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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6. 완벽한 타이밍 (46/130)


46. 완벽한 타이밍
2022.07.10.



 
보고 싶었다니.

권율은 품 안에 서연을 담고도 그 말이 도무지 믿기지 않았다.

확인이라도 하는 것처럼.

그녀의 여린 등을 쓸어내리다가 빈틈없이 당겨 안았다.


“고마워요. 정말 고마워요.”

지금까지 단단히 틀어막았던 그의 감정들이 봇물 터지듯 흘러내렸다.

긴 여행을 마치고 안식처로 돌아온 듯 모든 것이 제자리를 찾는 기분이었다.

권율은 서연의 여린 어깨에 얼굴을 묻고 그리움을 한껏 들이마셨다.

서연 특유의 달콤한 복숭아 향기…….

너무도 간절하게 닿고 싶었던 말랑한 감촉, 거기다 따스한 체온까지.

서연의 모든 것이 예전 그대로였다.

감격에 찬 권율이 순간 뜨거운 숨을 내뱉었다.

간지러운지, 서연의 어깨가 작게 흔들리자 그녀를 놓칠세라 더 꼭 끌어안았다.

다시는 그녀를 실망시키지 않겠다는 다짐과 이렇게 재회했다는 것에 감사하면서 말이다.


“하루도 빠짐없이 생각했어요.”

서연이 처음으로 웃었다.


“너무 보고 싶어서 여러 번 죽다 살아났어요.”

솜사탕처럼 부드러운 그녀의 숨결이 그의 뺨을 스치듯 지나갔다.

맞닿았다가 떨어진 뺨이 얼마나 화끈거리는지, 권율의 등줄기로 아찔한 소름이 돋아났다.

권율은 품 안에 있는 그녀가 또 보고 싶어져 상체를 세워 서연의 눈을 마주했다.

기다란 손가락으로 곡선을 그리듯 그녀의 얼굴선을 따라 움직였다.

그러다 서연의 턱 끝에서 자기도 모르게 스르륵 멈춰 섰다.

애틋한 그의 시선이 서연의 붉어진 입술로 향했다.

미치도록 닿고 싶다는 생각과 양심이 있다면 참아야 한다는 만류가 뒤섞였다.

하지만 이성의 통제에 벗어난 손가락이 제멋대로 움직였다.

그의 앞서가는 엄지손가락이 서연의 입가를 부드럽게 맴돌았다.


“서연 씨.”

차마 노골적으로 드러낼 수 없는 마음을 억지로 감추고 그녀의 이름을 불렀다.

사납게 뛰고 있는 심장을 가라앉히려 서연을 다시 안았다.

그래도 진정이 되질 않자, 다시 그녀의 얼굴을 마주했다.

그러길 여러 번.

보다 못한 서연이 권율의 뺨에 손을 가져다 붙였다.


“율이 씨.”

그토록 바라던 감촉이 느껴지자 권율의 마음에 달큰한 봄바람이 불었다.


“나머지 얘기는 우리 집에 가서 할래요?”

서연이 CCTV를 가리키며 멋쩍게 웃었다.

얼마나 제정신이 아닌지.

권율의 눈에는 어색하게 웃는 서연의 모습조차 미치도록 황홀해 보였다.

그는 내달리는 마음을 억지로 멈춰 세우고 아직은 아니라며 조바심을 겨우 가라앉혔다.

둘 사이에 해야 할 말과 명확하게 정리할 일들이 남아 있었으니까.


“가고 싶어요. 서연 씨랑 같이.”

“그럼, 우리 더 늦기 전에 출발해요.”

‘우리’라는 별 의미 없는 단어에도 심장이 해로울 정도로 두근거렸다.

권율은 사나운 폭풍이 지나가기 전처럼 스르륵 손깍지를 꼈다.


“어서 가요.”

마주 잡은 손이 너무 좋아 그는 걸으면서도 자꾸만 시선을 내렸다.

보고 또 봐도 어찌나 믿기지 않는지.

불과 몇 시간 전만 해도 칠흑 같은 지옥을 헤매고 있었는데.

그녀와 이렇게 함께 있는 것만으로도 천국이 따로 없었다.

권율은 구원자나 다름없는 서연의 손을 만지작거리며 속으로 다행이라는 말만 되뇌었다.

그는 커다란 상체를 서연의 쪽으로 한껏 기울여 자신의 흔적을 남기듯 그녀의 손등에 뺨을 비볐다.


“내가…… 그렇게 좋아요?”

피식, 서연이 웃으며 물었다.


“말로 표현할 수 없이요.”

권율은 미처 닫지 못한 운전석 문을 지나 조수석으로 향했다.

그러고는 예전처럼 서연을 앉히고 꼼꼼하게 안전벨트를 채웠다.

눈앞에 있는 그녀를 자꾸만 확인하고 싶어져 얼굴도장을 찍듯 빤히 쳐다봤다.

빙그레 새어 나오는 웃음, 다시 찾은 행복.

권율은 새 삶을 부여받은 사람처럼 한껏 고양된 기분으로 말했다.


“서연 씨. 꼭 내 옆에 있어요.”

미소를 머금은 서연이 고개를 끄덕이자 권율의 입가가 더 길게 벌어졌다.

운전석으로 돌아오는 그 짧은 순간에도 그는 가슴이 벅차올라 견딜 수가 없었다.

***

2주 만이었다.

두 사람이 같은 자리에 나란히 앉은 것이.

심각한 표정으로 시간을 갖자고 말하던 자리는 애틋한 재회의 자리가 돼 있었다.

권율은 서연과 떨어지면 죽는 병이라도 걸린 사람처럼.

한쪽 팔로 그녀의 어깨를 감싸고, 다른 팔로는 그녀의 손에 빈틈없이 마주 잡았다.


“우리, 못다 한 얘기를 해야겠죠?”

서연이 먼저 시작했다.


“율이 씨와 떨어져 있던 시간이 너무 괴로웠어요.”

서연은 그동안 권율이라는 사람에게 스며들다 못해 제대로 젖어 있었다는 걸 뒤늦게 깨달았다.


“아무리 밀어내려고 해도 어찌나 꿈쩍도 안 하는지. 도저히 지워낼 수가 없었어요.”

매 순간 남다른 존재감을 뽐내는 통에 일상생활이 불가능할 정도였다고도 털어놨다.

시도 때도 없이 웃음을 흘리는 권율이 서연의 어깨에 이마를 붙였다.

그건 그가 할 수 있는 가장 친밀한 행동이었다.


“나도 그랬어요.”

보고 싶을 때마다 일부러 공부에 더 매달렸다고.

어느 날은 5시간 동안 의자에서 일어나지 않았다는 말에 서연은 그저 웃었다.

비록 떨어져 있었지만, 서로가 같은 마음으로 고통 분담을 한 것 같아서.


“깨끗하게 항복할게요. 더는 율이 씨 없이는 못 살겠어요.”

승자도 패자도 없었다.

모두가 행복해지는 항복 선언만 있을 뿐.

권율의 얼굴에 형언할 수 없는 진한 행복이 묻어났다.


“처음부터였어요. 난 서연 씨 없이는 절대 안 되는 사람이니까요.”

권율이 당연한 진리라는 듯 말하자 서연이 따스한 시선으로 그를 바라봤다.


“늦게 받았지만, 편지…… 고마웠어요. 율이 씨 마음을 제대로 볼 수 있는 좋은 기회였던 같아요.”

“사실 오늘도 편지 때문에 왔어요.”

“진짜요?”

“항상 편지가 가득 쌓여 있어서. 서연 씨가 이미 날 정리한 줄 알았어요.”

그럴 리가 없었다.

편지가 있다는 걸 알았다면 마음의 결정이 더 빨라졌을지도 모를 일이었으니까.


“오늘 편지가 없어진 걸 알고 기대 반 걱정 반이었어요.”

권율은 서연이 혹시 받아줄지 모른다는 설렘과 다시는 보고 싶지 않아 버렸으면 어쩌나 걱정하는 마음이 동시에 들었다.


“그러다 참을 수가 없어서 무작정 찾아간 거예요.”

그는 매일 출근 도장을 찍듯 집 우편함을 찾았지만, 회사로 간 건 오늘이 처음이었다고 말했다.

그랬구나.

그동안 떨어져 있었어도 서로가 같은 마음이었네.

그것만으로도 권율을 선택한 자신의 결정이 옳았다는 확신이 들었다.


“결국 약속을 지키지 못했지만, 그래도 지금까지 한 일 중에 제일 잘한 일인 것 같아요.”

서연이 낯선 남자에게 가로막혀 있던 순간을 떠올리자, 권율의 미간이 흐려졌다.


“서연 씨한테 무슨 일이 생겼다면 정말…… 견딜 수 없었을 거예요.”

이런 게 운명인 건가.

마치 눈에 보이지 않는 누군가가 써놓은 대본처럼 완벽한 타이밍에 재회한 것이 운명이 아니면 뭔가 싶었다.

거창할 거 없이 꼭 만나야 할 사람들은 어떻게든 만날 수밖에 없는 것.

서연은 권율과 이미 그런 사이로 묶인 게 아닐까.

그렇게 믿기로 했다.

그러자 한때 겨울이었던 서연의 마음이 봄날의 햇살을 마주하듯 사르르 녹아내렸다.

그 순간을 기민하게 포착한 권율이 당당하게 나섰다.


“오늘부터 서연 씨랑 정식으로 사귀고 싶어요.”

그냥 사귀는 것과 정식으로 사귀는 건 무슨 차이인가 싶었다.


“율이 씨가 생각하는 건 어떤 의미인데요?”

서연은 앞으로는 궁금한 게 생기면 참지 않고 물을 생각이었다.

그래야지만 두 사람 사이에 더 이상의 비밀은 없을 테니까.


“제한이 없는 사이요.”

일전에 그에게 서른을 앞둔 자신의 현실을 가감 없이 털어놓은 것이 떠올랐다.


“내가 전에 했던 말 때문에 그런 거면 부담 가질 필요 없어요.”

정말 그럴 생각이었다.


“율이 씨 현실도 고려할 생각이니까요.”

이미 그와 함께하기로 마음먹은 건 권율의 현실을 종합적으로 판단하고 내린 결정이었다.


“여러 날 생각했어요. 내가 서연 씨 입장이라면 어땠을까 하고요.”

그의 나이를 의심조차 하지 않았을 만큼 그는 처음부터 속이 깊었었다.

때로는 자신보다 더 배려가 넘쳤고, 참 괜찮은 사람이라고 생각했었으니까.

그런데 내 입장에서 생각을 해봤다니.

서연은 그의 마음 씀씀이가 고마웠다.


“서연 씨가 느꼈을 감정과 현실에 대한 두려움이 고스란히 느껴졌어요. 그래서 고민할 것도 없었어요.”

서연은 뭐라고 하는 게 좋을지 잠시 갈피를 잡지 못했다.


“나이가 어리다는 이유로 워밍업처럼 사귀다 헤어질 거라는 전제는 싫어요.”

“율이 씨…….”

사실 서연의 마음 한구석에는 그런 생각이 있었다.


“이 사랑이 언젠가는 실패할 거라고.”

“…….”

“그러니까 앞으로 내 인생에 좋은 경험이 될 거라는 말은 하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물론 그와 끝까지 가고 싶다는 마음이 더 컸다.

하지만 후회 없이 사랑하다 감정이 사그라지면 그의 찬란한 앞날을 위해 좋은 기억으로 남겠다는 각오도 있었다.

아무래도 특별한 사이다 보니, 그 모든 걸 감수하겠다는 마음이 어지럽게 뒤엉켰다.

그런데 그걸 콕 짚어내다니.

서연은 권율의 다음 말이 더 궁금해졌다.


“난 서연 씨의 현재이자, 미래이고 싶어요.”

그의 진지한 말에 서연은 내심 놀라고 말았다.


“사실 서연 씨를 비롯해 서연 씨 주변에 어울리는 사람들이 모두 훌륭해서 내심 불안했어요.”

권율은 호진이 집으로 찾아온 날을 상기하며 그날 느꼈던 감정을 솔직하게 털어놓았다.


“어떻게 하면 서연 씨한테 당당해질 수 있을까. 많이 고민 했어요.”

아직 최종 합격까지는 거쳐야 할 단계가 남았지만, 열심히 노력 중이라고 했다.


“무슨 일이 있어도 올해 꼭 합격할게요.”

“율이 씨. 제대한 지 얼마 되지도 않았다면서요. 여유를 가지고 해도 괜찮아요.”

그건 진심이었다.

그를 몰아붙일 생각은 추호도 없었으니까.


“아니요! 서연 씨와 함께하고 싶다는 내 의지의 표현이라고 생각해주세요.”

너무도 단호한 그의 결심을 말리는 것도 모양새가 이상했다.

서연은 차라리 그에게 원하는 걸 묻는 것이 더 낫겠다 싶었다.


“그럼, 내가 율이 씨 공부하는데 도와줄 건 없어요? 뭐든지 편하게 말해봐요.”

손가락을 맞잡으며 서연이 물었다.

그는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건지 입술만 달싹거렸다.

그런 것도 잠시.


“2가지나 되면 너무 많을까요?”

머뭇거리던 그가 미안해하며 물었다.

너무도 신중한 모습이 그답다는 생각에 서연이 기분 좋게 웃었다.


“10가지도 들어줄 수 있어요. 뭔데요?”

서연이 선선히 허락하며 물었다.


“첫 번째는…….”

잠시 숨을 고른 그가 더 조심스럽게 말했다.


“만날 때마다 안아줬으면 좋겠어요.”

그건 굳이 부탁하지 않아도 될 일이었다.

하지만 더 신중해진 그의 행동을 보며 서연은 그에게 완전히 사로잡힌 기분이었다.

그가 너무도 사랑스러워서.

하마터면 당장 입술을 포갤 뻔했다.

흔들리는 감정을 꾹 누른 채 서연이 점잖게 물었다.


“이유는요?”

그녀가 합당한 이유를 묻자 권율은 미처 질문을 예상치 못했다는 듯 당황하며 말했다.


“예전처럼, 아니 더 가까워지고 싶어서요.”

“그것뿐이에요?”

“서연 씨랑 맞닿아 있으면 모든 근심 걱정이 사라지는 기분이라서요. 혹시…… 불쾌해요?”

불쾌하기는커녕 아주 솔깃한 부탁이었다.

서연은 일렁이는 감정을 애써 감추며 권율을 지그시 올려다봤다.


“나도 좋아요. 율이 씨랑 맞닿아 있으면…….”

서연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권율의 입술이 촉, 하고 닿았다 떨어졌다.


“이렇게 다가갈게요.”

그동안 얼마나 마음고생을 했는지, 부드러웠던 권율의 입술이 매우 거칠어져 있었다.

하지만 느낌만큼은 예전 그대로였다.

서연이 다음 말을 하려는 순간, 커다란 손이 그녀의 뺨을 그러쥐며 귓가를 스치듯 매만졌다.


“이만큼, 더요.”

비스듬하게 고개를 돌린 그가 천천히 다가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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