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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7. 진짜 커플 (57/130)


57. 진짜 커플
2022.08.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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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율이 주머니에서 작은 상자를 꺼내자, 서연의 눈이 쏟아질 듯 커다래졌다.

순간, 권율의 마음이 덜컥 내려앉았다.

혹시 서연이 부담스러워하면 어쩌나 하고 말이다.

그러나 이미 준비한 것을 무를 수는 없었다.

권율은 서연과 정식으로 사귀기로 한 다음부터 CC인 친구들을 유심히 살폈다.

그들의 애정 표현이나 기념일을 챙기는 방법, 데이트 장소 팁들을 구체적으로 조사했다.

그러다 여러 커플의 공통점을 하나 발견했다.

커플인 친구들은 열이면 열, 모두 반지를 끼고 있었다.

권율은 서연을 만나기 전까지는 이성에 관심을 가지지 않아, 전혀 생각해본 적 없는 영역이었다.

그래서 궁금함을 참지 못하고 몇몇 친구들에게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

반지의 의미와 사야 하는 시기, 그리고 구입처에 대해서 말이다.

디자인이나 브랜드는 천차만별이었지만, 보통 사귀기로 한 지 100일을 기준으로 커플링을 한다는 사실을 알아냈다.

권율은 그 중요한 사실을 이제야 깨달았다는 것에 마음이 급해졌다.

그래서일까.

한동안은 커플들의 손가락만 보고 다녔다.

그는 시간이 날 때마다 서연에게 어울릴 만한 반지 디자인을 머릿속으로 그렸다.

물론 서연에게 어울리지 않는 것은 하나도 없었다.

어떤 색깔이든, 무슨 소재든 세상의 모든 반지를 다 사주고 싶을 정도로 서연은 완벽하게 소화해냈다.

하지만 그래도 커플링은 처음인 만큼 고민에 고민을 거듭했다.

권율은 쉬는 시간이나 틈틈이 브랜드와 디자인, 소재를 알아봤다.

어느 정도 후보군이 좁혀지자, 이번에는 사이즈가 문제였다.

서연에게 대놓고 물어볼 수도, 그렇다고 눈대중으로 대충 살 수도 없었다.

그는 서연을 만날 때마다 자신의 새끼손가락과 서연의 약지를 비교하기 시작했다.

서연의 약지는 자신의 새끼손가락보다 훨씬 얇았다.

저렇게 작고, 심지어 귀엽기까지 한 손으로 많은 직원들을 이끌다니.

생각할수록 신기하고, 그런 서연이 너무도 자랑스러웠다.

권율은 일단 자신의 새끼손가락을 기준으로 둘레를 잰 다음 거기에 원하는 반지의 안지름과 둘레 값을 서연에 맞게 계산했다.

왠지 맞을 것 같다는 확신이 들자 저녁을 급하게 샌드위치로 때우고, 백화점으로 달려갔다.

시험이 끝나는 날에 꼭 주고 싶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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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율이 씨. 이건…….”

서연은 빨간색 상자를 손으로 만지지도 않은 채 눈으로만 가리켰다.

그러자 권율은 위험한 물건이 아니라는 듯 빙그레 웃어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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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커플링이에요. 우리가 정식으로 사귄 건 얼마 안 됐지만요.”

빨간 상자의 작은 버튼을 꾹 누르자 검은 벨벳 안에 작은 다이아몬드가 박힌 반지 두 개가 들어 있었다.

그는 작은 반지를 천천히 꺼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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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난 지는 100일도 훨씬 지났으니까요.”

권율은 100일이라는 말을 내뱉는 순간에도 서연과 함께했던 시간이 떠올라 가슴이 벅차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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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연 씨가 내 여자 친구라고 막 자랑하고 싶어서요.”

권율은 서연의 왼손 약지에 반지를 서서히 밀어 넣었다.

반지는 우려와는 달리 함께 가서 맞춘 것처럼 정확하게 맞았다.

서연은 하얀 손가락에서 빛나고 있는 반지와 권율의 얼굴을 번갈아 쳐다봤다.

도저히 알 수 없는 표정으로 말이다.

권율은 그녀의 반응이 걱정스러우면서도 애써 태연한 척 미소를 지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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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괜찮으면, 나도 끼워줄래요?”

그가 자신의 반지를 눈짓하며 말했다.

서연은 왼쪽 손등을 비스듬하게 올려 반짝이는 반지를 지그시 쳐다보고는 시선을 내렸다.

그러고는 홀로 남아 있던 권율의 반지를 꺼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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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 말이에요.”

서연이 잠시 말을 삼켰다.

빛나는 반지는 이미 권율의 약지 손톱 밑까지 와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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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율이 씨가 정말 좋아요.”

순식간에 빨려 들어가는 것처럼 반지가 딱 맞게 끼워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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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 끼고 다닐게요.”

서연이 반지를 낀 권율의 손가락을 매만지며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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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러니까 정말 커플 같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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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권율은 커플링을 낀 친구들을 볼 때마다 내심 부러웠었다.

자신도 직접 반지를 껴보니, 생각보다 더 끈끈한 유대감이 느껴지고 우리가 함께라는 만족감이 흘러넘쳤다.

권율은 하얀 대리석 테이블 위에 나란히 맞붙인 손을 내려다보며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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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자인은 직접 고른 거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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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혹시, 마음에 안 들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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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니요. 너무 예뻐서요. 커플링은 처음인데 이렇게 좋을지 몰랐어요.”

커플링이 처음이라는 서연의 말에 권율은 세상을 다 가진 사람처럼 웃었다.

사실 서연과 한 걸음씩 가까워질 때마다 심장이 뻐근할 정도로 설레었다.

형식적으로 하는 얘기가 아니라 그녀의 매력은 하루하루가 달랐으니까.

서연은 만나면 만날수록 새로웠고, 하루에도 몇 번씩 매력을 업데이트하는 사람이었다.

그 바람에 권율은 머릿속에 ‘나의 서연 씨 방’을 따로 만들어서 관리해야만 했다.

그는 시험을 준비하면서 겪었던 수많은 고비마다 서연을 생각하며 견뎠다.

어느 날은 공부가 마음처럼 되지 않아 좌절했던 적도, 이유 없이 서연이 보고 싶어 뛰쳐나가고 싶었던 적도 있었다.

그러나 그럴 때마다 그를 붙잡아 준 것이 서연이었다.

도서관 열람실에서 머릿속으로 그녀를 소환하면 거짓말처럼 코끝에 복숭아 향기가 스쳤다.

그러면 스르륵 눈을 감고, 서연의 말랑한 감촉과 다채로운 표정을 떠올렸다.

점점 깊어지는 생각의 끝. 권율의 머릿속 막다른 길에 행복한 얼굴의 서연이 조그맣게 속삭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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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율이 씨…….’

그저 머릿속에서 이름만 불러주는데도 까맣게 타들어 가는 상처에 연고를 바른 듯 멀쩡해졌다.

그러면 아주 잠깐, 꿀맛 같은 휴식을 취한 것처럼 그는 다시 공부에 몰두할 수 있었다.

사실 권율이 서연에게서 위안을 받을 수 있었던 건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었다. 그녀는 할아버지처럼 부담을 주지도, 부모님처럼 자신을 안쓰러워하지도 않았다.

그냥 가만히 자신의 말을 들어주고, 항상 잘하고 있다고 말해줬다.

서연은 한여름에 만나는 시원한 그늘처럼, 때로는 답답했던 마음에 내리는 한줄기 소나기처럼 그렇게 힘이 됐다.

그래서일까.

권율에게 있어 서연은 뭔가 거대한 계기 같은 것이었다. 잘 되고 싶은 이유가 여자 때문이냐며 사람들이 비웃는다고 해도 상관없었다.

그는 애초부터 소중한 사람에게 당당해지고 싶은 마음뿐이었으니까.

거기다 서연을 통해 앞으로 보람을 느끼며 잘할 수 있는 일을 찾았다는 것만으로도 만족했다.

그런 기분은 길고 긴 시험 기간에도 마찬가지였다.

생각보다 시험이 수월했다지만 꼭 붙고 싶다는 부담감이 엄습해올 때면, 소리 없이 서연의 이름을 중얼거렸다.

그러면 흐릿했던 시야가 순식간에 밝아지는 기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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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율이 씨, 그렇게 좋아요?”

권율은 서연의 눈동자 속에 비친 자신의 미소를 확인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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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연 씨랑 함께 있으면 내가 완벽해지는 기분이에요.”

권율의 말이 끝나자마자, 서연의 얼굴이 분홍빛으로 물들었다.

그 모습이 보기 좋아 자꾸만 달뜬 웃음이 새어 나왔다.

아직 서연에게는 말하지 않았지만, 모든 시험이 끝나면 바로 독립할 생각이었다. 오롯이 서연을 책임지고, 이 관계를 발전시켜야 하니까.

그때는 이런 단순한 커플링 말고, 서연에게 어울리는 제일 크고 화려한 반지를 끼워줘야지.

그런 생각이 들자 자기도 모르게 머릿속에 있던 말이 툭 하고 튀어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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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에는 훨씬 크고 예쁜 걸로 사줄게요. 정식으로요.”

평생을 함께하고 싶다는 말은 일부러 하지 않았다. 정말 중요한 순간을 위해서 아껴놔야 하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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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 해준 것도 별로 없는데. 뭐 갖고 싶은 거 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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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미 가졌잖아요. 서연 씨요.”

그 말끝에 자신과 똑같은 반지를 낀 서연의 손가락 하나하나에 입을 맞췄다.

입맞춤이 간지러운지, 서연의 어깨가 작게 흔들리자 그 모습마저도 미치도록 예뻤다.

서연과 함께 있을 때마다 느껴지는 느른한 포만감, 권율은 꿈을 꾸듯 몽롱하기까지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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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 율이 씨 피곤한가 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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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니에요. 괜찮아요.”

권율이 눈을 부릅뜨며 대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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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일찍 들어가서 쉬어요. 시험 보느라 피곤하잖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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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싫어요. 서연 씨랑 더 있을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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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나도 율이 씨랑 더 있고 싶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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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럼, 우리 호텔 정원이라도 걸을까요?”

솔깃한 그의 제안에 서연이 반지 케이스를 가방 안에 얼른 집어넣었다.

두 사람은 행복한 웃음을 꼬리처럼 매단 채 레스토랑을 나와 천천히 걸었다.

호텔 뒤편으로 연결된 산책로를 거닐자 각양각색의 조각상들 사이로 은은한 조명이 들어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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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텔 정원에 이런 곳이 있는 줄 몰랐어요.”

서연은 권율과 새끼손가락을 걸고 조각상 사이를 살랑거리며 걸었다.

순간 소나무 언덕에서 불어오는 산들바람에 서연의 긴 머리카락이 흩날렸다. 권율은 그 바람을 막아주려 서연을 뒤에서 안았다.

그러고는 그녀의 어깨에 턱을 붙이며 속삭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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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연 씨.”

서연이 ‘음?’ 하며, 고개를 옆으로 돌리자 그 틈에 촉하고 입을 맞췄다.

어차피 두꺼운 팔뚝에 가려져 남들에게 입을 맞추는 게 보이지 않을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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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무 좋아요. 모든 게, 다.”

권율은 마치 행복한 꿈결을 걷는 것처럼 작게 중얼거렸다.

강아지풀처럼 부드러운 그녀의 머리카락에 얼굴을 묻고, 여전히 싱그러운 향기를 맡으면서 말이다.

이대로 시간이 멈춰 버렸으면…… 아니 한 시간만 더. 그것도 안 되면 조금만 더.

권율은 품 안에 쏙 들어온 서연을 이대로 재킷 안 주머니에 넣어버리고 싶은 충동에 휩싸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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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욕심은.’

불쑥 든 생각에 권율이 피식하고 웃었다. 그러다 시험이 끝나면 함께 여행을 가자고 했던 말이 떠올랐다.

어차피 2차 시험의 결과가 나오기까지 여유가 있으니까, 서연에게만 집중하고 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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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연 씨. 우리 바다 보러 갈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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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다요?”

서연이 고개를 완전히 돌려 권율을 올려다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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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냥 내 차에만 타 줘요. 나머지는 내가 다 알아서 할게요.”

고민을 하는 건지, 일정을 점검하는 건지.

서연의 갈색 눈동자가 커다래졌다가 작아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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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아요. 원래 시험 끝나면 가기로 했으니까요.”

서연은 아무렇지 않은 척 말했지만, 맞닿아 있는 그녀의 등에서 심장이 두근거리는 게 느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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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박 2일도 괜찮아요? 좀 멀리 가고 싶어서요.”

서연의 동공이 다시 동그랗게 커지더니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고는 어디가 좋은지, 바다에 관한 이야기를 한참 동안 나눴다.

은은하게 빛나는 정원을 통째로 빌린 것처럼 아무도 없는 한적한 곳을 맴돌며 시간이 어떻게 가는 줄도 몰랐다.

그때, 권율의 주머니 안에서 핸드폰이 울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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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연 씨. 잠깐만요.”

권율은 서연의 어깨에 둘렀던 팔을 풀고는 전화기를 꺼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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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엄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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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율아. 저녁은 먹었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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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럼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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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기, 혹시 친구랑 다 만났으면…….]

권율은 아침에 집을 나서면서 약속이 있어서 밤늦게 올 수 있다는 말을 미리 했었다.

거기다 서연을 만나러 가는 길에도 시험은 잘 봤으니까 걱정하지 말라는 연락도 일찌감치 해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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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직이요. 무슨 일 있으세요?”

권율이 의아한 목소리로 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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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 엄마가 친구랑 시간 보내는 데 방해했구나. 그런데 저기, 율아…….]

연희의 목소리에 난처함이 가득 배어 있었다.

무슨 일이냐고 다시 물어보려는데, 분노에 찬 석구의 목소리가 전화기 너머에서 들려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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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이구. 답답해. 언제 들어오냐고 물으면 됐지. 뭐 이렇게 사설이 길어.]

당황한 연희의 숨소리가 흔들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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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휴. 어르신, 제 말이 그 말이에요. 성질 급한 사람은 이 사람 때문에 속 터져 죽었어요.]

순간 권율의 미간이 사납게 구겨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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