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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2. 다른 이유는 없어요 (42/130)


42. 다른 이유는 없어요
2022.06.26.



 
순간 권율의 머릿속이 하얘졌다.

아, 그래서…….

컨디션이 좋지 않다는 서연은 문을 열어줄 때부터 평소와 달랐다.

어딘가 모르게 눈빛이 서늘했고, 짧은 인사에도 온기를 찾아볼 수 없었다.

정말 아파서 그런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니었다니.

지금 어떤 말을 하더라도 변명일 수밖에 없겠지만, 구차한 변명이라도 해야만 했다.

그게 서연에 대한 최소한의 예의였으니까.


“……미안해요.”

사과를 건네는 그의 목소리에 복잡한 감정이 실렸다.


“율이 씨 진짜 모습은…… 뭐예요?”

서연은 흔들리는 감정을 다잡으려 아랫입술을 작게 깨물었다.

그렇지 않으면 그에게 상처 주는 말을 퍼부을 것 같아서.


‘일단 율이 씨 말을 끝까지 들어보자. 뭔가 피치 못할 사정이 있을지도 모르잖아.’

서연은 이 믿을 수 없는 상황에서도 그의 이야기를 들어주고 싶었다.

평소의 그녀였다면 연락은커녕 연결된 모든 것을 즉시 차단했을 것이다.

하지만 권율에게는 왠지 그러고 싶지 않았다.

그동안 그가 보여줬던 모습에 분명 진심이 있었으니까.

인내심을 최대한 끌어올린 서연이 권율의 설명을 기다렸다.

그가 참담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먼저 말했어야 했는데. 이렇게 알게 해서 정말 미안해요.”

“대학생…… 맞아요?”

서연은 대학생이라는 단어를 어렵게 내뱉고는 참았던 숨을 한꺼번에 쏟아냈다.

권율은 자신을 가장 잘 설명해주던 단어가 이렇게 후회스러울 줄 몰랐다.

어떻게 설명하면 좋을까.

한참을 머뭇거리던 그가 바지 주머니에 있던 지갑을 꺼냈다.

이걸 보여주는 게 맞는 건가 고민했지만 더는 숨길 수도, 미룰 수도 없는 일이었다.

언젠가는 해야 할 말이었고, 서연과 더 나은 관계로 발전하려면 반드시 거쳤어야 할 문제였다.

권율은 지갑에서 카드 한 장을 꺼내 그녀에게 건넸다.

<권율. 학사과정. 경영대학, 경영학과 전공/ 한국 대학교 학생처장>

서연은 권율의 사진이 박힌 학생증을 마주하며 어이없는 웃음을 흘렸다.


“진짜였네.”

질끈 눈을 감았다 뜬 서연이 허탈한 목소리로 물었다.


“아무리 생각해봐도 이해할 수가 없어요. 도대체, 왜 그랬어요?”

“어떤 변명도 소용없다는 거 알아요. 하지만…….”

커다란 그의 상체가 서연을 향해 기울자 그녀의 몸이 곧바로 물러났다.


“아무것도 모르는 날 보면서 재미있었어요?”

권율의 절망스러운 시선이 서연을 응시했다.


“잘 속고 있으니까 즐거웠냐고요?”

원망 섞인 추궁에 권율은 손으로 이마를 짚었다.


“다른 이유는 없었어요.”

권율은 무거운 한숨을 쏟아냈다.

그리고 2년 전 호텔 주차장에서 목격했던 이야기를 시작했다.

전혀 예상치 못한 전개에 서연의 눈동자가 세차게 흔들렸다.


“현우 형이랑 이야기를 나누는 서연 씨를 보고 바로 알아봤어요. 그때 그 사람이라는 걸요.”

서연은 자신도 모르는 사이, 감추고 싶은 치부를 그에게 들킨 것 같아 그의 이야기에서 도망치고만 싶었다.


“군대 가기 전에 우연히 서연 씨를 봤는데, 제대 후 나간 자리에서 또 우연히 마주치니까. 기분이 이상했어요.”

시간의 여행자라도 된 것처럼 두 번째 만나는 서연이 전혀 낯설지 않았다고.

그래서 더 눈길이 갈 수밖에 없었다는 걸 솔직히 털어놨다.


“본의 아니게 목격한 일이지만, 서연 씨의 상처가 괜찮은지 물어보고 싶었어요.”

권율은 절대 나쁜 마음으로 속이려던 건 아니었다고 강조하다가, 제발 믿어달라며 매달릴 뻔했다.

하지만 너무도 씁쓸한 서연의 표정을 마주하고는 차마 그럴 수가 없었다.


“그래서 나한테 연락처를 묻지도, 주지도 않았구나. 나는 그런 줄도 모르고.”

서연은 그의 말 못 할 사정이 이해되자 양손으로 눈을 가려버렸다.


“처음부터 호감이었어요. 얼마나 서연 씨 연락처를 묻고 싶었는지 몰라요.”

하지만 대학생인 자신의 위치를 생각해 여러 번 마음을 접었다고 했다.


“그래도 너무 만나고 싶어서…… 현우 형한테 핑계를 대고 홈쇼핑에 찾아간 거예요.”

권율은 모든 걸 털어놓았다.

그러자 우습게도 자신을 짓누르던 죄책감이 서서히 사라지는 기분이었다.

그녀를 향한 미안함과 이제라도 사실을 밝혀서 다행이라는 후련함이 동시에 느껴졌다.


“서연 씨를 떠올리지 않으려고 무던히 노력했어요.”

“…….”

“그러다 서연 씨가 커피를 쏟았던 날 깨달았어요. 도저히 참아지지 않는다는 걸.”

권율은 같은 상황이 와도 그랬을 거라고 말했다.


“왜 그랬는지 모르겠어요. 그저 서연 씨와 함께하고 싶었으니까요.”

다정한 말을 내뱉던 서연의 입에선 무거운 한숨이 쏟아졌다.


“율이 씨. 그 이후에도 말할 기회는 여러 번 있었잖아요.”

복잡한 감정에 사로잡히자 서연이 다그치듯 물었다.


“서연 씨가 욕심났어요.”

권율에게 욕심이라는 단어만큼 솔직한 표현은 없었다.


“어리다는 이유로 아예 날 남자로 봐주지 않을 것 같았어요.”

그는 서연에게 나이 어린 동생이 아닌, 철저히 남자이고 싶었다.


“그럼, 프리랜서는 뭐예요?”

“그건…… 과외 하는 걸 그렇게 얘기한 거예요.”

“과외요?”

서연은 과외라는 말에 기가 막혔다.

하지만 다행스럽게도 그를 프리랜서라고 소개한 건 서희였다는 걸 기억하고 있었다.


“그럼 현재 졸업이 한참 남은 대학생, 갓 제대했고, 프리랜서가 아닌 과외 알바. 내가 또 모르는 거 있어요?”

“……없어요. 과외는 최근에 다 그만뒀고, 고시 준비하고 있어요.”

권율은 하나도 숨기지 않고 모든 걸 깨끗하게 털어놓았다.

그러다 자신의 말 한마디에 달라지는 서연의 표정을 보며 어쩔 줄 몰랐다.

그녀가 지금 얼마나 혼란스러울지 짐작조차 할 수 없어서.

하지만 어떻게든 노력이라는 걸 해야 했다.


“서연 씨.”

그의 간절한 목소리가 그녀를 붙잡았다.

하지만 서연은 생각에 잠겨 대답이 없었다.


“한 번도 진심이 아니었던 적이 없었어요.”

“마음이 진심이면 속이는 것쯤은 괜찮아요?”

“…….”

“율이 씨는…… 그래요?”

두 가지 중에서 내내 고민하던 서연의 마음이 한쪽으로 기울어졌다.


“날 속였던 전 남자친구나, 디자인을 빼돌린 걸 숨긴 직원이나…… 그 사람들과 뭐가 달라요?”

권율은 그 사람들과 자신은 다르다고 말하고 싶었다.

하지만 그녀를 속인 건 명백한 사실이었다.


“서연 씨. 정말 미안해요.”

“어차피 다 똑같잖아요. 난 또 속았으니까.”

“서연 씨가 내 진심을 안다면 이해해줄 거라고 착각했어요.”

“이해요? 지금 이 상황에서 어떻게 이해를 해요?”

서연은 찝찝했던 마음과 그를 이해해보려 노력했던 시간을 떠올렸다.

그러나 이미 그녀의 마음 한구석엔 권율에 대한 불신이 자리 잡고 있었다.


“나는 율이 씨가 뭘 또 숨기면 어쩌나 의심할 거예요.”

서연이 믿지 못한 건 당연했다.

자신이라도 그랬을 테니까.

권율은 처음 느껴보는 설렘에 취해 서연에게 상처를 줬다는 걸 뒤늦게 깨달았다.

돌이켜 생각해보니 서연과 가까워지고 싶은 욕심이 제일 미숙한 결정을 내린 셈이었다.


“내가 어떤 말을 해도 다 핑계라는 거 알아요. 하지만…….”

권율은 자신에게서 고개를 돌린 서연의 손을 잡았다.

그리고 참회하듯 그녀의 손등에 이마를 가져다 붙였다.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한 번만…….”

권율의 진심이 서연의 손등에 뜨겁게 내려앉았다.


“잘못한 걸 바로잡을 수 있도록 노력할게요.”

뻔뻔하게 기회를 달라고 말할 수 없었다.

그저 노력이라도 할 수 있게 밀어내지 말아 달라고 간절하게 부탁했다.

서연은 착잡한 눈으로 권율을 내려다 볼 뿐 마주 잡은 손을 빼지는 않았다.


“사실…… 난 잘 모르겠어요.”

그건 서연의 솔직한 심정이었다.

서연은 조금 전까지만 해도 그를 만나지 않겠다고 마음을 정했었다.

하지만 권율이 진심으로 용서를 구하자 마음의 벽이 조금씩 허물어지는 걸 느꼈다.


“날 속인 율이 씨가 너무 미워요. 하지만 연락처를 주지 못할 만큼 고민했던 율이 씨 마음도 알겠어요.”

“다시는 숨기지 않을게요.”

권율은 당분간 서연이 자신을 믿지 못하더라도 다 이해할 수 있었다.

서연의 신뢰를 되찾기 위해서 무엇이든 노력할 생각이었으니까.


“하아―. 율이 씨한테 뭐라고 해야 할지 모르겠어요.”

서연은 매우 혼란스러웠다.

최근 두 사람 사이가 워낙 가까워진 데다 이제 많이 익숙해진 상태라 더욱 그랬다.


“힘들고 일이 잘 안 풀릴 때면, 율이 씨를 생각했어요. 행운의 부적처럼요.”

권율은 서연에게 그만큼 위로가 되는 존재였다.

게다가 요즘 그녀의 삶에 일 다음으로 가장 큰 관심사는 권율이 맞았으니까.


“어느새 율이 씨한테 스며들었다고 생각했어요.”

스며들었다니.

권율은 자신만의 일방통행이 아니었던 것 같아 안도하면서도 미안했다.


“하지만…… 나는 현실을 외면할 수 없어요.”

곧 서른을 앞둔 상황, 서연은 현실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난 비혼주의자도 아니고, 그렇다고 일 때문에 결혼을 늦게 할 생각도 없어요.”

자신에게 일은 일이고, 결혼은 결혼이라고는 뜻을 분명히 밝혔다.


“게다가 친한 친구가 결혼해서 행복하게 사는 모습을 보니까. 솔직히 나도 그러고 싶어요.”

서연은 대학생인 권율에게 부담스러울 수 있는 주제를 꺼냈다.

누군가를 만난다고 해서 다 결혼으로 이어지는 건 아니지만, 그렇다고 ‘연애 따로, 결혼 따로’ 구분하고 싶지 않았다.


“그러니까 내 말은요…….”

잠시 뜸을 들인 서연이 말을 이었다.


“난 대학생 남자의 첫사랑 상대가 되기엔 시간이 없어요.”

결국 서연의 입에서 고민했던 말이 흘러나왔다.

진지한 얼굴의 권율이 고개를 끄덕였다.

충분히 수긍할 수 있는 고민이었고, 그녀에게 닥친 현실도 공감했다.

하지만 그녀의 뜻을 이해하는 것과 헤어짐을 받아들이는 건 전혀 다른 문제였다.


“서연 씨가 날 믿고 의지할 수 있게, 내가 노력하면요?”

권율은 지금 당장 그녀에게 확답을 줄 수 있는 건 없었다.

그래도 시간을 준다면 최선을 다해 노력해볼 생각이었다.

꿋꿋하게 견디고 해내는 건 자신 있었으니까.


“날 배제하지 말고, 서연 씨 현실에 넣어줘요.”

“넣어주면요?”

“서연 씨에 대한 내 마음이 얼마나 진심인지 보여줄게요.”

권율은 어느 때보다 단호했다.


“서연 씨에 대한 마음, 단 한 번도 변한 적 없어요.”

오히려 그의 마음은 매일매일 몸집을 불리며 대책 없이 커져서 문제였다.

그만큼 한결같았고, 앞으로도 그렇다는 걸 서연에게 증명하고 싶었다.


“나 때문에 너무 무리하지 말아요.”

“무슨…… 뜻이에요?”

서연은 자신 때문에 권율이 20대에만 할 수 있는 기회를 놓치지 않았으면 했다.


“나한테 기회는 서연 씨예요. 그래서 놓치고 싶지 않고요.”

“율이 씨. 나중에 정말 후회할지도 몰라요.”

한번 지나간 시간은 돌아오지 않는다는 뻔한 이야기가 아니었다.

서연은 그의 미래를 진심으로 걱정해서 하는 말이었다.


“서연 씨가 내 곁에 없는 게 나한테는 후회예요.”

권율은 절대 물러날 생각이 없었다.

잠시 침묵한 서연이 어렵게 입을 열었다.


“어쨌든 내 결론은요.”

“…….”

“우리 당분간 떨어져 있었으면 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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