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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9. 알면 알수록 (39/130)


39. 알면 알수록
2022.06.16.


어둠이 짙게 내려앉은 한적한 도로에 비상깜빡이를 켠 권율의 차가 서 있었다.


‘오늘이 마지막인가?’

권율이 서연의 퇴근을 전담한 지도 벌써 2주가 다 되어가고 있었다.

그동안 권율에게는 서연이 모르는 일들이 있었다.

차근히 준비했던 중간고사가 끝났고, 요즘은 고시 준비로 바빴다.

권율이 공부에 매진한 사이, 서연도 여전히 바쁜 일정을 소화하고 있었다.

다친 것과 무관하게 그녀는 항상 밤 11시가 넘어서야 퇴근을 알려왔다.

서연은 너무도 미안해했지만, 권율은 그녀의 늦은 퇴근이 오히려 반가웠다.

그는 반복되는 서연의 스케줄과 업무 패턴을 머릿속에 집어넣고, 데리러 가기 전까지 최대한 시간을 활용해 공부에 전념했다.

새벽 5시에 일어나 수험생 때보다 더 잘게 시간을 쪼개 기출문제를 봤다.

식사와 30분의 운동을 제외하고는 항상 두뇌를 풀가동하며 공부에 집중했다.

그리고 자정이 되면 기쁜 마음으로 서연에게 달려갔다.

권율에게는 서연을 기다리는 그 짧은 시간이 얼마나 소중한지.

그녀가 육중한 유리문을 열고 걸어올 때면 심장이 설레다 못해 심하게 요동쳤다.

그러다 오래 기다렸냐며 가볍게 안겨 올 때면 머리부터 발끝까지 온몸이 따듯해졌다.

권율은 오늘이 마지막이라는 아쉬움을 달래며 어두운 밤하늘을 비스듬하게 올려다봤다.

풀냄새가 흐릿하게 배어 있는 바람이 스치자 행복하다는 생각이 그의 머릿속을 맴돌았다.

지금 이 공기의 냄새와 온도, 바람이 불어오는 방향과 저 멀리서 들려오는 작은 소음까지 모두 소중하기만 했다.


 


“어? 권율이다.”

서연이 아닌 다른 여자의 목소리가 들렸다.


“진짜 권율이네. 오랜만이다.”

권율은 의외의 인물을 길거리에서 만나자 당황스러우면서도 반가웠다.


“어어. 박시아. 오랜만.”

두 사람은 엄마들끼리 동창인데다 같은 영재원 출신이라 가끔 소식을 전해 듣는 사이였다.


“입학식 때 보고 처음인가? 제대했다는 소리는 들었어.”

“그러게. 몇 년 만이네. 넌 어떻게 지내? 이제 4학년인가?”

둘 다 1월생에 엄마들끼리 서로를 의식하다 보니 경쟁적으로 학교를 1년 일찍 들어갔었다.


“응. 4학년 1학기. 넌 하나도 안 변했네. 완전 그대로야. 저 멀리서도 한눈에 알아봤어.”

권율은 어려서부터 완성형 외모이다 보니 사실 달라진 게 하나도 없었다.


“칭찬으로 들을게. 근데 이 시간에 여긴 웬일이야?”

권율은 사무실이 즐비한 강남 한복판에서 만났다는 게 신기해 물었다.


“어. 이 근처 회사에서 인턴하고 있어. 오늘은 회식하느라…… 좀 늦었네.”

“인턴? 너 유학 간다고 들은 거 같은데.”

벌써 소문이 거기까지 났느냐며 시아가 멋쩍게 웃었다.


“엄마가 뉴욕 가서 JD 학위 받으라고 난리인데. 싸우면서 버티는 중이야.”

권율은 자식을 위해서라면 물불을 가리지 않는 시아 엄마의 모습을 떠올렸다.


“그래도 용감해졌네. 엄마한테 맞설 줄도 알고.”

“일단 졸업할 때까지만. 그다음에는 바로 미국으로 쫓겨날지도 몰라.”

그동안 그녀에게 무슨 일이 있었는지, 예민하던 성격이 활발하게 변해 있었다.

술에 취한 건지, 그녀는 자꾸 큰소리로 웃으며 권율의 어깨를 툭툭 두드렸다.

권율은 대화가 점점 길어지자 내심 걱정스러웠다. 혹시라도 여자와 웃고 떠드는 모습을 서연이 보고 오해할까 싶어서.


“근데 넌 여기서 뭐 해?”

“누구 좀 만나기로 해서.”

시아가 입을 가리며 야릇하게 웃었다.


“혹시 여, 자, 친, 구?”

“그래. 여자 친구. 그러니까 내 여친 오해하지 않게 너 그만 가.”

권율의 단호한 말투에 그녀가 ‘오오―’를 연발했다. 그러더니 양손을 세차게 흔들고는 미련 없이 자리를 떠났다.

그녀가 사라지는 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권율이 피식하고 웃었다.

어린 시절 그녀는 권율이 1등을 하면 울고불고 난리를 쳤었는데, 이제는 다 자란 어른처럼 구는 게 정말 신기했다.


“……사람이 변하기도 하는구나.”

권율은 나직하게 혼잣말을 중얼거리고는 시간을 확인했다.

그러다 멀리서 들려오는 반가운 목소리에 그의 고개가 돌아갔다.


“율이 씨.”

별처럼 반짝거리는 서연이 권율을 향해 빠르게 다가왔다.

***

서연은 안에서는 밖이 잘 보이지만, 밖에서는 건물 안쪽을 볼 수 없는 곳으로 자리를 옮겼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게 두 사람의 분위기가 뭔가 수상해 보였다.


‘도대체 박시아 인턴이랑…… 무슨 얘길 하는 거지?’

두 사람의 대화를 당연히 들을 수 없지만, 분위기를 파악하기에는 충분했다.


‘원래 아는 사이인가?’

시아는 대화를 나누는 중간중간, 고개를 젖히며 웃거나 권율의 어깨를 툭툭 두드렸다.

오늘 처음 봤다고 할 수 없을 정도로 그녀의 모든 행동이 너무나 자연스러웠다.

그러나 그녀가 권율을 꼬시는 중이라고 하기엔 터치가 보기보다 담백했다.

서연은 보안직원의 따가운 시선을 뒤로한 채, 생각에 잠겼다.

권율과 박시아의 공통점에 대해서.

교육 관련 프리랜서와 대학생 인턴이 알고 지낼 일이 뭐가 있을까 싶었다.

서연은 생각에 생각을 거듭한 끝에 하나의 결론을 내렸다.


“혹시…… 율이 씨 제자인가?”

제자라고 생각하니 두 사람 사이가 말이 되는 것 같다가도, 그러기엔 거슬릴 정도로 친근해 보였다.

순간 서연의 복잡한 머릿속에서는 훈남 선생님과 풋풋한 여학생의 로맨스 드라마가 자체 생산되고 있었다.


“하. 진짜 뭐지?”

입술을 잘근잘근 깨물던 서연이 자기도 모르게 속마음을 내뱉었다.


“아니, 율이 씨는 뭐 저렇게 환하게 웃어? 어, 어?”

대화가 끝났는지, 시아가 권율의 어깨를 다시 툭툭 치고는 양팔을 격하게 흔들며 자리를 떠나는 모습이 보였다.

서연은 순간 자신이 옛날 사람인가 싶었다.

아무리 그래도 선생님께 인사할 때는 고개를 숙여야 하지 않나?

급기야 서연은 자신의 학창 시절까지 떠올렸다.

선생님께 허리를 숙이지는 않더라도 항상 고개를 숙이며 인사를 했었는데…….

요즘은 안 그런가? 싶다가도.

‘아무리 제자가 나이를 먹었어도 선생님은 선생님이지.’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다 서연은 엉뚱한 결론을 내려버렸다.

아무래도 자신이 바쁜 사이, 요즘은 선생님과 제자가 친구처럼 지내는 걸로 급변한 게 틀림없다고 말이다.

그렇지 않고서는 두 사람의 이상한 모습을 설명할 방법이 없었다.


“내가…… 이상한가?”

서연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리고 혼자 서 있는 권율의 모습을 유심히 관찰했다.

그는 곧 평소와 다름없이 무표정으로 돌아왔고, 특별히 이상해 보이지도 않았다.

서연은 그의 모습을 5분 정도 살핀 후, 다시 보안요원에게 인사를 하고 밖으로 나갔다.


“율이 씨.”

서연의 부름에 권율의 눈매가 한없이 휘어졌다.


“많이…… 기다렸어요?”

서연은 권율의 표정을 꼼꼼히 살피며 물었다.


“금방 왔어요.”

평소와 다름없이 그가 먼저 스르륵 손깍지를 껴왔다.

서연은 그의 커다랗고 따듯한 손을 만지작거리며 속으로 고민했다.

‘물을까? 말까?’에 대해서.


“……그렇구나. 오래 안 기다렸다니 다행이에요.”

서연은 밤하늘처럼 까만 그의 눈동자를 마주했다.

나름 지금까지 권율을 겪어본 바로는 시아와 특별한 사이였다면 말을 안 했을 리가 없었다.

게다가 의심할 여지없이 연애를 안 해봤다는 그의 말엔 신빙성이 있었다.

그는 다른 남자들과는 확실히 달랐으니까.

그렇다면 우연히 누군가를 만났다고 말할 필요도 없는 사이인가?

서연은 자꾸만 복잡해지는 머릿속을 정리했다.

그래도 만약 찝찝함이 남는다면 권율이 아닌 시아에게 물어야겠다고 생각했다.

왠지 그녀가 권율과의 만남을 숨길 이유는 없을 것 같아서.

서연은 지금 당장 권율에게 꼬치꼬치 묻지 않기로 했다.

그렇게 결론이 정해지자, 서연은 물음표로 가득했던 생각을 얼른 밀어냈다.


“오늘 되게 피곤했어요.”

그러자 커다란 품이 서연을 가볍게 안았다 놓았다.


“온종일 디자인이 안 풀려서 속상했는데. 그래도 율이 씨 보니까 좋아요.”

“많이 힘들었어요?”

권율의 따뜻한 손이 서연의 등을 부드럽게 쓸어내렸다.


“아무래도 내 디자인 주머니에 구멍이 났나 봐요.”

서연은 신박한 디자인을 뽑아내고 싶은데 생각처럼 잘되지 않는다며 울상을 지었다.

그렇게 말하면서도 서연의 시선은 여전히 권율의 표정을 살피고 있었다.


“맛있는 거 먹으러 갈래요?”

애틋한 표정의 권율이 서연의 머리카락을 매만지며 물었다.

그러자 서연이 피식하고 웃었다.


“율이 씨랑 자꾸 야식 먹어서 살쪘어요.”

“아니에요. 지금도 완전 날씬해요. 한 손으로 들어볼까요?”

진심 어린 권율의 말에 서연이 킥킥하고 웃었다.


“율이 씨. 오늘 금요일이에요.”

“맞아요. 금요일.”

“2주 동안 퇴근시켜준 거 고마워요. 그런 의미로…… 내 비밀장소에 데려갈까요?”

“좋아요!”

어딜 갈 건지, 뭘 할 건지. 권율은 묻지도 따지지도 않았다.

늘 하던 것처럼 서연을 태우고, 안전벨트를 꼼꼼하게 매줬다.

그러고는 운전석에 앉아 시동부터 걸었다.


“어디로 가면 돼요?”

“사실은요. 머리가 복잡해지면 가는 곳이 있거든요.”

“어디든 같이 가줄게요.”

권율은 진심이었다. 서연에게 도움이 될 수 있다면 그곳이 어디라도 가줄 생각이었으니까.

미소를 머금은 서연이 자동차 내비게이션에 주소를 빠르게 입력했다.


“여기 가본 적 있어요?”

“아니요. 남대문은 할아버지 모시고 가봤지만 동대문은 처음이에요.”

“한 번도?”

권율은 서울에 살지만, 활동 범위가 넓지 않아 동대문에는 갈 일이 없었다.


“그렇게 잘 돌아다니는 스타일이 아니라서요.”

사실 그는 학원가를 벗어난 지 얼마 되지 않아 바로 입대했기에 놀러 다닐 일이 거의 없었다.

권율의 그런 사정을 알 리 없는 서연이 어깨를 으쓱하며 말했다.


“율이 씨니까 특별히 데려가는 거예요. 원래 원단 시장은 아무나 안 데려가거든요.”

권율은 서연에게 특별한 존재가 된 것 같아 빙그레 웃었다.

출발을 알린 그가 부드럽게 액셀을 밟았다.

자정이 가까워지는 시간, 그의 차가 점점 속도를 냈다.

뒷자리에 작게 열어놓은 창문 틈 사이로 달큰한 바람이 차 안을 돌아다녔다.

두 사람은 시시콜콜한 이야기를 나누며 한적한 도로를 달렸다.

늦은 시간이라 그런지 생각보다 일찍 동대문에 도착했다.

한때 원단 시장에서 살다시피 했던 서연은 시장을 손바닥 들여다보듯 했다.

그녀는 시장과 제일 가깝고 이동하기 좋은 주차 자리를 귀신같이 알려줬다.


“원래 이 시간은 도매만 오는데. 워낙 사장님들이랑 오래 알아서 그냥 가도 돼요. 자, 손.”

서연이 작은 손을 내밀었다.


“소중한 율이 씨를 잃어버리면 안 되니까. 안이 미로처럼 복잡하거든요.”

권율은 소중하다는 말이 듣기 좋아 얼른 그녀의 손부터 잡았다.


“단골부터 부자재 가게까지 한 바퀴 돌면 돼요. 구경 다 하고 맛있는 것도 사줄게요.”

“맛있는 건 내가 사줄게요.”

“누가 사면 어때요. 같이 가는 게 중요하지.”

권율은 자신도 모르게 마주 잡은 서연의 손등에 촉하고 입을 맞췄다.

이에 질세라 서연도 그의 손등에 촉하고 입을 맞췄다.

그러자 권율의 얼굴에 햇살 같은 미소가 내려앉았다.

평소라면…… 아니 1시간 전까지만 해도 서연은 그에게 똑같은 미소를 보냈을 것이다.

그러나 지금 서연의 얼굴엔 뭔가 다른 미소가 걸려 있었다.

웃고는 있지만, 완전히 웃는 게 아니었다.

지금 서연의 기분은 뭐랄까.

누군가 자신의 운동화에 모래를 한 움큼 집어넣은 기분?

걸으면 걸을수록 찝찝해 당장 멈춰 서서 신발을 탈탈 털어버리고 싶었다.


‘하아. 차라리 시원하게 물어볼까?’

결국 찝찝함을 견디지 못한 서연이 어렵게 입을 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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