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5. 정말 어쩌다가 이렇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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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5. 정말 어쩌다가 이렇게
2022.08.11.
청천벽력 같은 소리였다.
“벌써 구체적으로 얘기가 나오고 있대.”
서연은 호진이 뭔가 잘못 들은 게 아닌가 싶었다.
재벌 집 사위? 거기다 구체적으로 결혼 얘기가 나오고 있다고?
권율이 아무리 성숙해 보인다고 해도 갓 제대한 대학생인데, 벌써 결혼 얘기가 나온다는 게 도무지 믿기지 않았다.
그렇다고 호진의 앞에서 권율과 사귀는 사이라고 설명할 수도 없었다.
아직 호진에게 그와의 관계를 밝히지 않았으니까.
그러다 순간 서연은 멈칫했다.
과연 그를 잘 안다고 할 수 있을까.
사실 그의 진짜 나이를 안 것도 한 달 남짓 흘렀다. 게다가 호진이 말해주지 않았다면 어떤 집안인지 여태 몰랐을 것이다.
‘내가 호진이보다 아는 게 없으면 어쩌지…….’
그의 집안과 친분이 있다는 호진의 선배가 괜한 얘기를 전했을 것 같진 않았다.
굳이 없는 사실을 꾸며내거나 과장한다고 해서 그 사람에게 득이 될 건 없을 테니까.
그리고 어찌 됐건 호진이 서희와 연락하는 사이이다 보니, 그에 대한 정보를 접할 기회가 자신보다 많았다.
모든 것을 종합적으로 따져보자, 서연은 자신이 없어졌다.
‘그동안 율이 씨에 대해서 아는 게 없었네.’
서연이 아는 거라곤 오로지 권율 하나였고, 그를 둘러싼 모든 것들에 무지했다는 걸 이제야 깨달았다.
그러자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머릿속이 시끄러워졌다.
서연은 애써 생각을 정리하며, 호진이 알고 있는 그에 대한 정보를 확인하고 싶었다.
특히 결혼 얘기가 벌써 나왔다는 게 납득하기 어려웠다.
객관적으로 권율의 나이를 생각하면 빨라도 너무 빨랐으니까.
서연은 호진의 눈치를 살피다 어렵게 입을 열었다.
“그런데…… 사촌 형인 서희 씨도 아직 미혼이잖아.”
“그렇지.”
“아무리 사촌끼리는 결혼 순서가 없다지만, 서른 중반인 형도 있는데. 벌써?”
서연은 은근히 서희를 걸고넘어졌다. 그래야 호진이 이상하게 생각하지 않을 테니까.
“내 말이 그 말이다. 근데, 너 그거 모르지?”
“……뭘.”
“권율 씨 말이야.”
서연은 호진이 무슨 대단한 비밀이라도 알고 있나 싶어 빤히 쳐다봤다.
“글쎄, 대학생이래.”
“응?”
“아무리 봐도 우리보다 오빠처럼 보였는데, 어떻게 대학생일 수가 있지?”
동의를 구하는 호진의 물음에 서연은 크게 동요했다.
자신은 권율이 대학생이라는 사실을 최근에 알았는데, 호진은 벌써 알고 있었다니.
순간 기가 막혔다.
호진이 그 중요한 사실을 쉽게 알았다면, 재벌가에서 그를 눈독 들인다는 얘기도 신빙성이 있어 보였다.
서연은 속이 타들어 가는 것 같아 재빨리 얼음물을 들이켰다.
“너도 놀랐지?”
호진이 서연의 심각한 표정을 보며 물었다.
“어. 그러네. 대학생이라니.”
더는 침묵할 수 없어 서연이 어색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그런데 지금 생각해보니까 말이야. 약간 어려 보였던 것 같기도 하고. 뭐랄까. 잘 자란 부잣집 도련님 스타일이라고나 할까?”
“어. 어. 그러네.”
서연은 머릿속이 복잡해져 영혼 없이 대충 중얼거렸다.
“격한 호응은 어디로 가고. 어째 반응이 심하게 미지근하다.”
“아니. 대학생이라는 것도 신기한데. 벌써 결혼 얘기가 나온다니까…….”
서연은 꽉 막혀 있는 숨을 급하게 내뱉었다.
“후우. 난 이제까지 뭐 했나 싶고. 뭐 그래서…… 그렇지.”
서연의 말에 동의한다는 듯 호진이 고개를 끄덕였다.
“왜, 재벌들은 일찌감치 혼처 정하고 그런다잖아. K 타워 말고도 강남에 건물이 한두 채가 아니라던데. 그러면 재벌이나 다름없지 뭐. 안 그래?”
“아니, 재벌이고 뭐고 간에 본인도 모르게 무슨 결혼 얘기를…… 나 참.”
권율이 전혀 모르는 얘기인 게 틀림없었다.
그는 나이가 밝혀진 이후로 작은 것 하나까지도 서연에게 털어놓았으니까.
거기다 권율은 시험을 준비하느라 거의 도서관에서 살다시피 했다. 현실적으로 따져봤을 때 그가 다른 것에 신경 쓸 여력 따위는 없었다.
“네가 그걸 어떻게 알아? 본인이 아는지 모르는지.”
호진의 예리한 지적에 서연은 황급히 입을 다물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일부러 테이블을 탕탕 두드리며 말했다.
“그냥…… 뭐. 나 빼고 다 결혼하는 거 같아서 짜증난다고.”
“그러네. 아무래도 우리가 밤낮으로 너무 일만 한 것 같다. 그래서 말인데…….”
호진이 심란해하는 서연을 쓱 쳐다보고는 말을 이었다.
“우리도 질 수 없잖아?”
“뭘. 질 수 없어?”
“결혼하려면 일단 연애부터 해야지. 어떻게 그 J&P 변호사부터 만나볼래?”
호진은 마치 결혼 정보회사에서 나온 직원처럼 그 변호사에 대한 칭찬을 과하게 늘어놓았다.
“하. 그게 문제가 아니야.”
지금 서연에게 파트너 변호사든, 로펌 대표든 아예 관심 밖이었다.
자칫 잘못하다가는 사귄 지 얼마 되지도 않은 남자친구를 재벌가의 다른 사람에게 뺏길 위기였으니까.
“난 왜 이렇게 일이 꼬이는지 모르겠다.”
서연은 차라리 호진에게 모든 걸 툭 털어놓고 하소연이라도 할까 싶었다.
그러나 곧 생각을 고쳐먹었다.
그가 현재 말이 나오고 있는 결혼에 대해 알고 있는지, 만약 모르고 있다면 어떻게 할 생각인지 확인하는 것이 먼저였다.
“서연아. 진짜 안 만날 거야? 완전 괜찮다니까.”
“지금 말할 단계가 아니라서 좀 그런데. 더 확실해지면 얘기해줄게. 소개팅은 싫어.”
서연은 단호했다.
“뭐야! 너 남자 생겼어?”
호진이 화들짝 놀라며 물었다.
“나중에. 때가 되면, 제일 먼저 알려줄게.”
서연은 긍정도 부정도 하지 않았다.
호진이 유도 신문하듯 몇 가지를 캐물었지만, 서연은 심란한 얼굴로 물만 들이켰다.
지금 마시는 것이 물이 아니라 차라리 위스키였다면 쓰린 속을 달래줄 텐데 아쉬워하면서 말이다.
서연은 호진의 빗발치는 질문 세례를 뒤로하고 집으로 돌아왔다.
안 그래도 권율의 시험으로 불안하고 답답했던 마음이 걷잡을 수 없이 흔들렸다.
갓 제대한 대학생, 재벌이나 다름없는 집안, 깐깐하기로 소문난 가족들.
거기다 재벌에서 사윗감으로 탐을 낸다라…….
서연은 옷도 갈아입지 않은 채 쓰러지듯 소파에 누워버렸다.
어두운 적막에 갇힌 사람처럼 어떤 생각도, 말도 하지 않았다.
그저 불도 켜진 않은 천장을 멍하니 쳐다보고만 있었다.
창밖에서 희미하게 새어 들어오는 불빛과 규칙적으로 돌아가는 가전제품의 모터 소리, 작게 열린 틈 사이로 느껴지는 축축한 여름의 냄새. 서연은 스르륵 눈을 감았다.
얇은 눈꺼풀을 닫았을 뿐인데, 세상의 모든 것과 아득하게 멀어지는 기분이었다.
서연은 눈을 감은 채로 눈동자조차 굴리지 않았다.
온통 하얀 머릿속에 검은 사인펜으로 콕하고 점을 찍은 뒤 그것만 바라보고 있었다.
‘부정적인 생각은…… 하고 싶지 않아.’
권율의 시험이 아직 끝나지 않은 상태였고, 그에게 어떠한 얘기도 듣지 못했다.
서연은 자신을 괴롭히지 말라고 수없이 되뇌면서도, 먼지가 피어오르듯 스멀스멀 올라오는 불안함은 어쩔 수가 없었다.
머릿속의 까만 점들이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날수록 복잡한 감정들이 서로 줄다리기를 벌였다.
그러다 가벼운 한숨과 함께 어이없는 웃음이 새어 나왔다.
어쩌다가, 정말 어쩌다가 이렇게까지 마음이 깊어졌을까.
권율이 2년 전 호텔 주차장에서 끔찍한 이별 장면을 우연히 목격한 날부터, 어쩌면 이 모든 것이 예견되어 있었을지도 모른다.
그렇지 않고서야 그에 대한 감정이 이렇게까지 발전할 줄은 상상도 못 했다.
이건 뭐,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마음이 차곡차곡 쌓여가는 것이 아니라, 매번 감당할 수 없을 정도로 와르르 쏟아붓는 기분이었다.
어느새 새하얗던 머릿속이 온통 까맣게 물들어버리자 서연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여기서 더 나갔다가는 그를 만나기도 전에 펑 하고 터져버릴 것 같아서.
서연은 정신이 번쩍 들 정도로 차가운 물로 샤워를 하고 억지로 잠자리에 들었다.
***
서연은 깊은 물속에 가라앉은 사람처럼 하루를 보냈다.
불안함에 매몰돼 뭔가를 다급하게 결정하고 싶지는 않았다.
최대한 머릿속을 비우고, 부정적인 생각에서 멀어졌다.
그리고 평소와 같이 일에 파묻혀 ‘하루만’을 읊조리듯 중얼거렸다.
내일이면 그와 만날 수 있을 테니까.
서연은 코앞으로 다가온 행사를 위해 회의를 하고, 해야 할 일을 재차 확인하며 일에 몰두했다.
길고 긴 2번의 회의, 거기다 1시간 거리에 있는 행사장에도 방문했다.
행사 준비는 생각보다 순조로웠다.
서연은 심혈을 기울여 준비한 것들이 실제로 구현되고 있는 현장을 확인하자, 비로소 미소가 지어졌다.
“DJ 부스를 좀 더 화려하게 했으면 좋겠어요.”
서연의 말에 김 실장과 최 비서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입장할 때 혼잡하지 않도록 사은품 지급 부스 양쪽으로 한 개씩 더 만들어주세요.”
“네. 대표님.”
서연은 관계자들과 인부들에게 거한 간식을 쏘고는 다시 회사로 향했다.
요 며칠 부지런하게 움직여서 딱히 밀린 일도 없었지만, 습관처럼 일에 파묻혔다.
그나마 일을 할 때가 시간이 제일 잘 갔으니까.
굳이 급하지도 않은 일까지 완벽하게 마치고 나자 새벽 1시였다.
“오늘이네…….”
이미 자정이 지났으니 이른 저녁이 되면 권율을 만날 수 있다는 생각에 살며시 미소가 지어졌다.
그 사실 하나만으로도 가슴을 짓누르던 무거운 돌덩이가 흔적도 없이 사라지는 기분이었다.
하지만 권율을 만나기 전까지는 절대 안심할 수 없었다. 서연은 생각이 엉뚱한 길로 빠지지 않도록 애써 마음을 다잡았다.
하지만 그런 우려가 무색할 정도로 서연의 기분은 아침부터 상상 이상이었다.
아침에 눈을 뜬 후부터 들뜬 기분이 여과 없이 얼굴에 드러났다.
“무슨 좋은 일 있으세요?”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가지고 들어온 최 비서가 물었다.
“네. 오늘 남자친구 만날 거라서요.”
서연의 갑작스러운 남자친구 발언에 최 비서의 어깨가 움찔했다. 평소 사생활과 관련해선 말을 아끼는 편이었으니까.
“그래서 오늘은 조금 일찍 퇴근할까 해요. 그러니까 결재나 보고 미리미리 부탁드려요.”
서연은 일찍 퇴근한다는 말을 내뱉으면서도 살랑거리는 마음을 주체할 수 없어 배시시 웃었다.
순간 최 비서의 눈동자가 쏟아질 듯 커다래지더니, 평소보다 더 분주하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서연은 마치 봄날의 고양이처럼 사무실 안쪽으로 길게 들어오는 햇살을 황홀하게 구경했다.
아이스크림 막대기같이 기다란 저 햇살이 점점 작아지면 곧 만날 수 있겠지.
더디게 흐르는 시간을 재촉하느라 서연은 숨이 꼴딱 넘어갈 지경이었다.
“어! 시험 끝났다.”
시계가 닳아 없어질 정도로 바라보던 서연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녀의 인내심은 이미 끊어진 지 오래였고, 아직 잠잠한 핸드폰을 노골적으로 쳐다봤다.
시험이 종료되고 정확히 15분이 지나자 까만 액정에 <권율>이라는 이름이 떴다.
빛의 속도로 통화버튼을 누르자 너무도 듣고 싶었던 목소리가 숨을 헐떡거리며 말했다.
[서연 씨!]
그가 불러주는 이름이 왜 이렇게 좋은지, 순간 울컥하고 말았다.
서연은 손으로 입을 지그시 누르며 고개만 끄덕였다.
[어…… 서연 씨. 듣고 있어요?]
여전히 흔들리는 숨소리가 물었다.
“듣고 있어요. 율이 씨. 지금 나왔어요?”
[차에 핸드폰을 놔둬서요. 막 뛰어서 지금 차에 탔어요.]
그의 목소리 사이로 ‘딸각딸각’ 방향 지시등 소리가 들렸다.
“고생 많았어요.”
서연은 시험을 잘 봤는지, 못 봤는지 묻지 않았다.
애초부터 결과는 상관없었으니까.
[서연 씨. 40분. 아니, 30분만.]
권율의 그 말에 서연의 눈이 빠르게 시간을 확인했다.
[지금 회사로 갈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