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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0. 마음을 다잡아도……. (40/130)


40. 마음을 다잡아도…….
2022.06.19.



 


“율이 씨. 있잖아요.”

서연은 일단 그의 이름을 불렀다.

그러고는 어떤 말을 먼저 꺼내는 게 좋을지 고민했다.


‘박시아 씨랑 어떻게 아는 사이에요? 두 사람이 예전에 썸이라도 탔어요?’

그러다 퍽 우스워졌다.

키스 좀 하는 사이라고, 진짜 여자 친구처럼 행동하는 것 같아서.

권율을 바라보는 서연의 눈동자가 세차게 흔들리자 그가 물었다.


“왜요? 차에 뭐 놓고 왔어요?”

“아니, 그게 아니라…….”

순간 까만 봉지를 양손에 든 사람이 서연의 옆으로 지나갔다.

그러자 권율이 서연의 어깨를 부드럽게 감싸 안으며 자신의 품 안에 넣어버렸다.

코끝을 스치는 청량한 우드 향.

서연은 자신이 좋아하는 익숙한 향이 나자 스르륵 눈을 감았다가 떴다.


‘이 소중한 시간을 망치는 건, 바보 같은 짓이야.’

서연은 자신이 다치는 바람에 2주 동안 집 안에만 있었다는 사실을 상기시켰다.


“……율이 씨. 잘 따라와요. 다른 곳 쳐다보면 큰일 나요.”

진심이 들어간 서연의 말에 그가 마주 잡은 손을 빈틈없이 고쳐 잡았다.

마음을 바꾼 서연은 그와의 시장 데이트를 본격적으로 즐겼다.

좁은 길을 따라 늘어선 가게들을 한 줄 기차로 돌아다니며 색색의 원단들을 구경했다.

서연이 바빠서 못 와본 사이 신상품이 얼마나 많이 깔렸는지, 오묘하게 빛깔이 다른 천들을 구경하느라 정신이 없었다.

좀 전의 이상했던 기분을 싹 잊어버릴 만큼 말이다.

권율도 처음 와보는 원단 시장이 신기한지 커다란 두루마리에 말린 원단의 종류를 묻고 또 물었다.


“한 사장. 이거 월요일에 입고된 거야.”

“생각보다 단가가 너무 센데요.”

“에헤. 돈을 쓸어 담고 있다는 걸 다 아는데. 또, 또 앓는 소리 한다.”

“누가 그런 루머를. 아니에요! 겨우 밥만 먹고 살아요.”

서연은 한마디도 지지 않았다.

그녀는 신상 원단들을 직접 손으로 만져보고, 꼼꼼하게 색깔을 비교했다.

권율은 서연이 벌이는 흥정이 재미있는지, 그의 몸이 점점 앞으로 기울어졌다.

서연은 영국에서 수입한 고급 원단들 앞에서 한참을 고민했다.


“이번 가을에 한정판 재킷으로 만들어보고 반응 좋으면 추가할게요.”

서연은 어렵게 결정한 원단의 품번과 샘플을 받으며 말했다.


“암튼 똑소리가 나지. 어떤 사장이 이렇게 직접 원단을 보러 다녀.”

원단 사장은 서연과 오래전부터 알고 지내서 그런지 애정 어린 칭찬과 거침없는 농담을 동시에 건넸다.


“한 사장. 내가 저번에 말한 우리 의사 조카 만나볼래?”

왜 다들 서연에게 남자를 소개해주려 안달이냐는 듯, 권율의 미간이 순식간에 구겨졌다.


“사장님. 금쪽같은 의사 조카는 아껴두시고요. 요기 뒷자리나 깔끔하게 정리해주세요.”

서연이 가볍게 넘겨버리자 원단 사장의 시선이 정색하고 있는 권율에게로 향했다.


“그런데 직원이야? 애인이야?”

원단 사장이 서연의 뒤에 서 있는 권율을 보며 눈짓했다.


“누굴 거 같아요?”

“가만있어 보자. 눈빛이며 외모가 범상치 않은 게…… 경호원인가?”

피식 웃은 서연이 권율을 힐끔 쳐다봤다.

그러자 조용하던 권율이 불쑥 나섰다.


“애인입니다.”

“!”

그의 용기 있는 급발진에 서연의 눈동자가 동그랗게 커졌다.

권율은 자신이 경호원보다는 애인에 가깝지 않냐는 듯 서연을 빤히 쳐다봤다.


“아하하. 우리 한 사장이 안 본 사이에 애인이 다 생겼구나. 참…… 훤칠하고. 엄청 든든하겠어.”

원단 사장이 황급히 말을 줄이자, 서연이 한술 더 떴다.


“이렇게 큰 애인 데려온 기념으로 견적서 좀 이 가격에 써주세요.”

서연이 계산기를 빠르게 누르자, 원단 사장이 계산기를 뺏어다 다시 두드렸다.

두 사람은 가격을 두고 한참 동안 실랑이를 벌였다.

하지만 하루 이틀 거래하는 게 아니다 보니, 결국 서로가 조금씩 양보했다.

거래가 끝나자 서연은 고급 수입 셔츠 원단을 소량 구매했다.


“내가 들게요.”

권율이 얼른 짐을 받아들자, 서연이 그의 손을 살포시 잡았다.


“필요한 거 다 샀어요. 우리 짐 갖다 놓고 뭐 먹으러 가요.”

“좋아요.”

두 사람은 까만 봉지를 차에 실어놓고는 뭘 먹을지 고민하기 시작했다.


“간단하게 떡볶이랑 꼬마 김밥으로 하죠.”

서연은 짐이 가득 실린 오토바이들을 지나 권율을 단골 포장마차로 데려갔다.

둘은 비닐봉지로 감싼 플라스틱 접시에 떡볶이와 겨자소스를 곁들인 꼬마김밥을 사이좋게 나눠 먹었다.

그러고는 새벽 3시까지 여기저기를 기웃거리며 길거리에서 파는 달달한 간식들을 사 먹었다.

두 사람은 배불리 먹은 것들이 흔적도 없이 사라질 만큼 그렇게 밤거리를 쏘다녔다.


“다리 아파요?”

서연의 걷는 속도가 점점 느려지자 권율이 물었다.


“하이힐을 신었더니, 뒤꿈치가 아파요.”

권율은 빨갛게 올라온 서연의 발을 보며 등을 내보였다.


“업혀요.”

“무거워서 안 돼요.”

서연이 두 손을 빠르게 내저으며 거절해도 권율은 넓은 등을 웅크린 채 일어나지 않았다.


“아니, 나 진짜 무겁다고요. 응? 빨리 움직여요. 윽. 왜 이렇게 꿈쩍도 안 해.”

은근 고집 있는 권율이 꿈쩍도 하지 않자, 그를 일으켜 세우려던 서연도 어쩔 수가 없었다.


“난 경고했어요. 나 무겁다고 하지 마요.”

망설이던 서연이 그의 어깨를 향해 매달리듯 팔을 뻗었다.

그러자 가볍게 서연을 업은 권율이 벌떡 일어났다.


“업은 줄도 모르겠어요. 막 달릴 수도 있는데. 달려볼까요?”

권율이 갑자기 속도를 내자 깜짝 놀란 서연이 그의 등에 찰싹 달라붙었다.


“아, 인정. 인정! 나 깃털처럼 가벼워요. 됐죠? 힘드니까 그만 뛰어요.”

흐뭇한 표정의 권율이 속도를 줄이자 서연의 작은 발이 그의 허벅지를 톡톡 두드렸다.

상쾌해진 새벽 공기와 너무도 따듯한 권율의 체온.

서연은 그의 넓은 등에 뺨을 기대며 생각했다.

만약 행복이라는 감정이 거창한 게 아니라면, 지금 자신은 행복한 게 아닐까 하고.

추억이 깃든 특별한 장소에 그와 함께 와서 좋다고 말하고 싶었다.

어느새 서연의 온 마음이 폭신한 담요를 덮은 듯 포근해졌다.


“서연 씨.”

서연은 등에서 울리는 그의 목소리가 잔잔한 진동처럼 느껴졌다.


“말해요.”

그의 목소리가 더 듣고 싶어 서연이 제 뺨을 꾹 하고 눌렀다.


“나 행복해요.”

권율은 서연이 지금 느끼는 감정을 대신 말해줬다.


“서연 씨한테 꼭 해주고 싶은 말이에요. 나 지금 굉장히 행복해요.”

“진짜요?”

권율의 등에 기대 있던 서연이 상체를 일으키며 물었다.


“서연 씨랑 이렇게 같이 있을 수 있어서 좋아요.”

그러자 서연이 나직하게 웃었다.

그도 목덜미에 와 닿는 서연의 숨결이 좋아 따라 웃었다.


“율이 씨.”

“왜요?”

“‘아’ 하고 입 좀 벌려 봐요.”

“네?”

“아까 나 몰래 사탕 사 먹은 거 아니에요? 왜 이렇게 달달한 말만 골라 하지?”

서연은 꼭 사탕을 찾는 사람처럼 그의 뺨을 손으로 매만졌다.


“으. 간지러워요. 이러다 떨어져요.”

그러자 서연이 상체를 들어 올려 권율의 목덜미에 속삭이듯 말했다.


“이따 차에 타면 입안에 뭐 있는지 꼼꼼하게 확인해 봐야겠어요.”

서연은 그 말을 끝으로 자신의 입술이 닿는 곳에 촉하고 입을 맞췄다.

***

월요일 아침.

서연은 평소보다 일찍 출근했다.

물론 특별한 이유가 있었다.

누군가 가끔 자신의 명치를 꾹 누르는 것처럼 속이 답답했다.

그러다 스치듯 찝찝한 기분이 꼬리표처럼 따라붙었다.

그렇다고 권율과 사이가 안 좋았던 건 아니었다.

주말 내내 그동안 미뤄놨던 데이트를 즐기며 다정한 시간을 보냈다.

하지만 마음 한구석이 여전히 묵직한 게 뭔가 확인하고 풀어내야만 할 것만 같았다.

똑똑―.

노크 소리도 단정한 최 비서가 월요일 보고를 위해 들어왔다.

서연은 특별한 것 없는 보고를 한 귀로 흘려들으며, 한 가지 생각에만 몰두했다.


“최 비서님. 인턴들 돌아가면서 면담을 할까 하는데요.”

“면담이요?”

“네. 저번에 숙제 내준 것도 있고 해서요. 출근하자마자 올라오라고 하실래요?”

갑작스러운 지시에 최 비서의 눈동자가 분주해졌다.


“네. 그럼 누구부터 하시겠습니까?”

“박시아 인턴이요. 가능하면 빨리요.”

깍듯하게 인사를 마친 최 비서가 나가자 10분 만에 노크 소리가 다시 들렸다.


“들어오세요.”

세련된 오버사이즈 셔츠를 입은 시아가 조심스럽게 들어왔다.


“여기 앉으세요.”

화사한 미소를 머금은 서연이 자리로 안내하자, 시아가 단정한 몸짓으로 따라와 앉았다.

서연은 그녀를 보자마자 권율과 어떻게 아는 사이인지 단도직입적으로 묻고 싶었다.

하지만 대표 체면에 차마 그럴 수는 없었다.

서연은 그녀의 이력을 간단히 확인하고, 신입에게 물을 법한 건설적인 목표와 생각에 대해 몇 가지 물었다.

자신의 소신을 밝히는 그녀의 눈빛이 어찌나 반짝거리는지, 같은 여자가 봐도 너무도 매력적이었다.

결국 서연은 진짜 궁금했던 말을 불쑥 내뱉고 말았다.


“박시아 씨가 이렇게 멋있어서 그런가? 지난 금요일 밤에 남자친구랑 다정하게 있는 모습 봤어요.”

‘한서연. 정말 유치해서 못 봐주겠다. 어린 애한테 이게 다 뭐 하는 짓이야?’

서연은 갓 입사한 인턴을 슬쩍 떠보는 자신을 꾸짖으면서도 그녀가 대답하기만을 기다렸다.


“지난 금요일 밤이요? 어…… 저는 남자친구가 없는데요.”

남자친구가 없다는 그녀의 말에 서연은 순간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고는 ‘그럼 그렇지’를 여러 번 되뇌며 불안했던 감정을 빠르게 추슬렀다.


“아, 그렇구나. 퇴근하다 우연히 봤는데 둘이 다정해 보이길래 남자친구인 줄 알았어요.”

서연이 적당히 얼버무리자 그녀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러더니 곧 그녀의 눈동자가 동그랗게 커졌다.


“아! 대표님 눈에 충분히 그렇게 보이실 수 있어요. 걔가 좀 노안이거든요.”

걔? 선생님이…… 아니고?

서연은 엄지손톱으로 제 손등을 꽉 누르며 침착하게 물었다.


“나이 차이가 꽤 있어 보이던데. 에이. 친구…… 뭐 그런 건 아니죠?”

“친구 맞아요. 나름 엄마들끼리 경쟁자라서 생일도 며칠 차이 안 나요.”

친구라는 그 말에 서연은 자신의 귀가 아무래도 고장이 난 게 아닐까 싶었다.


“내가 연애를 오래 안 했더니. 다정하게 얘기하는 사람만 봐도 다 연인으로 오해하고 그랬나 봐요. 미안해요.”

“아, 아닙니다. 대표님.”

“그런데 친구라고 하니까 정말 신기하다.”

서연은 두 사람이 어떻게 친구가 될 수 있는지 너무도 궁금했다.

떨리는 마음을 겨우 붙잡고 서연이 궁금증을 은근히 흘렸다.

그러자 서연이 던진 미끼를 그녀가 덥석 물어버렸다.

시아의 입에서는 서연이 감당할 수 없을 정도의 많은 정보들이 쏟아져 나왔다.


‘진정해. 친구라고만 했지. 권율이라는 실명이 나온 건 아니잖아. 아닐 수도 있어.’

서연은 실낱같은 희망을 붙잡고, 최선을 다해 입꼬리를 올렸다.


“한국대 학생이라 그런지 역시 다르네요.”

“저도 같은 한국대이긴 한데. 그 친구에 비하면 정말 아무것도 아니에요. 걔는 완전 다른 존재라서요. 그냥 1등을 하기 위해 태어난 사람이라고나 할까요?”

서연은 시아에게 한마디라도 더 들으려고 적절한 칭찬과 반응을 잊지 않았다.


“아. 그래요?”

“잠깐만요! 제가 제 일도 아니면서 막 이런 걸로 다 자랑하게 되네요.”

시아는 바지 주머니에 삐쭉 나와 있던 핸드폰을 꺼내 자판을 두드리기 시작했다.


“대표님. 이것 좀 보세요. 가슴이 웅장해지네요. 이런 사람이 제 친구라서요.”

흔들리는 서연의 눈동자가 핸드폰 화면에 날아가 박혔다.

-‘불수능’ 유일한 만점자 권율 학생 인터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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