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3. 알맹이가 빠져나간 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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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3. 알맹이가 빠져나간 듯
2022.06.30.
“헤어지는 건 싫어요.”
권율이 망연자실한 얼굴로 말했다.
그는 서연의 손을 놓칠세라 더 꼭 붙잡았다.
그러자 최대한 감정을 갈무리한 서연이 자신의 생각을 밝혔다.
“오늘 감정이 통제가 안 됐어요.”
얼마나 충격을 받았었는지.
서연은 자신이 대표가 된 이후 조퇴라는 걸 처음 해봤다.
“이 정제되지 않은 기분으로 내 감정을 쏟아내고 싶지 않아요.”
그가 이미 좋아져서 용서하겠다는 의미는 아니었다.
서연은 권율에게서 시선을 돌리고 잠시 침묵했다.
자신이 내뱉고 싶은 말속에 그를 향한 무례한 표현이 있을까 싶어서.
그의 나이를 알았다고 해서 손바닥 뒤집듯 달라질 건 없었다.
아직 확실하게 마음을 결정하지 못했으니까.
“우리 각자 생각할 시간을 가져요.”
“생각할 시간이요?”
불안한 예감이 스쳤지만, 권율은 서연의 다음 말을 차분하게 기다렸다.
“나는 원래 앞만 보고 달리는 사람이에요. 하지만 지금은 잠시 멈출게요.”
이게 최선이라고.
그를 아끼고 좋아하기에 성급하게 결정하지 말라는 자신의 당부였다.
“얼마나요?”
권율이 착잡한 얼굴로 물었다.
“모르겠어요. 일주일이 될지, 한 달이 될지. 아니면 그 이상이 될지도.”
서연은 모든 것이 모호했다.
그가 미웠다가도 받아줄 수 없는 현실이 안타까웠고.
왜 그랬냐고 길길이 날뛰며 화를 내고 싶다가도, 지금 당장이라도 용서하고 싶었다.
서연의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권율이 담담한 목소리로 말했다.
“기다릴게요. 서연 씨 마음이 풀릴 때까지.”
“기대하진 말아요. 나도 내가 어떤 결정을 내릴지 모르겠으니까.”
다만 한 가지 확실한 건 시간이 정답을 줄 거라고.
서연은 그렇게 생각했다.
잠시 고민하던 권율이 어렵게 입을 열었다.
“지금까지의 내 모든 것이 거짓처럼 느껴질 수 있어요.”
핑계에 불과하더라도 말해야만 했다.
“하지만 마음이 거짓이었던 적은 없었어요.”
나직한 그의 음성이 서연의 귓가를 맴돌았다.
“이렇게 큰 상처를 줘놓고 위로를 말하는 건 염치없지만…….”
뜨거운 날숨을 내뱉은 권율이 힘겹게 말을 이었다.
“많이 아프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도대체 저 남자를 어떻게 해야 할까.
서연은 그와 이야기를 나누다 보면 어느새 그에게 감겨버렸다.
제대로 날이 선 칼날도 무뎌지고, 단단하게 쌓아 올린 벽도 이내 허물어졌다.
이유는 알 수 없었다.
그저 천적이라도 만난 것처럼 어김없이 약해졌으니까.
하지만 서연은 마음을 다잡았다.
“그럴게요.”
서연의 말에 권율이 흐리게 웃었다.
그는 엄지로 서연의 손등을 문지르고는 눈을 마주했다.
“……이제 갈게요.”
차마 발길이 떨어지지 않았지만, 권율은 일어나야만 했다.
“잘 가요.”
서연이 작별 인사를 건네자, 권율은 아직 이별이 아니라는 걸 알려줬다.
“다음에…… 또 만나요.”
저릿한 그의 마음이 다음을 기약했다.
권율은 습관처럼 서연을 안아주려 팔을 올렸다가 곧 허공에서 손을 거둬들였다.
그러고는 진심 어린 사과와 애틋한 여운을 남기고 일어섰다.
서연은 일부러 그를 배웅하지 않았다.
혹시라도 나약해진 마음이 그의 축 처진 어깨를 안쓰럽게 생각할 것 같아서.
철컥, 현관문이 닫히자 겨우 막아놓은 한숨을 쏟아냈다.
“앞으로 어쩔 거야.”
서연은 자신에게 다그치듯 물었다.
하지만 돌아오는 건 ‘모르겠다.’라는 생각뿐이었다.
“머리 아파.”
사납게 머리를 헝클어트리던 서연이 무심코 식탁 위를 쳐다봤다.
다양한 종류의 죽과 딸기, 아이스크림과 약이었다.
만약 그가 학교에서 출발했다면 얼마나 바쁘게 움직였을지 눈에 그려졌다.
“하아…….”
서연은 깊은 한숨을 또 밀어내고 식탁에 앉아 그가 사 온 죽을 꺼냈다.
그의 성의를 생각해 죽을 반쯤 비우고, 그 자리에서 두통약을 삼켰다.
그러고는 한숨조차 잃어버린 사람처럼 입을 꾹 닫은 채 한 가지 생각에만 몰두했다.
그의 마음이 정말 진심이라면…… 과연 그를 받아줄 수 있을까.
현실적인 문제들을 모두 차치하고 오직 사람 하나만 본다면…….
그러다 자신 있게 내뱉었던 그 말이 또 떠올랐다.
‘오로지 됨됨이! 인성은 돈 주고 살 수도, 노력한다고 가질 수도 없으니까. 가장 중요해요.’
지금 보니 그 말은 아예 권율을 설명하는 말이나 다름없었다.
서연의 관자놀이가 다시 욱신거렸다.
“오늘은 여기까지만 하자.”
더는 안 되겠다는 듯 서연이 바로 침대로 향했다.
그러나 도무지 잠이 오지 않았다.
뒤죽박죽 얽혀 든 생각들이 자세를 바꿀 때마다 흩어졌다가 다시 뭉쳐지기를 반복했다.
서연은 답답한 마음에 벌떡 일어났다가 앉았다.
두 손으로 머리를 헤집고 벌러덩 도로 누웠다가 핸드폰을 만지작거렸다.
관심도 없는 기사를 검색하고, 친구들의 SNS를 방황했다.
하지만 결국 종착지는 권율과 주고받은 톡이었다.
어둠이 내려앉은 방.
서연은 핸드폰 속의 권율을 곱씹었다.
이제껏 대수롭지 않게 넘겼던 부분들이 비로소 보인다고나 할까.
“한결…… 같았네.”
자기도 모르게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강제로 잠을 청한 그녀의 시끄러운 머릿속은 꿈속이라고 별반 다르지 않았다.
겨우 토끼잠이 들었지만, 갈피를 잡지 못한 마음이 이별과 용서를 반복했다.
결국 서연은 이른 아침 저절로 눈이 떠졌다.
그녀는 미동도 없이 어스름한 천장만 응시했다.
분명 어제까지만 해도 있었는데, 오늘은 없어진 것처럼.
그녀의 아침이 고요하다 못해 적막했다.
서연은 그와 함께하는 아침 일상이 익숙해져 버렸다는 걸 그제야 깨달았다.
“……출근이나 하자.”
서연은 잔뜩 허전해진 아침을 더 분주하게 움직여 출근 준비를 마쳤다.
그리고 평소보다 일찍 회사에 도착했다.
서연은 책상 위에 산더미처럼 쌓인 일을 보며 오히려 다행이라고 여겼다.
아니, 그렇게 반가울 수가 없었다.
그래야 권율을 떠올리지 않을 것 같아서.
권율과 거리를 둔 첫날, 서연은 식사 때를 제외하고는 자리에서 일어나지 않았다.
그다음 날은 현실과 권율로부터 도망쳤다.
그와 헤어지는 것도, 그와 계속하는 것도 자신이 없어서.
그래도 문득 권율이 생각나면 세뇌를 걸 듯 중얼거렸다.
“모르겠어. 난 아직…… 아무것도. 모르겠다고.”
서연은 하기 싫은 숙제처럼 결정을 미루고 또 미뤘다.
결정 장애에 걸린 사람처럼 하루하루를 보내다가 결국 방법을 바꿨다.
그녀는 매일 녹초가 되기 직전까지 일하다, 퇴근하면 쓰러지듯 잠이 들었다.
몸이 무겁고 고단해지자, 복잡했던 생각도 자연히 흐려졌다.
그러나 그와 떨어져 지낸 지 2주가 흐르자 그것마저도 소용이 없었다.
서연은 여전히 남다른 존재감을 뽐내는 권율에게서 한 발짝도 멀어지지 못했다.
처음엔 몸을 못살게 굴자 잠을 자느라 그를 떠올릴 새가 없었다.
그러나 피곤도 적응이 되는 건지.
습관처럼 이어지는 야근에 몸은 피곤했지만, 정신만은 더욱 또렷해졌다.
아무리 일에 열중하고, 그를 밀어내도.
그는 시시때때로 서연의 머릿속을 점령했다.
권율은 여전히 서연의 머릿속에서 꿈쩍도 하지 않은 채 오히려 몸집만 불리는 중이었다.
바로 지금처럼.
디자인 1팀 회의. 이야기가 길어지자 서연은 불현듯 권율을 떠올렸다.
‘날 기다리고 있겠지?’
“대표님. 이번 신상품 중에서 몇 가지 좀 바꿀까요?”
김 실장이 서연의 씁쓸한 표정을 살피며 멀쩡한 디자인을 변경하고 싶은지 물었다.
서연은 다른 생각을 하다가 들킨 것 같아 흠칫 놀랐다.
“아니요. 그냥 이대로 진행하세요.”
잔뜩 지친 서연의 목소리에는 생기가 없었다.
“대표님. 아직 몸이 안 좋으세요?”
그녀답지 않게 기운이 없어 보이자 김 실장이 다시 물었다.
“아닙니다. 날이 더워져서 그런지 영 피곤하네요.”
“오후에 홈쇼핑 기획 회의도 가셔야 하는데. 저 혼자 다녀올까요?”
걱정스러운 김 실장의 시선이 서연에게로 닿았다.
“그 정도는 아니에요.”
흔들리는 감정을 겨우 추스른 서연이 힘겹게 입꼬리를 올렸다.
“회의는 이 정도에서 마무리하죠.”
“네. 대표님.”
“김 실장님. 같이 점심 먹고 출발할까요?”
두 사람은 오후에 잡아놓은 홈쇼핑 회의를 위해 분주히 움직였다.
***
두 번의 회의, 그리고 이어진 회식.
서연의 컨디션은 최악이었다.
하지만 지난번 현우에게 회식을 하자고 뱉어놓은 말을 수습해야 했다.
다시 회사로 들어가기도 애매했고, 잔뜩 신이 나 메뉴를 고르는 직원들에게 찬물을 끼얹을 순 없었다.
서연은 마지못해 미식가 현우를 따라 새로 생긴 고깃집으로 향했다.
네모난 테이블에 6명이 마주 앉아 왁자지껄 떠들었다.
서연은 굳이 대화에 끼지 않아 고기만 구웠다.
“대표님. 제가 구울게요.”
김 실장이 자꾸만 집게를 뺏어 들려 하자, 서연이 일부러 환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제가 고기 하나는 기가 막히게 굽잖아요. 어서 드세요. 김 실장님.”
서연은 김 실장을 만류하고 그녀에게 편하게 먹으라며 손짓했다.
“요즘 회사에 안 좋은 일이라도 있으세요? 안색이…….”
현우가 조심스럽게 아는 척을 하고 나섰다.
안 그래도 온종일 회의 자료를 보느라 눈알이 빠지기 일보 직전인데.
뜨거운 숯불에 뻑뻑해진 눈동자를 깜빡이며 서연이 대답했다.
“아니요. 별일 없어요. 요즘 깊은 잠을 못 자서 그런가 봐요.”
“이럴 줄 알았으면 회식을 다음에 할 걸 그랬네요.”
배려의 아이콘답게 현우가 서연의 눈치를 살피며 말했다.
“괜찮습니다. 이사님.”
“혹시 입맛이 없으시면 다른 거 시켜드릴까요?”
그가 메뉴판을 쳐다보며 다정하게 물었다.
“고기도 안 드시고. 술잔도 그대로라서요.”
쓸데없이 예리하긴.
“잘못 보셨어요. 제가 고기 구우면서 얼마나 많이 먹었는데요.”
서연은 회사 대표로 앉아 있는 자리에서 사적인 감정에 휘둘리고 싶지 않아 멀쩡한 척 연기했다.
사람들의 이야기에 열심히 고개를 끄덕이고, 야들야들한 고기를 입에 넣었다.
그러다 현우가 건배를 제안하면 어김없이 술잔을 들고 목적도 없이 ‘위하여’를 외쳤다.
눈치 빠른 현우가 이상하게 생각하지 않도록 말이다.
현우는 대화를 주도하면서도 서연을 살뜰히 챙기기 시작했다.
‘참 이상하네.’
서연은 현우의 다정한 모습을 보자 자꾸만 권율이 떠올랐다.
생김새는커녕 분위기조차 닮지 않은 사람을 보며 그를 떠올리다니.
오로지 권율과 친하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말이다.
‘맥주를 너무 오랜만에 마셨나?’
권율을 보고 싶은 마음이 스멀스멀 올라오자 서연은 죄 없는 맥주를 탓했다.
그러다 억지로 먹은 고기가 명치에 걸린 듯 속이 답답해졌다.
“괜찮으세요? 음료수라도 시켜드릴까요?”
괜히 맞은편에 앉아서는.
서연은 현우의 세심한 관심에서 자유롭지 못했다.
“고기가 너무 맛있어서 과식했나 봐요.”
이젠 아무렇지 않은 척 연기하는 것도 지겨워져 빨리 집에 가고 싶은 생각뿐이었다.
슬슬 자리를 정리하려는데 현우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저, 한 대표님. 프로모션 행사 티켓이요.”
“네.”
“1장 더 부탁드려도 될까요?”
서연은 현우가 개인적으로 뭘 부탁하는 사람이 아니었기에 의아하게 쳐다봤다.
그 사이 여자친구라도 생겼나?
그러자 그가 멋쩍어하며 설명을 덧붙였다.
“원래 서희랑 가려고 했는데요.”
서연이 고개를 끄덕이며 그의 다음 말을 기다렸다.
“그때면 2차 시험이 끝난 직후라, 율이도 같이 데려갈까 해서요.”
갑작스럽게 소환된 그의 이름에 서연의 심장이 쿵 하고 내려앉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