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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9. 부담 백배 (49/130)


49. 부담 백배
2022.07.21.



 
커피?

오랜만에 전화해서 웬 커피타령인가 싶었다.

하지만 서연은 단번에 거절하진 못했다.

아무래도 민혁이 홈쇼핑이라는 주요 거래처 대표이다 보니, 그가 말하는 커피가 예사롭게 들리지 않았다.

혹시…… 저번에 얘기한 사업 때문에 그러나?

아니면, 홈쇼핑에 정말 무슨 일이라도?

서연의 머릿속이 빠르게 돌아갔다.

잠시 고민하던 서연이 화사한 목소리로 말했다.


“당연히, 커피 사드려야죠.”

‘커피 싸가지께’라는 말을 삼키며 서연이 철저히 비즈니스 모드로 응대했다.


“편하신 시간을 알려주시면 최대한 맞추겠습니다.”

[오늘도 가능합니까?]

갑자기?

민혁은 여유도 주지 않고 훅 치고 들어왔다.

당황한 것도 잠시.


“잠시만요.”

서연은 최 비서를 쳐다보며, 오후에 중요한 일정이 있는지 물었다.

홍보팀 회의만 잡혀 있자, 서연이 고개를 끄덕였다.


“회의가 하나 있기는 한데. 몇 시에 뵐 수 있을까요?”

[아. 그럼. 회의 끝나고 뵙죠. 편안한 마음으로 커피 겸 저녁으로요.]

커피가 저녁으로 이어지자 귀찮다 못해 부담스러웠다.

마지못해 나가긴 하겠지만, 그래도 그가 만나자는 이유는 알아야만 했다.


“혹시…… 제가 긴장하고 있어야 할 만큼 중요한 말씀이실까요?”

중요한 얘기가 아니면 저녁까지는 먹기 싫다는 말을 대충 빙빙 돌렸다.


[편하게 나오셔도 되고, 긴히 할 말은 있습니다.]

그렇다면 꼭 나가야만 했다.

아무래도 그의 목소리가 밝은 것이 일전에 말한 사업을 긍정적으로 검토한 게 틀림없었다.

서연의 기대감이 순식간에 넘쳐흘렀다.


“시간과 장소를 알려주시면 나가겠습니다.”

[차를 보내죠.]

운전기사까지?

과하다는 생각에 서연이 되물었다.


“차는 왜…….”

[좋아하는 빈티지 와인이 들어왔다고 해서요. 저녁에 가볍게 괜찮으실까요?]

식사 중 와인 정도야 딱딱한 분위기를 부드럽게 해준다지만, 그래도 영 부담스러웠다.


“아. 그럼 커피 겸 저녁은, 제가 대접하겠습니다.”

서연은 그에게 얻어먹는 것보다는 오히려 사는 편이 낫다고 생각했다.


[누가 사면 어떻습니까. 이따 뵙죠.]

눈치 빠른 민혁은 서연이 저녁을 사겠다고 못을 박기 전에 서둘러 전화를 끊었다.

서연은 순식간에 끊어진 핸드폰을 물끄러미 내려다봤다.


“나 참. 뭐 이렇게 자기 마음대로야.”

이러니까 사람 좋은 현우가 싫어한다는 말을 덧붙이며 중얼거렸다.

***

화려한 외관을 자랑하는 5성급 호텔.

최고급 외제차가 미끄러지듯 멈춰 섰다.

말끔한 차림의 도어 직원들이 절도 있는 자세로 다가와 차 문을 열어주었다.


“감사합니다.”

독특한 디자인의 화이트 셔츠와 베이지색 정장 슬랙스 차림의 서연이 차에서 내렸다.

서연은 민혁을 만나러 가면서 캐주얼한 점프 슈트를 입고 갈 수 없어 일부러 옷을 갈아입었다.

로비에 들어선 서연은 예술작품으로 가득한 넓은 공간을 둘러보며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호텔 참 좋아해.”

처음 식사 자리에서도 조리장의 특선 요리를 대접하더니, 이번에도 또 호텔이었다.

게다가 호텔에는 무슨 행사라도 크게 열렸는지, 로비가 사람들로 북적였다.


“늦은 건 아니겠지?”

그러다 어차피 민혁이 보내준 차를 타고 왔으니 늦어도 이해하겠지 싶었다.

그래서인지, 서연은 더 느긋하게 약속 장소로 향했다.

서울 시내가 파노라마처럼 보이는 레스토랑.

서연이 민혁의 이름을 대자 친절한 직원이 깍듯한 자세로 말했다.


“기다리고 계십니다.”

먹색과 주황색이 물들어가는 배경 한가운데 민혁이 그림처럼 앉아 있었다.


“최 대표님.”

서연의 목소리가 들리자 민혁이 고개를 돌려 씩하고 웃었다.


 


“어서 오세요. 한서연 대표님.”

뭘 이름까지 붙여서 부르는지.

서연은 속으로 ‘부담스러워’를 연발하며 자리에 앉았다.


“갑자기 불러내서 속으로 욕했습니까?”

민혁이 매력적인 웃음을 흘리며 물었다.


“해도 되는 거였어요?”

못해서 아깝다는 듯 서연이 정말 아쉬워하자 민혁이 시원하게 웃으며 말했다.


“듣고 싶네요. 서연 씨가 뭐라고 할지.”

서연 씨?

공적으로 만난 사이, 서연은 그가 갑자기 이름을 부르자 적잖이 거슬렸다.

그녀는 일부러 경고하듯 진담 반, 농담 반으로 말했다.


“제가 제대로 입을 열면 최 대표님이 울면서 나가실지도 몰라요. 친구 오빠한테 전수 받은 욕이 엄청나거든요.”

금쪽같은 외동딸이었지만, 곱게만 자라지는 않았다.

어린 시절 오빠가 있는 호진이랑 하도 붙어 다니다 보니 그 집에서 거의 삼 남매처럼 생활했던 적도 있었다.

서연은 기선제압과 말싸움에서 지지 않는 방법을 그때 다 배웠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그래서일까.

어디서든 할 말이 있으면 참지 않는 편이었다.

지금 거슬리는 민혁의 행동에 따끔한 한 마디가 아니라 열 마디도 해줄 수 있었다.

하지만 말을 아낄 수밖에 없었다.

그녀의 양어깨에는 회사와 직원들이 걸려 있었으니까.


“항상 느끼는 거지만, 한 대표님은 참 재미있습니다.”

또, 또.

서연은 민혁이 친근하게 이름을 또 부르면 뭐라고 해주려고 벼르고 있었다.

그런데 눈치 빠른 그가 슬쩍 뒤로 물러났다.

민혁은 줄다리기라도 하는 듯 아슬아슬하게 줄을 당겼다가 놓았다가를 반복했다.


“칭찬으로 받아들이겠습니다.”

서연은 찝찝한 기분을 삼키며 어쩔 수 없이 웃었다.

어색했던 분위기도 잠시.

그래도 두 사람의 저녁은 꽤 순조로웠다.

입에서 살살 녹는 코스요리와 오감을 자극하는 빈티지 와인.

거기다 노을이 사라진 자리에는 별을 흩뿌려 놓은 듯 서울 시내 야경이 점점 아름답게 빛났다.

대화도 그리 나쁘지 않았다.

부담스럽게 굴던 민혁은 어디로 가고, 그는 서연이 예상했던 대로 새로운 사업 이야기를 시작했다.

그러자 서연도 적극적으로 의견을 제시했다.


“실무진들의 의견을 들어봐야겠지만, 파일럿 방송을 해보면 어떨까 싶습니다.”

기존의 판매방식과는 다르게 엔터테인먼트 형식을 더 첨가하자는 의견이었다.


“나쁘지는 않은데. 쇼 콘셉트에 따라 디자인이 좌지우지될 것 같네요.”

두 사람은 한참 동안 일 얘기에 집중했다.

구체적인 방향을 정하는 사이, 이미 식사가 끝나고 디저트가 나왔다.

서연은 작은 볼에 나온 크림 브륄레 표면을 티스푼으로 탁탁 두드려 깼다.


“흐음! 맛있어.”

원래 달달한 간식을 좋아하기도 하지만, 요즘 마음이 편해져서 그런지 입맛이 더 돌았다.

서연은 쌉쌀한 와인 한 모금과 달콤하고 부드러운 디저트를 먹으며 생각했다.


‘나중에 율이 씨 시험 끝나면 같이 와야겠다.’

이제는 좋은 곳이나 맛있는 음식을 먹으면 항상 그가 떠올랐다.

그녀의 입안은 달콤했고, 머릿속은 행복했다.

서연은 권율과의 데이트를 상상하며 자기도 모르게 배시시 웃었다.


“그렇게 맛있습니까?”

“네. 여기 아주 괜찮네요.”

서연은 자신의 데이트 리스트가 추가되자 잔뜩 신이 난 나머지 활짝 웃었다.

그런 서연의 모습을 보는 민혁의 눈동자가 잠시 커졌다가 작아졌다.


“다음에 또 사드려야겠네요.”

만족스러운 듯 민혁의 눈매가 느슨하게 휘었다.


“이런 거 10개쯤 사 먹을 돈은 저도 열심히 벌고 있습니다.”

서연은 그의 호의를 살살 돌려 사양했다.


“그런 의미로 오늘 저녁은 제가 사겠습니다.”

그러자 민혁이 또 웃었다.

특별히 재미있는 말도 아닌데 말이다.

서연은 그가 자꾸만 웃자 왜 저러나 싶어 몹시도 신경 쓰였다.


“오늘의 옵션은 2가지입니다.”

“갑자기, 옵션이요?”

“오늘 저녁은 일로 만났으니까 제가 사고, 집까지 모셔다드리는 게 1번입니다.”

썩 마음에 드는 옵션은 아니었지만, 일단 더 들어보기로 했다.


“한 대표님의 의견을 존중해 저녁을 사시면, 제가 댁까지 모셔다드리겠습니다. 그리고 다음 약속을 바로 잡겠습니다. 이게 2번입니다.”

2번 옵션도 영 내키지 않았다.


“3번은 없을까요?”

서연이 손가락을 3개 펴 보이며 말했다.


“부채 의식을 느낄 필요 없이. 각자 내고, 집에도 알아서 가기. 어때요?”

민혁은 처음 보는 캐릭터라는 듯 눈을 가느다랗게 좁히며 서연을 쳐다봤다.

그동안 그가 만났던 여자들은 자신의 호의를 매우 반겼으니까.

그런데 서연은 호의를 반기기는커녕 아예 받아주지도 않았다.

언제나 자로 잰 듯 정확하게 계산하고, 어떠한 여지도 주지 않고 물러났다.

민혁은 잠시 고민했다.

여기서 자신의 의견을 어떻게든 밀어붙일 것인가. 아니면 서연의 의견을 존중해 줄 것인가를.


“여기서 굳이 남자의 체면을 꺼내고 싶지 않지만, 오늘은 1번으로 하시죠.”

그래야 마음이 편하다는 민혁의 간곡한 부탁에 서연은 그를 빤히 쳐다봤다.

너무 뚫어지게 쳐다보자 웬만해선 민망해하지 않는 민혁의 얼굴이 화끈거렸다.


“저도 여기서 빚을 운운하는 건 우습지만, 저번에 신세 진 걸 갚은 거로 하겠습니다.”

“빚이요?”

“저번에 병원에 같이 가주신 거요. 이걸로 마음의 빚, 청산하겠다고요.”

그는 진심으로 걱정했던 자신의 마음을 빚이라고 표현하는 서연의 말이 서운했다.

하지만 그렇다고 자신의 행동이 사라지는 건 아니었으니까.

민혁은 크게 개의치 않기로 했다.

그가 고개를 끄덕이자, 서연이 남은 와인을 깨끗하게 비워냈다.


“어서 비우고 일어나시죠. 비싼 빈티지 와인 남기지 말고요.”

거침없는 서연의 말에 민혁도 자신의 잔을 비우고 일어났다.

계산을 마친 후 두 사람은 로비로 내려왔다.

안 그래도 붐비던 로비는 무슨 행사가 끝났는지 아까보다 더 혼잡해 보였다.


“오늘 여기서 행사가 있었나 봐요.”

“그러게요. 사람들이 많네요.”

서연은 삼삼오오 대화를 나누고 있는 중년의 무리를 피하며 걸었다.

그때 커다란 꽃다발을 안은 여성들이 수다에 빠져 서연을 툭 치고 지나갔다.

무방비 상태로 부딪혀서인지, 서연의 무릎이 꺾이면서 미끄러운 대리석 바닥에 철퍼덕 넘어지기 직전이었다.


“어!”

어떻게든 넘어지지 않으려 발가락에 힘을 주고 양팔을 벌리자 민혁이 얼른 그녀의 팔을 붙잡았다.


“괜찮아요?”

서연은 넘어지지 않았다는 안도감에 허리를 펴며 괜찮다는 신호를 보냈다.


“다음부터는 운동화를 신고 다녀야겠어요. 잡아주셔서 감사합니다.”

서연이 바지를 툭툭 털며 상체를 일으키는 순간, 민혁의 눈동자가 커다래졌다.


“한 대표님. 앞만 보고 가세요. 어서요.”

그가 다급한 목소리로 말했다.


“여기서 걸리면 큰일 납니다.”

누구한테 큰일이 난다는 건지.


“네? 어딜요?”

당황한 서연이 주위를 두리번거리자, 민혁은 그녀가 뒤를 돌아보지 못하도록 앞으로 밀었다.


“빨리 벗어납시다.”

그는 마치 쫓기는 사람처럼 불안해했다.


“아, 아니. 갑자기 왜요?”

민혁이 하도 밀어대는 통에 서연은 졸지에 도망가는 사람처럼 빠르게 앞서나갔다.

그러나 얼마 가지 않아 누군가 서연의 팔을 덥석 붙잡았다.

갑작스러운 접촉에 흠칫 놀란 서연이 재빨리 뒤를 돌아봤다.


“누, 누구……세요?”

한눈에 봐도 너무도 우아한 차림의 여성이 서연을 보며 씽긋 웃었다.

그러자 민혁이 손으로 얼굴을 가리며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최 대표님. 아시는 분이세요?”

“그럼요. 아주 잘 알죠.”

당연히 안다는 듯 우아한 차림의 여성이 민혁 대신 대답했다.

젊은 여자였다면 전 여친인가 싶었겠지만, 민혁에게 아는 척하는 여자는 중년의 여성이었다.

그렇다고 두 사람이 남매라고 하기엔 닮은 구석이 하나도 없었다.

여전히 낯선 여성에게 팔이 잡힌 서연이 두 사람을 번갈아 쳐다봤다.


“만나서 반가워요.”

그 여성이 잡았던 손을 스르륵 내리며 말했다.


“난 최민혁 대표의 현 형수님이자 전 선생님인 김윤선이에요.”

전혀 예상치 못한 소개에 안 그래도 커다란 서연의 눈동자가 더 동그래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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