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47. 되살아나다 (47/130)


47. 되살아나다
2022.07.14.



 
권율은 서연의 아랫입술을 좀 더 깊게 머금었다 물러났다.

이 순간을 되찾고 싶어서 얼마나 바라고 바랐던지.

달콤한 사탕을 입안 가득 깨물어 먹은 사람처럼.

그는 치명적인 단맛에 빠져 정신을 차릴 수 없었다.

다시 가볍게, 조금 더 깊게.

그러다 부드럽게 머금었다가 도로 강하게 삼켰다.

그러자 서연의 어깨가 앞으로 살짝 오그라들었다.


“이렇게는 어때요?”

그녀의 대답을 들으려는 물음이 아니었다.

그저 다음으로 이어질 행동이 더 깊어진다는 신호일 뿐.

이번에는 놀랍게도 서연이 그에게로 부드럽게 파고들었다.

권율은 그녀를 애타게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 말캉하게 서연을 마중했다.

2주 만의 만남은 처음 입맞춤을 하는 것처럼 너무도 새로웠다.

그동안 멀어졌던 아찔한 감각이 빠르게 되살아나자 한참을 그렇게 서로의 안부를 확인했다.

어느새 맞붙은 입술 사이로 ‘푸스스’ 정다운 웃음이 새어 나왔다.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이 친밀한 느낌이 반가워서.

두 사람은 코끝을 스치듯 비비며 재회의 기쁨을 한껏 누렸다.

그러면서도 권율은 수도 없이 되뇌었다.

오늘 편지를 들고 오길 잘했다고 말이다.

그러지 않았다면 혹독한 시간이 계속됐을 테니까.

권율은 그녀의 입술에서 서서히 멀어졌다.

여기서 더 나갔다가는 통제를 벗어날 것만 같아서.

그녀의 머리칼을 귀도 넘겨주며 권율은 가쁜 숨을 천천히 내쉬었다.

달뜬 감정을 애써 갈무리하다가 또 아쉬워져 서연을 꼭 끌어안았다 다시 놓았다.

그러자 어깨에 뺨을 붙인 서연이 물었다.


“2번째 부탁은 뭐예요?”

서연은 뭐든지 다 들어줄 것처럼 다정했다.

권율은 이런 얘기를 꺼내야 한다는 것이 내심 미안했지만 하는 수 없이 입을 열었다.


“서연 씨.”

권율이 서연의 등줄기를 천천히 쓰다듬으며 말했다.


“시험이 끝날 때까지 기다려줄 수 있어요?”

재회의 아쉬움을 채 달래기 전이었지만, 시험이 얼마 남지 않은 상황에서 불가피한 결정이었다.

마음 같아서는 매일 서연을 만나고 싶었지만, 더 나은 미래를 위해 잠시 참아야만 했다.

지금은 좋은 성과를 위해 달려야만 하니까.


“당연히 기다릴 수 있죠. 그 대신…….”

서연이 서로의 간격을 벌리며 말했다.


“시험 보기 전, 딱 10분만 만나 줄 수 있어요? 꼭 응원해주고 싶어서요.”

그건 전혀 어렵지 않은 일이었다.

권율이 고개를 끄덕이자, 서연이 빙그레 웃었다.

권율은 자신을 이해해주는 서연의 모습이 하룻밤의 꿈처럼 도무지 믿기지 않았다.


“뭐든지 평소대로만 해요. 난 결과에 상관없이, 쭉 율이 씨 편할 거니까요.”

내 편이라니.

서연의 그 말이 너무도 든든했다.

원래 일희일비하지 않는 성격임에도 곧 좋은 일이 생길 것 같은 긍정적인 예감이 들었다.


“율이 씨. 앞으로요.”

서연이 권율의 양손을 마주 잡으며 시선을 내렸다.


“혹시 공부하다 피곤해지면 언제든지 연락해요. 난 기다릴게요.”

애틋한 손길이 권율의 손등을 만지작거렸다.


“서연 씨. 마음 같아서는 오늘 일 때문이라도 매일 퇴근시켜주고 싶어요.”

상황이 상황인지라, 어떻게든 그녀에게 미안한 마음을 표현하고 싶었다.


“만약에 무슨 일이 생기면 꼭 연락해요. 언제든 달려올 테니까요.”

시험보다 서연이 훨씬 중요하다는 걸 재차 강조했다.


“알았어요. 걱정 안 하게 씩씩하게 잘 지낼게요.”

권율은 환하게 웃는 서연을 보자 믿을 수 없이 새로웠고, 가슴이 크게 벅차올랐다.


“시험 끝나면, 서연 씨 옆에 꼭 있을게요.”

“그래요. 우리 그때는 홀가분한 마음으로 꼭 같이 있어요.”

서연의 다정함이 좋아, 권율은 자꾸만 ‘1분만, 더’를 외쳤다.

하지만 아쉽게도 이제는 일어나야 할 시간이었다.

감격스러운 재회를 만끽하느라 이미 새벽 3시가 넘어가고 있었다.


“서연 씨. 전화할게요.”

그녀도 아쉬운 듯 권율의 어깨를 얼른 끌어안았다.

권율은 말랑한 온기가 주는 편안함에 스르륵 눈을 감았다가 떴다.


“서연 씨. 생각해봤는데요.”

“뭔데요?”

“야근하는 날에는 보안요원분이랑 주차장까지 같이 가면 안 돼요?”

아무래도 오늘 일이 마음에 걸려 권율이 말했다.


“아. 진짜! 그래야겠다. 율이 씨 걱정 안 하게.”

서연이 배시시 웃으며 고개를 끄덕이자, 그 사랑스러운 모습을 보고 차마 발길이 떨어지질 않았다.

권율은 작별이 아쉬워 여러 번 안았다가 놓느라 결국엔 30분이나 지체했다.


“정말 갈게요.”

“곧 다시 만나요.”

또 만나자는 서연의 인사에 권율은 세상을 다 가진 얼굴로 웃었다.

그의 마음이 순식간에 행복으로 충전됐다.

***

권율은 평생을 통틀어 이렇게 신나게 공부한 적은 처음이었다.

골치 아픈 책들을 보면서도 실없는 사람처럼 자꾸만 피식거렸다.

피곤을 느낄 새도 없었다.

그에겐 피로 회복제이자 비타민인 서연이 있었으니까.

아무리 복잡한 내용도 머릿속에 쏙쏙 들어와 콕콕 박혔다.

어찌나 능률이 오르는지, 재회하기 전과 후의 집중력이 확연히 달랐다.

권율은 이럴 때일수록 공부량을 더 늘려야겠다고 생각했다.

서연이 믿어주고 응원해줄 때 더 나은 모습을 보여주고 싶어서.

그는 모든 시간을 빈틈없이 활용했다.

여전히 도서관에서 살다시피 했지만, 그는 예전과는 확실히 다른 사람이었다.

그걸 제일 먼저 알아챈 건 절친 원준이었다.

매일 미친놈처럼 공부만 하던 권율의 얼굴에 생기가 넘쳐나자 그가 의아한 듯 물었다.


“눈빛이 왜 이래!”

“내 눈빛이 왜?”

원준은 권율이 무리하게 공부하다 쓰러질까 봐 항상 점심을 함께했다.


“살아났잖아.”

“그럼 살아 있지. 언제는 죽었었냐?”

원준은 분명 그랬었다는 듯 권율을 빤히 쳐다봤다.


“허? 지금 웃어?”

점심을 먹으러 가는 길.

권율이 터져 나오는 웃음을 참지 못하자, 원준이 손으로 그의 이마를 짚었다.


“어디가 아파?”

“아니. 컨디션 최고.”

“공부를 너무 많이 해서. 설마…… 정신줄을 놓은 건 아니지?”

권율이 킥킥거리며 원준의 어깨를 툭 쳤다.

그러자 깜짝 놀란 원준의 눈동자가 보름달처럼 커다래졌다.

‘얘가 갑자기 왜 이러지?’ 싶어서.

하지만 권율은 여전히 감정을 감추지 못한 채 싱글벙글했다.


 
따가운 여름 햇살이 쏟아지는데도 권율은 어깨를 붕붕 돌리며 숨을 깊이 들이마셨다.


“흠. 날씨 좋고.”

“갑자기?”

분명 어제까지만 해도 권율은 감정을 잃어버린 사람처럼 죽상이었는데.

밤사이 무슨 일이 있었던 건지, 볼수록 놀라웠다.

원준은 권율이 거액의 복권이라도 당첨됐나 싶어 꼬치꼬치 캐물었다.


“뭐야. 뭔데! 이 형님한테 빨리 털어놔.”

“뭘.”

“다 죽어가던 얼굴이 활짝 핀 이유가 뭐냐고!”

원준이 아무리 재촉해도 권율은 말을 아끼며 웃기만 했다.


“얼른 밥이나 먹자. 나 빨리 공부해야 해.”

“하. 뭐지. 영 이상하네.”

달라진 권율의 모습이 적응이 안 되는지, 원준은 자꾸만 고개를 갸웃거렸다.

하지만 아무리 권율이 이상해도 밥은 먹어야만 했다.

두 사람은 넓은 캠퍼스 안에서 제일 비싼 교직원 식당에 마주 앉았다.

자고로 공부를 잘하려면 잘 먹어야 한다는 원준의 강요에 따라 비싼 갈비찜 정식을 시켜놓고 기다리고 있었다.


“진짜 시험도 얼마 안 남았네. 야! 끝나면 소개팅할래?”

원준의 말에 권율은 바로 거절을 날렸다.


“아니! 필요 없어. 자세한 건 시험 끝나면 알려줄게.”

궁금함을 참지 못한 원준이 자세히 파고들려던 그때.

경쾌한 여자 목소리가 들려왔다.


“뭐가 필요 없다는 거야?”

잘록한 허리가 살짝 드러나는 명품 티셔츠에 잘 빠진 청바지를 입은 여자가 권율의 옆자리에 턱 하니 앉았다.


“야! 진보라. 왜 거기 앉아. 율이 불편하게.”

원준이 대신 핀잔을 보냈다.


“그럼. 내가 네 옆에 앉아야겠냐? 율아. 나 여기 앉아도 되지?”

그녀가 말할 때마다 귀여운 앞머리가 찰랑거렸다.


“여기가 다 내 자리도 아닌데. 뭐.”

하지만 권율은 깔끔하게 일어나 원준의 옆으로 자리를 옮겼다.

그러자 보란 듯이 원준이 킥킥거렸다.


“야! 최원준. 거슬린다. 웃지 마라.”

보라는 권율의 철벽이 민망한 듯 괜히 원준을 타박하고 나섰다.


“내 입 가지고 웃지도 못하냐? 넌 우리가 여기서 밥 먹는 건 어떻게 알고 왔어?”

“우리 율이는 항상 정해진 시간에 움직이니까. 당연히 지금은 밥 먹을 시간인 줄 알았지.”

보라는 원준을 향해 혀를 날름 내밀고는 턱을 괴며 귀여운 표정을 지었다.

그러고는 권율을 쳐다보며 사르르 웃었다.

때마침 주문한 음식이 나오자 권율은 보라가 쳐다보거나 말거나 식사에 집중했다.


“율아. 물 갖다줄까?”

“아니. 밥 먹을 때 물 마시면 소화액이 묽어져서 안 돼.”

권율의 단호한 선 긋기에 원준이 ‘풉’ 하고 보라를 비웃었다.

그러자 보라의 사나운 눈빛이 원준에게로 날아갔다.


“공부는 힘들지 않아? 내가 혹시 도와줄 건 없어?”

“전혀.”

권율은 보라의 부담스러운 시선을 피해 밥 먹는 것에만 집중했다.


“같이 듣는 교양 수업 말이야. 기말 리포트, 도와줄까? 아니면 요약 노트를 줄까?”

“괜찮아. 이미 다 했어.”

“고시 준비로 바쁠 텐데 언제 다 했어? 내가 도와주려고 했는데. 아깝당.”

보라의 과도한 애교가 꼴사납다는 듯 원준이 미간을 잔뜩 찌푸렸다.


“진보라. 그만 가라. 너 때문에 속이 울렁거려서 밥이 안 넘어간다.”

원준이 구박을 하거나 말거나 보라는 꿋꿋하게 자리를 지켰다.

권율은 보라가 과도한 애교를 부려도 무표정으로 일관했다.

그에게 서연을 제외한 모든 여자는 안중에도 없었으니까.

부담스러운 점심 식사가 끝나자 권율은 바쁘게 자리를 정리했다.

오늘까지 끝내야 할 분량을 맞추려면 더 부지런히 움직여야만 했다.

권율이 도서관까지 빠른 걸음으로 걷는데도 원준과 보라는 개의치 않고 따라나섰다.


“율아. 나 과방에 있을 테니까. 공부하다 답답하면 전화해라.”

그럴 일은 없겠지만 권율은 원준의 성의를 생각해 고개를 끄덕였다.

권율이 도서관으로 들어가려고 몸을 트는 순간.

보라가 그의 팔을 덥석 붙잡았다.


“율아. 이거 받아.”

그녀가 자신의 명품 가방에서 작은 쇼핑백을 꺼냈다.

권율은 붙잡힌 팔을 슬그머니 빼고는 미동도 하지 않은 채 서 있었다.


“뭔데?”

보다 못한 원준이 대신 물었다.


“프랑스 명품 초콜릿. 공부하다가 머리 안 돌아가면 먹으라고.”

보라가 권율의 손에 쇼핑백을 강제로 쥐여 주며 말했다.


“미안한데. 나 초콜릿 싫어해.”

“당분을 섭취하면 머리가 팡팡 잘 돌아간다잖아. 받아줘라. 율아―.”

보라는 권율이 미간을 구기거나 말거나 귀여운 얼굴로 자꾸만 보챘다.

그러자 원준이 또 대신 나섰다.


“율아. 얼른 들어가 공부해. 이 진상 보라는 내가 처리할 테니까.”

원준은 권율의 손에 어정쩡하게 걸린 쇼핑백을 낚아채 그대로 도망쳤다.

그러자 다행이라는 듯 무표정한 권율이 인사도 없이 그대로 도서관으로 들어가 버렸다.

보라는 도망가는 원준과 사라져버린 권율을 번갈아 쳐다보며 꽥하고 소리쳤다.


“이 미친! 최원준!”

화를 참지 못한 보라가 그 자리에서 발을 동동 굴렀다.


“너 걸리기만 해봐. 아주.”

보라는 지나가는 학생들의 시선을 무시한 채 한참을 씩씩거렸다.

그러다 말고 무슨 좋은 생각이라도 났는지, 얼른 전화기를 꺼냈다.

그녀는 ‘큼큼’ 목소리를 가다듬으며 통화버튼을 눌렀다.


“할아버지. 보라예요.”

[오냐 오냐.]

“오늘은 율이 점심 먹는데 같이 있어 줬어요.”

[그랬니? 잘했다. 오늘, 우리 율이 안색은 괜찮아 보였고?]

보라의 통화 상대는 율이의 할아버지인 석구였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