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1. 잘못 짚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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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1. 잘못 짚었다.
2022.07.28.
서연은 권율의 진지한 부탁을 뭐든 들어줄 생각이었다.
“말해봐요. 들어줄게요.”
[영상통화 하고 싶어요.]
영상통화라니. 물론 서연도 핸드폰에 그런 기능이 있다는 건 잘 알고 있었다.
다만 그런 걸 사용해보겠다고 시도해본 적도, 실제로 해본 적도 없었다.
굳이 이유를 대자면 2년 넘게 연애를 쉬어서지만, 결정적인 건 지금까지의 연애에서는 영상통화가 필요 없었다.
보고 싶으면 기사 딸린 차를 타고 와서 잠깐이라도 얼굴을 보며 얘기하는 게 더 간단했으니까.
하지만 권율이 하고 싶다면 마다할 이유가 없었다.
그리고 더 솔직하게는 서연 역시도 권율이 보고 싶었다.
“어떻게 하는 거예요? 한 번도 안 해봐서요.”
서연이 멋쩍게 웃자, 권율이 전화를 걸면 다시 받아달라고 말했다.
“알았어요. 기다릴게요.”
전화가 끊어지자, 서연은 재빨리 옷매무새를 매만졌다.
그러고는 SNS에 올릴 사진을 찍을 때처럼 제일 예뻐 보이는 각도로 자세를 잡았다.
곧 얼마 지나지 않아 전화가 울렸다.
서연은 마지막으로 머리를 정리하고는 얼른 통화버튼을 눌렀다.
[서연 씨!]
흐릿한 가로등 사이로 권율이 해맑게 웃고 있었다.
평소와 달리 머리에 아무것도 바르지 않아 앞머리가 이마를 덮은 모습이 더 순해 보였다.
“율이 씨. 밖이에요?”
[도서관 앞이요. 계단에서 통화하면 다른 사람한테 방해될까 봐요.]
그는 여전히 배려가 넘쳤다.
“공부하기 힘들지 않아요?”
[아니요. 아주 재밌게 하고 있어요.]
고시 공부가 재미있다는 그의 말을 믿을 수 없었지만, 얼굴이 나빠 보이지 않아 안심했다.
“이렇게 얼굴 보니까 좋다. 꼭 가까이 있는 거 같아요.”
서연은 처음 하는 영상통화가 꽤 마음에 들었다.
그러다 자기도 모르게 웃고 있는 권율의 얼굴을 쓰다듬다가 화면을 건드려 그가 잠깐 사라지기도 했다.
[하루에 5분씩, 이렇게 얼굴 볼까요?]
“그래요. 공부에 방해되지 않게 5분만 이렇게 만나요.”
두 사람은 빠르게 지나가는 시간을 안타까워하며 하고 싶은 말과 묻고 싶은 말을 쏟아냈다.
그럴수록 아쉬움과 애틋함이 점점 커져 쏜살같이 지나가는 시간을 붙잡고만 싶었다.
“율이 씨. 시험 보기 전에 언제 만나면 좋을지 알려줘요. 딱 10분만요.”
아무래도 지금 준비하고 있는 선물을 제때 완성하려면 만날 날을 알아야만 했다.
[만나면 10분 동안 안고 있어도…….]
“!”
권율의 뒤로 귀엽게 생긴 남학생이 기웃거리고 있었다.
서연과 눈이 마주치자 서로가 서로를 보며 당황했다.
뭔가 이상하다는 걸 눈치챈 권율이 뒤를 돌아보는 동시에 남학생이 카메라로 쓱 다가왔다.
[안녕하세요. 저는 권율의 제일 친한 친구 원…… 윽. 왜 인사 정도는 할 수 있잖아.]
권율이 원준을 황급히 막아섰다.
[우리 율이 엄청 착해요. 그건 제가 보장…… 흡. 율아!]
원준은 어떻게든 권율을 어필해주고 싶어 그의 손길을 피해 서연에게 자꾸 말을 걸었다.
[근데 연예인이세요? 우리 학교 여신들보다 훨씬 예쁘…… 윽.]
하지만 결국 권율에게 붙잡혀 더 이상은 말을 할 수 없었다.
[미안해요. 친구가 절 너무 걱정해서 그런 거예요.]
“율이 씨, 괜찮아요. 친구 빨리 풀어줘요.”
서연은 권율의 커다란 품에서 버둥거리는 원준을 가리키며 말했다.
그러자 그가 마지못해 원준을 풀어줬다.
자유의 몸이 된 원준은 짧은 시간 동안 많은 말들을 쏟아냈다.
어찌나 성격이 활발하고 다정한지, 서연은 원준의 말에 웃느라 정신이 없었다.
[제가 나름 권율 전문가거든요. 궁금한 거 있으면 언제든지 물어봐 주세요.]
원준의 말에 권율은 안절부절못했다.
“그래요. 율이 씨 시험 끝나면 언제 같이 만나요.”
[진짜요?]
“네. 그런데 이제 율이 씨랑 작별 인사하고 싶은데. 통화한 지 10분이 지나서요.”
자리를 비켜달라는 서연의 뜻을 찰떡같이 알아들은 원준이 꾸벅 인사를 하고는 화면에서 물러났다.
그 모습이 귀여워 서연이 빙그레 웃었다.
[서연 씨. 미안해요.]
“아니에요. 나는 율이 씨 친구 봐서 너무 좋았어요. 우리가 더 가까워진 것 같잖아요.”
서연의 그 말에 권율의 눈매가 시원하게 휘었다.
[너무 보고 싶지만, 내일 통화할 때까지 참아볼게요.]
아직 원준이 주위에 있는지 권율의 목소리가 귓속말하듯 작아졌다.
“나도 잘 참아볼게요. 집에 조심해서 가요.”
[잘 자요. 우리 꿈속에서 또 만나요.]
애틋한 권율의 목소리 사이로 원준의 격한 인사가 멀리서 들려왔다.
서연은 그가 눈앞에 있는 것처럼 카메라에 대고 손을 흔들며 전화를 끊었다.
그리고 까맣게 변한 액정을 바라보다가 소리 없이 웃었다.
처음 하는 영상통화, 거기다 그의 친구까지 얼떨결에 만나다니.
그동안 생각해보지 않았던 그의 진짜 모습을 알게 된 것 같아 기분이 묘했다.
뭐랄까.
서른 넘은 형들과 있을 때의 조심스러웠던 모습과는 달리 더 자연스럽다고나 할까.
그러다 그의 친구의 앳된 얼굴과 통통 튀는 말투가 떠올랐다.
만약 권율이 제 또래와 같았다면 어땠을까. 그럼 아마 사귀지 않았을 것이다. 그런 면에서 그가 남달리 성숙한 건 참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그가 제 나이처럼 굴었다면 그것도 매력적일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뭔들 안 멋있겠어.”
지금 서연은 권율 한정 만사 오케이 모드가 작동 중이어서 그런지, 그에게 한없이 관대했다.
***
남산타워가 저 멀리 보이는 정원.
커다란 배롱나무 위에 매달아 놓은 둥지 먹이통에는 이름 모를 새들이 쉬고 있었다.
서연은 각종 조각상과 어울리는 예술적인 정원을 감상하느라 정신이 없었다.
비싼 땅에 이 정도 크기의 정원과 건물이라니.
비영리 재단의 남다른 스케일에 DN 그룹의 위엄을 실감하는 중이었다.
서연이 DN 그룹의 안주인인 윤선의 연락을 받은 것은 그녀를 만난 다음 날이었다.
티타임을 갖자는 말이 인사치레가 아니었는지, 비서를 통해 만날 약속이 곧바로 잡혔다.
매우 부담스러워하던 민혁이 신경 쓰였지만, 그렇다고 좋은 인맥을 만들 기회를 놓치고 싶진 않았다.
서연은 그림 같은 정원에 앉아 윤선을 기다리며 자꾸만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인제 보니 하니블랙은 구멍가게였네.’
나름 잘 나가는 회사 대표라고 자부했는데 DN 그룹과 비교하자 한없이 작아졌다.
“후우. 갈 길이 멀다.”
서연은 자기도 모르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다 말고 어느 회사든 구멍가게 시절이 있었겠지 싶어, 움츠러든 어깨를 일부러 폈다.
“나라고 못 할 게 뭐야.”
서연은 우두커니 앉아 한껏 기죽었다가, 당찬 다짐을 했다가 혼자서 모노드라마를 찍고 있었다.
그때였다.
“한 대표님이 못하는 게 있어요?”
우아한 정장 차림의 윤선이 화사한 미소를 지으며 다가왔다.
“이사장님. 초대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자리에서 벌떡 일어난 서연이 허리를 숙여 그녀에게 인사했다.
“아휴. 별말씀을요. 바쁜 사람을 오라 가라 해서 미안해요.”
“아닙니다. 한남동에 이런 멋진 곳이 있는지 몰랐습니다.”
두 사람은 화기애애한 분위기로 마주 앉았다.
“아까 하던 얘기는 뭐예요?”
서연은 잠시 머뭇거렸다.
그러다 부끄러운 것도 아니다 싶어 방금 느꼈던 감정을 솔직하게 털어놓았다.
서연의 이야기를 가만히 듣고 있던 윤선이 빙그레 웃으며 말했다.
“내 눈이 정확하네요.”
무슨 얘기인가 싶어 서연의 눈동자가 커다랗게 빛났다.
“난 태생적으로 재벌가 사람은 아니에요. 남의 말 하기 좋아하는 사람들은 나보고 시집을 엄청나게 잘 갔다고들 하죠.”
그녀는 아무렇지 않게 자신의 이야기를 툭 꺼냈다.
유복한 집안에서 자라긴 했지만, 그렇다고 해서 재벌에 견줄 정도는 아니었다고 말했다.
“그래서 나는 자수성가 타입을 좋아해요. 든든한 배경 없이도 스스로 성공한 사람이요.”
그런 면에서 서연의 능력을 높게 산다는 말을 덧붙였다.
“좋게 봐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런데 오늘 와서 보니까 가야 할 길이 한참 먼데요.”
서연은 어려웠던 시절을 담백하게 설명하며, 아직 해보고 싶은 것이 많다는 뜻을 밝혔다.
두 사람의 대화는 물 흐르듯 자연스러웠다.
원래 알고 지내던 것처럼 어찌나 말이 잘 통하는지, 서연은 윤선의 합리적인 생각과 태도에 연신 감탄했다.
한참을 신나게 이야기를 나누다 보니 ‘이사장님’이 어느새 ‘언니’가 되어 있었다.
“어쩜 이렇게 똑소리가 나는지 모르겠네.”
롤 모델 같은 사람의 후한 칭찬에 작아졌던 서연의 어깨가 쫙 펴졌다.
“일도, 생각도 이렇게 똑바른데. 연애 스타일은 어떨지 궁금하다.”
서연은 경계와 긴장이 풀어질 대로 풀어져 아무런 가식 없이 솔직하게 말을 이었다.
“연애랑 일은 별개인 것 같아요. 연애를 일처럼 노력한다고 해서 결혼이라는 성과가 나진 않더라고요.”
“결혼을 너무 어렵게 생각하는 거 아니에요?”
“그게…… 상대방도 중요하니까요.”
서연이 멋쩍게 웃어 보이자 윤선은 궁금한 것을 은근슬쩍 물었다.
“하긴 우리 도련님도 그렇더라고요.”
윤선은 민혁의 얘기를 꺼내며 슬슬 분위기를 조성했다.
“아. 최 대표님이요. 다른 재벌가에서 인기가 좋으실 것 같은데요.”
“그래 보여요?”
“그럼요. 능력 있으시고, 외모도 출중하시고. 성격은…….”
서연이 의미심장한 미소를 짓자 윤선은 그걸 놓치지 않았다.
“뭔데요?”
“예전에 뉴욕에서요. 커피 때문에 일이 좀…… 있었거든요.”
서연은 굳이 숨길 이유가 없었다.
“그런 일이 있었어요? 어머. 뉴욕에 있었을 때면 그게 언제야.”
윤선은 두 사람의 오래전 인연을 새삼 신기해했다.
“저도 깜짝 놀랐어요. 최 대표님이 저를 기억하고 계셔서요.”
서연의 말에 윤선이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었다.
“우리 최민혁 대표가 학교 다닐 때 얼마나 똑똑했다고요.”
팔은 안으로 굽는다고 민혁에 대한 윤선의 칭찬이 시작됐다.
서연은 가깝고도 멀 수 있는 형수와 시동생 사이가 참 보기 좋다고 생각했다.
분위기가 한층 무르익자, 윤선이 슬며시 본론을 꺼냈다.
“난 가족이라 잘 모르겠는데. 서연 씨가 객관적으로 보기엔 어때요? 우리 최 대표 남자로 괜찮은 거 같아요?”
서연은 뭐라고 말해야 할지 난감했다.
아무리 객관적이라는 단서를 붙이더라도 그를 남자로 평가할 수 있을까 싶어서.
그렇다고 정색하며 모르겠다고 할 수도 없었다. 그래서 서연은 가장 무난한 대답을 선택했다.
어찌 됐건 DN 그룹과 일로 얽히고설킨 관계였으니까.
“객관적으로, 아주 출중하시죠.”
서연은 ‘객관적’이라는 말을 강조했고, 윤선은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우리 종종 만나야겠어요. 차도 마시고 맛있는 것도 먹고.”
“불러만 주세요. 언니.”
너무도 만족스러운 대화에 서연은 스스럼없이 언니라는 말이 나왔다.
“이런 얘기 너무 속보이지만, 난 서연 씨가 참 마음에 들어요.”
“제 속도 보여드리자면, 저도요.”
서연도 오랜만에 말이 통하는 사람을 만나 즐거웠다.
두 사람은 1시간 넘게 기분 좋은 수다를 더 나누다 헤어졌다.
서연이 돌아가자, 윤선은 민혁에게 바로 전화를 걸었다.
사실 윤선은 민혁이 자꾸만 맞선을 거부하자 이유를 물었었다.
민혁은 상대가 누군지 밝히지도 않은 채 눈길이 가는 사람이 있다고만 말했다.
그런데 민혁이 홈쇼핑 매출을 이야기하며 서연을 크게 칭찬하자, 뭔가 심상치 않다는 걸 느꼈다.
원래 누굴 쉽게 칭찬하는 사람이 아니었으니까.
그래서 윤선은 조심스러워하는 민혁을 설득해 오늘 서연과의 만남을 어렵게 가질 수 있었다.
“도련님.”
[네. 형수님. 서연 씨는요?]
“사람이 너무 괜찮아요. 일단 난 합격.”
윤선의 말에 민혁이 시원하게 웃었다.
“두 사람이 올해 안에 결혼할 수 있도록 어떻게든 힘 좀 써볼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