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1. 오해하기 딱 좋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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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1. 오해하기 딱 좋은
2022.09.01.
사실 민혁은 사무실 밖에서 들려오는 서연의 목소리에 벌떡 일어났다.
어찌나 반가운지.
가만히 앉아 있을 수 없어 문을 벌컥 열었다. 그러자 서연이 선물처럼 품 안으로 와락 들어왔다.
민혁이 왼쪽 팔로 휘청거리는 서연을 받치자 그녀의 따듯한 숨결이 그의 심장에 와 박혔다.
달콤한 복숭아 향기.
거기다 풍성한 긴 머리카락이 잔뜩 긴장한 팔을 부드럽게 간지럽혔다.
이대로 시간이 멈춰버렸으면…….
그러면 정말 좋겠다고 민혁이 작게 되뇌었다.
그러나 달콤함도 잠시.
품 안을 따스하게 달구던 서연의 몸이 순식간에 뒤로 물러났다.
말로 표현할 수 없을 정도의 허전함과 아쉬움. 민혁은 서연을 향한 갈증을 삼켜야만 했다.
그는 애써 태연한 척 연기하며 물었다.
“서연 씨! 괜찮아요?”
안 그래도 커다란 서연의 눈동자에 순식간에 눈물이 고이고, 코끝이 붉어졌다.
거기다 그녀는 입만 벙긋거린 채 민혁의 가슴을 뚫어지게 쳐다보고 있었다.
시선을 내린 민혁은 하얀 셔츠에 보기 좋게 찍힌 립스틱 자국을 보며 속으로 웃었다.
당황하는 서연의 모습이 미치도록 귀여웠고, 그녀의 흔적을 가슴에 새긴 것 같아 어이없이 좋았다.
그러나 그는 달뜬 감정을 숨긴 채 괜찮다는 말만 반복했다.
민혁은 물티슈를 꺼내며 어쩔 줄 몰라 하는 서연을 바라보다가 립스틱 자국을 대충 문질렀다.
많고 많은 게 셔츠였고, 그녀의 흔적을 굳이 지우고 싶지 않았으니까.
그러나 그녀는 어떻게든 수습을 해보려고 닦아야 할 부위를 가리키며 물티슈를 자꾸만 건넸다.
안절부절못하는 그 모습이 얼마나 예쁜지.
눈에 보이지 않는 누군가가 자신을 곤란하게 만들 생각으로 서연을 보낸 게 틀림없었다.
민혁은 세차게 일렁거리는 마음을 진정시키려 여러 번 숨을 삼켜야만 했다.
그러다 손으로는 셔츠를 대충 문지르며, 눈으로는 서연의 모습을 천천히 담았다.
동그란 이마에 가지런하게 나 있는 잔머리, 눈을 깜빡일 때마다 풍성하게 흔들리는 속눈썹, 거기다 아직도 분홍빛이 어려 있는 코끝.
그저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황홀했다.
지금 고백하면 어떨까.
흔들리는 이성이 불쑥 속내를 드러냈다.
아니면 차라리 내일 행사가 끝나자마자 얘기를 하자고 한다면…….
뉴욕에서 만났을 때부터 이미 운명을 예감했다고 말하면, 과연 받아줄까?
민혁이 조바심을 태우던 그때, 서연이 정리가 안 된 얼굴로 쳐다봤다.
“……저랑 나가실래요?”
서연은 영 안 되겠는지, 새 옷을 사주겠다고 말했다.
민혁에게 셔츠는 중요하지 않았지만, 그녀의 말을 굳이 거절하고 싶지 않았다.
어차피 서연과 점심을 먹을 생각으로 시간을 통째로 비워놨으니까.
다만 너무도 미안해하는 서연에게 오히려 더 미안할 뿐이었다.
사실 사무실 뒤편으로 난 문을 열고 들어가면 자신의 침실을 그대로 옮겨놓은 방이 있었다.
굳이 여기에 꺼내놓지 않았을 뿐, 그의 붙박이장 안에는 언제든 갈아입을 수 있는 옷이 20벌이나 들어 있었다.
하지만 민혁은 자신에게 찾아온 기회를 놓칠 수는 없었다.
서연과 한낮에 백화점을 가고 점심을 먹을 기회는 처음이었으니까 말이다.
민혁은 제대로 번진 서연의 립스틱 자국을 훈장처럼 달고는 명품 재킷을 걸쳤다.
그러고는 서연과 나란히 걸어 그녀의 차에 나란히 앉았다.
“가까운 명품관으로 갈게요.”
서연은 시동을 걸자마자 빠르게 핸들을 돌렸다.
어찌나 거침없이 운전하는지, 민혁은 피식하고 웃음이 새어 나왔다.
한서연이라는 사람의 매력은 도대체 끝이 있기는 한 건지.
부담스럽지 않은 당당함, 언제나 일에 진심인 워커홀릭, 거기다 감출 수 없는 매력과 솔직함…… 그리고 레이서 못지않은 운전실력까지.
“한 대표님은 정말…….”
민혁은 자신도 모르게 마음의 소리를 내뱉을 뻔했다.
“운전을 위험하게 한다고요?”
서연은 아무렇지 않은 표정으로 말했다.
“제가 성격이 급해서요. 제 차를 타는 사람들은 다 멀미 난대요. 그러니까 최 대표님도 조심하세요.”
민혁은 정말 시원하게 웃었다.
그녀의 농담마저도 주체할 수 없을 정도로 너무 좋아서 말이다.
***
화려한 불빛과 고급스러운 인테리어가 돋보이는 명품매장.
서연은 셔츠가 걸려 있는 옷걸이를 눈으로 훑으며 민혁이 눈치채지 못하게 심호흡을 하는 중이었다.
‘나는 지금 마음 수양 중이다. 조금만 참자. 점심만 먹으면 금방 끝난다.’
어떻게든 이 일을 수습해야 한다는 생각에 마음은 급해지고, 짜증이 있는 대로 솟구쳤다.
하지만 서연의 표정만큼은 백화점 직원들보다 더 친절해 보였다.
스스로가 자초한 일이지, 민혁의 잘못은 아니었으니까.
“이 디자인은 어떠세요?”
서연은 민혁에게 굳이 사이즈를 묻지 않고, 디자인만 물었다.
“괜찮네요.”
“여기, 이 디자인으로 105 XL 사이즈 있을까요?”
대충 눈대중만으로도 사이즈를 알아맞히는 건 서연에게는 일도 아니었다.
“어떻게 아셨어요?”
점원이 상품을 찾으러 간 사이, 민혁이 의아한 표정으로 말했다.
“직업병 같은 거예요.”
서연의 말에 민혁이 신기하다는 듯 다시 물었다.
“다른 것도 맞춰보세요.”
“으음. 허리는 허벅지 크기에 맞춰서 조절해야 할 것 같고. 30은 타이트 하고. 32는 허리가 커서 수선을 맡겨야 할 것 같은데…… 맞아요?”
민혁은 별거 아니라는 서연의 표정에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최 대표님은 생각보다 팔이 길어서 셔츠 소매를 신경 써서 봐야겠어요. 이 디자인이 안 맞으면 이것도 추천할게요.”
서연은 매장 직원처럼 몇 가지 디자인을 민혁에게 추천했다.
“제가 옷만 보면 이렇게 참견하고 싶어서 못 견뎌요. 그냥 제 오지랖이니까 부담스럽게 생각하지 마세요.”
불치병 수준이라며 서연이 민망한 표정을 지었다.
“한 대표님이 추천해준 디자인도 좋네요.”
민혁은 서연과 쇼핑을 하고 있으니 진짜 데이트라도 나온 것 같은 착각이 들었다.
“고객님. 입어보시겠습니까?”
“입어보세요. 제가 봐 드릴게요.”
서연의 말에 민혁은 탈의실로 들어갔다.
그러고는 화이트 셔츠 차림에 단추를 2개 푼 상태로 나왔다.
서연은 거울을 쳐다보는 민혁의 곁에 서서 어깨선과 소매 끝을 점검해줬다.
“제가 보기에는 괜찮은 거 같은데. 어떠세요?”
“나쁘지 않네요.”
“잠깐만요. 단추 좀 다 채워보시겠어요? 목둘레가 맞는지 볼게요.”
민혁이 단추를 모조리 채우자 서연이 더 가깝게 다가왔다.
“불편하시면 말씀하세요.”
서연은 까치발을 하고는 검지의 첫마디를 민혁의 셔츠 깃에 살짝 집어넣었다.
그러고는 여유가 있는지 확인하듯 부드럽게 잡아당겼다.
순간 민혁의 목울대가 크게 일렁거렸다.
“답답하게 조이세요?”
“아니요. 괜찮습니다.”
잠시 숨을 멈췄던 민혁이 급하게 대답했다.
“셔츠 깃을 올려보시겠어요?”
서연은 마치 패션쇼 의상을 점검하듯 민혁을 꼼꼼하게 쳐다보고는 걸음을 옮겼다.
색색의 넥타이들이 걸린 행거에서 심플한 디자인의 다크 브라운 컬러를 꺼냈다.
“지금 입고 계신 슈트하고 잘 어울릴 것 같아서요.”
서연은 넥타이를 민혁의 깃에 걸쳐주며 중얼거렸다.
그러자 점원이 다가와 민혁의 넥타이를 손수 매줬다.
“어떠세요?”
역삼각형 모양이 살짝 삐뚤어진 것 같자, 서연이 똑바로 정돈해주며 물었다.
“좋은데요.”
“그럼 이대로 입고 가세요. 잘 어울려요.”
민혁은 순간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계산은 제가 하죠.”
“최 대표님이 그러시면 제 마음이 불편해요. 셔츠는 제 행동의 결과고, 넥타이는 소중한 시간을 뺏은 것에 대한 선물입니다.”
서연은 탈의실에 벗어놓은 민혁의 옷을 쇼핑백에 넣어달라고 말하고는 자신의 블랙 카드를 꺼냈다.
“일시불이요.”
민혁은 낯선 기분에 사로잡혔다.
이건 뭐랄까. 색다른 경험이라고나 할까.
갑자기 신데렐라가 된 것처럼 좋아하는 여자가 어울리는 옷을 골라주고, 거기다 블랙카드로 계산까지 해주다니.
상대방에게 사준 적은 많았어도 이렇게 받아보니 기분이 묘하면서도 좋았다.
“별일 아닌 걸로 이렇게 받으려니 민망하네요.”
“부담 가지실 필요 없으세요.”
서연은 별거 아니라는 듯 손을 휘휘 내저으며 천장을 가리켰다.
“회사에 들어가 봐야 해서요. 점심은 백화점 식당가에서 간단하게 먹어도 될까요?”
“얼마든지요.”
민혁은 서연을 따라 난생처음으로 백화점 식당가로 향했다.
두 사람은 에스컬레이터를 여러 번 갈아타며 이야기를 나눴다.
물론 대화의 시작은 민혁이었다.
“내일 행사 준비는 다 끝나셨어요?”
그런데 어떻게 된 일인지, 대화의 스케일이 점점 커지고 있었다.
항상 일에 진심인 서연이 행사의 진행과 이번 기회를 발판삼아 여니블랙을 성장시킬 방법을 공유하자 분위기가 사뭇 진지해졌다.
“냉철하게 보시기에는 여니블랙에 대한 제 계획이 어떠세요?”
“나쁘지 않은 전략인 것 같습니다.”
민혁의 평가에 서연의 눈매가 느슨하게 휘었다.
“그렇죠? 하. 최 대표님이 우리 회사를 구멍가게라고 비웃으셔도 할 수 없지만요.”
서연의 눈동자가 생기 있게 반짝거렸다.
“여니블랙 때문에 전체 매출이 1,000억 되는 게 제 소원이에요. 왠지 느낌이 좋아서 될 수도 있을 것 같고요.”
패기만만한 서연의 말에 민혁이 진지하게 반응했다.
“그 목표, 꼭 이루시기를 응원하겠습니다.”
서연은 재벌인 민혁의 앞에서 너무 나섰나 싶어 순간 민망해졌다.
“제가 너무 심취한 나머지…… 최 대표님 앞에서 쓸데없이 말이 많았네요.”
서연이 수줍게 웃자 민혁도 빙그레 따라 웃었다.
두 사람이 각기 다른 웃음을 주고받는 사이, 그 모습을 지켜보며 한쪽 입꼬리를 올리는 사람이 있었다.
“누군데, 그래. 아는 사람이야?”
친구의 물음에도 그녀는 대답이 없었다.
그녀는 혹시라도 얼굴이 들킬까 싶어 조금 떨어진 곳에서 서연을 뒤쫓았다. 그러고는 몰래 두 사람의 사진을 찍고, 동영상을 촬영했다.
서연이 안이 훤히 들여다보이는 태국 요리 전문점으로 들어가자 그 모습까지도 열심히 찍어댔다.
누가 보면 오해하기 딱 좋은 각도를 일부러 잡아서 말이다.
한참 동안 공을 들여 사진을 찍던 것도 잠시.
그녀는 만족할 만한 걸 얻었는지, 사진첩을 확인하며 서늘하게 웃었다.
“허, 요거 봐라.”
“아, 답답해. 야. 진보라.”
보라는 잘 나온 사진을 고르느라 정신이 없었다.
“저 사람 누구냐니까?”
보라가 우울하다고 징징거리는 바람에 얼떨결에 쇼핑을 따라 나온 친구가 물었다.
그녀는 명품매장을 다 돌기도 전에 보라가 이상하게 굴자, 뭐 때문에 그러는지 궁금해 미칠 지경이었다.
무슨 첩보영화라도 찍는 것처럼 모델 같은 남녀를 따라다니며 사진을 마구 찍어댔으니까 말이다.
“인제 보니 저거 양다리였잖아.”
좋은 증거를 잡았다는 듯 보라가 중얼거렸다.
“양다리? 누구? 야, 알아듣기 좋게 좀 말해 봐.”
“누구긴 누구야. 우리 율이지.”
“율이? 저 사람이 네가 말한 율이 여자 친구라고?”
화들짝 놀란 보라의 친구가 서연의 얼굴을 다시 한번 확인했다.
“어…… 율이가 사귈 만하네. 웬만한 연예인보다 더 예쁘긴 하다.”
“예쁘긴 뭐가 예뻐. 저거 다 고친 걸 거야.”
보라가 신경질적으로 쏘아붙였다.
“두고 봐. 내가 우리 율이한테 오늘 일 다 까발려서, 헤어지게 만들 테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