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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0. 생각대로 되지 않는다 (60/130)


60. 생각대로 되지 않는다
2022.08.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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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괜찮으면, 언제 집으로 데리고 놀러 올래? 밥이나 같이 먹자.”

서연의 얘기가 나오자 권율의 얼굴에 환한 미소가 번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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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워낙 바빠서 시간이 될지 모르겠지만, 물어는 볼게요.”

권율의 표정이 화사하게 변하자, 연희는 서연에 대해 몇 가지를 더 물었다.

그러자 권율은 자신과는 달리 적극적인 서연의 장점을 늘어놓으며 행복해했다.

물론 그녀의 나이는 밝히지 않았다.

그걸 밝히는 건 서연의 의견에 따라 움직일 생각이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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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고 싶다.’

서연을 떠올리던 권율의 눈동자가 순간 짙어졌다.

그녀가 미치도록 보고 싶어서 더는 시간을 지체할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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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럼, 저는 그만 들어가서 쉴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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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어. 그래. 피곤할 텐데. 어서 쉬어.”

권율은 바람 같이 일어나 자신의 연락을 기다리고 있을 서연에게 바로 전화를 걸었다.

연결음이 2번을 넘기지 않고 서연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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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율이 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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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안해요. 오래 기다렸죠?”

피식, 가벼운 숨소리가 들리더니 다정한 목소리가 대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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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 늦었으면 숨넘어갈 뻔했어요.]

권율은 서연의 목소리를 듣는 것만으로도 마음속의 안개가 걷히는 기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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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얘기는 잘했어요?]

서연은 할 말이 많아 보이는 목소리였지만, 참을성 있게 기다려줬다.

권율은 민감할 수 있는 집안 얘기를 최대한 순화하고, 가능한 부분에서 숨김없이 털어놨다.

이제 서연도 알아야 할 만큼 가까워진 사이였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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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엄마가 서연 씨 초대하고 싶어 하시는데. 괜찮아요?”

갑작스러운 권율의 물음에 서연은 잠시 말이 없었다.

그녀의 침묵이 길어지자 권율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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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혹시 부담스러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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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건 아닌데. 내가 나이가 많은 걸 알면 과연 좋아하실까 싶어서요.]

서연의 솔직한 말에 권율도 망설임 없이 속내를 드러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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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연 씨만 허락하면 부모님께 솔직하게 말하고 싶어요. 어차피 숨길 이유도 없으니까요.”

최종 목적지까지 가기 위해서는 꼭 넘어야 하는 첫 번째 관문이었다.

물론 서연도 잘 알고 있었지만, 친구들도 모르는 상황에서 부모님에게 먼저 알리는 것이 맞는 건가 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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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단 친구들에게 먼저 알리고 나서 생각해봐요. 이번 행사에 다 오기로 했거든요.]

서연은 단계를 밟아가는 게 좋겠다고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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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 다 좋아요. 그런데 회사 직원들이 알 텐데. 괜찮겠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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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원들은 상관없는데. 율이 씨는 현우 이사님이랑 서희 씨한테 괜찮겠어요?]

나이라는 장애물에 서로가 서로를 걱정하는 모양새가 우스워 서연이 피식하고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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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형들이야 뭐 좀 놀라긴 하겠지만, 괜찮아요.”

별문제가 아니라는 권율의 말에 서연도 다행이라고 대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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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요. 서연 씨. 걱정이 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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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뭔데요?]

권율은 부모님 얘기가 나온 김에 서연의 부모님이 궁금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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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연 씨 부모님이요. 혹시 우리가 만나는 걸 싫어하실까요?”

권율의 솔직한 질문에 서연은 더 솔직한 대답을 돌려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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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마도요. 하지만 부모님이 내 인생을 대신 살아주시는 건 아니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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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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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좋으면 그만이에요.]

서연은 간단하면서도 확실하게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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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부모님은 원래 걱정을 사서 하세요. 쇼핑몰 시작할 때도요.]

서연은 권율의 기분을 풀어주려 일부러 옛날이야기를 꺼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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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업자도 안 냈는데 쇼핑몰이 망할까 봐 한 달 넘게 불면증에 시달리셨어요. 지금은 그때 안 했으면 어쩔 뻔했냐고 하시고요.]

하물며 쇼핑몰 창업 때도 그런데, 평생을 함께할 사람이 아직 대학생이라고 한다면…….

그녀의 부모님이 얼마나 걱정하실까 싶었다.

하지만 잘 생각해보면 서연의 얘기에 정답이 있었다.

시간이 걸리긴 하겠지만 결국 믿음을 주면 해결될 문제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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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으로 서연 씨 부모님 마음에 들 수 있도록 열심히 노력해볼게요.”

의지를 불태우는 권율의 말에 서연이 밝은 목소리로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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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엄마, 아빠 마음에 드는 가장 좋은 방법이 있는데.]

그런 좋은 방법이 있다니, 권율의 귀가 쫑긋거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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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 더 많이 예뻐해 주고, 아껴주면 돼요. 나름대로 우리 부모님의 금쪽같은 딸이라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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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거라면 제일 자신 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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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없는 농담에 두 사람의 얼굴에는 함박웃음이 걸렸다.

똑같은 커플링을 나누어 끼고, 부모님 얘기가 자연스럽게 흘러나오자 마음의 무게가 한없이 무거워졌다.

하지만 두 사람은 점점 무거워지는 사랑의 무게와 책임감을 즐길 생각이었다.

쓸데없이 미리부터 걱정할 필요는 없으니까.

권율은 자신의 손가락에서 생소하게 빛나고 있는 커플링을 매만지며 통화를 이어갔다.

말을 몇 마디 하지도 않은 것 같은데 30분이라는 시간이 순식간에 지나가 있었다.

게다가 시험에 대한 긴장이 풀려서일까.

어깨는 뻐근하고, 눈은 뻑뻑했다. 권율은 지금 당장이라도 뜨거운 물에 몸을 담그고 싶었다.

하지만 서연과의 통화를 짧게 마무리하기에는 너무도 아쉬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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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연 씨. 혹시 나…… 보고 싶지 않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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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 나 방금 그 생각했었는데.]

이럴 때만큼은 한마음 한뜻이라고나 할까.

두 사람은 곧바로 영상 통화를 연결해 1시간 넘게 이야기를 이어나갔다.

끊어질 듯 팽팽했던 긴장감의 여파, 복잡한 집안일 때문에 흔들렸던 마음.

권율은 네모난 액정 안에서 웃고 있는 서연을 마주한 순간, 부정적인 모든 것에서 완벽하게 벗어날 수 있었다.

***

금요일 오전 홈쇼핑 회의가 끝난 직후, 서연은 시간을 확인했다.

곧 점심시간.

안 그래도 점심을 함께하자는 현우의 제안을 완곡하게 거절하고 나오는 길이었다.

내일 있는 행사에 딱히 바쁜 건 없었지만, 일단 회사로 돌아가 점검해야 할 사항이 몇 가지 있었다.

처음에는 현우나 대표실 비서에게 행사 티켓을 전달할까도 생각했었다.

하지만 민혁에게 직접 가져다주기로 약속한 이상 왠지 지켜야 할 것만 같았다.

지금 서연에게 있어 갑 중의 갑은 DN 홈쇼핑 최민혁 대표였으니까.

서연은 대표실이 있는 제일 꼭대기 층으로 향했다. 지금껏 몇 년을 드나들었지만, 입구부터 남다른 대표실은 처음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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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서 오십시오. 대표님께서 기다리고 계십니다.”

대표실의 비서는 햇살 같은 미소를 짓고 있었다.

서연은 가방에서 초대장이 잘 보이도록 쓱 꺼내고는 화사한 목소리로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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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티켓만 전달해드릴 거라서요. 차는 안 주셔도 돼요.”

민혁의 사무실에서 차 대접이라도 받았다가는 그와 점심까지 먹어야 될 것 같아 미리 둘러댔다.

그러자 그의 비서가 빙그레 웃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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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짜, 이것만 드리고 얼른 갈게요. 저 신경 쓰지 않으셔도 돼요.”

서연은 비서에게 어서 앉으라며 손짓하고는 육중한 대표실 문 앞에 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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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갑게 인사하고, 적당하게 덕담 좀 주고받다가, ‘내일 뵙겠습니다’ 하면서 티켓 주면. 한 10분?’

완벽할 정도로 시간 계산을 마친 서연이 가벼운 마음으로 문을 두드렸다.

달칵하고 커다란 손잡이를 막 밀려는 순간, 안쪽에서 벌컥 문이 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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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어, 어!”

무방비 상태로 문을 잡고 있던 서연의 몸이 순식간에 딸려갔다.

여리여리한 그녀의 몸이 기우뚱 쏠리며 민혁의 가슴팍에 그대로 부딪혔다.

그의 단단한 팔이 휘청거리는 서연을 감싸 안자, 졸지에 그의 품에 안긴 꼴이 되어버렸다.

이 남자는 도대체 무슨 운동을 하는 건지, 가슴이 단단하다 못해 돌덩이처럼 딱딱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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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으, 아파.’

서연은 오뚝한 자신의 코가 이대로 부러진 건 아닌가 착각이 들 정도였다.

얼얼한 코끝을 손으로 문지르자 눈물이 핑 돌았다.

그러다 아직 그의 품이라는 사실에 재빨리 정신을 차리고 순식간에 몸을 뒤로 물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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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연 씨! 괜찮아요?”

또, 또.

아픈 건 둘째치고 민혁이 또 이름을 부르자 서연은 꼭 한 마디를 해줘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뻣뻣하게 고개를 들고는 그의 이름을 차갑게 불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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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 대표님.”

일로 만난 사이에 호칭을 똑바로 해달라고 정말 똑 부러지게 얘기할 생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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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 여기.”

금방이라도 터질 듯 팽팽한 그의 하얀 셔츠에 핑크빛 입술 자국을 보기 전까지는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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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립스틱 자국이…….”

서연은 너무 당황한 나머지 따끔하게 쏘아붙이려던 말들을 모조리 잊어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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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떡하죠? 죄송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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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닙니다. 제가 문을 세게 여는 바람에 많이 놀라셨죠?”

사람을 들었다 놨다 하는 것도 아니고, 이번에는 제대로 한 대표님이라고 불렀다.

민혁은 정말 종잡을 수 없는 남자였다.

서연은 묘하게 선을 넘나드는 민혁을 지적하고 싶으면서도, 그의 왼쪽 가슴팍에 박힌 자신의 입술 자국 때문에 심란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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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혹시 이렇게 하면 지워질까요? 잠시만요.”

그녀는 얼른 가방을 뒤져 물티슈를 꺼냈다.

그러고는 무의식적으로 그의 가슴팍을 향해 손을 뻗다가 멈칫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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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른 셔츠가 있으면 갈아입으시겠어요? 제가 한번 지워볼게요.”

한 장에 백만 원이 훌쩍 넘는 명품 셔츠다 보니 어떻게든 그에게 빚지는 게 싫어서 한 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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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시다시피 가져다 놓은 셔츠가 없어서요.”

무슨 대표가 돼서는 여벌 옷도 안 갖다 놓나 싶어 믿을 수가 없었다.

거기다 씽긋 웃어 보이는 민혁의 표정이 너무도 수상했다. 서연은 슬쩍 고개를 빼서 그의 어깨너머를 재빨리 살폈다.

있으면서 없는 척하는 건 아닌가 싶어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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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뭐야. 진짜 없잖아.’

값비싼 옷걸이에 재킷만 덩그러니 걸려 있자 서연은 말할 수 없이 난처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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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럼 어쩌죠? 직접 닦아 보시겠어요? 아니면 비서분을 불러드릴까요?”

민혁은 서연의 손을 들린 물티슈를 톡 하고 뽑으며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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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닙니다. 제가 하죠.”

고개를 숙인 그가 열심히 문질렀지만 제대로 닦이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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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기가 아니고요……. 조금 더 아래쪽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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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에서 보니까 잘 안 보이는데요.”

하필이면 두툼한 가슴 근육 밑이라 그런지, 잘 보이지 않는 모양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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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래도 안 되겠어요.”

화장품을 물티슈로 지우려고 하다니, 어림도 없는 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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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괜찮습니다. 신경 쓰지 마세요.”

서연은 민혁이 아무리 괜찮다고 해도 전혀 괜찮지 않았다.

손목시계를 힐끔 쳐다본 서연이 어렵게 입을 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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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랑 나가실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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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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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똑같은 셔츠가 있을지 모르겠지만, 최대한 비슷한 걸로 사드릴게요.”

서연은 어떻게든 수습하고 싶었다.

이제 막 점심인데다 만약 민혁이 오후에 회의가 잡혀 있다면 큰일이었다.

젊은 대표의 가슴팍에 선명한 립스틱 자국이라니.

그를 직원들의 가십거리로 만들 수는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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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말 괜찮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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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닙니다. 그래야 제 마음이 편해져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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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럼, 뭐 그러시죠. 서로 불편할 필요는 없으니까요.”

민혁의 눈매가 느슨하게 휘어졌다.

서연은 속으로 자신을 향해 험한 말을 짓씹으며 ‘똑바로 하자’를 수도 없이 되뇌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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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차로 모시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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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점심은 제가 사도 됩니까?”

그렇게도 피하고 싶었던 민혁과의 점심이 확정되자 서연은 억지로 미소를 지어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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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쁘실 텐데 번거롭게 해드려서 죄송합니다. 그런 의미로 점심도 제가 사겠습니다. 어서 가시죠.”

서연은 그의 재킷을 가리키며 빨리 입으라고 손짓했다.

민혁은 서연에게서 완전히 몸을 돌리고는 재킷을 향해 천천히 걸었다.

그러고는 만족스러운 표정으로 씨익 하고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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