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8. 폭발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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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8. 폭발하다
2022.08.21.
권율은 연희의 숨소리만 들어도 어떤 상황인지 충분히 머릿속에 그려졌다.
분명 자신이 집에 없다는 말을 들었을 텐데도 석구와 김 여사가 막무가내로 찾아온 게 틀림없었다.
너무도 미안해하는 연희에게 더 미안해진 권율이 말했다.
“엄마, 1시간 정도 걸릴 것 같아요. 그 정도면 괜찮을까요?”
서연을 집까지 데려다주고 가려면 적어도 1시간은 필요했다.
“율아. 미안해서 어떡하니.”
연희는 오랜만에 나간 아들의 휴식을 방해했다는 생각에 어쩔 줄 몰라 했다.
권율은 자신의 데이트를 방해한 건 둘째치고, 강압적인 분위기로 연희를 안절부절못하게 한 상황이 참을 수가 없었다.
오늘도 어김없이 자신 때문에 엄마의 어깨가 잔뜩 움츠러들었을 생각에 가슴이 찢어졌다.
“엄마. 금방 가니까 상현이 학원에 픽업 간다고 하고 잠깐 나갔다 오세요.”
혼자서 감당하기에는 버거운 상대라 하는 말이었다.
석구 역시도 손주들의 학업과 관련한 일이라면 많이 관대했으니까.
“응. 그래. 운전 조심해서 들어와. 서두르지 말고.”
“네. 지금 얼른 상현이 데리러 가세요.”
권율은 연희의 알겠다는 대답을 듣고서야 전화를 끊었다.
눈치를 살피던 서연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그만 갈까요?”
순간 서연에게도 미안해졌다.
달콤한 데이트가 씁쓸하게 마무리되자 권율은 서연의 어깨를 더 꼭 끌어안았다.
“미안해요. 더 있고 싶은데, 가 봐야 할 것 같아요.”
서연은 생각이 많아진 얼굴로 권율을 올려다봤다.
하지만 아무것도 묻지 않았다.
그녀는 항상 생각할 시간을 주고, 말할 기회를 줬다.
그게 서연에게 참 고마운 점이었다.
“괜찮아요?”
“……아니요.”
그냥 솔직해지고 싶었다.
어차피 미래를 함께할 사이라면 서연도 알아야 하니까.
“할아버지가 집에 오셨는데. 엄마가 혼자 계세요.”
서연은 고개만 끄덕일 뿐 잠시 또 침묵했다.
그건 하고 싶으면 더 하고, 그만하고 싶으면 그만해도 좋다는 신호 같았다.
“사람마다 장단점이 있잖아요. 할아버지는 근면 성실하시지만, 활활 타오르는 불같으세요.”
커플링으로 반짝거리는 서연의 손가락이 권율의 손등을 매만졌다.
“엄마는 코스모스 같은 분이라 그걸 많이 힘들어하시고요.”
서연이 권율의 손에 깍지를 껴왔다.
“가요. 어서 가서, 곁에 있어 드리세요.”
자세한 이야기를 하지도 않았는데 서연은 모든 걸 이해하는 사람 같았다.
서연의 그 말이 어찌나 고마운지, 순간 가슴 깊은 곳에서 감정이 울컥하고 흘러넘쳤다.
“이해해줘서 고마워요.”
그녀는 어떤 말도 보태지 않았다. 그저 손깍지 위에 자신의 손을 하나 더 포갰을 뿐이었다.
손등을 다 덮지도 못하는 작은 손이 얼마나 포근한지.
마음에 두툼한 담요를 감싼 듯 온기가 돌았다.
두 사람은 호텔을 빠져나와 서연의 집으로 향했다.
집으로 가는 도중에도 서연은 행사와 관련된 이야기만 할 뿐 불편한 질문을 하지 않았다.
권율은 그런 그녀에게 고마우면서도 한편으로 미안해졌다.
만약 서연과 결혼한다고 나서면 할아버지가 어떻게 나올지 충분히 예상할 수 있으니까.
‘엄마에게 했던 것처럼…… 서연 씨에게도?’
단순한 상상만으로도 가슴 한쪽이 서늘해져 그는 애꿎은 핸들만 세게 잡아 쥐었다.
무슨 일이 있어도, 어떤 상황이 닥쳐와도. 그것만큼은 절대 용납할 수 없는 일이었다.
아무리 소중한 가족이라도 서연에게 상처를 준다면 그건 참을 수 없을 테니까.
‘할아버지랑 그 여자애. 한두 번 만난 사이가 아닌 것 같더라고.’
순간 서희가 했던 말이 떠올랐다.
그러자 이번 기회에 석구와 보라와의 관계를 명확히 해야겠다고 마음먹었다.
도대체 두 사람이 수시로 만날 이유가 뭐였는지.
게다가 학교에서 서연과 마주쳤을 때 보라가 보인 이상한 행동의 이면에 무엇이 있는지도 말이다.
이런저런 생각을 하다 보니, 벌써 서연의 집 앞이었다.
“율이 씨.”
딸깍 소리와 함께 서연의 안전띠가 풀리자 말랑한 몸이 다가왔다.
그녀는 잔뜩 긴장한 권율의 어깨에 가는 팔을 얹고는 뒷덜미를 느릿하게 쓸어내렸다.
“전화 기다릴게요.”
권율은 복잡한 생각으로 뜨거워진 자신의 이마를 서연의 어깨에 비비며 말했다.
“오래는 안 걸려요. 꼭 기다려줘요.”
서연이 빙그레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부글부글 끓어오르던 마음이 조금 진정되며 겨우 숨을 쉴 수 있었다.
***
권율은 잔뜩 흐려진 마음을 안고 엘리베이터에서 내렸다. 흐릿하지만 날카로운 호통 소리가 공용 복도까지 울리고 있었다.
순간 권율의 팔뚝에 굵은 핏줄이 사납게 불거졌다.
그는 몇 발자국 되지도 않는 거리를 뛰어 단숨에 도어 록을 해제했다.
석구는 아들 내외를 향해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느라 일등 손자가 들어오는 소리도 듣지 못했다.
“율이가 그렇게 훌륭한 게, 너희가 잘 키워서 그런 걸로 착각하지 말아라.”
“아휴. 그러면요. 우리 일등 손자가 똑똑한 건 다 어르신 머리 닮아서 그렇죠.”
김 여사가 얄밉게 거들고 나섰다.
석구는 김 여사의 말이 틀리지 않다는 듯 헛기침을 두어 번 하고는 말을 이었다.
“율이 시험이 끝나면 보라네랑 구체적으로 상의를 하자고 했냐. 안 했냐.”
권율은 이게 다 무슨 소리인가 싶어 제자리에 우뚝 멈춰 섰다.
“내가 너희들 대신 JS랑 대성건설 회장과 이야기를 얼추 맞춰 놨다 이 말이다.”
“아……버님. 그래도 율이 의견은 물어 봐야…….”
연희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천둥 같은 꾸중이 이어졌다.
“무슨 의견! 보라만큼 좋은 조건이 어디 있다고. 친가, 외가 다 내로라하는 재벌에, 최고 대학 다닐 정도로 똑똑하지.”
누구의 할아버지인지 모를 정도로, 석구는 지나치게 보라의 편을 들었다.
“너 같이 사람 속 터지게 하는 일도 없고. 애가 얼마나 싹싹하고 성격이 좋은지. 입 뗄 것도 없다. 입 뗄 것도!”
“저번에 우리 집에 와서 밥 먹을 때도 애가 얼마나 구김살이 없는지. 난 손주며느리 감으로 참 괜찮더라고요.”
석구는 김 여사의 맞장구에 맞춰 보라의 장점을 줄줄이 읊어댔다. 물론 연희의 못마땅한 점에 빗대서 말이다.
순간 권율은 구역질이 날 것만 같았다.
그래서 보라가 그랬구나.
그렇게 기고만장하고, 수시로 도서관을 기웃거리고, 다정한 척 애교를 부린 이유가…….
믿는 구석이 있어서였다는 생각에 온몸에 소름이 돋아났다.
자신이 공부로 바쁜 사이, 이 모든 일이 벌어지고 있었다니.
어디서부터 어디까지 이야기가 진행됐는지 짐작조차 할 수 없었다.
“그래도요. 아버님. 율이 인생이니까…… 결혼만큼은.”
결국 연희가 울먹이며 말을 잇지 못했다.
“연희야. 내가 얘기할게. 넌 방에 들어가 있어.”
재형이 연희를 부축하고 나서자, 넌더리가 난다는 듯 혀를 끌끌 차는 소리가 들려왔다.
“아버지! 저 하나만 잡으면 됐지. 얼마나 더 하시려고요.”
“내가 뭘 그렇게 잡았냐. 네가 내 마음대로 됐으면 이 집에 다른 며느리가 들어왔었어야지.”
참지 못한 재형이 벌컥 화를 냈다.
“율이가 어디 하늘에서 떨어졌습니까?”
“뭐!”
“연희가 없었으면 아버지가 그렇게 자랑해 마지않는 일등 손자도 이 세상에 없습니다.”
권율은 질끈 눈을 감았다.
분명 서연과 함께 있을 때는 행복한 꿈속이었는데.
어느새 지독한 악몽의 한복판에 갇혀버린 기분이었다.
“내 그늘 밑에서 호의호식하는 놈이 어디서 소리를 높여!”
카랑카랑한 목소리가 울리자 연희의 흐느끼는 소리는 들리지도 않았다.
“그러니까 만만한 저한테만 하시라고요. 연희랑 율이는 제발 좀 놔두시고요.”
“그렇게 위아래도 없이 너희 마음대로 하고 싶으냐?”
석구의 억지소리에 재형이 절규하듯 한숨을 쏟아냈다.
“그렇다면 간단하지. 나한테 받은 거 싹 다 토해내.”
석구가 최후의 수단을 써먹자 재형은 이를 꽉 물었다.
그때, 몸서리를 치던 권율의 발이 저절로 움직였다.
갑자기 나타난 것도 모자라서 권율의 눈빛이 너무도 싸늘하자, 석구가 당황한 듯 재빨리 입을 다물었다.
“율아…….”
재형과 연희가 동시에 난처한 얼굴로 그의 이름을 불렀다.
“오셨어요. 할아버지.”
얼음장같이 차가운 그의 목소리가 인사를 건넸다.
“오냐. 지금 들어오니?”
석구는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태연한 척 굴었다.
“네. 여자 친구랑 약속이 있어서요.”
여자 친구라는 말에 모든 시선이 권율의 얼굴로 향했다.
“뭐, 뭐?”
“여자 친구요. 아. 참고로 진보라는 아니에요. 할아버지.”
“너. 너! 방금 여자 친구라고 했니?”
얼마나 당황했는지, 웬만한 일로 꿈쩍도 하지 않는 석구가 말을 더듬었다.
“네. 처음 본 건 군대 가기 전이었고, 제가 많이 좋아해서 쫓아다녔어요. 그러니까 저랑 보라, 엮지 마세요.”
권율은 감정이 없는 사람처럼 무미건조하게 말했다.
그게 지금 석구를 대하는 가장 좋은 방법이었으니까.
“아니, 보라는 어쩌고…….”
석구가 자꾸만 보라를 끌어다 붙이자, 권율이 처음으로 피식하고 웃었다.
“할아버지. 저는 보라를 여자로 생각해본 적이 단 한 번도 없어요.”
“둘이 오래전부터 잘 지내지 않았니?”
“그런 거 아니에요. 걔는 그냥 좀 귀찮은 친구예요.”
권율은 보라에 대한 솔직한 생각을 털어놓았다.
“제가 보라를 그렇게 생각한다고 해서 걔한테 상처를 줄 수는 없으니까. 그냥 놔둔 거예요.”
하지만 일이 이렇게 된 이상, 보라를 더 두고 볼 생각은 없었다.
“그러니까. 보라를 따로 안 만나셨으면 좋겠어요.”
권율의 목소리가 더욱 단호해졌다.
“율아. 그건, 다 너 잘되라고 그러는 거지. 입맛에 맞는 좋은 혼처가 어디 흔하냐.”
보라와의 결혼이라니. 생각할수록 끔찍했다.
“네 아버지를 봐라. 이 할아버지가 네 앞날을 생각해서…….”
권율은 죄인같이 서 있는 재형과 연희를 물끄러미 쳐다봤다.
“할아버지, 제가 잘 되길 바라세요?”
“그럼. 말이라고.”
당연한 말이라는 듯 석구가 즉답했다.
“전 할아버지가 부모님을 몰아세울 때마다 모든 걸 놓아버리고 싶어요.”
처음 내뱉는 진심이었다.
“제가 이 집안의 불행의 원인인 것 같아서…… 어디로 흔적도 없이 사라져 버렸으면 좋겠다고 항상 생각했어요.”
“율아!”
재형과 연희는 처음 듣는 폭탄 발언에 어쩔 줄 몰라 했다.
“조금 전에 아버지한테 모든 걸 토해내라고 하셨어요?”
권율의 차가운 물음에 석구는 입을 다물 수밖에 없었다.
원래 순한 사람을 잘못 건드렸다가는 돌이킬 수 없는 사태가 벌어질 수 있으니까.
“그동안 할아버지 덕분에 편안하게 잘 살았습니다.”
한번 열린 그의 입은 거침이 없었다. 그래도 끝까지 예의를 잃지는 않았다.
“이제부터는 제가 할게요.”
“그, 그게 다 무슨 소리냐.”
“졸업할 때까지 과외만 해도 네 식구 생활비는 거뜬하게 벌 자신 있고요.”
사실 시험 준비로 중단해서 그렇지, 맡아달라는 수업만 해도 대기업 과장 월급 정도는 벌 수 있었다.
“아버지도 예전에 하던 일 다시 시작하시면 되니까. 우리 네 식구 행복하게 사는 데, 아무 문제없다고 생각합니다.”
사실 재형이 좋아하던 일을 그만두게 만든 것도 석구였다.
아들의 발목을 잡고, 돈줄을 틀어쥐기 위해 첫 번째로 한 일이었으니까 말이다.
“그러니까. 할아버지.”
권율의 까만 눈동자가 깊은 심해처럼 가라앉았다.
“우리, 그만 좀 놓아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