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8. 한 사람을 위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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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8. 한 사람을 위해
2022.07.17.
“안색은 좋아 보였어요. 그리고 오늘 율이는 점심으로 갈비찜 정식을 먹었고요.”
[밥은 다 먹었고?]
“네. 깨끗하게 비웠고, 바로 도서관으로 갔어요. 물론 제가 도서관까지 데려다줬고요.”
[오냐. 우리 보라가 최고구나.]
보라는 권율에게 주려고 준비한 명품 간식을 원준이 뺏어갔다는 하소연을 늘어놓았다.
석구는 연신 혀를 차며 보라의 험담을 한참 동안 들어줬다.
두 사람의 통화는 무려 30분이나 이어졌고, 주제는 한결같이 권율에 대한 것이었다.
“할아버지. 이따가 우리 기사 아저씨가 과일 도시락 가져온다고 했거든요.”
보라는 자신이 권율의 뒷바라지를 한다고 착각하고 있었다.
사실 그녀가 놓고 간 것은 하나도 빠짐없이 원준이 수거해갔다.
원준은 권율에게 방해가 되지 않도록 자취하는 친구들에게 그것들을 골고루 나눠줬다.
그런 줄도 모르고, 보라는 권율에게 도움이 된다는 생각에 항상 신이 나 있었다.
“율이 몸은 제가 챙길게요. 이따가 공부에 방해 안 되게 살짝 놓고 오려고요.”
그러자 전화기 너머로 석구의 흡족한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우리 보라가 내조를 다 하는구나. 이 할아버지는 너만 믿는다.]
기특하다는 칭찬이 끝도 없이 이어졌다.
“걱정하지 마세요. 어떻게든 율이가 시험에 붙어야 저한테도 좋으니까요.”
보라는 가족들에게 권율이 시험만 합격하면 더 진지하게 만나고 싶다는 뜻을 여러 번 비췄다.
그녀의 집안에서도 워낙 천재로 소문난 권율의 존재를 매우 반겼다.
게다가 사업하는 집안이다 보니 현금 부자인 석구의 존재도 몹시 달가워했다.
보라가 석구와 수시로 만나자 그녀의 집안에서도 꽤 관심을 보였다.
석구는 보라의 친가인 JS 화재보험과 외가인 대성건설 회장과도 이미 식사 자리를 갖은 바 있었다.
물론 이 모든 것은 당사자인 권율이 모르게 진행됐다.
중요한 시험을 앞둔 그를 굳이 신경 쓰게 할 필요는 없었으니까.
“또 전화드릴게요. 할아버지.”
[오냐. 아, 참. 백화점 갔다가 네가 갖고 싶다는 가방 하나 사뒀다.]
“진짜요?”
[이번 주에 사무실로 나오거라.]
“감사합니다. 할아버지.”
석구는 재벌 집 딸인 보라에게 수시로 성의 표시를 했다.
가진 돈이 많고 적고는 상관없었다.
누구나 고가의 선물에는 혹하는 법이니까.
그게 현금 부자 석구가 사람을 부리는 방법이었다.
돈으로 사람을 좌지우지하고, 단단히 옭아매는 것이 석구의 오래된 철칙이었다.
“금요일에 봬요. 할아버지.”
두 사람의 통화는 훈훈한 분위기로 곧 마무리됐다.
새로운 가방을 선물 받게 된 보라는 원준 때문에 불쾌했던 감정이 싹 사라지는 기분이었다.
사실 보라와 석구와의 관계는 한마디로 정의하기 어려웠다.
다만 한 가지 확실한 건 서로가 서로의 조력자라는 것이었다.
보라는 일등 손자 권율을 만나지 못해 애달픈 석구를 위해 기꺼이 정보를 제공했다.
물론 특별한 내용은 하나도 없었다.
권율이 무슨 수업을 듣고, 주변 친구와의 관계가 어떤지, 공부를 잘 하고 있는지가 다였다.
그러나 석구는 그것마저도 소중했다.
현재 권율을 통 만나지 못한 데다 공부에 방해가 될까 싶어 연락도 마음껏 할 수 없었다.
그렇다고 집에서 잠만 자고 나가는 권율의 세세한 소식을 며느리 연희에게 듣기도 어려웠다.
요즘 석구의 유일한 소식통은 오로지 보라 하나뿐이었다.
그녀는 권율이 공부하는 열람실을 수시로 기웃거리며 그의 생활을 낱낱이 보고했다.
권율이 전혀 눈치채지 못하도록 살짝 왔다 갔다 하며 말이다.
그럴 때마다 석구는 보라의 살가운 성격과 화려한 배경이 더욱 마음에 들었다.
아무래도 친가, 외가 할 것 없이 모두 재벌인 데다 한국대 학생이라는 점이 크게 작용했다.
보라 역시도 석구와의 관계가 필요했다.
석구가 권씨 집안의 실세다 보니 그에게 잘 보이는 건 보라에게도 큰 이득이었다.
어찌 됐건 어린 시절부터 좋아하던 권율과의 완벽한 결혼을 위해서는 든든한 지원군이 있어야 하니까.
서로가 ‘윈윈’인 관계.
권율을 손안에 쥐고 싶은 사람들의 지극히 속 보이는 비즈니스라고 해도 무방했다.
보라는 도서관을 쳐다보며 입꼬리를 한껏 들어 올렸다.
“최종 합격하면, 율이랑 약혼이라도 시켜달라고 해야지.”
이대로라면 권율의 합격이 그리 어려운 일은 아닌 것 같았다.
권율은 무슨 일이든 한다면 꼭 해내는 사람이었으니까.
보라는 자신의 핑크빛 미래를 상상하며 권율과의 역사를 떠올렸다.
아무것도 모르던 어린 시절부터 보라에게는 권율뿐이었다.
그녀의 인생을 통틀어 다른 남자를 좋아해 본 적이 단 한 번도 없었다.
다들 한 번쯤 좋아한다는 인기 아이돌조차도 권율에게는 게임이 안 됐다.
보라에게 남자는 오로지 권율 하나였으니까.
도서관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보라의 눈동자가 순간 촉촉해졌다.
권율에게 처음 설레었던 그 순간이 떠올라서 말이다.
아직도 손에 잡힐 듯 생생한 그 기억.
그날은 공교롭게도 두 사람만이 엄마를 기다리며 영재원에 남아 있었다.
보라는 도서관에서 얌전히 앉아 있는 권율을 자꾸만 힐끔거렸다.
그때 왜 그랬었는지, 이유는 알 수 없었다.
나이에 걸맞지 않게 두꺼운 영어원서를 척척 읽어 내려가는 권율의 모습이 멋있었을지도…….
아니면 그의 등 뒤로 나타난 햇살이 영화의 한 장면 같아 보여서였는지도 모를 일이었다.
어린 시절, 책에 빠져 있던 권율의 그 초롱초롱하던 눈빛이 아직 보라의 눈에 선했다.
권율은 또래에 비해 성숙했고, 절대 언행이 가볍지 않았다.
그 시절 아이들의 유치한 농담이나 장난은커녕, 언제나 진지했고 예의가 발랐다.
거기다 수학경시대회를 망쳤을 때도 유일하게 괜찮다고 말해준 사람이 권율이었다.
누구도 뺏어갈 수 없는 소중한 추억.
보라는 자신과 권율의 사이가 너무나 특별하다고 생각했다.
“율아. 이따 또 보러 갈게. 수고해.”
아쉬운 듯 그녀는 여러 번 뒤를 돌아봤다.
그렇게 보라의 마음이 한없이 깊어지고 있었다.
***
오후의 햇살이 길게 드리워진 사무실.
미니 점프 슈트 차림의 서연이 서 있었다.
그녀는 오랜만에 손수 패턴을 제작하는 중이었다.
커다란 테이블에 본을 그려 신중하게 가위질을 하고 있었다.
똑똑.
고개를 들어 시간을 확인한 서연이 가위를 내려놨다.
“네. 들어오세요.”
김 실장과 최 비서가 쇼핑백을 양손에 들고 나란히 들어왔다.
여니블랙 행사장에서 나눠줄 선물 샘플들이었다.
“이번에 정하면 제작까지 얼마나 걸릴까요?”
“2주 안에 가능하다고 합니다.”
소파 테이블 위로 다양한 디자인의 티셔츠와 패션 소품들이 종류별로 깔렸다.
아무래도 여니블랙의 주요 타겟층이 20대이다 보니, 샘플 제작에도 통통 튀는 감각이 요구됐다.
“이거 괜찮네요.”
서연은 등 뒤에 커다란 프린트가 들어간 티셔츠를 골랐다.
“인턴들 그림 중에 제일 느낌 있는 걸로 제작해 봤습니다.”
서연이 빙그레 웃으며 말했다.
“이거, 박시아 인턴 작품이죠?”
“어떻게 아셨어요?”
“그림만 봐도 알죠. 지문처럼 각자 다르잖아요.”
서연은 권율의 동창이자 생일까지 비슷하다는 시아를 떠올렸다.
그러다 흠칫하고 놀랐다.
단순히 시아를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연관 검색어처럼 권율이 떠올라서.
홈쇼핑 회식에서도 현우를 보며 권율이 보고 싶었는데.
이제는 시도 때도 없이 그가 생각났다.
서연은 시아의 그림이 박힌 티셔츠를 만지작거리며 말했다.
“일단 티셔츠 하나는 박시아 인턴 걸로 하죠.”
그러고는 만화 캐릭터 같은 디자인 양말과 스카프, 거기다 액세서리들을 몇 가지 더 골랐다.
“비치 타월 프린트는요?”
진지한 서연의 얼굴에 최 비서가 얼른 태블릿을 건네며 말했다.
“과감한 디자인으로 추려봤습니다.”
서연의 화려한 손톱이 화면에서 미끄러질 때마다 톡톡 소리가 났다.
한참을 고민하던 서연은 제일 마음에 드는 2가지를 정한 후 두 사람에게 의견을 물었다.
서로의 의견이 결정되자 최 비서가 부지런히 품번을 적기 시작했다.
“행사 규모가 커진 만큼 실수 없이 진행돼야 합니다. 당일 안내요원들 넉넉하게 뽑으세요.”
“네. 대표님.”
서연은 일에 있어서 항상 빈틈이 없었다.
1시간 넘게 이어진 회의가 어느 정도 마무리되자 최 비서가 시원한 간식을 내왔다.
그러자 잠깐의 수다가 이어졌다.
“대표님. 저 패턴…… 남성복이죠?”
눈썰미 좋은 김 실장이 단번에 물었다.
“아. 누구한테 좀 선물하려고요.”
“혹시…… 그때 그분이요?”
김 실장의 물음에 서연은 굳이 부정하지 않았다.
“네. 선물하고 싶어서요.”
“셔츠 만드시는 거예요?”
순간 서연의 얼굴에 행복한 미소가 그려졌다.
“네. 셔츠가 아주 기가 막히게 잘 어울리는 사람이거든요.”
숨김없이 털어놓는 서연의 말에 김 실장과 최 비서가 의미심장한 눈빛을 주고받았다.
“누군지 몰라도 좋겠네요. 대표님이 직접 만든 옷도 입어보고요.”
어렴풋이 알고 있는 남자를 부러워하며 김 실장이 말했다.
“그런데 남자 옷은 하도 오랜만이라 자신이 없어요. 일단 바느질을 봐야 알겠어요.”
사실 권율에게 깜짝 선물로 주고 싶어 눈대중만으로 셔츠를 만들 생각이었다.
살짝 큰 건 괜찮았지만, 안 그래도 남다른 신체 구조를 가진 권율에게 작으면 어쩌나 솔직히 걱정됐다.
“다 만들면 꼭 보여주세요. 어머. 근데 소재가 너무 고급스러운데요. 어디서 사셨어요?”
일전에 권율과 원단 시장에 갔을 때 샀던 값비싼 수입 천이었다.
거의 고가의 명품라인에서만 쓰는 원단이라 소량을 샀음에도 가격이 꽤 나갔었다.
“저번에 가을 신상품 원단 사면서 재미 삼아 사봤어요.”
재미는 무슨, 전혀 아니었다.
권율에게 어울릴 것 같아 처음부터 눈에 들어왔었고, 그래서 일부러 색깔별로 소량 구매했었다.
물론 그사이 권율과 헤어질 뻔해 사무실 한구석에 방치하고 있었지만 말이다.
애틋한 재회 이후, 서연은 권율에게 하루라도 빨리 특별한 선물을 하고 싶었다.
그래서 생각보다 일찍 작업에 들어갔다.
자신이 만든 세상에 하나뿐인 옷.
그걸 입은 권율을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서연의 가슴이 미치도록 두근거렸다.
“아. 맞다! 김 실장님. 부탁 좀 드릴게요.”
안 그래도 김 실장을 부르려던 참이었다.
“20수 반소매 티셔츠로요. 사이즈는 2XL.”
서연은 자리에서 일어나 김 실장에게 바로 이메일을 보냈다.
“라운드 넥으로 10개 정도 제작하고 싶은데. 색깔은 블랙이랑 화이트요.”
앉은 자리에서 바로 디자인을 확인한 김 실장이 서연의 눈치를 살피며 조심히 물었다.
“이것도 선물하시게요?”
너무 소량이라 판매용은 아닌 것 같았다.
“아. 네. 편하게 입어야 할 일이 있어서요.”
서연은 7월에 시험을 보러 가는 권율을 위해 편하게 입을 수 있는 반소매 티셔츠를 선물할 생각이었다.
이렇게 작은 거라도 해주고 싶어서.
“H가 작고 심플해서 좋네요. 명품 브랜드라고 해도 믿겠어요.”
깔끔하지만 고급스러운 디자인에 김 실장은 단발적으로라도 남성 캐주얼을 시도해보자고 말했다.
서연은 김 실장의 샘솟는 아이디어를 칭찬하며 빙그레 웃었다.
그때였다.
서연의 핸드폰이 울린 것이.
발신자를 확인한 서연이 깍듯하게 전화를 받았다.
“네. 최 대표님.”
[오랜만이네요. 한 대표님.]
중저음의 매력적인 목소리가 말했다.
“무슨 일 있으세요?”
갑작스러운 민혁의 전화에 무슨 일이 생겼나 싶었다.
[예전에 아껴둔 커피, 언제 마실 수 있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