오겠습니다.”

비서는 주어진 미션을 완수한 사람처럼 환하게 웃으며 인사를 건넸다.

서연도 덩달아 고개를 숙이고는 조심히 문을 닫았다.


“누가 또 오는 건 아니겠지?”

더는 방해받고 싶지 않은 서연이 잠금장치를 꼼꼼하게 걸었다. 그리고 경숙에게 먼저 선수를 치기 위해 전화를 걸었다.

잔뜩 피곤한 티를 내며 약을 먹고 푹 잘 테니, 절대 오지 말라고 신신당부했다.

서연은 경숙의 잔소리 섞인 확답을 받고서야 권율을 불렀다.


“율이 씨. 이제 나와요.”

그러자 짧은 머리칼을 가지런히 정리한 권율이 방문을 열고 나왔다.


“누구예요?”

“아. 어제 병원에 갑자기 가는 바람에 직원분이 차를 대신 가져다주셨거든요. 차 키를 깜빡하고 가져가셨다고요.”

권율은 고개를 끄덕이며 현관에 놓인 물건으로 시선을 돌렸다.


“미안하다고요. 선물로 주고 가셨어요.”

“안쪽으로 들여놓을게요.”

선물을 들던 권율의 예리한 눈빛이 과일 바구니 속 작은 카드에 꽂혔다.


“안 풀어 봐도 돼요?”

“과일은 엄마 오면 가져가라고 하고. 이 상자나 풀어 볼까요?”

서연이 은은하게 빛나는 회색 보자기를 풀자 그 안에 네모반듯한 찬합이 나왔다.

뚜껑을 열자 정갈한 자태를 뽐내는 육전들이 가지런하게 들어 있었다.

집에서 부쳐 먹는 전이 아니라 명인이 정성을 다해 만들었을 법한 그런 모양이었다.


“아니, 웬 육전을…….”


‘우리 서연이가 육전을 얼마나 좋아하는지. 자다가도 일어나서 한 접시를 다 먹어요…….’

아무래도 태석의 말을 들은 민혁이 생각해서 보내준 것 같았다.

어제 그렇게 피식거리더니, 부담스럽게 뭐 이런 걸 보냈나 싶었다.

그러나 고민도 잠시, 이미 받은 걸 버릴 수도 없었다.


“육전은 죄가 없지.”

“네?”

“아, 아니에요.”

서연은 노릇노릇 윤기가 흐르는 육전 하나를 얼른 입에 넣었다.


“흐음. 맛있어! 율이 씨도 먹어 봐요.”

서연은 육전을 손으로 집어 권율의 입에 쏙 넣어줬다.


“어. 진짜 맛있네요. 서연 씨 육전 좋아해요?”

“육전은 언제나 옳죠. 으음. 맛있다. 우리 이걸로 밥 먹어요.”

“서연 씨는 여기 앉아서 나한테 말만 해요. 내가 다 할게요.”

권율은 서연을 공주님처럼 앉혀놓고, 냉장고에 있는 음식을 꺼내 접시에 가지런히 담았다.

맛있는 음식을 푸짐하게 차려놓고 두 사람이 마주 앉았다.

서연은 권율이 먹는 것만 봐도 절로 미소가 지어졌다.


“서연 씨. 이것도 먹어 봐요.”

그와 맛있는 걸 나눠 먹고 있으니 천국이 따로 없었다.


‘하아. 좋다.’

서연은 식사를 마치고 나서도 구름 위를 걷는 듯 기분이 붕붕 날아다녔다.

잠도 푹 잤겠다, 맛있는 밥도 배불리 먹었겠다, 권율이 손에 물 한 방울 못 묻히게 하자 기분이 너무도 상쾌했다.


“서연 씨. 여기 약이요.”

그는 약도 챙겨주고.


“서연 씨 심심해요? 책 읽어줄까요? 아니면 영화?”

재미있게 놀아도 주고.


“아 해요. 서연 씨 취향을 저격하는 딸기 듬뿍 아이스크림이요.”

그는 심지어 서연이 좋아하는 간식을 시간마다 먹여줬다.


‘다친 게 꼭 나쁘지만은…… 않네.’

서연은 권율의 극진한 간호에 실없는 사람처럼 자꾸만 피식거렸다.

몸과 마음이 너무도 편안하자, 골치 아픈 회사에서 벗어나 권율과 매일 이렇게 놀고 싶다는 엉뚱한 생각까지 들었다.

권율은 얇은 책 한 권을 뚝딱 읽어주고는 서연을 쓱 쳐다봤다.


“……서연 씨.”

그의 기다란 손가락이 서연의 앞머리를 쓸어올렸다.


“율이 씨. 그거 알아요?”

“뭐요?”

“나 지금 율이 씨랑 있어서 되게 재미있어요.”

서연의 말에 그의 눈매가 느슨하게 휘어졌다.


“간호한 보람이 있네요.”

그의 따듯한 시선이 서연의 입술로 향했다.


“서연 씨. 부탁 하나만 들어줄래요?”

“부탁? 뭔데요?”

“실밥 풀 때까지, 내가 매일 출퇴근 시켜줘도 돼요?”

갑자기 훅 치고 들어오는 그의 말에 서연의 고개가 비스듬하게 꺾였다.


“출퇴근이요? 에이. 율이 씨 바쁜데. 괜찮아요.”

서연이 바로 거절 의사를 밝히자 그의 넓은 어깨 끝이 살짝 내려갔다.

뭐 이렇게까지 실망할 일인가 싶어, 서연이 차근히 설명하려는데 그가 먼저 입을 열었다.


“마음 같아서는…… 서연 씨가 다 나을 때까지 옆에 있어 주고 싶어요.”

서연은 기특한 말을 쏟아내는 그의 입술을 지그시 바라봤다.


“하지만 아픈 서연 씨를 귀찮게 할 수는 없으니까. 그 대신 다른 걸 해주고 싶어요.”

그는 스르륵 손깍지를 껴오며, 2주 동안은 꼭 그렇게 하고 싶다는 뜻을 전했다.

서연은 그의 얼굴을 빤히 쳐다보며 생각에 잠겼다.


‘운전도 못 하는데 아침에는 아빠한테 데려다 달라고 하고, 밤에는 율이 씨가 오면?’

어차피 잠들기 전까지 전화도 하는데, 직접 얼굴을 마주하는 것도 나쁘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다.


“율이 씨, 귀찮지 않겠어요?”

“전혀요!”

언제부터 그런 생각을 하고 있었는지, 그는 너무도 확고했다.


“나야, 뭐 그래 주면 고맙죠. 어차피 밖에서 데이트도 못 하는데 짧게라도 볼 수 있어서 좋고요.”

데이트라는 서연의 말에 권율이 급하게 확인하고 나섰다.


“오늘 만났다고 해서 원래 계획된 데이트가 없어진 건 아니죠? 이건 간호지 데이트가 아니잖아요.”

그는 퇴근을 시켜주는 것은 지극히 공적인 목적이기에 남은 데이트 횟수와는 상관없다는 점을 재차 강조했다.

나름대로 일리가 있는 말이라 서연도 반박하지 않았다.


“그럼 내일부터 부탁할게요. 그런데 언제 끝날지도 모르는데 괜찮겠어요?”

“할 일 하고 있을 테니까, 그건 걱정하지 말아요. 그 대신 끝나기 1시간 전에 연락해주면 바로 회사로 갈게요.”

서연은 너무도 달콤한 제안에 단번에 오케이를 날렸다.


“그리고 실밥 풀고 상처가 다 아물면 데이트는 다시 하기로 해요.”

“좋아요.”

서연은 안 그래도 자꾸만 데이트를 미루는 것 같아 그에게 미안하던 참이었다.

눈부신 오후의 햇살이 거실의 반을 채웠고, 만족스러운 합의를 마친 두 사람이 환하게 웃었다.

***



“오늘이 마지막인가? 생각보다 빨리 지나가네.”

서연은 최 비서가 보내준 일정을 확인하다 오늘이 권율과 마지막 퇴근하는 날임을 깨달았다.

2주라는 시간이 얼마나 빨리 지나가는지.

이틀에 한 번씩 받는 소독을 몇 번 받지도 않았는데 서연은 벌써 실밥을 제거했다.

민혁과 함께한 첫 번째 진료를 제외하고는 부모님과 함께 다녔고, 매일 퇴근은 권율이 도맡았다.

매일 밤 만나서 그런지, 서연은 권율과 함께 보내는 시간이 꽤 익숙해졌다.

그는 생각보다 책을 아주 좋아했고, 알고 있는 지식이 매우 방대했다.

그래서인지 그와의 대화는 항상 재미있었다.


“알면 알수록 매력 있단 말이야.”

서연은 그를 생각하며 조그맣게 중얼거렸다.

그러다 그가 신날 때 짓는 표정, 가끔 내뱉는 귀여운 말투 등 사소한 것들을 떠올렸다.

특히 키스가 하고 싶어질 때면 평소와 약간 달라지는 행동까지.

그는 커다란 강아지처럼 이마를 서연의 어깨에 비빈다거나, 자꾸만 입술을 쳐다보며 은근히 신호를 보냈다.


“귀여워. 암튼 귀여워서 미치겠어.”

서연은 아예 대놓고 핸드폰 속 그의 사진을 들여다봤다.

회사에서 이렇게까지 격한 감정을 토해낼 일은 아니었지만, 서연은 손가락으로 그의 사진을 확대하며 ‘귀여워’를 연발했다.


 
똑똑―.


“네. 들어오세요.”

서연은 핸드폰에서 해맑게 웃고 있는 권율을 얼른 감추며 표정을 바꿨다.


“대표님이 지시하신 대로 인턴들에게 숙제를 내줬습니다.”

언제나 단정한 모습의 최 비서가 말했다.


“아. 잘 하셨어요. 혹시 그분들 이력서 다시 볼 수 있을까요?”

대표 모드로 돌아온 서연이 묻자, 최 비서가 인턴들의 정보가 담긴 태블릿을 바로 내려놨다.

다들 인턴인데도 불구하고 어찌나 이력이 화려한지.

서연은 화면을 넘길 때마다 입꼬리를 한껏 들어 올렸다.


“아아. 이분, 한국대 학생.”

서연이 가리킨 사진을 힐끔 쳐다본 최 비서가 인턴의 이력을 줄줄이 읊었다.


“이름은 박시아. 한국대 4학년 1학기. 전공은 미술사학과입니다.”

“맞아요! 박시아 씨. 이분은 전공자가 아닌데도 포트폴리오가 참 괜찮았어요.”

서연의 긍정적인 평가에 최 비서가 부연 설명을 덧붙였다.


“실무교육에서도 하나를 알려주면 열을 안다는 평가가 있었습니다.”

만족스러운 듯 서연이 고개를 끄덕였다.


“학교에 취업계는 내고 온 건가?”

서연이 화면을 넘기며 대학생인 인턴들을 손가락으로 꼽았다.


“인턴 중에 시험이나 졸업 과제 내야 하는 사람들은 미리 얘기하라고 하세요. 편의 좀 봐주게요.”

서연은 사회에 첫발을 내딛는 인턴들의 시작이 긍정적이었으면 하고 바랐다.

그런 의미로 어려운 숙제도 냈겠다 맛있는 저녁을 선물해야겠다고 생각했다.


“다들 숙제 때문에 심란할 텐데. 인턴들 비싼 소고기도 사주고, 데블스 데려가서 시원하게 회식 좀 시켜주세요.”

서연의 지시에 깔끔하게 대답을 마친 최 비서가 재빨리 사무실을 빠져나갔다.

최 비서가 나가고 나자, 서연은 본격적으로 가을 신상품 디자인에 몰두했다.

서연은 디자인이 잘 풀리지 않아, 밤이 늦도록 그림을 그렸다가 지웠다가를 반복했다.


“하아. 안 되겠다. 율이 씨랑 놀아야지.”

밤 10시. 서연은 평소보다 일찍 권율을 불렀다.

그러고는 느긋하게 책상을 정리하고는 사무실을 빠져나왔다.

보안요원에게 인사를 하고 막 문을 나서려는데, 저 멀리 권율이 누군가와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어…… 저 사람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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