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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3. 흔들리지 않아 (63/130)


63. 흔들리지 않아
2022.09.08.



 
핸드폰을 확인하던 권율의 눈이 쏟아질 듯 커다래졌다.


<네 여자 친구를 여기서 다 보네.>

보라가 보낸 톡이었다.

그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열람실을 빠져나왔다.


<사람들은 이런 걸 보통 양다리라고 불러.>

권율은 보라의 비아냥을 무시한 채, 그녀가 보낸 사진을 손가락으로 크게 확대했다.

정말 서연이 맞았다.

그것도 원준의 삼촌이자 DN 홈쇼핑 대표인 민혁과 함께였다.

사진 속의 두 사람은 명품매장에서 나란히 나오고, 에스컬레이터에서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특히 민혁의 상체가 서연을 향해 지나치게 기울어져 있는 모습이 눈에 거슬렸다.

보라가 보낸 사진은 시간 순서대로인지, 식당에 마주 앉아 있는 모습이 마지막 사진이었다.

생각을 정리하기도 전, 이번에는 여러 개의 동영상이 한꺼번에 들어왔다.

권율은 바로 재생 버튼을 눌렀다.

점심시간을 맞은 백화점 식당가의 분주한 소리가 생생하게 들려왔다.

네모난 액정 속에선 서연이 민혁과 마주 앉아 있었다.

두 사람의 대화 내용은 당연히 들리지 않았지만, 여러 각도에서 찍힌 동영상은 오해를 불러일으키기 충분했다.

그러나 권율은 알 수 있었다. 서연이 너무도 어색한 미소를 짓고 있다는 걸.

물론 어색하다는 정의는 지극히 개인적인 판단이지만, 그래도 그건 틀림없는 사실이었다.

서연이 자신에게 저런 인위적인 미소를 지은 적은 단 한 번도 없었으니까.

그렇지만 자신이 그렇게 믿고 있는 것과 화면 속의 두 사람의 모습을 실제로 마주하는 것은 너무도 달랐다.

권율은 터져 나오는 한숨을 막지 못했다.

괜히 애꿎은 핸드폰만 꽉 쥐고 있는데, 보라의 말도 안 되는 억측성 톡이 계속 들어왔다.


<넌 속고 있다고. 호구처럼 당하고만 있을래?>

권율은 빠르게 올라가는 보라의 톡에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았다.

보라의 의도대로 놀아나 서연을 의심하고 싶지 않았으니까.

자신이 겪어본 서연은 배신에 트라우마가 있어 마음을 가지고 장난칠 사람은 아니었다.

그렇다면 문제는 다른 곳에 있었다.

DN 홈쇼핑 대표 최민혁.

권율은 사진 속 민혁의 표정을 유심히 살폈다.

그는 지나칠 정도로 환하게 웃고 있었고, 서연을 바라보는 눈빛 또한 남달랐다.

이건 뭐랄까.

자신이 서연을 바라볼 때의 눈빛이라나 할까.

순간 가슴 깊은 곳에서 뜨거운 불덩어리가 치미는 기분이었다.


‘새로운 대표가 서연 씨 반응을 은근히 재밌어하더라고.’

민혁을 잘 아는 현우의 말도.


‘삼촌이 단칼에 거절하더라고. 자기가 관심 있는 여자가 따로 있다고.’

민혁의 조카인 친구 원준의 말도……. 권율은 모든 걸 빠짐없이 상기했다.

그중 무엇보다 원준의 엄마가 적극적으로 나섰다는 말이 마음에 걸렸다.


“……안 돼.”

권율은 자기도 모르게 중얼거렸다.

물론 정확한 것은 더 알아봐야만 했다. 하지만 그는 어지럽게 흩어진 퍼즐 조각을 하나씩 맞춰보기 시작했다.

원준의 집에서 민혁을 마지막으로 마주쳤을 때 연애가 마음대로 되지 않는다는 뉘앙스였는데.

그럼 그때부터 서연 씨를?

그러다 서연이 다쳤을 때와 그 다음날 홈쇼핑 직원이 그녀의 집으로 찾아왔을 때를 떠올렸다.

유명 호텔에서 준비한 듯한 음식과 거대한 과일 바구니. 그리고 그 안에 들어 있던 카드.

아무리 차 키를 돌려준다는 명목이었지만, 그 비싼 것들을 직원이 직접 준비했다고?

왠지 그랬을 것 같지는 않았다.

권율은 합리적으로 의심이 가는 상황들을 차분히 정리해 나갔다.

그러자 마음이 초조하다 못해 멀미가 난 것처럼 울렁거리기 시작했다.

현재는 심증만 가질 뿐이지만, 앞으로 민혁이 어떤 행동을 취할지 예측할 수 없었다.

비록 단편적이기는 하지만 그의 연애 방식이 얼마나 저돌적이고, 거침없었는지 들어서 알고 있었으니까.


“혹시…….”

권율은 말을 잇지 못했다.

사회적으로 성공한 민혁이 서연에게 고백이라도 한다면, 대학생인 자신이 경쟁력이 있을까라는 생각에 이르렀다.

그러자 부정적인 생각들이 밀물처럼 끝도 없이 밀려왔다.

최대한 자신에게 유리한 방향에서 따져 봐도 잘 나가는 대표인 민혁과 유명 쇼핑몰 대표인 서연의 그림이 자신보다는 더 그럴싸해 보였다.

순간 심장이 빠듯하게 조이며 답답해졌다.

서연과 헤어질지 모른다는 불안감이 엄습하자, 권율은 공기가 부족한 사람처럼 숨을 헐떡거렸다.

잠시 숨을 고르던 그때, 권율은 난생처음 느껴보는 감정에 휩싸였다.

그건 질투였다. 날이 잔뜩 선 질투.


“후우…….”

스르륵 눈을 감은 권율이 무거운 숨을 내뱉었다.

그러고는 명상을 하듯 복잡한 머릿속을 차근차근 정리하기 시작했다.

어차피 결론은 하나였으니까.

어떻게든 서연을 놓치고 싶지 않다는 것, 그에게는 오로지 그것뿐이었다.

그러려면 이런 쓸데없는 사진으로부터 멀어져야만 했다.

권율은 미련 없이 보라와의 대화창을 삭제해버렸다.

그러고는 보라의 모든 연락처를 아예 차단시켰다.

앞으로 4시간.

그는 서연을 만나기 전까지는 어떤 무엇에게도 방해받고 싶지 않다는 듯 다시 열람실로 향했다.

권율은 어렵게 평정심을 되찾고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공부에 매달렸다.

***



“율이 씨.”

반갑게 손을 흔드는 서연의 긴 머리카락이 바람에 나풀거렸다.

어깨에 걸린 저녁 해를 등지고, 권율이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권율은 서연과 숨이 닿을 거리만큼 가까워지자 그녀를 가볍게 당겨 안았다.


“보고 싶었어요.”

“나도요.”

그는 서연의 대답이 듣기 좋아, 그녀의 여린 어깨에 웃음을 흘렸다.


“내일 바쁠 테니까. 오늘은 저녁만 먹고 데려다줄게요.”

“산책하면 안 돼요? 나 율이 씨랑 같이 걷고 싶은데.”

서연의 기분 좋은 제안에 권율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당연히 좋죠. 어서 가요.”

두 사람은 집 근처 맛집에서 저녁을 먹고, 달달한 음료수를 사서 공원으로 향했다.


“여기 되게 오랜만이다.”

“그러네요. 나도 시험 준비하느라고 공원에 안 온 지 꽤 됐어요.”

둘은 마치 바람에 흔들리는 것처럼 마주 잡은 손을 살랑거리며 걸었다.

너무도 평화로운 저녁. 서연은 예전에 안달병이 났었던 때가 떠올랐다.

권율과 우연을 가장해 만나고 싶어 운동복까지 만들어 입고, 공원에 출근하다시피 했었던 예전의 일을 말이다.

서연은 뜬금없이 소환된 옛 기억에 자꾸만 웃음이 새어 나왔다.


“왜요?”

“율이 씨. 내가 재미있는 얘기 하나 해줄까요?”

“뭔데요?”

“듣고 놀리지 않기.”

서연이 새끼손가락을 내밀자 권율이 재빨리 손가락을 걸었다.


“사실은요. 율이 씨가 이 공원에서 운동한다는 말을 듣고 2주 넘게 매일 왔었어요.”

처음 듣는 얘기에 권율의 눈이 동그랗게 커졌다.


“우연인 것처럼 만나고 싶어서요.”

서연은 그 당시 예쁘게 보이고 싶어 없던 운동복 라인까지 만들어 입었다는 걸 털어놓으며 민망해했다.

그러다 2주가 되도 만나지 못해 자포자기 상태로 빵을 사러 간 날, 권율의 앞에서 커피를 쏟았던 얘기까지 모든 걸 들려주었다.

권율은 서연의 이야기를 가만히 듣고 있다가 그 자리에서 우뚝 멈춰 섰다.


“……진짜요?”

그는 서연이 자신을 만나기 위해 그런 노력을 했었는지 전혀 몰랐었다.


“그때 율이 씨를 만나고 싶은데 연락처도 모르고. 그렇다고 현우 이사님한테 묻기도 그래서요. 나름대로 노력…… !”

 

 
그 순간 권율은 서연의 입술을 부드럽게 머금고는 그녀를 포근하게 감싸 안았다.

자신을 향한 그녀의 마음이 정말 고맙고, 그것만으로도 불안함이 사라지는 기분이었다.


“좋아해요. 난 서연 씨가 정말 좋아요.”

닿을 듯 말 듯한 입술 사이로 권율이 작게 속삭였다.

그러자 서연이 꾹 하고 입술 도장을 찍으며 웃었다.


“나도, 율이 씨가 너무 좋아요.”

권율은 서연의 얼굴을 가볍게 감싸 쥐고는 이마를 맞댔다.


“우리 내일 행사 끝나고 뭐 할까요?”

“아! 내일 끝나고 30분 정도 기다려 줄 수 있어요?”

“바쁘면 끝날 때까지 더 기다릴 수 있어요.”

권율은 정말 그럴 생각이었다.


“오래는 안 걸릴 것 같아요. 홈쇼핑 대표님이 따로 할 말이 있다고 해서요.”

홈쇼핑 대표라는 말에 권율의 미간에 빗금이 그어졌다.


“그분도…… 내일 오세요?”

“네. 아까 회의 끝나고 점심을 같이 먹었거든요. 중요한 얘기라고 해서요.”

권율은 모든 걸 숨김없이 얘기하는 서연에게 안심하면서도 민혁이 중요하게 하려는 말이 뭘까 궁금해졌다.

그러나 권율이 생각에 잠기기도 전, 서연이 조심스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있잖아요. 내 친구들이 율이 씨한테 이것저것 물어볼지도 몰라요.”

서연은 가족 같은 친구들이라 거침없이 질문을 퍼부을 거라는 말을 덧붙였다.


“난 괜찮아요. 안 그래도 서연 씨 친구들이랑 만나고 싶었어요.”

“막 곤란하게 해도 기분 나쁘게 생각하지 말아요. 다 날 너무 사랑해서 그런 거니까요.”

권율은 어떤 질문을 해도 상관없다고 그녀를 안심시켰다.


“아예 친구분들이랑 와인이라도 마시러 갈까요?”

비록 자신은 술을 마시지 못하지만, 이번 기회에 서연의 친구들에게 좋은 점수를 따고 싶었다.


“차라리 그럴까요? 아무래도 내 친구들이 율이 씨를 가만히 놔줄 것 같지는 않아서…….”

“난 좋아요. 나도 서연 씨 친구들 앞에서 당당하고 싶어요. 내가 근사한 곳으로 예약할게요.”

“이해해줘서 정말 고마워요. 율이 씨.”

권율은 서연의 환한 얼굴을 부드럽게 쓰다듬다가 다시 입술을 내렸다.

촉촉하게 맞붙은 입술 사이로 뜨거운 숨결을 잠시 더 주고받았다.

이 시간이 영원했으면 싶다가도, 바쁜 서연을 위해 내일을 기약해야만 했다.

권율은 너무나 아쉬운 나머지 서연의 얼굴 구석구석에 입술 도장을 찍고 천천히 물러났다.


“하. 집에 가기 싫다.”

진심 어린 권율의 혼잣말에 서연이 빙그레 웃으며 속삭였다.


“우리 내일은 오래오래 봐요.”

“좋아요. 내일은 서연 씨가 만들어준 셔츠 입고 갈게요.”

“그래요. 최고로 멋있게 하고 와요. 친구들한테 막 자랑하게요.”

서연의 특별 주문에 권율이 고개를 끄덕였다.

두 사람은 다시 손을 마주 잡고 천천히 걸었다.

해가 진 공원의 커다란 나무 사이로 바람이 불어오자 상쾌한 풀 냄새가 코끝을 스쳤다.

권율은 서연과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누며 그녀의 집으로 향했다.

어찌나 시간이 잘 가는지.

15분 거리를 30분이 걸리도록 늑장을 부렸는데도 어느새 서연의 현관 앞이었다.


“잘 자요.”

권율은 서연의 이마에 촉하고 다시 입을 맞췄다.


“율이 씨도요. 조심해서 들어가요.”

권율은 차마 발길이 떨어지지 않았지만. 작별 인사를 여러 번 나누는 것으로 아쉬운 마음을 달래야만 했다.

서연과 헤어져 집으로 돌아가는 길.

권율은 복잡한 생각에 빠져 있었다.

따로 만나서 이야기를 하자는 민혁과 서연의 가족 같은 친구들, 거기다 서희와 현우의 반응까지.

신경 쓰이는 것이 한둘이 아니었다.

하지만 권율은 서두르지 않았다.

어지러운 생각들을 천천히 갈무리하고, 차분하게 내일을 준비하기로 마음먹었다.

그는 집에 도착하자마자 바로 드레스룸으로 향했다.

그곳은 마치 명품매장을 그대로 옮겨 놓은 것처럼 고가의 옷들이 깔끔하게 걸려 있었다.

권율은 색깔별로 줄지어 있는 명품 슈트의 옷걸이를 매만지며 고심을 거듭했다.

그러다 모던한 블랙슈트를 꺼내 서연이 선물한 셔츠와 맞춰봤다.

그는 갑자기 패션쇼를 벌이는 사람처럼, 어울리는 넥타이와 시계를 이것저것 매치했다.

어느 정도 의상이 준비되자, 이번에는 조력자가 필요했다.

권율은 고민하지 않고, 바로 전화를 걸었다.


“형. 바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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