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6. 한 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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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6. 한 사람
2022.08.14.
“율이 씨, 운전 조심해요!”
그 말을 끝으로 서연은 전화를 끊었다.
그저 목소리만 들었을 뿐인데도 격하게 치밀어 오르는 감정을 억누르기 힘들었다.
서연은 아무래도 곧 나가야 할 것 같아, 재빨리 김 실장을 불렀다.
“대표님. 감기 기운 있으세요?”
글씨가 하늘로 날아갈 듯 서명하던 서연이 김 실장을 올려다봤다.
“네? 아니요.”
서연은 손으로 뺨을 매만지며 대답했다.
“얼굴이 빨개지셔서요. 에어컨은 잘 나오는 것 같은데. 사무실이 더우세요?”
순간 피식하고 웃음이 새어 나왔다.
자신의 다급한 마음이 얼굴에 고스란히 드러난 모양이었다.
김 실장에게 결재 서류를 얼른 건네며 서연이 말했다.
“김 실장님. 사람 마음이라는 게 참 간사한 것 같아요.”
서연의 뜬금없는 소리에 김 실장이 빤히 쳐다봤다.
“12시간 전까지만 해도 머리가 터져나갈 것 같았거든요. 그런데 지금은 가슴이 터져나갈 것 같아요. 좋은 의미로요.”
도통 무슨 소리인지 모르겠다는 듯 김 실장이 고개를 갸웃거리자 서연이 또 웃었다.
“그냥 헛소리예요. 지금 기분이 이상하게 좋아서요.”
눈치 빠른 김 실장은 셔츠의 주인과 데이트 약속이라도 생겼나 싶어 흐뭇하게 웃었다.
“뭐든지 응원하겠습니다. 대표님.”
“넵. 그럼, 전 일찍 들어가 보겠습니다.”
서연은 김 실장이 나가자마자 커다란 거울 앞에 섰다.
마치 첫 데이트에 나가는 사람처럼 어찌나 가슴이 콩닥거리는지, 립스틱을 바르면서도 여러 번 심호흡을 해야만 했다.
“후우…… 갈수록 가관이다. 정말.”
서연은 어쩔 줄 몰라 하는 자신이 유치해서 픽 하고 웃어버렸다.
하지만 그가 전화한 지 30분이 지나자, 이제는 심장이 두근거리다 못해 알싸할 정도로 저릿해졌다.
지하 주차장으로 미리 내려가야 하나, 아니면 1층으로 나가야 하나 고민하는 사이, 전화가 울렸다.
[서연 씨. 지하 1층이요.]
벌써 도착했다는 말에 의자에 앉아 있던 서연의 몸이 튕겨 올랐다.
“금방 내려갈게요.”
서연은 재빨리 가방을 팔에 걸고는 벌컥 문을 열었다.
최 비서가 자리에서 채 일어나기도 전에 쏜살같이 사라지며 서연이 외쳤다.
“최 비서님도 그만 퇴근하세요.”
서연은 최 비서의 대답을 듣기도 전에 엘리베이터에 몸을 실었다.
평소에는 눈 깜짝할 사이 잘도 내려가는 엘리베이터가 왜 이렇게 더디기만 한지.
점점 줄어드는 빨간 숫자를 못마땅하게 올려다봤다.
땡―.
경쾌한 소리와 함께 스르륵 문이 열리자마자 서연의 몸이 커다란 품으로 빨려 들어갔다.
“율이…… 흣.”
“서연 씨…… 하. 서연 씨.”
그르렁거리듯 낮게 읊조리는 그의 목소리가 들리자, 서연이 그의 등을 당겨 안았다.
“미치는 줄 알았어요. 너무 보고 싶어서요.”
그의 말에 화답이라도 하듯 서연은 커다란 품으로 빈틈없이 파고들었다.
다급한 그의 심장 박동과 거친 숨소리, 흐릿하게 배어 있는 여름의 바람 냄새.
거기다 좀 더 선명한 그의 체취와 향긋한 섬유유연제 향기가 그가 돌아왔음을 알려줬다.
서연은 양손으로 그를 꼭 끌어안아도 성에 차지 않는 듯 가까이 더 가까이 다가갔다.
“서연 씨. 얼굴 좀 보여줘요.”
어깨에서 울리는 그의 목소리에 서연이 얼굴을 살짝 들어 올렸다.
권율은 서연의 얼굴을 눈에 새기고 싶은 사람처럼 상체를 한껏 숙여 눈을 마주하고, 앞머리를 쓰다듬었다.
미끄러지듯 내려온 그의 검지가 서연의 턱 끝에 자리를 잡음과 동시에 그의 입술이 와닿았다.
가볍게 다가왔다가 촉촉하게 물러나더니, 다시 돌아와 부드럽게 방향을 틀었다.
그의 입술이 애틋하게 스칠 때마다 그의 등줄기에서 느껴지는 맥박이 더욱 빨라졌다.
서연은 너무도 아찔한 감각에 힘이 풀려 순간 휘청했다.
그러자 핏줄이 단단히 솟아난 그의 팔뚝이 서연을 번쩍 안아 들었다.
달콤한 숨결을 맞붙인 채로 말이다.
갑자기 키가 커진 서연이 권율의 얼굴을 두 손으로 감싸 쥐었다.
“서연 씨. 내 어깨 잡아요. 차까지 이렇게 안아주고 싶어요.”
입술이 닿을 듯 말 듯한 거리에서 권율이 속삭였다.
그러자 서연의 입가가 그의 숨으로 포근하게 데워졌다.
‘그래. 맞아. 이 느낌이었지.’
말로는 정확히 표현할 수 없는, 권율만이 가지고 있는 온기에 둘러싸인 기분이었다.
서연은 권율의 목을 바짝 끌어안고는 그의 어깨에 뺨을 비볐다.
“보고 싶었어요. 율이 씨.”
“기다려줘서 고마워요. 서연 씨가 없었으면 정말 힘들었을 거예요.”
권율은 서연에게 고마운 점을 끝도 없이 나열하며 걸었다.
서연은 그의 칭찬에 취한 듯 배시시 웃으며 이 순간을 만끽했다.
권율은 한쪽 손으로 가볍게 서연을 고쳐 안고는 조수석 문을 열었다.
항상 그랬듯 서연의 안전벨트를 매주고는 확인 도장이라도 찍는 것처럼 이마부터 입술까지 차례로 입을 맞췄다.
그러고는 눈매를 한껏 접어 만족스럽게 웃었다.
그는 운전석으로 와 앉아서도 시동을 걸지 않은 채 달콤한 시선으로 서연을 물끄러미 바라보기만 했다.
그러자 서연은 속으로 할 말을 고심했다. 시험에 대해 물어도 될까 싶어서 말이다.
“율이 씨. 고생했어요.”
사실 묻고 싶은 말은 따로 있었지만, 대놓고 물어볼 순 없었다.
그럴 일은 없겠지만, 만에 하나 시험이 어려웠을 수도 있으니까.
“왜 안 물어요? 시험 어떻게 봤는지요.”
“물어봐도…… 돼요?”
서연은 한껏 들떠 있는 권율을 보며 안심하듯 물었다.
그러자 권율이 서연을 와락 끌어안으며 중얼거렸다.
“역대급이요. 수능 때보다 더 잘 본 거 같아요.”
역대급이라니. 그것도 수능 만점 때보다 더 잘 봤으면…….
결과는 말할 것도 없었다.
권율이 시험을 가지고 허세를 부리거나 과장할 사람은 아니었으니까.
서연은 커다란 계약을 따낸 사람처럼 기쁨을 주체할 수 없었다.
얼마나 기분이 좋은지, 그 자리에서 빽 소리를 지르며 권율을 더 끌어안았다.
“그렇게 좋아요?”
서연이 너무도 좋아하자 덩달아 신이 난 권율이 물었다.
“그냥 막…… 복권에 당첨된 것 같고. 듣기만 해도 좋아요.”
두 사람은 코끝이 눌릴 정도로 서로의 얼굴을 감싸 쥐었다.
“다 서연 씨 덕분이에요.”
그는 말도 어쩜 이렇게 예쁘게 하는지, 서연은 그의 까만 눈동자를 바라보며 함박웃음을 지었다.
“아니에요. 율이 씨 정말 수고 많았어요.”
호진의 말대로 아직 마지막 관문이 남아 있지만, 서연의 마음은 권율이 최종 합격증을 받아온 것처럼 잔뜩 부풀어 올랐다.
“율이 씨. 아직 끝난 건 아니지만, 그래도 우리 축하하러 가요.”
서연은 자신이 왜 이렇게 들뜨고 즐거운지 이해할 수 없을 정도였다. 그의 볼이 뭉개지도록 쪽쪽 소리를 내며 마구 입을 맞추고는 자꾸만 배시시 웃었다.
“난 서연 씨랑 있으면 뭐든지 다 좋아요.”
권율은 더 뽀뽀하라고 서연에게 아예 볼을 내맡기며 말했다.
“나중에 이 지긋지긋한 시험이 완전히 끝나면요. 그때는 정말 크게 축하해요. 우리.”
“좋아요. 그럼 우리 어디부터 갈까요?”
“난 율이 씨만 옆에 있으면 다 괜찮아요.”
서연의 그 말에 권율의 귓불이 붉게 물들었다.
그는 입꼬리를 시원하게 올리며 바로 시동을 걸었다.
“일단 출발할게요.”
서연은 어디로 가는지 그에게 묻지 않았다.
그와 함께라면 편의점 야외 테이블에 앉아 컵라면을 먹어도 상관없었다.
그것도 다 추억일 테니까.
서연은 행복의 날개를 달고 금방이라도 날아오를 것처럼 기분이 한껏 달아올랐다.
서로가 같은 마음인지, 권율은 신호가 걸릴 때마다 서연을 안은 채 놓지를 않았다.
불과 몇 달 전까지만 해도 수줍어하던 모습이 무색할 정도로 그는 꽤 적극적으로 변해 있었다.
꼭 사랑을 갈구하는 커다란 강아지 같달까.
서연은 그의 커다란 손을 샌드위치처럼 포개며 못다 한 이야기를 나눴다.
그 사이, 권율의 차가 속도를 줄이며 오른쪽으로 방향을 틀었다.
“어. 여기는…….”
호텔이었다.
목적지를 말하지도 묻지도 않은데다 특별한 설명이 없었는데, 갑자기 호텔이라니.
호텔 사인이 보이자마자 서연의 머릿속에 많은 생각들이 스치고 지나갔다.
혹시……?
그러나 권율의 옆모습을 쳐다보자마자 괜히 화끈거리던 자신의 마음이 오해였음을 직감했다.
그의 얼굴이 지나칠 정도로 환하게 웃고 있었으니까.
차가 서서히 로비에 멈춰서자, 직원들이 재빨리 다가와 문을 열어줬다.
“잠깐만요. 위에 재킷만 입을게요.”
권율은 서연이 선물한 반소매 차림이라 뒷자리에서 블랙 재킷을 얼른 꺼내 들었다.
그러고는 서연에게로 다가와 어깨를 감싸 안았다.
“저번에요. 서연 씨가 여기 레스토랑이 너무 맛있다고 했잖아요.”
“그걸 다 기억하고 있었어요?”
“그럼요. 시험 끝나면 꼭 같이 오고 싶었어요.”
그러고 보니, 일전에 민혁과 저녁을 함께했던 호텔이었다.
지나가는 말로 디저트가 너무 맛있어서 같이 오고 싶다는 말을 하긴 했었다.
“그동안 못 한 거 시간 날 때마다 하나씩 하려고요. 어서 가요.”
“여기 예약해야 할 텐데요.”
“이미 했어요.”
공부하느라 바쁜 사람이 언제 이런 걸 다 신경 썼나 싶어 서연이 의아하게 쳐다봤다.
“전화 한 통만 하면 되잖아요. 오래 걸리지 않았어요.”
단순한 전화 한 통이라지만, 시험 끝나는 날에 맞춰서 미리 계획을 세운 권율의 마음이 너무도 고마웠다.
“율이 씨…….”
서연이 권율의 넓은 어깨에 살포시 기대며 그의 이름을 불렀다.
“당분간은 서연 씨랑만 시간 보낼 거예요. 공부를 하더라도 서연 씨 옆에서 할래요.”
그는 마음에 허기가 진 사람처럼 서연에게서 떨어질 생각이 없었다.
로비를 가로지르면서도, 엘리베이터 안에서도, 심지어 메뉴를 고르는 순간에도 서연의 새끼손가락이라도 붙잡고 있었다.
서연도 커다란 통창 너머로 펼쳐진 그림 같은 창밖을 감상할 여유조차 없었다.
오로지 권율에게 집중하느라 정신이 없었으니까.
서연은 이름만 들어도 머리가 지끈거리는 시험 과목에 대한 그의 따끈따끈한 후기가 너무 재미있었다.
마치 시험을 함께 보는 것처럼 얼마나 흥미진진한지.
생전 처음 듣는 행정법의 세계가 흥미로워 한참을 웃었다.
그러다 메인 요리인 스테이크가 나오자 권율이 말했다.
“내가 잘라줄게요. 잠깐만요.”
그는 서연의 접시를 가져다 고기를 한입 크기로 자른 다음 돌려줬다.
“천천히, 꼭꼭 씹어 먹어요.”
평소 같았으면 소중한 육즙이 빠져나간다고 핀잔을 줬겠지만, 지금은 그런 걸 따질 필요가 없었다.
권율이 한 거였으니까. 서연은 그에게 뭐든지 허락해주고만 싶었다.
“율이 씨가 잘라주니까. 더 맛있어요.”
사람이 이렇게까지 변할 수 있다니.
서연은 자신의 멘트가 오글거려 샌들 안의 발가락을 잔뜩 오므렸다.
그러나 그런 것도 잠시.
권율이 자신의 스테이크를 깍두기처럼 썰어 버리고, 다시 급하게 손을 내밀자 얼른 그의 손을 잡았다.
서연에게 한 손 식사는 불편하기는커녕 즐겁기만 했다.
단단한 손을 만지작거리며 먹는 코스요리가 얼마나 미각을 자극하는지, 민혁과 먹었던 것보다 100배는 더 맛있었다.
거기다 권율은 서연이 한 말을 모두 기억하고는 초콜릿이 잔뜩 들어간 조각 케이크를 단품으로 시켰다.
네모난 초콜릿케이크를 사이좋게 나눠 먹자, 이게 달콤한 디저트인지, 아니면 사랑인지 모를 만큼 오감이 사르르 녹아내렸다.
“서연 씨.”
“나 완전 많이 먹은 거 같아요. 율이 씨는요?”
“나도요. 그래서 말인데요.”
그의 커다란 손이 서연의 얇은 손가락을 만지작거렸다.
순간 서연의 눈동자가 커다래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