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64. D-day (64/130)


64. D-day
2022.09.11.



 


[어. 율아. 괜찮아.]

현우는 안 그래도 내일 행사 때문에 권율에게 전화를 하려던 참이었다.


“형, 제가 내일 조금 늦을 것 같아서요. 많이는 아니고 한 30분 정도요.”

권율은 서연에게도 미리 양해를 구할 생각이었다.


[무슨 일 있어?]

“잠깐 들를 곳이 있어서요.”

[그럼, 네 초대장은 입구에 맡겨 놓을게.]

현우는 권율이 따로 부탁하지 않아도 알아서 필요한 말을 해줬다.


“데려가 주셔서 감사합니다.”

사실 현우가 아니어도 서연이 초대장을 줬겠지만, 그래도 마음을 써주는 그가 고마웠다.


[내가 이런 거 물어도 될지 모르겠다. 시험은…… 잘 봤어?]

조심스러운 현우의 물음에 권율이 환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네. 잘 봤어요. 다 형들 덕분이에요.”

현우가 프라이빗 바에 불러주지 않았다면.

게다가 서연을 알고 있지 않았다면, 과연 그녀를 다시 만날 수 있었을까.

권율에게 현우는 은인이나 다름없었다.


[잘 봤다니 내 기분이 다 좋다. 율아. 내일 하루는 실컷 즐겨. 서연 씨 회사의 행사는 특히 재밌거든.]

권율은 현우의 따듯한 덕담을 들으며 고맙다는 인사를 잊지 않았다.


“형. 내일 제가 좀 놀라게 할 수도 있어요.”

[좋은 쪽으로? 아니면 나쁜 쪽으로?]

현우의 말에 권율이 빙그레 웃으며 말했다.


“당연히 좋은 쪽으로요. 많이 응원해주세요.”

알쏭달쏭한 권율의 말에 현우가 몇 가지를 더 물었지만, 그는 웃음으로 답을 대신했다.


[형이야 뭐. 우리 율이 항상 응원하지.]

“감사합니다. 형.”

[그래. 구체적인 얘기는 내일 얼굴 보면서 하자.]

그렇게 현우와의 통화가 마무리됐다.

그러나 권율은 드레스룸을 떠나지 않았다.

아예 자리를 잡고 앉아 이것저것을 알아보고, 여기저기 전화를 걸었다. 그는 완벽한 내일을 위한 만반의 준비를 시작했다.

***

심장을 두근거리게 만드는 EDM 음악과 사방에서 광선처럼 쏟아지는 핀 조명.

거기다 블랙 포토 월에는 색색의 네온 컬러로 그라피티하게 써놓은 여니블랙의 로고가 감각적이었다.

그보다 더 화려한 의상을 차려입은 셀럽들이 줄줄이 도착하자 카메라 플래시가 연신 터졌다.

시상식장을 방불케 하는 취재 열기에 서연의 인맥과 영향력이 고스란히 느껴졌다.

원래 유명 패션 잡지에서 기획 기사를 싣기로 했는데, 어찌 된 일인지 연예부 기자들이 훨씬 더 많았다.

아무래도 최근 들어 핫한 행사가 없다 보니, 카메라 앞에서 주목받고 싶은 스타들이 총출동해 그런 모양이었다.

그렇다 보니 그들을 취재하기 위한 열기로 행사장이 들썩거렸다.

내로라하는 연예인과 모델들이 모습을 드러내는 와중에도 제일 눈에 띄는 사람은 단연코 서연이었다.

그녀는 이 대단한 행사를 기획한 대표인 데다 ‘패션 인플루언서’이다 보니 사람들의 시선을 한 몸에 받았다.


“한서연 대표님! 여기 좀 봐주세요.”

“이쪽도요! 손 좀 흔들어주세요.”

서연은 블랙 오프숄더 미니 드레스에 길고 나풀거리는 리본 장식을 등에 선물처럼 달고 있었다.

거기다 포니테일로 높게 연출한 반묶음 머리가 너무도 귀여웠다.

포토 월에 선 서연은 기자들의 쏟아지는 요청에 따라 기다란 리본을 살랑거리며 다양한 포즈를 취했다.

아무래도 하니블랙 화보를 직접 찍다 보니 전문 모델 못지않았다.


 


“역시, 한 대표님. 너무 예쁘다.”

말끔하게 차려입은 현우의 말에 서희가 건성으로 대답을 하며 주위를 둘러봤다.

아무래도 호진이 와 있을 것 같았다.

서희의 예상대로 레드 미니 드레스 차림의 호진이 서연과 멀지 않은 곳에서 친구들과 서 있었다.

다들 범상치 않은 미모를 가진 그녀의 친구들은 서연을 핸드폰에 담느라 여념이 없었다.


“우리 서연이 예쁘다!”

“한 사장님. 최고예요!”

그녀의 친구들은 큰 소리로 깔깔거리며 즐거워했다.


“저기. 호진 씨 아니야?”

“맞네. 여호진 검사님.”

서희는 호진의 위치를 벌써 파악해놓고도 일부러 모른 척 말을 툭 던졌다.


“드레스 입으니까 검사님 말고, 갓 데뷔한 탤런트 같다.”

“뭐……. 그런가 보지.”

서희는 호진이 바쁘다는 이유로 만나주지도 않으면서 너무도 완벽한 모습으로 나타나자 괜히 투덜거렸다.


“한 대표님은 연예인 친구도 많더니, 일반인 친구도 왜 이렇게 예쁘냐. 우리 소개팅 해달라고 할까?”

현우가 서희의 팔을 툭 치자 그는 호진에게 시선을 고정한 채 고개만 가로저었다.


“됐어. 무슨 소개팅이야.”

“어때. 야, 우리 저기 가서 인사하자.”

“뭘 굳이 찾아가서 인사를 해. 모양 빠지게.”

“까칠한 놈. 네가 이러니까 여친이 없는 거야. 빨리 따라와.”

현우의 성화에 서희는 못 이기는 척 그를 따라갔다.

어느새 사진을 다 찍고 내려온 서연이 지인들에 둘러싸여 인사를 하느라 정신이 없었다.

현우는 그 사람들을 뚫고 슬며시 모습을 드러냈다.


“한 대표님. 축하드립니다.”

“어! 오셨어요. 이사님. 오늘따라 너무 멋지시네요……. 안녕하세요. 서 변호사님.”

서연은 권율의 사촌 형인 서희를 보자 괜히 찔리는 것이 있어 더 깍듯하게 인사했다.

그러다 너무 어색한 나머지 얼른 호진을 불렀다.


“호진아. 서 변호사님 오셨어.”

서연은 친구들과 사진을 찍느라 등을 돌리고 있던 호진의 어깨를 툭툭 두드리며 말했다.

그러자 호진이 살랑 뒤를 돌아보며 반갑게 아는 척했다.


“어? 장군님이다. 언제 왔어요?”

서희는 귀여운 강아지 같은 호진의 눈웃음에 저도 모르게 픽하고 웃어버렸다.


“좀 전에요.”

“온다고 얘기했으면 서희 장군님이랑 같이 사진 찍었을 텐데. 아쉽다.”

서희는 지금이라도 사진을 찍고 싶었지만, 대놓고 말하기에는 둘 사이가 아직 어색했다.

그러나 두 사람 사이의 은밀한 사건을 잘 알고 있는 서연이 눈치껏 나섰다.


“뭘 아쉬워해. 그냥 찍으면 됐지. 서 변호사님, 괜찮으시죠?”

서연의 물음에 그가 못 이기는 척 호진의 곁으로 다가와 섰다.


“네. 뭐, 그러죠.”

“잠깐만요. 포토그래퍼한테 찍어달라고 할게요.”

서연은 호진과 서희를 나란히 포토 월에 세우고는 다정한 포즈를 주문했다.

처음에는 난감해하던 서희도 호진이 가까이 붙어서자 꽤 과감하게 움직였다.

호진이 흠칫 놀랄 정도로 말이다.


“서연아. 저분은 누구신데 호진이랑 같이 사진을 찍어?”

서연과 뉴욕에서 만났던 친구 리나가 서희를 빤히 쳐다보며 물었다.


“어. 아예 소개해야겠다. 여기는 제 중학교 때 절친들이에요.”

서연은 큐레이터인 리나와 K&H 재단에서 실장으로 일하고 있는 지연을 소개했다.

그러자 가장 신난 건 현우였다.

그는 눈을 반짝거리며 서연의 친구들과 인사를 나누느라 정신이 없었다.


“이쪽은 DN 홈쇼핑 김현우 이사님. 그리고 이분은 법무법인 서우의 후계자이신 서희 변호사님.”

서연이 후계자라는 말을 강조하자 안 그래도 넓은 서희의 어깨가 더 쫙 펴졌다.


“반갑습니다.”

다들 화기애애한 분위기로 통성명을 하던 그때, 익숙한 목소리가 서연의 등 뒤에서 들려왔다.


“저는 DN 홈쇼핑 대표 최민혁입니다.”

세련된 다크 그레이 슈트를 차려입은 민혁이 매력적인 모습으로 서 있었다.


“어머! 최 대표님. 오셨어요.”

현우는 불편한 상사를 즐거운 자리에서 만나자 당황한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한 대표님, 친구분들이신가 봐요. 반갑습니다.”

“처음 뵙겠습니다.”

서연의 친구들은 훤칠한 남자의 출현에 한목소리로 반가워했다.

그러고는 아주 호기심 어린 눈빛으로 민혁을 스캔하기 시작했다.

서연과 나란히 서 있는 모습이 어딘가 잘 어울리는 것 같아 보였다.


“준비하느라 고생 많으셨겠어요. 규모가 정말 남다르네요.”

친구들은 민혁의 다정한 목소리에 흐뭇한 미소를 지으며 서로 귓속말을 속닥거렸다.


“아, 네. 뭐. 이게 다 제 피와 땀과 돈이죠.”

민혁은 서연의 어색한 농담에도 입꼬리를 매력적으로 올리며 웃었다.

그러자 친구들은 서로 의미심장한 사인을 주고받았다.

그녀들이 대놓고 둘 사이를 물으려던 그때.


“대표님. 인사 말씀하셔야 합니다.”

김 실장이 다가와 서연을 찾았다.


“그만 가 봐야 할 것 같네요. 다들 좋은 시간 보내고 계세요.”

서연은 어색하게 서 있던 남자들에게 인사를 하고는 자리를 떴다.

그녀가 화려하게 장식된 무대로 향하자 행사 진행을 맡은 전문 MC가 소개를 시작했다.


“오늘 우리에게 멋진 시간을 선물해주신 한서연 대표님입니다.”

여기저기서 환호성과 박수 세례가 쏟아졌다.

서연은 당당한 자세와 완벽한 차림으로 무대 정중앙에 섰다. 그러자 모든 조명이 그녀에게로 향했다.

안 그래도 반짝거리는 얼굴은 마치 인간 다이아몬드라도 되는 것처럼 눈이 부실 정도였다.


“안녕하세요. 하니블랙, 여니블랙의 대표 한서연입니다.”

서연은 넓은 공간을 가득 메운 사람들 앞에서 전혀 떨지 않았다.


“우리, 오늘만큼은 골치 아픈 건 모두 잊어버리자고요.”

서연의 한 마디에 세찬 환호성이 돌아왔다. 그러자 서연이 심장 위에 손을 올리고 행복한 표정을 지었다.

그 모습을 민혁이 사랑스러운 눈길로 쳐다보고 있었다.


“여기서는 재밌고, 신나게. 꼭 여니블랙처럼요.”

서연은 날아갈 듯 상큼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녀는 간단하게 인사말을 하면서도 오늘 행사의 목적인 여니블랙 홍보를 잊지 않았다.


“그러려면 일단 휴대폰부터 꺼내세요.”

아무래도 패션에 관심 있는 사람이 많다 보니 서연의 말대로 다들 휴대폰을 꺼냈다.


“오늘 여기서 가장 핫한 나를 찍으세요. #여니블랙파티#여니블랙신상. 그리고…….”

여유로운 미소를 지은 서연이 잠시 말을 멈췄다.

그녀는 사람들을 빙 둘러보고는 마이크에 대고 부탁하듯 소리쳤다.


“바로 SNS에 올리시는 거예요. 지금부터 포토제닉 이벤트를 진행하겠습니다.”

그러자 다들 사진을 찍느라 정신이 없었다.


“자! 그럼. 지금부터 신나게 놀아볼까요?”

서연이 환하게 웃으며 윙크를 날리자 클럽을 방불케 하는 EDM이 배경음악처럼 깔렸다.

다들 신이 나서 환호했고, 서연도 무대에서 사뿐히 내려왔다.


“우리 서연이 너무 멋지다.”

“난 우리 한 사장이 이렇게 성공할 줄 알았지.”

“이런 날은 당연히 샴페인이지.”

친구들은 기포가 톡톡 터지는 잔을 들고는 건배를 외쳤다.

서연은 친구들의 열렬한 축하에 기분이 좋아져 어깨로 리듬을 타며 단숨에 잔을 비워냈다.

다들 유명 클럽에 놀러 온 것처럼 분위기에 취해, 연예인이든 비 연예인이든 자연스럽게 어울렸다.


“한 대표님.”

어쩌다 보니 일행이 된 민혁과 현우, 그리고 서희가 샴페인 잔을 들고 다가왔다.


“우리도 같이 건배하죠.”

서연과 민혁을 가운데 두고 다들 둥그렇게 서서 건배를 외쳤다.


“여니블랙 매출 1위, 가보자고!”

리나의 외침에 다들 박수를 치며 웃었다.

다들 즐거운 그때, 호진이 서희의 어깨를 툭 치며 말했다.


“어! 서희 씨. 저 사람, 사촌 동생 아니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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